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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책 #하리뷰 #에세이 ![]() 《자두》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소설가 이주혜 첫 산문집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빛이 되어준 존재들을 향한 사랑과 우정과 연대의 마음 #눈물을심어본적있는당신에게 #이주혜 #에트르 ![]() 이주혜 작가는 <누의 자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누의 자리에서 느꼈던 덤덤하면서 단단한, 그런 다정한 느낌은 산문집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단편 <골목의 근태> 속 뜨개방은 산문집 프롤로그에서도 등장한다.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가 밝은 빛을 발견하고 가까이 갔을 때 발견하게 되는 뜨개방, 그 안에서 여성들이 있다. 낯선 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뜨개질을 하는 그녀들은 곁에 내어주고 어느새 함께 뜨개질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이 이주혜 작가가 추구하는 여성 연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뜨개질하며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여성들. 어두운 골목길 따스한 불빛의 뜨개방. 함께하는 공간과 함께 만들어가는 뜨개.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풀어낼 수 있게 된다. 이미 작품에서 여성 서사를 풀어내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우리여서 슬프고 외롭고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다. 할머니부터 어머니를 거쳐 함께해온 수많은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기쁨과 분노의 눈물을 흘려온 사람들, 그중에서도 여성의 눈물을, 나 자신의 눈물만이 아닌 타인의 눈물까지도 껴안아주는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과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마음, 남의 행과 불행을 제멋대로 짐작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먹먹하고 뭉클해지는 순간들이었다. 마흔이 넘어 번역일을 시작하고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 이주혜 작가의 삶은 쓰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우리가 지나는 길이 어둡고 외로운 길인 것만 같아도 작가의 글이, 소설이 환한 빛을 내며 우리에게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길을 잃지 않도록, 두려움과 외로운 시간을 지나 빛을 따라오라고. <책 속 좋았던 문장들> P. 45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깨진 거울을 겁내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 화환처럼 무지개를 걸어주고 싶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내느라 오늘도 모진 애를 쓰고 있으므로. 어린 날의 낙하는 크느라 그런 거라지만 오늘 우리는 끝내 추락하지 않기 위해, 기어이 생존자가 되기 위해 낚싯바늘 몇 개를 아래턱에 매달고도 숨을 쉬고 있지 않은가. P. 50 산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의 도움을 거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림자 노동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상기해야 한다. 내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에 타인의 이름을 지우지 않는 일도 포함됨을 알아야 한다. P. 85 이름은 식별과 호명의 기본 수단이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건 말 그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우선 정확한 명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왜곡과 혐오를 목적으로 하는 멸칭은 이름이 될 수 없다. 첫 이름이 정확하다면 이제 별명의 차례다. 정확함이 이름 붙이기의 기본이라면 이름 바꾸기의 전제는 애정이다. 오직 애정으로 붙이고 또 붙인 이름만이 길어질 수 있고, 우리는 마음을 다해 긴 이름을 부르는 수고로움을 자처할 것이다. P. 120 어쩌자고 이 여성들은 삶을 불태워가면서까지 문학에 닿기 위해 노를 저었을까? 여성이라는 신분, 병자라는 처지, 사랑조차 족쇄가 되었던 시대를 살아갔던 이 여성들이 유일하게 자유로웠을 때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느끼면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글쓰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P. 175 정체성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부여받은 이름이 아니라 내가 찾을이름이라고. 그러니까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내가 원한 적 없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물정 모르는 여대생‘이었다가 ‘만만한 혼자 사는여자‘였다가 ‘애 딸린 아줌마‘가 되었다. 그런 이름들은 나의 어떤 부분을 제멋대로 확대해 전시하는 폭력적인 돋보기같았다. ‘작가‘나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붙인다고 해서 나의 모든 면이 제대로 조명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가 원한 온전한 정체성이 아니었다. 내가 ‘작가‘로만소개될 때 내 안의 ‘애 딸린 아줌마‘는 다쳤다. 내가 볼품없는 중년 여자‘로 호명될 때 ‘읽고 쓰는 사람‘은 어둠 속에 갇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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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여자는 모두 생존자라고 했던가. 이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고 싶다. 엄마가 된 여자는 모두 생존자다. 그러므로 고통과 기쁨이 범벅이 된 모성의 양가성을, ‘생명을 젖으로 빨아대는’ 엄마 됨의 분투기를 증언할 때 엄마가 된 여자는 모두 쓰는 사람이다. 이주혜의 소설을 읽고 에세이도 궁금했는데 좋다.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