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리뷰
【 바이마르 문화 】 - 내부자가 된 외부자 | 교유서가 어제의 책 시리즈 _피터 게이 / 교유서가
“공화국은 패망 속에서 탄생해 혼란 속에서 존속했으며 재앙 속에서 사멸했다”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8년 11월 9일 독일제국이 4년간의 전쟁 이후 붕괴하고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기 위한 도피를 준비할 때 태어나,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더 이상 권자의 높은 곳에 있지 못하고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수상으로 임명했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은 살해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정치적 격변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숨 막힐 정도로 문화가 만개한 시대였다.
세계의 관심이 독일의 무용, 건축, 영화, 소설, 연극, 미술과 음악으로 쏠렸다. 단지 1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정치적 분쟁과 문화적 창의성이 어떻게 이렇게 공존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외부자들은 민주주의자, 유대인, 전위예술가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부자가 되어 박물관과 오케스트라와 극장과 개인적인 학문의 중심지에서 의사결정자가 되었다고 한다(따라서 책의 부제도 ‘내부자가 된 외부자’로 되어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게이의 본명은 페터 요아힘 프뢸리히이다, 유대인이었지만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꽤 성공을 거둔 기업가의 외아들로 1923년 6월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가정이었음에도 나치가 득세하게 되자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아들(페터 요아힘 프뢸리히)마저 베를린의 괴테 김나지움에서 쫓겨나게 되자 그 가족은 쿠바로 가는 배를 탔고, 그 뒤 미국 입국 허락을 받아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정착했다. 이후 아들은 페터 프뢸리히라는 이름을 피터 게이(peter Gay)로 바꿨다. 주변 미국인들이 발음을 어려워했기에 ‘행복하다’, 또는 ‘즐겁다’는 의미의 독일어 이름을 영어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Gay'의 의미가 어떤지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암튼 저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좀 불편한 느낌이 든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저자는 수많은 명저를 저술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4년 미국 역사학회로부터 명예로운 학술상을 받았다. 1969년부터 1993년까지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 책 『바이마르 문화』는 총 6장으로 편집되었고, 부록으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간략한 정치사’와 방대한 ‘참고문헌’이 붙어있다. 시대순으로 엮었으며 독자들이 각 시점마다 문화와 정치 사이를 잇는 긴밀한 관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이용한 자료는 저자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하다. 문학, 철학, 역사, 음악, 미술, 영화, 연극, 출판, 일기, 전기등이 담겨있다. 게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던 마거릿 제이컵은 “모든 사람들이 계몽주의 시대 국가의 역사라는 경계에 갇혀 있을 때 그만이 ‘국경 너머를 보라’고 말했다”는 최종적 평결을 내리며 그의 『계몽사상』을 칭송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1910년에 베를린에 정신분석 연구소를 세워 바이마르시기에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프로이트는 내부자가 된 외부자의 대표적 인물이다(오스트리아 출생이기 때문).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피터 게이가 쓴 프로이트에 대한 평전『프로이트』(Ⅰ,Ⅱ)가 국내 번역서로 출간되어있다. 『바이마르 문화』의 결론 부분이기도 한 5,6장도 프로이트와 무관하지 않다. 제목은 각기 ‘아들의 반역’과 ‘아버지의 보복’으로 되어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킨다. 바이마르 문화에서 표현주의적 실험의 출현과 연관되어진 정치적 변혁을 ‘아들의 반역’으로, 이후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 몰락되는 과정을 ‘아버지의 보복’으로 서술하고 있다. 바이마르 문화는 ‘대량학살을 저지른 범죄자’ 히틀러(독일을 대표하는 역사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표현)가 등장하자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주관적 리뷰”
#바이마르문화 #피터게이 #교유서가 #교유서가서포터즈 #쎄인트의책이야기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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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게이 지음 / 교유서가 *내부자가 된 외부자 <바이마르 문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대단히 풍부하고, 호기심을 자아내며, 흥미진진하다! - 뉴욕타임스 "이것은 위태로운 영광이었으며 화산의 분화구에서 추는 춤이었다. 바이마르 문화는 짧고 혼란스러우며 허약했던 순간에 역사에 의해 내부로 몰려들어왔던 외부자들의 소산이었다." ---------------------------------------------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난 후 우리나라에 관련된 책이나 다른 나라들에 관한 책들을 조금씩 찾아보고 있는데 바이마르공화국이란 이름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p23 바이마르공화국은 짧고 열에 들뜬 것 같지만 매혹적인 삶을 살았다., 1918년 11월 9일 독일제국이 4년간의 전쟁 이후 붕괴하고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기 위한 도피를 준비할 때 태어나,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데부르크 대통령이 더이상 권좌의 높은 곳에 있지 못하고 나치당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수장으로 임명했을 때 바이마르공화국은 살해되었다. 서문에서 소개되는 바이마르공화국이다 1. 탄생의 진통 : 바이마르에서 바이마르로 2. 이성의 공동체 : 절충자와 비판자 3. 비밀스러운 독일 : 힘으로서의 시 4. 전체성의 갈망 : 현대성의 시련 5. 아들의 반역 : 표현주의 시기 6. 아버지의 보복 : 객관성의 성쇠 뒤에 부록으로 1. 바이마르공화국의 간략한 정치사 2. 참고문헌 도 함께 들어있다 책에는 바이마르 문화의 주요인물들의 이야기가 정말 많이 나온다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부터 여러 인물들까지 전부 이해하며 읽기에 어려운 책이었지만 새로운 친구를 만나 조금씩 알아가는 기분으로 한장한장 책을 읽어나갔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에 영토를 상실하고 막대한 배상금 부담을 져야했던 제국주의자들 그러나 어떤 죄의식도 없이 그 책임을 떠넘겼다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에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바르부르크 연구소와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도 나오는데 익숙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나와서 왠지 반가웠다 바우하우스도 인상적이었는데 바우하우스는 위대한 스승들이 자신의 어린 복제판을 만들어내는 대학이 아닌 학생들과 선생들이 서로를 자극하는 연구소였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바우하우스에 다음가는 훌륭한 결실은 1920년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작은 방> 이다 이 영화는 표현주의 시기의 바이마르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후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면서 바이마르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그들과 함께 바이마르 정신은 내적으로 변화하여 이솝 우화가 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소멸했다 문화는 그 자체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사회, 정치와 함께 달라질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보인 강렬한 창의성으로 전설이 된 바이마르공화국 독일의 민주주의가 쇠락한 혼란 속에서 짧게 꽃피웠고 히틀러의 권력 획득 과정에 격렬하게 부딪쳤던 예술과 문학과 음악, 문화의 성장을 저명한 역사가 피터 게이의 생생한 설명으로 추적할 수 있는 바이마르 문화였다! |
피터 게이의 『바이마르 문화(조한욱 옮김, 교유서가, 2022, 1968, 344쪽 분량)』 는 시민이 주권자인 공화국은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 독일의 찬란한 시기를 소환하여 질문하는 책이다. 바이마르 헌법 제정은 독일 문학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괴테와 실러의 바이마르 고전문학 시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도 담고 있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겼던 헌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던 미래는 현실화하지 않는다. 문화적 융성과 정치, 경제적 몰락은 곧바로 연결되고 급하게 막을 내린 부흥기 이후 처참한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14년간 지속된 괴테의 독일, 즉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과 히틀러의 독일은 두 개의 전혀 다른 독일이고 그 파급력은 국가 차원을 넘어선다.
피터 게이는 당시 망명가들이 남긴 업적, “고국을 혐오하면서도 그리움에 뒤돌아보며 외국 땅에서의 강요된 생활 속에서 최대의 업적”(p.14)을 찬양한다. 예술가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이 내재되어있는 모더니즘과, 그 안에서 탄생한 “새로운 미적 감수성”에 주목한다. “외부로 밀려난 내부자”(p.17)중 한 명인 저자 또한 이를 민감하게 포착한다. 피터 게이는 역사학자이자 유럽 근대 사상사와 문화사 분야의 권위자로서 특히 계몽주의 연구, 부르주아 문화 연구에서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역사 연구에 접목한 저작들을 남겼다. 저자는 서문을 “바이마르공화국은 짧고 열에 들뜬 것 같지만 매혹적인 삶을 살았다.”(p.23)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공화국은 1차 대전 이후 독일 제국이 붕괴한 1918년 탄생하여 1933년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살해된다. 책은 문화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조명하면서 부족한 정치사를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한다.
1장 <탄생의 진통: 바이마르에서 바이마르로>은 패망 속에서 탄생해 혼란 속에서 존속했으며 재앙 속에서 사멸한 공화국(p.38)의 자취를 따라간다. 책은 바이마르 역사에서 공화국에 해가 되었던 베르사유 평화조약을 언급한다. 가혹하고 보복적인 조약, 치밀하게 계획된 모욕에 속수무책인 파견 대표단, 증오하는 조약에 서명하면서 비겁자이자 반역자라는 낙인을 받게 된 이들에게 조약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반유대주의자와 나치 선전의 핵심이 된다. 2장 <이성의 공동체: 절충자와 비판자>는 나치를 증오했지만 공화국을 사랑하지 않았던 수천의 교수, 기업가, 정치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들을 열정적 신념이 아닌 지적 선택에서 출발한 ‘이성적 공화주의자’(p.73)라고 부른다. 탁월한 젊은 예술가 에카르트 케르에게서 내부자에서 외부자가 된 예를 살피고 공화국 연구소, 특히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추구와 업적을 다룬다. 사회 전반으로 영향을 끼치고 변화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엘리트 주의의 한계는 자명하다.
“바르부르크 방식의 엄격한 경험주의와 학문적 상상력은 1920년대에 독일의 문화를 야만화시키려 위협했던 천박한 반지성주의와 통속적 신비주의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이마르의 전성기였다. 아테네는 알렉산드리아의 손에서 거듭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바르부르크의 유명한 표현은 연금술이나 점성술과 고투를 벌이던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한 예술사가의 처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이성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세계 속 삶을 위한 철학자의 처방이었다.”(p.88) 심오했지만 제한적이었던 바르부르크 연구소 외에 베를린의 정신분석 연구소와 프로이트,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조사 연구소 등의 업적과 한계를 차례로 살핀다.
3장 <비밀스러운 독일: 힘으로서의 시>에서는 현대판 소크라테스인 슈테판 게오르게로 문을 연다. 그에게 “비밀스러운 독일의 왕이었으며 비영웅적 시대에 영웅을 찾고 있던 영웅이었다.”(p.113)는 설명을 덧붙이고, 영향력에 있어 그와 견줄 수 있었던 단 한 명의 살아있는 경쟁자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언급한다. 최고급 서정시인(토마스 만의 표현), 청년운동 신비주의(무쉬크의 표현), ”수천의 우둔한 존재들 속에서 어떻게 단지 한 존재만이 시인이 되는가를 세속적 인과관계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지만“ 실지로 그러한 시인이 되었던(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 릴케에게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 장은 릴케 숭배자의 한 사람으로써 꽤 인상 깊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시의 연관성은 주목할 만하다.
4장 <전체성의 갈망: 현대성의 시련>에서 저자는 정치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습관과 마찬가지로 연습으로 강화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되는 하나의 습관이라고 말한다. 유력한 독일 지식인들이 “비판은 물론 일반적인 정치 행위조차 자제”(p.152)하였는데 특히 토마스 만은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 반대편에 에밀 졸라가 위치한다. 바이마르에서의 비정치적 경향은 인식의 왜곡을 발생시키고 15년이 못되는 바이마르 역사에서 내각이 17번 바뀌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경영에 있어서는 완강하리만큼 독립적이지만 정치 기사 처리에 있어서는 신뢰할 만큼 편파적”(p.157)이었던 신문이 등장하고, 단지 ‘프랑크푸르트 신문’만이 예외적 위치를 차지한다. 책은 편집장이었던 하인리히 지몬의 연설을 “자신이 여전히 외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외부자, 다른 독일의 대변인, 최고의 바이마르 정신”(p.158)이라고 평한다. 그 밖에 청년 사이에서 두드러지던 전체성을 향한 갈망에 주목하고, 그들 사이에 만연한 반이성주의가 반사회적 행위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이 장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다.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 취임 연설은 그에게 나치 부역자라는 라벨을 붙이고 비난하는 근거가 된다.
5장 <아들의 반역: 표현주의 시기>에서는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바우하우스 다음으로 꼽히는 표현주의 사조를 영화, 회화, 연극 등의 예술에서 확인한다.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전망과 희망은 그대로 작품에 반영된다. 특히 연극에서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부권에 대한 반역”(p.221)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권위주의적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은 카프카에서도 두드러진다. 6장은 <아버지의 보복: 객관성의 성쇠>에서는 1924년의 문학적 사건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해설한다. 부자갈등과 둘 사이 경쟁을 다루는 문학을 비롯해 정치화된 청년운동(p.262)등 바이마르공화국 내 가장 통절한 요소로 청년의 정치사를 꼽는다. 청년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한 나치에게 청년들은 거대한 잠재적 표(p.263)였고, 우편향은 심화된다. 책의 마지막 문단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막을 정리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영향은 계속 회자된다.
『바이마르 문화』는 양차대전 사이에 만개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과 몰락을 다룬다. 책의 부제인 “내부자가 된 외부자”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내부자들은 언제나 독일제국에 충실했던 보수주의자들이고, 공화국의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외부자들이었는데 역사적 정황에 의해 내부로 들어오지만 결코 내부자가 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시인들을 불러내는 3장이었다. 말테에게 열광하던 때가 생생하다. 나는 바보인가 자괴감 들며 읽었던 릴케, 두이노의 비가 첫줄을 무한히 반복하며 릴케를 우러르던 시기가 있다. 그는 천사인가, 무엇인가. 그런데 모국어로 읽는 그들도 난해하다는 부분에 소심하게 후련하고 안도한다. 저자는 350쪽 내외(정치사 제외하면 270쪽)의 간결한 분량 안에 방대한 문화사를 추리고 연결한다. 밀도가 확연히 높아져 느슨한 문장이라고는 없고 독자는 행간의 숨은 의미를 찾아서 스스로 주석을 매기며 읽어나가게 된다. 등장하는 인물이나 예술의 각 분야는 따로 한 권의 책과 맞먹는 무게로 독자를 압박한다.
그럼에도 저자가 집필한 흥미로운 역사는 과거에 묶이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로 밀려온다. 지금 이 순간과 곧 다가올 미래를 근심하게 만들고, 반복되는 역사의 패착을 두렵게 바라보도록 한다. 화려하게 피어난 문화 직후에 연결되는 정치적 내리막길은 예기치 못하는 가파름을 보여 날개를 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면 무시무시한 추락을 우리는 막아낼 수 있을까, 위험 신호나 전조에 민감할 수 있을까, 이쯤부터는 더욱 깨어있어야 한다고 서로를 믿고 돕고 변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작년 2월에 로쟈 이현우 선생님의 강제독서 겨울 학기에서 읽었다. 지금 다시 읽으며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의 폭에 놀란다. K문화의 정점을 누렸고, 노벨 문학상 수상에 한껏 고무되는 찰나에 문화 외적인 부분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우리는 잠식당한다. 고난 끝에 새로운 희망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방대한 사례와 자료를 재조직하여 매력적인 비유와 직관으로 통찰하는 중요한 저작 『바이마르 문화』를 추천한다. ![]() 책 속에서>
몇 달 후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바이마르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그들과 함께 바이마르 정신은 내적으로 변화하여 이솝 우화가 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소멸했다. 다른 이들은 베를린에서 문 앞의 노크 소리 뒤에, 또는 스페인 국경에서, 파리의 임대아파트에서, 스웨덴의 어떤 마을에서, 브라질의 도시에서, 뉴욕의 호텔방에서 자살로 바이마르 정신을 소멸시켰다. 그러나 또다른 자들은 바이마르 정신을 실험실에서, 병원에서, 언론에서, 무대에서, 대학에서 소생시켜 위대한 발전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얻게 하여 망명지에서 이 정신의 진정한 고향을 찾아주었다.(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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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매달 출판사에서 일괄적으로 지급되는 미션 도서 외에 읽고 싶은 한 권의 책을 더 고르고 이에 대한 서평을 써야 한다. 굳이『바이마르 문화』같은 어려운 책을 고른 걸 사실 좀 후회했지만, 이 책을 고른 까닭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완독 후 여러 의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는 1933년까지 '바이마르공화국' 시대를 거친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혼란과 배반과 모반과 계략 속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고난에 빠져 있었고 대내외적 혼란이 가라앉을 무렵인 1923년에 이르러 바이마르공화국은 나름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황금기는 역사학자 '피터 게이'에 의하면 짧지만 강렬한 시기이다. 그는 이 시기를 '위태로운 영광이었으며 화산의 분화구에서 추는 춤이었다. 바이마르 문화는 짧고 혼란스러우며 허약했던 순간에 역사에 의해 내부로 몰려들어왔던 외부자들의 소산이었다.'라고 일갈한다. 건축-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법한 '바우하우스'부터, '라이아 마이너 릴케', '니체', 그리고 토마스 만의 『마의 산』까지. 바이마르공화국 시기는 독일의 민주주의 쇠락부터 히틀러의 권력 획득 과정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혼란과 요동치는 정국 속에서 그 불안의 에너지를 예술과 문학, 음학, 문화의 성장에 폭발적으로 쏟는다. 이 의심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황금기, 짧지만 강렬했던 바이마르공화국 시기는 히틀러 정권 탈취에 의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급박하게 전복되고 몰락하는데, 그 후에도 외부로 퍼져나가 영혼의 힘으로 영원히 살아남는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피터 게이의 평에 따르자면 '문화적 귀족이자 철학적 아이러니스트'였던 '토마스 만'에게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한 이 작품은 바이마르공화국 황금기인 1924년에 출간되었고, 두꺼운 분량과 상관없이 매우 큰 인기를 끌며 대중에게 팔려 나갔다. 『마의 산』은 남독일 고원, 슈바벤 호수를 건너 스위스 지역에서 알프스산맥을 거슬러 올라간 '다보스 플라츠'에 위치한 요양원이다(가상의 공간이다).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는 결핵에 걸린 사촌 '요하임'을 방문하기 위해 3주 일정으로 그곳을 방문한다. 하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곳에서 시간의 감각을 상실하고, 저지低地(그의 고향 함부르크뿐만 아니라 일반적 사회와 세속)의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사촌 방문 3주 일정은 금세 지나고 한스 자신도 요양원의 사람들과 같은 '병'에 걸린다. 곧 세 달, 삼 년을 지나 그는 결국 요양원에서 7년을 머문다. 엄밀히 이 소설은 성장 소설류이지만, 단순히 사실주의적 성장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심오하고 복잡한 상징적 장치들로 둘러싸여 있다. 우선,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마의 산'과 '저지低地'이다. 작품의 초입에서 작가는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시간을 훨씬 능가하는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밝히는데, 사실 이 부분만 읽어도 '마의 산'의 상징성을 간파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의 산'은 '한스 카스트로프'라는 청년을 '현실의 관계'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 본연의 자유의 상태로 옮겨 놓는 공간이다. '저지低地'가 시간의 질서에 따른 규율과 규칙의 삶, 사회적 관계에 얽매여 전통과 문화를 답습하며 살아가는 의무와 책임의 삶, 선線적인 삶을 상징한다면, '마의 산'은 모든 시간이 정지한 공간, 죽음을 화두로 병과 퇴폐에 탐닉하는 공간, 사회적 자아를 상실하고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자아에 빠져드는 공간을 상징한다. 이 공간, 즉 '요양원'은 『바이마르 문화』에서 작가 피터 게이의 언급을 따르면, '평화를 역겨워하고, 죽음의 무도회가 준비되어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번영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부패한 퇴폐적 유럽의 복제품'이다. 하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개인의 성장에만 초점을 두자면, '시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은 공간. 망자들이 취생몽사하는 심연. 죽음의 심연인 동시에 그렇기에 가장 강렬하고 가볍고 자유로운 욕망과 원시적 자아의 공간'이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곳에 올라와 고향인 저지대로 돌아가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요양원에서 칠 년이라는 망각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개인 내적 성장에 있어서는 청년에서 사회적 자아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만 쓰기에는 『마의 산』이라는 작품은 물론 무척 복합적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이 요양원에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들 각 인물은 수 세기 동안 유럽을 발전시키거나 분열시킨 사고들이 유형화된 캐릭터들로, 예를 들어 한스를 맞닥뜨린 처음 순간부터 "이곳을 떠나 자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경고를 하는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는 한스로 하여금 삶의 질서, 건강한 업무의 세계로 복귀할 것을 염려하는 이상화된 아버지의 전형이다. 하지만 한스는 이 선하고 합리적인 자유주의자를 좋아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에게 요양원에서 칠 년은 누군가에 의해 감금된 세월이 아닌, 자의에 의해 선택된 것으로 정지해 있는 영원이며 인생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연금술적 마술의 순간이다. 요양원에서 시간의 관념은 사라지고, 건강한 생의 업무 대신 죽음에 지배당한 문제적 세계가 한없는 자유와 가벼움을 불어 넣는다. 얼핏 보면 한심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일면으로는 과잉된 에너지의 축적이 언제든 폭발할 것처럼 불안감을 안고 있는 이곳에서 한스 카스트로프는 죽음과 병과 욕망과 자유 의지에 깊이 이끌린다. 그런데 한스 카스토르프가 요양원에서 칠 년의 생활 끝에 저지의 삶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은 전쟁 발발이라는 외부적 사건, 역사적 청천벽력 때문이며, 그렇기에 그가 요양원을 떠나는 장면은 급작스럽다. 사람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마의 산을 떠난다. 한스도 이들과 함께 무모한 출발을 감행한다. 마지막 이별의 장면에서 세템브리니가 그를 안고, "이제야 떠나는군! 네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떠나길 바랐는데. 나는 네가 일하러 가기를 바랐는데, 이젠 네 형제들 틈에서 싸우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말한 '다른 방식'은 아마 자유 의지에 의한 떠남, 한스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길 세템브리니는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마의 산'과의 이별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 의해서이고, 이렇게 기나긴 장편 소설의 분량에 비해 턱없이 짧게 배치된 결말 장면에서 작가 토마스 만은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양 운명 속으로 내팽개쳐 버린다. 『바이마르 문화』에서 피터 게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심도 있게 논하면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으로 '눈'의 장을 꼽는다. 요양원에서 한참의 세월을 흘려보내며 한스가 죽음과 병의 방종에 헤매며 탐닉하고 있을 때에 산속으로 스키를 타고 갔다가 눈보라를 만나 고립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이 눈보라 속에서 넘어져 잠이 들며 꿈에 빠지는데, 이 꿈을 통해 자신의 현재 삶이 정지해 있는 영원임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난다. 곧 그는 자신이 탈진해 눈 속에서 얼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착이 실은 생에 대한 강렬한 긍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 속에 있지만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닌 사랑이다. "나는 선과 사랑을 위해 인간은 죽음이 그의 사고 위에서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뒤 그는 가까스로 생환한다. 이 생환은 한스가 눈보라에서 살아 돌아온 사건이기도 하지만, 한스라는 한 인간의 '각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오랜 방황과 무감각한 시간의 소요 끝에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맞닥뜨리고, '삶'의 장소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스 카스트로프가 저지대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외부적 장치에 의해서이지만, 알고 보면 이 생의 귀환에는 내면의 각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 비록 작가가 마지막 구절에서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라고 의문하고 있지만, 그의 의문은 절망적 비관주의가 아닌, 희망적 긍정이다. 피터 게이는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에 대해 "그러나 이 시기의 바이마르는 마의 산 위의 사회와 흡사했다"라고 쓴다. 비아마르공화국 내에서 청년의 정치사는 이들의 수많은 아이러니 중에서 가장 통절한 것이었다고 평한다. 일부의 진정한 혁명가를 제외하고 죽음에 도취된 이 시기의 청년들은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심연 속으로 돌진할 정도로 젊었다. 이런 청년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은 '나치'이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을 통해 알 수 있듯) 인내를 갖고 합리성과 절제를 가진 진정한 자유를 향하라고 촉구한 사람 중 하나일 뿐, 청년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아들들은 떠나기 위해 모반을 꾀했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어머니의 전능함을 저버리고 싶어 했다. "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자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이려 한다"는 이 젊은이들은 진정한 혁명에 대한 준비 없이 오로지 영웅숭배, 진정한 혁명적 '사상'에 도취되어 세상을 전복시킨다. 1932년 바이마르공화국은 사방으로 무기력하고 곤경에 처했으며, 그 위기를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된다.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이 젊은이들을 덮쳤고, 그들에게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오기까지 너무 많은 희생과 고통과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실 『마의 산』도『바이마르 문화』도 모든 내용을 이해하며 읽기에는 난해하고 어려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을 나름의 열정으로 탐독하며 완독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정말 기성세대로, (기성세대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그러하듯) 그다지 악의적이거나 비아냥대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기약으로 신 시대를 열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염려한다. 아버지의 복수만큼 어머니의 전능함 또한 청년들에게 똑같이 해로운 것이라는 작가 '피터 게이'의 말에 통감하면서도, 청년들의 운명을 행운으로 바꾸는 전능함을 발휘하고 싶다. 바이마르공화국처럼 혼란과 불안의 극단은 아니지만, 사방에서 다양한 분노와 혐오, 분열이 아이들을 잡아당기고, 갈 곳 잃은 아이들의 열정과 불안과 자유 의지가 농축될 때 이것이 나쁜 방향으로 분출하고 폭발되지 않기를 바란다. 배반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악의적이고 비관적이지만, 그저 우리 기성세대를 거스르는 일쯤으로 볼 때, 기존의 부조리와 구태의연한 관습과 어른의 세속적 욕망과 경직된 의무 부여를 거스르는, 그러한 부모에 대한 배반을 통해 실컷 헤매고, 멈추지 말고, 사랑이 가득한 삶의 자리로 귀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포스팅은 교유서가 서포터즈로, '피터 게이'의 문화 역사서 『바이마르 문화』에 대한 서평인데, 토마스 만을 비롯,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로이트, 막스 베버 등 비록 공화국은 짧은 시간 안에 쇠락했으나 그 정신은 오래 살아남은 '바이마르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본래 소설을 읽을 때에 작가적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도 나 스스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슬슬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더 깊은 앎은 또 다른 감동을 이끈다는 생각을 한다.
*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 『바이마르 문화』를 제공 받았습니다. |
<바이마르 문화>는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문화적 예술적 업적의 특징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을 계기로 바이마르공화국의 예술적 성과가 갖는 정치적 사회적 맥락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바로 이 점이 역사서로서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중요성이라고 평가받는다. 바이마르공화국은 1918년 11월 9일 사회주의자 필리프 샤이데만에 의해 선포되었고 1933년 1월 30일 당시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사멸되었다. 저자 피터 게이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문체로 이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다.
피터 게이가 이 책을 집필하기 전 바이마르 문화를 언급하는 역사 저작은 보통 황금의 20년대에 대한 이야기만 많았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어마어마하게 눈부신 망령자들은 바이마르 문화를 이상화하려는 유혹을 늘 받았다. 그러나 피터 게이는 방대한 1차 사료와 2차 사료를 토대로 과장이나 냉소주의를 넘어서 바이마르 문화를 포괄적으로 연구하여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외부자들은 민주주의자, 유대인, 전위예술가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바이마르공화국 안에서는 내부자가 되어 박물관, 오케스트라, 극장, 학문의 중심지에서 의사결정자가 되었다. 이러한 외부자들은 이미 제국 말기에 활동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바이마르 문화는 단지 패배한 전쟁의 산물로 요약될 수 없으며 또한 느닷없는 재능과 열정의 출현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바이마르공화국 내부자들은 언제나 독일제국에 충실했던 보수주의자들이었지만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이들 외부자들이었다. 독일 문화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유대인들은 완전히 동화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바이마르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편안한 협력을 들고 있다. 한편 역사적 정황에 의해 내부로 들어와 눈부신 바이마르 문화를 일구어 냈지만 결코 이들은 내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이마르 문화>를 읽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바이마르공화국은 모더니즘의 산실로써 지적, 문화적, 피터 게이는 모더니즘의 특징을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려는 충동"과 "철저한 자기 탐구"에서 비롯된 개성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것이 모더니즘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바이마르 양식의 직접적인 계보는 세기 전환기와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제국은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의도적으로 적대시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속물적이고 억압적이긴 했으나 완전한 독재는 아니어서 모더니즘 운동은 성장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 문화의 형성기를 지배하게 될 표현주의는 이러한 제국 속에서 완전히 성숙했다는 것이 피터 게이의 해석이다. 책에서 바이마르 양식은 바이마르공화국 이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창조해낸 것은 거의 없었고 단지 공화국은 이미 존재하던 것을 풀어놓았을 뿐이라는 것이 피터 게이의 설명이다.
조한욱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피터 게이의 예리한 감수성과 문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피터 게이는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문체를 분석했는데 그의 저서 <역사 속의 문체>에서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문체는 형식과 그들의 서술대상, 즉 내용과 연결시킨다고 말한다. 문체는 켄타우로스(반인반마의 괴물)로 자연 속에서 결합될 수 없는 인간과 말이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해 한 몸으로 연결되듯, 문체는 책의 내용과 형식을 엮어준다는 것이다. 옮긴이 조한욱 교수는 2015년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사설 [조한욱의 서양 사람]에서 '마음의 은사'라는 글에서 <바이마르 문화>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의 번득이는 문체를 시늉이라도 내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체화되었다고 썼다. 한글로 글을 쓰면서 "지금 이 글은 피터 게이 스타일이야"라고 되뇌었던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말한다. 조한욱 교수의 노력 덕분에 <바이마르 문화>의 번역본을 읽는 나와 같은 독자도 피터 게이의 우아한 문체를 상상하며 이 책을 읽었다.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적 현실은 혼란 그 자체였다. 혁명, 내란, 외국의 점령, 정치적 살인, 경악스러운 물가 폭등 등. 인간의 문화는 고통 속에서 번창하는 것일까? 한 세기도 채 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는 한계 가득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삶을 통시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나 역시 짧고 좁고 빈약한 경험을 겨우겨우 쌓으며 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그럴 때 나는 역사서를 들춘다. 이 혼란 가득했던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히틀러에 의해 살해당한 이 공화국의 삶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와닿는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절멸할 수 있다는 것. 위태하다는 것. 바로 이 사실을 역사서 속에서 찾는다.
이 책은 출판사 서포터즈로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 리뷰입니다 |
피터 게이 (지음)/ 교유서가(펴냄)
피터 게이 (1923~2015) 예일대학 역사학과 교수,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을 떠나야 했고 쿠바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책의 역자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미슐레의 《민중》을 번역하신 조한욱 님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다.
역사관! 세계사 인식의 중요성! 늘 깨닫는다. 지구 반대편의 신음 소리! 전쟁은 늘 진행형이다. 최근 실시간 공유되는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 상황에 다들 관심이 많으실 것이다. 세계사 특히 중동, 이스라엘 역사나 문화 관련 책 판매가 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중동 관련 역사책 두 권을 동시 병렬 중이다. 전쟁과 무관하게 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책을 읽으며 오늘날의 전쟁은 교육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상생이 아닌 내신 1등급, 의치 한 약수를 향해 치달린 우리의 교육도 곧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매정한가?) .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하마스의 행동은 무엇의 결과물인가? 똑똑한 애들이 훗날 병원 개업해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교육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교육이 진짜 교육일 것이다. ( 이 말씀은 방금 내 입으로 나왔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어령 교수님 외 우리 시대 지성들이 누누이 언급하신 부분이다.)
바이마르를 모르고서는 독일을 말할 수 없다. 역사, 문화, 지식 기반산업, 자연환경과 교통 인프라까지 독일 문화와 예술, 역사를 알기 위해 가장 먼저 접근할 부분이 바이마르 문화다. 책은 바이마르의 탄생과 성장 멸망을 프로이트 개념을 빌려와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바이마르의 짧은 역사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토마스 만 선생님이라 많은 학자, 작가, 철학자들이 언급되어 반가웠다. 역사학자의 문장인가 싶을 만큼 유려하고 아름답고 은유적이다. 그는 단순히 세상을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는 학자다. ( 여기까지만 해도 이 책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만 내용과 개인의 감상을 덧붙여본다.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민주주의자 필리프 샤이데만에 의해 선포되었다. 무질서 상태의 독일, 180만 명의 사망자와 400만 명의 부상자를 낸 독일의 군 수뇌부는 평화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 공화국 탄생 자체가 좀 웃픈것은 소련보다 먼저 선포하려고 ㅋㅋㅋㅋ지기싫은 심리?)
이후 단기간에 헌법 만들고 7년 임기의 강력한 대통령 탄생! 이분은 공공 안정과 질서가 심각하게 혼한되거나 위협받을 때에는 전권을 맡을 수 있었다. 우리의 독재와 매우 비슷한 장면^^ 1919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반유대적이며 반공화적이자 모호한 성격의 사회주의 광신자들의 소집단인 불투명한 우익 단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이름 왜 이렇게 길어? National Socislist German Workers Party) 창립!!!
그러나 실업률 증가, 600만 실업자 시대가 문을 열었고 폭력사태도 자주 있었고 그러니 공화국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이마르의 몰락을 묘사한 저자의 문장인데 시대를 관통하는 은유적인 문장이다. 유대인인 저자의 인식이 잘 느껴진다.
바이마르의 정신은 내적으로 변화하여 이솝 우화가 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소멸했다. 다른 이들은 베를린에서 문 앞의 노크 소리 뒤에. 또는 스페인 국경에서, 파리의 임대 아파트에서, 스웨덴의 어떤 마을에서, 브라질의 도시에서, 뉴욕의 호텔방에서 자살로 바이마르 정신을 소멸시켰다.
그러나 또 다른 자들은 바이마르 정신을 실험실에서, 병원에서, 언론에서, 무대에서, 대학에서 소생시켜 위대한 발전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얻게 하여 망명지에서 이 정신의 진정한 고향을 찾아주었다. p270
이후 역사는 1932년 선거에서 나치의 승리 1933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 수상으로 임명, 역사의 그날이다. 무능한 보수주의자들이 나치당쯤은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앞으로 일어날 비극의 시작이었다. 독재자들의 필수 코스인가? 히틀러 역시 언론부터 틀어막았다. 나치당은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히틀러의 나치당 운동은 해양제국을 좌절당한 독일 도이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며 보수주의자와 좌파 노동자를 모두 노린 대중운동이었다. 비정상적인 나치당의 카르텔이 먹힌 이유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는 오히려 삐딱한 것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우리의 정치도 마찬가지^^
수많은 청년들, 유소년들이 나치당과 히틀러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광인 하나가 전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뒤쪽에는 전쟁이, 앞에는 사회의 몰락만이 기다리고 있는 독일의 청년들!!!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어디를 둘러봐도 시대를 헤쳐나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 3포, 4포, n 포의 대한민국 현실과 다를까? 세계는 지금 우경화를 달리고 있다. 3년 전 책스타그램을 시작하며 내가 읽은 채석장 시리즈 『신극우주의의 양상』에서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역시 말했다.
청년 우경화, 이대남들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시간을 두고 실력부터 기르라고 말하면 꼰대가 되는 세상. 여성이나 소수자, 이민자들을 자신들의 신성? 한 일자리를 빼앗는 새로운 가해자로 인식하는 부분. 민주주의 탈을 쓴 파시즘, 나치즘의 청년들과 유사하다.
'극우주의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아픈 상처'라고 존경하는 나의 학자 아도르노께서 말씀하셨다. 독일은 20세기 후반 내내 히틀러가 싸지른 똥을 치워야 했다.
덧. 전쟁사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가? 특히 세계대전 관련 책!! 모든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쟁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그 식상한 문장! 왜 역사를 반복적으로 읽어야 하는지, 19세기 총과 대포로 시작된 전쟁과 21세기 첨단과학 드론 전쟁은 도구와 수단이 다를 뿐 지향점은 같다. 심지어 읽는 동안에도 전쟁은 일어나니까. 우크라이나에서 가자 지구에서 생명을 살리는 병원이 폭격당했다. 구석기 신석기인이 야만인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야만의 시대다.
덧. 정작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다 쓰지 못한 리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이 세상어디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으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라는 젋은이들은 나라와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되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국방의 의무도 없고 어머니들은 전쟁으로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던 권정생 동화 작가님 말씀이 이제야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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