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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 by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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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에 의하면, '침묵 = 시간 = 무無'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또한, 삶과 사랑조차 이 공식에 집어넣는다.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접근을 통한 글쓰기에 대한 성찰이다. 글쓰기는 무한히 길게 잡아 늘여진 침묵하는 불면의 밤이다. 불면의 글쓰기, 그것은 불가능한 고백의 언어가 단단히 동여 맨 침묵이다. 불가능한 고백들과 침묵하는 불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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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에 의하면, '침묵 = 시간 = 무無'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또한, 삶과 사랑조차 이 공식에 집어넣는다.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접근을 통한 글쓰기에 대한 성찰이다. 글쓰기는 무한히 길게 잡아 늘여진 침묵하는 불면의 밤이다. 불면의 글쓰기, 그것은 불가능한 고백의 언어가 단단히 동여 맨 침묵이다. 불가능한 고백들과 침묵하는 불면의 글쓰기로 질문을 던지고, 시간과 삶을 이야기하고, 언어와 침묵, 사랑의 이미지를 더듬거리며 탐색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위대한 문인들과 작품, 언어의 기원, 철학의 폭넓은 이해에서 가져오는 문법을 탐구하고 세기의 작가들의 창작 뒤에 수반되는 고뇌의 자취를 더듬어간다.  

 
선문답집인 『조동록曹洞錄』에 나오는 문답이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비싼 물건입니까?"
"죽은 고양이 머리가 가장 귀하다."
"어째서 죽은 고양이 머리가 가장 귀합니까?"
"아무도 값을 매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고양이의 머리, 그것이 문학과 글쓰기의 언어이자 운명이다.
-P81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다. 우리는 에로스의 화살에 맞는다. 그리고 미친 듯이 사랑의 대상을 욕망한다. 사랑은 청춘의 행위이며 거기에는 성적 갈망, 미칠 듯한 그리움 그리고 조화와 우아함, 상대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과 헌신까지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P119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내면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는 열정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준 까닭은 인간이 얼마나 쉽사리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게 그 상처를 극복할 내적인 힘도 부여해주었다. '망각하는 능력'과 '노력하는 힘'은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두 가지 선물이다. -P195

 

 

 

 

 

 

저자는 ‘침묵하는 글쓰기’를 제안한다. 릴케의 침묵은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으로 충만한 침묵이며, 고요한 침묵 속에 침잠해 있을 때가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이다. 불가능한 고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이 바로 불면의 글쓰기다. 생생한 본질의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망각이 필요하다. 망각을 통해 호메로스는 그 운명의 내적인 본질에 연루된 장면들만을 선택적으로 노래한다. 불멸로 남는 것은 한 권의 책이다. 저자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 無, 글자 無의 고형古形은 '망亡'자다. 망亡자는 사람이 울타리 안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본뜬다. 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세계 뒤편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가시적인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향수라고 번역하는 노스탤지어, 매혹이라는 강렬한 단어에 매혹되어 '잃어버린 사랑의 미학' 속에 첨부한다. '하염없이'란 단어가 쓰인 한 문장에 눈물을 흘릴 뻔했고, 김훈의 풍경과 상처에 쓰인 '쩔쩔맨다'는 표현에 진정으로 감탄한다. 고독孤獨과 장 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 낭만성과 결합한 낭만주의적 고독의 기원과는 대조적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자본주의 시공간이 삼켜버린 도시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좇고 있다.

 

형용사 남용과 함께 형용사 자체를 비판하고 공격한 작가들이 있다. 프랑스의 누보로망 소설가 알랭 로브 그리예는 [히드라의 거울]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에 대해 "형용사 남용벽에 맞서 절망적으로 싸우는 인물"이라 표현했다. 롤랑 바르트는 수식어를 뜻하는 에피테트와 같은 어원을 갖는 라틴어 에피테마는 무덤의 덮개, 혹은 무덤 장식을 가리키는 말로써, 형용사는 지나치게 패러다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했고 그것을 글쓰기로 실천했다. 문학 작품에서도 형용사와 더불어 부사의 남용은 혐오스런 감상주의와 작가의 언어의식의 부재를 부추길 수 있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적절한 형용사가 수식하는 명사를 완벽하게 표현해줄 때 혹은 술어로 사용되어 주어의 행위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할 때 형용사는 눈부신 빛처럼 독자를 사로잡는다. 언어를 문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간결하게 말하자면 형용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의 참된 목소리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문학의 기원이자 글쓰기 최초의 문장이다. 저자는 이토록 철저한 언어 금욕주의자가 되길 희망하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어떤 흐름을 지각하고 있고 그것을 시간으로 표상한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계절의 변화 또는 육체가 점차 쇠락해가는 변화의 징후를 자각할 때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멈추어라!"하고 소리치며 붙잡고 싶은 모든 순간이 강물 흐르듯 나를 스쳐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슬픔과 상실감을 느낀다. 시간의 본질은 망각이다. 망각은 곧 죽음, 無와 다름없다. 글쓰기는 신의 고귀한 신비에 참여하는 신적인 행위이며, 신비mistic라는 단어의 어원은 침묵misticos이므로 글쓰기와 고독, 신비 그리고 침묵은 분리될 수 없다. 자유로운 삶은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이라는 삶의 모순된 측면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러면서도 어느 한쪽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무無에서 출발해야 한다. 클리나멘clinamen(비처럼 쏟아지는 원자들의 우발적인 기울기 운동과 마주침)은 그러한 무無에서 탈출하는 것이며 미셸 푸코가 말한 '자기'라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존재론적 사건의 폭발인 동시에 존재론적 비약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대중을 위해서나 혹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 어떤 한 사람을 위해 글을 쓰던 사람들이 있었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 [신곡]을 쓴 단테, [푸른꽃]을 쓴 노발리스, [휘페리온]을 쓴 휠덜린.. 문학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가치에 묶인 것이지 교환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예술의 거장들은 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적어도 10년 이상의 세월, 혹은 그 작품을 위해 삶 전체를 소진시켰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를 십 수 년에 걸쳐 쓰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그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시장과 순환의 가속성 메커니즘을 속성으로 하는 현대는 예술 영역 고유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잠식했고 순응성과 피상적인 카타르시스만을 여백으로 남겨놓았다. 오늘날의 예술활동은 시장의 욕망과 시대의 공허한 무의식을 즉각적이고도 손쉽게 반영하는 대량생산된 매끈한 손거울로 변신했다.  

 

황금 화살과 사랑의 묘약은 고대인들과 중세인들이 사랑의 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적, 문학적 상징물들이다. 기이한 것은 현실 속에서는 한 권의 책이 에로스의 화살과 사랑의 묘약을 대체하는 낭만적인 상징물이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어느 한 순간에 집요하게 고착되어버린 추억의 다른 이름이다. 번쩍 하며 내리치는 한 순간의 낙뢰가 우연히 밤길을 지나던 한 생을 태워버린다. 그런 운명의 섬광을 제외한다면, 살고 죽은 모든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無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생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향해 닫혀 있는 것이다. 욕망과는 다른 사랑이 있다. 욕망을 초월하며, 그것의 숭고한 형식 속에서 인간성마저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마치 스피노자의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하면서도 세계를 초월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가 외설적인 사회인 까닭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환한 빛 아래에 드러내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사랑은 부재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부재를 통해서 더욱 명징하고 절박하게 확인되는 감정,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혼자일 때조차도 항상 존재한다. 또한 사랑은 현존 속에서도 부재의 형식으로써만 존재한다. 그것이 사랑의 아이러니다.

  

삶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버림의 과정이다. 오르페우스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그의 호소와 갈망의 애틋함에도 불구하고 추억을 현재로 소환하려 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된 비극이었다. 그것은 추억의 그릇된 사용법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며 인간의 한계에 대한 비극적 환기다. 누구나 흘러간 과거보다 현재가, 또 현재보다 미래가 더 낫기를 갈망하지만 지나가버린 과거보다 현재 이 순간이 더 나을 수 있기란 힘든 일이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은 진정한 의미의 자전적 문학의 기원이다. 그러나 그의 고백록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많은 결핍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경이로울 수 있는 것은 야생성, 외재성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삶이 오로지 필연적인 것들로만 채워진다면 그 속에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우연적인 것들만이 신비롭다. 연민의 감정은 타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과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사회적 감정이다. '슬픔과 비탄의 계곡'인 생에서 세상의 모든 타인들은 나처럼 상처투성이다.

  

우리가 자본주의capitalism라고 부르는 사회는 그 탄생 초기부터 스스로 고안한 집단 언어에 반대하는 또 다른 집단의 언어들과 무수한 반정립적 개인 언어들을 산출하면서 출현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일한 형태의 공동체다. 이 체제는 개인들을 모래알처럼 흩뿌려놓은 뒤 그들의 욕망을 전면적으로 해방시켜 그 해방된 욕망들을 '시장'이라는 맷돌 속으로 흘려 넣고 빙글빙글 돌린다. 시장은 하나의 겟세마네, 즉 기름 짜는 틀이다. 욕망을 짜서 기름진 돈을 짜내는 틀. -P260

자유와 사생활이라는 이념하에 어떤 욕망이라도 허용하는 게 자본주의다. 욕망이야말로 시장이 가장 선호하는 일용할 양식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집단 언어의 체계를 능가하는 독특하고 고유한 자기 세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중들이 선호하는 개인주의와 진짜 개인이 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욕망의 무정부주의이거나 획일적인 유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는 의미다.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는 사회에 투영된 가짜 인격으로 해석된다. 진짜 얼굴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환한 낮의 세계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페르소나로 연기 하며 살아간다. 마치 가면이 진짜 얼굴인 양 스스로를 기만하기도 한다. 밤만이 빛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준다. 밤이 되어야만 감추어진 것들이 귀환하고 무의식의 세계가 돌연 출현한다. 인간이 사회라는 집단적 조직체를 구성하고 온갖 규칙들로 사회적 존재로 묶어버린 순간부터 밤의 매혹은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전히 밤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밤의 어둠만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진짜 얼굴을 되찾아주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침묵을 숭배하고 언어를 금했다. 그 결과 침묵을 뜻하던 mysticos가 신비mystery로 바뀌었다. 밤은 사회적인 모든 것을 침묵시킨다.



d******7 2013.12.18. 신고 공감 6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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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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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그가 낸 ‘카프카의 서재’를 읽을 때도 의미 있는 문장이 마음에 닿았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책 “릴케의 침묵”도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마음에 들어와 앉는다. 지은이 김운하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실존적 방황을 겪기도 하면서 철학에 빠져들기도 했고, 현재는 소설가 이고 인문학연구자로 집필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제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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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그가 낸 ‘카프카의 서재’를 읽을 때도 의미 있는 문장이 마음에 닿았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책 “릴케의 침묵”도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마음에 들어와 앉는다. 지은이 김운하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실존적 방황을 겪기도 하면서 철학에 빠져들기도 했고, 현재는 소설가 이고 인문학연구자로 집필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제목이 “릴케의 침묵”인데 책의 내용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의 참된 목소리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문학의 기원이자 글쓰기 최초의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글쓰기와 침묵의 관계를 쉽게 풀어 놓았다. 사실 이 책에 대해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왠지, 부담스럽다. 대부분의 문장들이 너무 뜨거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인간은 상처받는 존재라고 나온다. ‘심각한 마음의 상처와 충격은 트라우마가 되어 병까지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어느 여인이 생각난다. 그녀는 조울증 약을 복용중이다. 마음의 상처가 깊어서 자주 가출도 한다. 그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본인도 힘들 테고 가족들도 힘이 들 것이다. 이론으로 그냥 마음의 상처를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고통 받는다.

  

  이 책에는 작가들의 침묵이 나온다. 김시습은 북한산 암자에서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울며 사흘 동안이나 괴로워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영혼의 운둔처가 과연 있기나 할까? 그러나 침묵을 숭배하고 언어를 금했다는 신비주의자들의 이야기 속에는 영혼의 운둔처가 있는 듯하다. 신비주의자들이 침묵을 금하자 ‘침묵을 뜻하던 단어가 신비로 바뀌었다. 밤은 사회적인 모든 것을 침묵시킨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 자정이 넘은 시간의 대지에는 오직 깜깜한 어둠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여기에서는 신비와 침묵이 가까운 사이로 여겨진다. 참 멋진 침묵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침묵에 대해 고민해 볼만한 많은 것 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도 여러 번 음미하며 다시 한 번 들춰 보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용하는 글의 색이 옅은 자주색이어서 글자가 너무 희미하게 보인다. 좀 더 진한 색상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원고지 줄에 소제목이 들어 있는 것은 꽤 운치 있다. 사람과의 대화만이 대화는 아니다. 책 속의 언어에 몰두하다 보면 사람보다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것처럼 뿌듯하다. 겨울 잠들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책 하나 옆에 두고 읽어 보면 좋을 듯싶다.

 

f******2 2013.12.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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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글쓰기의 가능성에 관하여...
"불가능한 글쓰기의 가능성에 관하여..." 내용보기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부제가 더 마음을 끌었다. 내가 릴케를 알면 얼마나 알고, 그에게 매료당했다면 얼마나 당했을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장미를 좋아해 장미가시에 찔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장미를 좋아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건 덫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침묵의 의미를 깨닫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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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부제가 더 마음을 끌었다. 내가 릴케를 알면 얼마나 알고, 그에게 매료당했다면 얼마나 당했을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장미를 좋아해 장미가시에 찔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장미를 좋아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건 덫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침묵의 의미를 깨닫는 건 또 얼마나 덧없고, 무모한 도전이란 말인가? 이 세대가 과연 침묵을 허용하는 시대란 말인가? 저자는 책 가운데 외로움과 침묵의 정의에 관해 쓰긴 했지만, 이것을 깨닫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성싶다. 

 

오히려 내가 꽂혔던 건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였다. 더 정확히는 '불면의 글쓰기'였다. 저자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불면하는 밤의 매혹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나는 그런 매혹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어쩌면 불가능한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밤이 털어놓는 고백 자체가 불가능한 고백인 탓이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고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이 바로 불면의 글쓰기다.(101p)      

 

저자가 말하는 불면의 글쓰기는, 확실히 열어보지 못할 판도라의 상자를 독자에게 불쑥 들이미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책은 뭔가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는 것도 같고, 저자가 읽은 책, 더 정확히는 인문학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아직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지식은 그것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 순간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유혹일까?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글쓰기에 미쳤던 건. 발자크처럼 커피에 중독돼 가며 어느 순간 미치도록 쓴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두렵고 주저하게 만드는 일이었을까? 그러던 중 교회에서 대본 쓰는 일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그것도 하필 주일학교 교사하는 일이 너무 안 맞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를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대본 쓰는 일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지만(난 늘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나에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락을 했던 것이다. 한 1년 동안은 신나게 그 일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숨어 있었나? 나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 일이 마냥 신났던 것만은 아니다. 맨땅에 헤딩하듯, 한 주에 한 편의 연극 대본을 쓴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어떤 땐 너무 글이 안 써져 컴퓨터 모니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것도 살아 있음이라 생각하고 나는 매번 주어진 숙제를 성실하게 해 나갔다.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내가 꽤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된다. 단지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사람이 뭔가 한 가지 정도는 잘하는 것이 있다는데 나는 비교적 늦게 그걸 발견해낸 셈일 뿐이다. 

 

하지만 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나는 대본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교사라는 것이다. 그 일을 성실히 했다고해서 나의 교사의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나를 새롭게 발견해 주는 일이었을 뿐, 교사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어려운 일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내가 했던 일은 교사의 직무를 바꿔치기 할만큼 대단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즉 이 일을 하느라 교사의 직무를 유기했던 것이 고스란히 내 책임으로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알았던 제자 녀석이 하나가 있었다. 난 그 녀석을 거의 2년 동안 지켜와 봤지만 이 녀석에 대한 뭔가의 믿음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제자와 선생이란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때 보면 나에게 친근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한데 선생에 대한 예의나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 녀석과 멀어지길 바랐지만, 녀석에겐 뭔가 거부할 수 없는 특유의 페로몬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녀석의 페로몬은 선생인 나 사이에 하극상을 낳았고, 또한 그것은 녀석으로 하여금 어떻게 세력을 규합하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알게해 준 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그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게 됐다면 그의 영혼에 미칠 영향이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덕분에 나와 녀석은 조직내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조직에서 파직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나로선 조직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고, 따라야겠지만 이후 오래도록 과연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남았다. 

 

뭐 좀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하필 그때 거미줄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라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훗날을 위해 더 공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글 쓰는 내가 좋았던 것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곳은 어느 창작학원이었는데 거긴 정말 별천지였다. 80년 대 어느 민주화 투사가 경영하는 곳이기도 했고, 역시 민주화 투사 중 한 분이 나의 선생이 되었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건 나는 한때 글 쓰는 사람이길 원치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든 문학 소년이 아니고, 문학 소녀가 아닌 때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지 이 꿈을 나의 의식의 수면 저 밑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일찍 찾아 온 사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독 부모님이 서로 싸우는 걸 못견뎌 했다. 엄마는 늘 약자처럼 보였고, 아버지는 늘 강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참다 못해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께 드렸는데, 아버지는 뭐 때문이었는지 화를 내지 않고 나의 그런 용기를 칭찬해 주셨다. 덕분에 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무의식으로나마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그해 늦가을이었던가? 교지에 실을 글을 모집한다고 해서, 나는 시인지 낙서인지도 모를 글을 당시 몰래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 손에 직접 쥐어 드렸다(생각해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사랑의 연서를 쥐어 드린 건 아닌지?). 나는 당연히 내 글이 교지에 실릴 줄 알았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그런데 웬걸, 기대를 가지고 교지의 첫 페이지를 열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내가 쓴 글은 한 자도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때부터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몰아 닥쳤던 민주화 운동은 그나마 있었던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사그러트리는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의 문학은 온통 참여문학 일색이었으니까. 인간의 상상력을 말살하고, 참여문학만이 문학이라면 차라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무슨 허무주읜지, 한 번 읽고마는 소설의 일회성을 생각해 볼 때 문학은 더 이상 나에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문학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작가를 대하고 보니 얼마나 소견이 좁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류는 나름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존심 생각하고, 상처만 생각하면 다시 못 돌아 갈 곳이다. 이 책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상처에 대항하는 방식은 실로 여러 가지다. 그중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은 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다. 상처는 쉽사리 콤플렉스가 되고 우울증과 신경과민, 세상과 피해의식을 낳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적극적인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수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내면에 대한 각인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 끝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192~193p)

 

그리고 난 그 일을 겪은 후 훨씬 더 안정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일을 하고 나서 나에겐 적지않은 변화도 생겼다. 유치하고, 시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는 것이다. 행복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에 영광이 찾아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제자 녀석의 하극상을 통해 녀석안에 꿈틀대고 있는 뭔가의 악마성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훗날 나는 더 큰 것을 보기도 했다. 녀석의 악마성을 교묘히 이용하는 또 다른 더 큰 권력을 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녀석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하긴 하다.

 

나는 나대로 조직이 재편될 때 그 새로운 권력에 의해 축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볼 때 또 한 번의 좌절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나만이 당한 일도 아니거니와, 원래 새로운 사람이 수장이 되면 이전에 있었던 사람은 필요에 의해 그 조직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조직을 떠나기도 한다(자의든, 타의든). 그런 차원이었으니 속상해 할 것도 없다. 단지 그 새로운 수장이 이전과 다른 얼굴로, 없는 죄도 만들어 가며 더 이상 그 조직에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인격적이고, 추잡한 행동에 분개할 뿐었다. 

 

이를테면, 글쟁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글쓰기가 좋아 죽겠는데 어딘가 필요로 하는 곳에 속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서 내가 목격한 인간의 이면과 진실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지칭함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느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아라크네의 후예들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그 일도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그후 나는 그 보다 훨씬 좋은 곳에서 글을 썼지만, 나의 글 쓰기의 욕망은 어느 조직이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의 경험과 인연이 나로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다. 그것은 항상 좋은 경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쁜 경험이 자극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불만은 나의 힘이라고, 난 항상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마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또 말한다.

글쓰기를 하건 다른 창조적인 일을 하건, 진정으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거기에서 성취감을 얻을 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된다. 이것은 상처를 내면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면화시킴으로써 극복하는 방법이다.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사랑을 찾아 열정을 쏟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과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대신 오히려 마음 속에서 상처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193p)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지금까지 한 번도 글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면서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게을러서일까? 거기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하지만 뭔가 시간이라고 하는 필터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교롭게도 저자는 위의 글에 앞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얘기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예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행태를 고발하면서, 이 모두가 진실임을 거듭 천명했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말과 위배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협잡꾼이라고 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목졸라 죽이기까지 해야한다고 했다. 과연 무시무시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요는 루소도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객관성을 들어 진실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말했다('불가능한 고백',177p~).

 

그런 것처럼 나의 이야기는 자서전이란 형태로 글 쓰기가 가능할 것도 같지만 나의 얘기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나 자신 조차도 정말 진실을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그때 일을 들쑤셔서 마음이 우울에 빠질지도 모르고, 명예훼손이라고 고발당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엄밀한 의미에서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상처받을 가능성 속에서 모두 하나라고. 또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내면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는 열정의 에너지이기도 하다고. 신이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준 까닭은 인간이 얼마나 쉽사리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게 그 상처를 극복할 내적인 힘도 부여해주었다. '망각하는 능력'과 '노력하는 힘'은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두 가지 선물이다.(195p)    

  이것이 불가능한 고백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겠다는 것이거나, 시간과 망각의 필터링을 통해, 또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좀 더 고도화된 방법을 통해 좀 더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거나.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는 글쓰기를 글 감옥이라고도 표현했지만, 그렇게 흘러온 나의 글쓰기 유전은 이제 나의 십자가요, 족쇄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받아야 하지 않을까?  

    

m****9 2014.01.13.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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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김운하, 한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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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에서 치열한 글쓰기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불면의 글쓰기입니다. 그는 시간과 삶의 이야기, 언어와 침묵, 사랑의 이미지를 탐색합니다. 저자는 끝없이 아름다운 문장을 욕망합니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무지막지한 품사인 형용사”를 혐오합니다. 왜냐하면 “형용사는 사실보다는 가치 평가에 지나치게 깊이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존재들에 대한 폭력을 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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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 책에서 치열한 글쓰기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불면의 글쓰기입니다. 그는 시간과 삶의 이야기, 언어와 침묵, 사랑의 이미지를 탐색합니다. 저자는 끝없이 아름다운 문장을 욕망합니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무지막지한 품사인 형용사”를 혐오합니다. 왜냐하면 “형용사는 사실보다는 가치 평가에 지나치게 깊이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존재들에 대한 폭력을 야기하기 때문”(pp. 18~19)입니다. 그는 진정 자유로운 문장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참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옛 선비들은 만권의 책을 읽거나 만 리의 길을 여행한 뒤라야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죠. 글쓰기는 인생 그 자체이며, 심오한 고뇌와 성찰입니다. 그런 점에서 책은 곧 글 쓰는 자기의 영혼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운하에게 있어서 글은 곧 신(神)입니다. 그는 성경 전도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시간과 운명이 그들을 세상에 내려 보낸 까닭이 특정한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편의 작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 문장을 위해서였다”(p. 42). 이 정도로 글쓰기에 미쳐야 진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조선 후기 시인 김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연희라는 관기와 사랑을 나누며 <사유악부>라는 시문집을 지었답니다. 여기서 ‘사유’(思牖)는 “들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합니다(p. 48). 김려의 오랜 유배 생활이 아름다운 시를 낳고, 보르헤스의 시력 상실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도서관장에 임명되게 되었듯, 인생의 시련은 오히려 문장을 빛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시문집을 낸 김려, 오직 한 명의 독자 어머니에게 읽어 주기 위해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의 경우에서 보듯, 문학은 돈으로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랑의 가치에 본질적으로 묶여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감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글쓰기에 푹 빠지는 것일까요? 작가는 인상깊은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써 답합니다. “늙은 노새의 노래”(pp. 72~76). 어느 선비가 앞 두절의 시구를 짓고는 평생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 평생 노새를 타고 방랑하다 마지막 뒤 두 구절의 시구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시는 이제 보니 너(노새)를 위한 시였구나. 이제 됐다. 이걸로 내 생은 충분하구나. 그만 가자꾸나” 늙은 선비와 노새는 강을 건너 어느 마을에 도착했고 며칠 후 선비도 노새도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잊고,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들이 뒤섞였다 다시 흩어집니다.

  나는 김운하의 글에 담겨있는 문학과 글, 인생과 철학에 대한 넓이와 깊이에 감탄하며, 사람과 인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푹 빠졌습니다. 사유(思惟)와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그의 고독과 그의 침묵이, 그의 치열한 글쓰기가 이 책을 빛나게 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에 대해 쓴, 그의 또 다른 책 <카프카의 서재>도 찾아 읽어보아야겠네요. 이런 책을 읽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l******y 2013.1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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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최초의 문장, 침묵이 가져다 주는 내면의 세계 [릴케의 침묵]
"글쓰기 최초의 문장, 침묵이 가져다 주는 내면의 세계 [릴케의 침묵]" 내용보기
"나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글을 썼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글도 쓸 수 없다." --- p.15   오스카 와일드의 이 문장은 이 책 [릴케의 침묵]을 쓴 저자 자신의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문장이 저자가 오랜 기간 글쓰기에 '침묵'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그 고통의 사유를
"글쓰기 최초의 문장, 침묵이 가져다 주는 내면의 세계 [릴케의 침묵]" 내용보기
"나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글을 썼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글도 쓸 수 없다." --- p.15
 
오스카 와일드의 이 문장은 이 책 [릴케의 침묵]을 쓴 저자 자신의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문장이 저자가 오랜 기간 글쓰기에 '침묵'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그 고통의 사유를 걷어내고, 다시 세상 밖으로 언어를 내보내기까지의 과정을 '글쓰기' '침묵'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침묵과 글쓰기...상반된 것 같은 두 개의 관념은 시간차를 두고 이어졌을 때 운명적인 조합이 된다는 것을 저자는 한발한발 침묵의 과정에서 나오는 걸음걸이를 통해서 보여준다.
 
"혹은 그것을 더 열렬히 사랑하는 수다와 절대적 침묵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며 존재하는 어떤 행위가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의 참된 목소리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문학의 기원이자 글쓰기 최초의 문장이다." --- p.23 
 
"글을 쓴다는 것은 내면의 절대적인 깊이로 침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가장 깊은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고독이다. 고독은 침묵의 밀도 높은 근원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로 설명될 수 없다. 태초의 혼돈, 신이 최초로 입술을 열기 전 빛과 어둠이 한데 뒤엉킨 채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그것이 침묵이다. 깊은 동굴이 빛을 삼켜 감추어버리고 있는 상태다."
---p.32
 
시인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발표하고 나서 <두이노의 비기>를 쓰기까지 10년 간의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릴케의 침묵은 단순한 언어의 부재가 아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침잠해 있을 때가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이다. 침묵이 스스로 넘치고 범람하지 않은 한, 함부로 입술을 열어 외쳐서는 안 된다."
---p.93
 
동서양의 철학을 통해 깨달은 사유를 풀어 낸 저자의 전작과는 달리, 이 책은 이러한 내면으로 향하는 깊은 침묵 속에서 끌어 올린 진정한 삶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수많은 사례와 인물이 나온다. 무의 형상화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서로가 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인용과 인류 공통의 경험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서 시작한 글쓰기가 아닌 듯. 릴케처럼 터져나오기 전까지의 침묵을 받아 적으며 휘갈려 써내려 간 글은 문학과 철학의 초보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버거움이 있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며, 가장 원초적인 인간을 볼 수 있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에 빗대어 종종 표현되는데, 읽는 도중 '누구였더라, 어떤 상황이었었지?'를 고통스럽게 기억해내야 하기 때문에 저자의 느낌과 한 번에 소통하기가 힘들다.
물론, 앞뒤 전후를 살피며 떠올릴 수는 있지만, 섬세한 감정과 순간을 포착해 표현해 낸 저자의 감상을 온전히 공유하기에는 내 발걸음이 너무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보자용 책처럼 앞 뒤 설명이 들어가다 보면 감정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겠지만, 침묵과 함축을 통한 공명의 공간 확보를 위해서 필요했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깊게 공감하기 힘든 독자는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저자의 글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짧고, 쉽다. 수식어구가 별로 없는 그의 글은 쉽게 읽혀 내려간다. 그럼에도 글이 빨리 닿을 수 없는 것은 어려운 형식의 글이 아니라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깊은 곳의 이야기들. 시간, 삶과 사랑...그리고 예술.
 
단순해질수록 정신은 풍요로워진다. 깊은 침묵 속에 집중한 이 세 가지의 주제는 우리 태초의 감정을 건드린다. 오래 전에 남겨 놓은 선비의 글들은 달빛이 드리워진 고요한 수면처럼 숨막히는 정적의 순간을 그대로 전해 준다. 그리고 함께 그 순간을 사유하게 한다.
 
석양은 맑은 시냇물 다리 위로 내려앉고
낙엽은 떨어져 가을 가는 길을 채우네.
나그네 가는 길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데
말은 차가운 시냇물에 그림자 떨구며 건너고.
 
"그래, 이 한 편의 시를 얻기 위해 그토록 긴 방랑이 필요했던 것인가 보다. 이 시는 이제 보니 너를 위한 시였구나. 이제 됐다. 이걸로 내 생은 충분하구나. 그만 가자꾸나." --- p.75
 
출세와 부귀영화에 대한 갈망을 접고,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방랑해야 했던 어느 이름없는 선비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긴장감 넘친다. 안타까울 수도 있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시간과 삶, 예술의 의미와 번뇌가 그대로 담겨있다.
 
 
삶이든 예술이든, 시간이든...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입을 닫고 침묵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자는 이 하나의 근원적인 '본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전방위적인 접촉을 했다. 결국 다시 돌아와 '침묵'으로 마무리한다. 길었던 그의 긴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
 
"신비주의자들은 침국을 숭배하고 언어를 금했다. 그 결과 침묵을 뜻하던 단어 mysticos가 신비mystery로 바뀌었다. 밤은 사회적인 모든 것을 침묵시킨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 자정이 넘은 시간의 대지에는 오직 깜깜한 어둠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우리가 여전히 밤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밤의 어둠만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진짜 얼굴을 되찾아주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아닌 얼굴을. 타자로 변해버린 자기가 아닌 진짜 자기를. 거추장스런 옷 대신 벌거벗은 진짜 육체를.
벌거벗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들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사회인으로서의 역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길고 오랜 세월을 야생의 동물로 살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 p.275
h******4 2013.1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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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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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볼거리, 들을거리, 읽을거리로 인해 현대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엇을 어떻게 왜 보고 듣고 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남들이 보고 듣고 읽고 이야기하니까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유없이 동참하는 모습이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찾는 마지막 발악처럼 보여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갈수록 깊이 없는 가벼움과 조금의 침묵도 참지 못하는 지속적인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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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볼거리, 들을거리, 읽을거리로 인해 현대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엇을 어떻게 왜 보고 듣고 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남들이 보고 듣고 읽고 이야기하니까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유없이 동참하는 모습이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찾는 마지막 발악처럼 보여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갈수록 깊이 없는 가벼움과 조금의 침묵도 참지 못하는 지속적인 소음과 현란한 빛만을 찾아가는 현대인들은 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왜 자신을 잃어가고 있을까?
왜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왜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을 추구할까 
왜 조금의 다름에 대한, 또는 새로움에 대한 불안함이나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스스로의 내면의 참모습 찾기를 무서워하는 것일까 
 
"우리는 고독은커녕 외로움조차 견디지 못한다. 자기 자신과 자발적으로 마주하지 못한다. 끊임없는 소음, 수다, 볼거리들, 먹을거리들의 어지러운 소란 속에서 자기를 던져 넣는다.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외로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심심함, 권태로 곤두박질쳐버리기 때문이다." - P. 232.
"오늘날 우리가 침묵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세계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형이자 생성의 근거인 침묵을 상실했다는 것은 세계의 상실이자 삶의 상실이며, 그것은 곧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킨 결과의 생생한 표식인 것이다." - P. 239.
 
릴케의 침묵은 저자가 오랫동안 자신의 삶속에서 고민하며 숙고해온 시간과 이야기, 글쓰기와 침묵, 그리고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 책이다.
스스로의 삶에서 겪은 고통과 어려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의 오랜 고민과 침묵으로, 삶의 여러가지 주제들에 대해 저자가 깨달은 것들을 역사속 많은 인물들과 작품들의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불멸의 글쓰기 - 시간과 이야기'에서는 시간과 이야기의 영원성, 그리고 글쓰는 이의 내면의 깊은 고민과 성찰이 불멸의 작품을 남긴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2'잃어버린 사랑의 미학'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3', 내가 존재하는 순간들'에서는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와 존재를 느끼는 순간들에 대해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시간의 풍경 속에서 명멸하는 덧없고 속절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존재하기, 그것은 사라지는 방황이며 사랑은 가혹한 고독의 내면성이다. 글쓰기는 무한히 길게 잡아 늘여진 침묵하는 불면의 밤이다." - P. 5~6.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의 참된 목소리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문학의 기원이자 글쓰기 최초의 문장이다." - P. 23.
 
저자는 왜 릴케를 끌어들였을까 
그에게서 왜 침묵을 찾았을까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릴케의 삶 자체가 젊은 시절의 뜨거운 열정에서 말년의 자신의 내면의 깊은 성찰과 존재의 깨달음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릴케 말년의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침묵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삶과 예술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와 삶의 내면적이고 상징주의적인 비약으로써 표현되는 예술. 예술이 직접적인 삶의 표현이 되고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 P. 80.
 
너무나 많은 글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희망한다.
그 중에서 내면의 오랜 성찰을 통해 나온 작품들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모든 작품들이 작가의 삶과 고민이 녹아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의 기억속에서 오랜 시간 남겨질 작품은 얼마나 될까라고 묻는다면 그 수는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작가 스스로는 고민했을지 모르지만 읽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리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보다는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는 많은 글은 읽고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마음의 소리를 써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가볍고 짧은 생명의 글보다는 오랜 시간 우리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글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예술에는 진보가 없다. 장소에 따른 혹은 시대에 따른 우열도 없다. 각기 다른 예술세계, 다른 삶들만 있을 뿐이다. 다른 삶은 다른 예술을 낳는다." - P. 81.
 
"책과 독서는 인간이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다운 자유를 위해 일차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나머지는 물론 개인들의 자유롭게 열린 상상력과 사유의 몫이다." - P. 262
l*******8 2013.1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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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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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원래 생략과 여백의 예술이라고 배워 왔다. 꼭 있어야 야 할 말만으로 글을 고르고 골라서 시를 지으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시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말들 중에 귀한 말들을 고르기 위해 많은 시간을 고투하며, 심지어는 불면의 밤까지 낮을 삼고 그 말들을 찾고 또 찾는 작업을 하는 것이리라. 이 책 제목, [릴케의 침묵]을 보며, ‘주여 때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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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원래 생략과 여백의 예술이라고 배워 왔다.

꼭 있어야 야 할 말만으로 글을 고르고 골라서 시를 지으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시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말들 중에 귀한 말들을 고르기 위해 많은 시간을 고투하며, 심지어는 불면의 밤까지 낮을 삼고 그 말들을 찾고 또 찾는 작업을 하는 것이리라.

이 책 제목, [릴케의 침묵]을 보며,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로 시작되는 라이너 마리어 릴케를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릴케는 1910년 [말테의 수기]를 발표하고, [두이노의 비가]를 쓰기까지 10년간 침묵과 고뇌의 기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침묵은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으로 충만한 침묵이었고 규정한다.

저자는 말한다. [고요한 침묵 속에 침잠해 있을 때가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이다(93페이지)]고 정의한다.

또한 릴케가 10년 동안 침묵해야만 했던 것은 글쓰기와 언어의 원칙인 침묵에 대한 진지한 헌신 때문이었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존재들의 참된 목소리는 침묵이며, 이는 문화의 기원이며, 글쓰기의 최초의 문장이라고 한다.

저자는 침묵이 스스로 말을 걸어 올 때까지 침묵하라고 말하며, 지나친 형용사의 사용은 혐오스러운 감상주의로 갈 수 있음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이가 필요한데,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한 그루의 나무와 그 나무를 의지하고 사는 미생물이나 벌레나 짐승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또, 독자들은 그 책을 읽으며 한 번씩 죽고, 다 읽은 후에는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한다.

또,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신이 행한 천지창조의 반복이며 창세기의 재구성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이 한 권의 책은 천지를 창조하는 일에 동참하는 과업이며,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엄청난 영향력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나는 지금껏 책을 읽으며, 이런 의식과 중요성을 알고 읽은 적이 없다.

그저 단순하게 지식과 간접 경험을 얻는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책을 대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이토록 치열하게 쓴 작가들에게도, 많은 고귀하고 값진 것들의 대가로 얻은 책에게도 엄청난 실례와 무례의 잘 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불면의 글쓰기-시간과 이야기, 두 번째는 잃어버린 사랑의 미학, 세 번째는 삶, 내가 존재하는 순간들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것으로 추천한다.

그런 특별한 계획이 없더라도, 그저 한 권의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h*******0 2013.12.1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서평] 릴케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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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진실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우리는 고요한 내면의 세계로 잠시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때까지 글을 쓰는 작법서를 많이 보았지만, 침묵의 글쓰기라니! 진실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는 침묵하는 글쓰기라 그래서 상당히 호기심이 일었다. 시각장애인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전쟁. 시력을 잃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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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진실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우리는 고요한 내면의 세계로 잠시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때까지 글을 쓰는 작법서를 많이 보았지만, 침묵의 글쓰기라니! 진실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는 침묵하는 글쓰기라 그래서 상당히 호기심이 일었다. 시각장애인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전쟁. 시력을 잃고 나서 <실락원>을 쓴 존 밀턴. 사건에 감추어진 비밀은 내면의 통찰, 침묵하는 것을 통해 알수 있다고 한다. 1부에서는 시간과 이야기, 2부에서는 잃어버린 사랑의 미학, 3부에서는 삶, 내가 존재하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침묵, 고독 속에서 글쓰기와 사랑,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몇몇 흥미로운 페이지가 많았지만, 2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2부를 이야기 하기 전에 이 책의 제목인 릴케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하겠다. 릴케는 10년가까이 은둔하며 침묵했던 시인이었고, 4년 반동안 무려 40여 곳을 돌아다녔다.

 

그의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이었다. 시련을 시련답게 만드는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으로 충만한 침묵이었다. - p.92

 

 릴케의 침묵은 단순하게 우리가 생각하던 침묵이 아니었다. 그의 침묵은 좀 더 시간의 종말, 삶의 종말인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심연처럼 절대적 침묵의 공간이고 소멸과 죽음, 삶과 생성 이라는 조금 복잡한 침묵이었다.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글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아무튼 릴케의 고뇌는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좀 더 심도있는 고뇌의 사투를 계속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 더 깊고 깊은 생각, 개별성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에 도달한다고 한다. 불면의 글쓰기. 나도 밤에 글쓰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어둠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적막함. 그것은 심연의 내면과 닮았기 때문일까? 이 책 속에서는 모든 불면의 밤들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밤이라고 한다. 그 밤과 불면의 고통, 고독, 침묵 속에서 우리는 불면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쉽게 적힌 글은 쉽게 읽힌다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고뇌하고 침묵하며 써야 한다.

 

혼자만의 고요한 침묵과 고독 없이 영원한 현재의 천국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부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면, 2부에서는 좀 더 쉽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다. 상사병에 빠진 아폴론, 다프네, 에로스, 그리스 신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에로스의 화살과 사랑의 묘약을 대체하는 낭만적인 상징물을 만들었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한 권의 책과 편지는 암컷 공작을 유혹하기 위한 수컷 공작의 아름다운 꼬리 장식물이라고 칭했다. 그런 아름다운 유혹인 책과 편지가 요즘 시대에는 거의 없다. 메일의 발달과 카톡의 발달로 손편지를 거의 받아보기 힘들다. 우편함에는 손편지는 없고 돈을 내라는 청구서만 득실거리고 있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손편지를 쓰고 사랑을 노래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줍음의 미학편도 인상 깊었다. 추억 속의 그녀의 수줍음. 수줍음으로 망설이던 입술. 하지만 그런 수줍음이 어느 순간에는 우리 삶 곳곳에 대담함과 뻔뻔스러움으로 변했다.  이 부분에서 롤랑 바르트, 베르테르, 단테의 신곡 이야기가 조금씩 나온다. 수줍음은 욕망을 감추는 것. 감춤으로 욕망을 더 강하게 드러내는 것.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수줍음의 의미를 전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수줍음의 단어 하나로도 이렇게 깊게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저자도 릴케의 침묵을 몸소 느끼고 행동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마다 상당한 고뇌와 깊이가 느껴졌다. 그래서 가볍게 이 글을 읽으려고 하는 분한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책이다. 하지만 총 3부로 되어있지만, 각 챕터마다 길지 않아 분량의 압박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 중에 가볍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깊이 남을 책을 쓰고 싶다면, 생각의 깊이를 얻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다. 나역시 이 책을 읽고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한 번 읽고 완전히 책을 습득할 수는 없지만,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볼 생각이다. 이 책만 읽었는데도 지금보다는 한층 깊이가 깊어 진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깊이를 원한다면 스스로 침묵하고 고뇌해 자신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v***o 2013.12.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