|
요즘으로 말하자면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장이 조선시대에는 향교였다. 서원은 사립 중고등학교이고, 서당이 초등, 그리고 성균관은 국립 대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조선은 개국한 뒤 관학을 통해 교육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려고 1읍1교(一邑一校)정책으로 고을마다 항교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향교에 대해서 토지, 노비를 하사했고, 교관을 파견해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게 하는 등 물적,인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조선의 교육은 관립과 사립이 공존하는 체계였는데, 역할 면에서 보자면 향교는 사림들이 세운 서원과 겹치는 점이 여럿이다.무엇보다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성현을 배향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등에서 그렇지만 아무래도 향교가 서원보다는 더 여러가지 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우제나 풍작 기원하는 사직제를 지내는 등 종교적 역할도 그렇고, 향약을 주도하고, 활쏘기를 하는 향사례, 학식높은 사람 모시고 벌이는 향음주례도 그렇고. ![]()
그런데 15세 이후 향교의 역할은 급속도로 약화됐다.왜란과 호란, 전쟁으로 향교가 거의 다 소실된 데다 이즈음부터 사림들이 건립하는 서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향교의 자리를 서원이 메워갔던 것이다. 향교는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교관들의 수준이 낮아서,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이다. 가르치는 교관의 수준에서도 그렇고 수적으로도 서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에 놓이게 됐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향교가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은 역시 향촌 사대부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사회 변동으로 사대부들의 수가 급증할 때에도 사대부로서의 신분과 위엄을 유지하고 향촌민들을 통제하는 데 향교가 거점으로 이용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향교의 교육적 역할은 유명무실해지고, 석전제 등 배향이나, 향약 등을 통한 백성들 교화에 치중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축소돼갔다.
관립과 사립이라는 출발이나 운영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향교와 서원은 여러 면에서 비교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제 감정하에서는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근대 교육체계에 배제됐고, 일본의 전시 체제에 동원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된 뒤 지금까지 향교는 존재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교육의 장으로는 포섭되지 못하고, 한문 교실 등 전통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제공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 향교와 서원을 비교하면서 한눈에 느꼈던 것은 교육에서 교관, 교사의 질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앙 관리에게 항교 교관은 기피하는 한직이었고, 그러다보니 교수의 질에서 서원에 밀릴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교육열이나 과거 급제해서 출사하는 것이 지상과제였을 사대부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서원의 등장은 향촌 사대부들에게는 환영할 일이었을 것이다. 교육의 질을 담보하지 못하게 되자, 향교는 향촌민을 교화시키고, 통제하는 쪽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또 향촌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는데, 그럼으로써 향촌사회를 운영하는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그 결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상실하게 됐고,그 뒤 근대화,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향교는 근대적인 교육체계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