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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는 「일간 이슬아」를 꾸준히 발행하며 ‘메일링 서비스’로 주목받았으며,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꾸준한 인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놀람’을 만들고 있는 작가다. 그가 열한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소설인 『가녀장의 시대』로 또 한 번의 놀라움을 선사한 논픽션 소설이다.
그의 에세이집 『심신 단련』을 읽어서 내용이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 흐름의 맥락에서 쓴 소설이라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정신력이 탄탄한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통해 효와 삶에 대해서 ‘조기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은 부모라고 말하고 쓰기도 하는데 이 소설책에서는 고집스럽게 ‘모부’라고 쓴다. 이슬아가 지칭하는 모부와 함께 ‘낮잠 출판사’에서 근무한다. 대표는 이슬아, 정식 직원은 복희씨, 비정규직 웅이씨가 있다. 실제로 ‘헤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엄마와 아빠와 함께 일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311P) “길고 뿌리 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족 이야기만큼이나 가족으로부터 훌훌 해방되는 이야기 또한 꿈꾸고 있습니다. 사랑과 권력과 노동과 평등과 일상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을 듯합니다. 이 공부를 오래 할 수 있도록 길고 긴 세월이 제게 허락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밝혔다.
매일 요가를 하고, 야식은 먹지 않는다. 엄마에게 배울 것을 권유하며 요가를 함께 다니고, 훌라 댄스 학원도 다니도록 한다. 수고한 일들에 대한 수당을 철저히 지급한다. 식사 준비나 김장, 된장 담기 등 출판사와 숙소가 같은 곳이지만, 근무 시간에 서로 존댓말을 쓰며 존중한다. 아빠랑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은 쿨하게 그렇게 산다.
가부장이 아니다. 딸이 살림을 일으키고 출판사의 사장이고, 모부가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권은 딸에게 있다. 여자가 가정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녀장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희생을 강요받으며 사는 것이 이 땅의 태어난 여자들의 오랜 숙명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여자가 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고, 남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 호주제도 폐지가 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부부가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는 조사에서 2010년에는 남성 31.2%, 여성 42.2%가 찬성했는데, 2020년도에는 남성 57.9%, 여성 67%로 가족 구성원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었다고 한다.
「부엌에 영광이 흐르는가」에서(228P) “새삼스레 슬아는 미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민망함이 앞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때로 너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라고 적었다. 매일 삼시 세 끼를 준비하는 엄마의 수고에 대한 마음이다. 그 수고를 감사하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말이다.
「헷갈리는 식탁 예절」에서(263P)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라고 말한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주머니를 부를 때, ‘이모님!’이나 ‘아줌마!’로 부르는 것은 불합리하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식당에 가면 호칭이 늘 헷갈렸는데 ‘선생님!’ 이렇게 부르면 좋을 것 같다.
「우리들의 신을 찾아서」에서(294P)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슬아에게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 중의 하나다.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속 쓸 수 있겠는가. 슬아는 자신에게도 좋은 신앙이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추앙과 문학에 관한 믿음으로 슬아는 움직여왔다. 신의 입을 빌려 기도하고 몸을 낮추듯, 슬아 역시 자기보다 먼저 살아간 작가들의 힘을 빌려 글을 쓴다.”라고 밝히고 있다. 좋은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마음과 문학을 믿는 마음, 문학을 시이라고 믿는 작가 이슬아이기에 더 믿음이 간다.
시대적인 변화상을 반영하는 것이 문학이고, 또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이 문학이라고 할 때, 이슬아는 일인 출판사를 운영하며 출판사 경영과 책 쓰기, 글쓰기 지도, 원고 마감, 운동 등 자기 관리와 일에 대한 프로 정신으로 일인 다역을 해가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글에서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함과 예절, 공평 등의 고집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자유분방함과 재미가 있어서 이슬아를 찾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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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가부장이라고 칭했다. 오래전의 통칭이긴 하나 은연중에 가부장이라는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의 손녀로 태어나 집안을 일으킨 가녀장의 시대가 되었다. 글로써 집을 일으킨 가녀장 슬아와 가녀장의 출판사에서 모부는 음식, 청소와 운전을 담당하는 직원이 되었다. 그래서 근무시간에는 직원과 사장으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존댓말 하는 건 당연하다. 아무래도 작가 이슬아와 어머니 복희, 아버지가 웅의 이름이 소설의 등장인물로 나와 에세이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코믹 가족드라마 같은 소설이었다.
‘일간 이슬아’ 발행으로 눈여겨보았던 작가였다. 매일 글 한 편씩 발행하는 성실한 작가라 여겼다. 언젠가 읽어보리라 벼르던 차에 『가녀장의 시대』부터 읽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부와 슬아의 대화가 매력적이었다. 근무시간에는 직원과 대표로, 이후 시간에는 가족으로 뭉친 그들의 관계가 좋아 보였다.
전업 작가로 사는 일은 상당히 부지런해야 할 거로 보였다. 쉼 없이 글을 쓰고 강연회도 나가야 할 것이다. 계약된 출판사가 있다면 직원이 담당할 것이나, 출판사를 직접 운영한다면 일련의 작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인쇄소를 방문하여 책 만드는 작업도 지켜봐야 하고 각 서점에 배포하는 일에서부터 홍보도 직접 해야 한다.
글을 쓰는 작업은 인고의 시간이기도 하다. 정확한 시간에 글을 쓰고, 글을 오래도록 쓰기 위해서는 운동도 필요하고 함부로 먹을 수 없다. 슬아는 일주일에 세 번 요가를 하고 직원의 건강도 중요하기에 엄마를 요가원에 등록해 함께 다닌다. 또한 강연 때문에 출장을 가게 될 때면 운전해주었던 웅이에게 회사 카드를 내주면서 맛있는 음식을 사서 드시라고도 한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복지 차원의 보너스를 챙겨주는 등 대표로서 인색하지 않다. 예를 들면 밥상에 자주 올라오는 된장을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출장을 가야 할 때 특별 보너스를 챙겨준다. 노고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한때 아이들의 글쓰기 선생님으로 이름을 날렸던 슬아는 지금도 주말이면 아이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한다. 자유롭게 떠들다가 하나의 주제를 주고 그것에 대하여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글 쓰는 작업은 쓰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백지에서 글자 한 자도 써지지 않는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건강을 챙겨야 하므로 골목길 산책은 필수다. 많은 작가가 허리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작업해야 하므로 글을 쓰기 전, 후에 걸어야 한다. 산책을 하며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막히지 않는 법이다.
고정된 관념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대로, 생각했던 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라 우겨도 스스로 틀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도 알았다. 가부장 제도권에서 열한 명의 식사 준비를 했던 엄마를 구한 것처럼 보여도 세 사람분의 식사 준비는 여전히 계속된다. 대표와 직원으로서 분리하는 게 당연하지만, 근무시간 이후에도 복희 씨에게 의지하지 않았는가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겠다.
그럼에도 따뜻한 글이었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무의식적 차별하지 않았는지 질문을 건네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직접 부모님과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경험에서 나왔으며, 익숙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으로 보여주는 가족드라마 형태다. 이제, 매일 고통에 가까운 작업 과정을 거쳐 발행했을 『일간 이슬아』를 만나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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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VIII / 이야기장수 1번째 리뷰] 대학생 시절에 나는 한 살 많은 누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남자니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고 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운동이 '페미니즘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나에게 '넌 남자니까' 본질적으로 페미니스트는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하는 누나의 말투가 '네 뜻은 가상하다만'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남자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이, "감히 남자 주제에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반장'을 지지했던 나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지금도 논술쌤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인권'을 향상시키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거나 열성당원처럼 광적인 집회, 시위에 참여해 강성한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고, 약간의 후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의 이런 모습에 여성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고, 남성들은 '역차별' 받는 게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툴툴거린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차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차별'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서는 '차별'을 정당화시킨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그런 차별을 하겠냐면서 나보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다. 안 그럴 것 같다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여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찌찌가 그대로 존재감을 뿜뿜하는 의상을 입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물어보라. 대한민국 사람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여성의 찌찌노출은 안 된다'면서 공공장소에서는 모든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를 어기는 여성에게는 '경범죄'를 적용해서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높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보수적인 남성들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보수적인 여성들도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 그럼 진보적인 남성들은 '괜찮다'고 말할까? 아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는 여성이 찌찌를 노출한다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다가 '자기 엄마'가, '자기 아내'가, '자기 애인'이, '자기 딸'이 찌찌를 드러내는 '노브라 의상'을 입으면 질색팔색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보적인 여성들은 '브래지어 착용'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며 그나마 논리적인 찬반의견을 내놓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브래지어'는 왜 꼭 착용해야만 하는가? 일일이 이유를 다 밝히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노브라는 너무 야해서', '성범죄를 유발시키므로', '그냥 부끄러워서', 그리고 '그냥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라는 답변이 많았고, 그 다음으로 많은 이유는 '어릴 적부터 착용을 해서 안하면 오히려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런데 '브래지어 착용'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또 다른 이유다. 남자의 찌찌는 부끄럽지 않은데, 왜 유독 여성의 찌찌만 부끄러워해야 하느냐로 시끄럽기 때문이다. 남자는 찌찌가 돌출되는 의상을 입든, 그냥 벗고 노출하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 편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남성이 찌찌 노출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남성들 가운데에도 '여성형 유방'을 갖고 있는 분들은 찌찌 노출 뿐만 아니라 상의 탈의조차 꺼리는 분들도 많다. 이들조차 '남자답지 못한 가슴'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여성스런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왜 '가슴(찌찌)'에 대해 이런 차별이 생겼냔 말이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도 '개인의 성향'일 뿐이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브래지어 착용'을 사회적으로 강요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냥 '개인의 성향, 자유의지'에 맡겨두면 된다. 오히려 '여성의 찌찌'만 보면 거시기가 꼴려서 성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야만성'에 대해 사회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런 논의를 공론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의 몸'을 옭아매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식의 문제로 접근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남녀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여성의 몸'을 속박하는 방향, 즉 '브래지어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심지어 '남성의 성욕'은 원래 인간의 본능이라면서 두둔하며 성범죄에 대해서도 '여성에게만 강제적인' 대처방안들을 내놓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페미니즘 논쟁'이 이 책 <가녀장의 시대>와 무슨 상관이냐고? 이슬아 작가의 경험담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남의 찌찌에 상관 마'라는 소제목이 나와 있기에 화두를 던져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이라고 표현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한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을 보통은 아빠가 담당하기 마련인데, 이슬아의 집에서는 '엄마'도 아니고, 딸인 이슬아가 '가장의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상당부분이 '허구'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만, 어쨌든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가 직접 겪은 경험에 비춰서 쓰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슬아 작가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기에 '팩트체크'도 할 겸 이 책에서 나오는 [낮잠출판사]도 검색해보았다. 하지만 찾을 순 없었다. 아마도 이슬아 가족이 직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가 있긴 할텐데, 그게 '낮잠'은 아닐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소설을 '그 잡채'로 즐기기 위해서 더 자세한 검색과 체크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가족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뭐가 중요한 것이냐? 이 소설에서 나오는 모든 상황이 그저 자연스럽게 읽히면 된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자가 사장이자 가장으로 등장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가 되면 된다. 이런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근거이고, 이러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아직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문제'를 발견한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작 '문제'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되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 진정 문제이고, 이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인식을 빨리 바로 잡지 못하면 크나큰 사회 갈등을 유발할 수 있으니,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녀장의 시대>를 아직도 '문제작'으로 인식하는 독자가 있다면 딴죽을 걸어주시길 바란다. 내가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뜯어고쳐 주겠다. 대한민국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문제로 삼았던 <82년생 김지영>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이 책도 그런 식의 비난을 하며 문제를 삼는 독자분들이 있다면..아니, 없을 것으로 믿는다.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대전제를 이해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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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라는 책 제목을 보자마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부장’을 대체하는 어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상했다. 책을 다 읽고난 후의 나의 감상은 집안의 가장이 딸로 대체되었을 뿐 가부장의 비공식적인 규율은 ‘가녀장의 시대’에도 반복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는데, 바로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이런 문장이 있다.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시대와 문화에 대해 고민하는 이슬아 작가가 가부장제의 폐해와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보수없는 집안일은 당연히 엄마가 하고, 권위를 독차지한 가부장 아빠, 집에서 우선순위가 아닌 딸들, 이런 시대를 뒤로 하고 새 시대가 도래하길 바랐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복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가족이 겉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스템을 전복시킨 형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 흐르고 있는 관계의 역동은 가부장 위계 시스템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가녀장은 가족 중 가장 돈을 많이 벌고, 모든 구성원들의 경외를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직원들은 가장의 눈치를 봐야 하며, 가녀장은 직원들을 ‘놀리고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그녀가 가끔 선을 넘는 것은 적절한 보수와 보상을 통해 ‘입막음’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렇게나 직원을 잘 챙기는 훌륭한 나 자신’을 칭찬하는 달콤한 나르시시즘 타임 ㅎㅎ
이슬아 작가가 미디어에도 많이 노출이 되고 본인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 내용들이 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이 미러링을 하려는 의도인지, 정말 ‘슬아’라는 주인공이 자신이 가부장과 다르다고 믿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더욱 헷갈렸던 것 같다. 비꼬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이렇게 믿고 있는걸까?
개인적으로 이 지점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뇌가 퇴화된다는 심리학 연구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그룹이든 위계가 생기고 권력과 지위과 높은 사람이 정해지면 (그것이 외부에서 정해준 것이든, 그룹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든 간에) 권력을 잡은 사람의 뇌와 사고방식, 행동 패턴이 달라진다고 한다. 더 높은 지위와 혜택을 누릴수록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은데, 우리 가녀장 슬아도 자기애와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발산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한편, 어쩌면 우리 안에 여성에 대한 엄격한 기준 때문에, 여성(딸)은 그래도 아무리 가장이어도 공감능력은 갖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님을 저렇게 대하는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내용들에 가끔 갸우뚱한 지점들이 있긴 했지만, 인간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슬아가 밉지는 않았다. 글이 재미있어서 하루이틀만에도 술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책을 함께 읽은 친구들과 감상을 주고받는 것이 특히나 재미있었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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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이라는 말이 익숙한 어린시절을 지냈고 지금 역시 '가부장'적인 남자와 살고 있다. 실제로는 얼마전까지는 '가모장'의 가족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주체에 따라 살아간다면 실제로도 '가녀장'의 가족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딸이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가장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한 마디 할라치면 '돈 버는 유세'라는 말로 기를 죽이 시대를 살고 있다. 워킹맘으로 가사와 육아, 직장 일을 병행하며 정말 억울할 때가 많았고 지금도 많다. 제대로 생활비 한 푼 벌지 않으면서 가사와 육아를 선택하는 그를 보며 내게 결혼이란 제도는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며 여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합법적이지만 불합리한 제도로 자리잡았다. 또한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낳아서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을 효도라는 이름을 붙여 의무로 부여한다. 더 우스운 것은 분명 내가 더 부모를 부양하는 일에 꾸준했고 결정적이었는데 아들에게 효자라는 타이틀을 지우는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부모 세대에 꾸준한 의구심이 들었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들이 쌓여가곤 했다. 비단 나만이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딸과 엄마는 애증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보다 9년이나 늦게 태어난 '이슬아' 작가는 내가 신세한탄만 하고 있을 때 현재 가족 제도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하지만 전혀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점들을 소설 속에서 유쾌하게 반박해나간다. '가녀장' 이슬아가 아버지 웅이와 어머니 복희와 가족의 형태에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형태를 더하여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부모로서 제공하는 노동력에 정당한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자식에게 얹혀사는 부모가 아닌 가족과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노동자로서 역할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모부'이다. 우리가 흔히 엄마아빠라고 부르는데 한자로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비 부'를 먼저 적는다. 엄마의 역할이 가정의 형태를 유지를 하는데 결정적인데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부모'라는 물로 양친을 표현해왔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유지해온 가족 형태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렇게 꼬집는 이슬아 작가의 위트가 참 맘에 든다. 5~6년 전쯤 전업주부의 노동력을 약 4천만원의 연봉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다면 현재 전업주부의 연봉은 4천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14년~15년 차의 직장인이던 나의 연봉과 맞먹는 연봉임을 생각할 때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업주부의 노동을 너무 하잘것 없고 하찮게 여긴다. 대체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그런 어머니의 노동력에 물질적 가치를 부여하여 고용하는 살림 해본 '가녀장 이슬아'의 생각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딸을 가장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에 관한 댓가를 지불하는 고용주로서 존중하고 딸이자 고용주인 '슬아'에 대해 섭섭해 하지 않는 웅이와 복희에게서 어떤 어른으로, 모부로 나이들어가며 어떻게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해나가야 하는지 모델을 발견한다. 한편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부모의 도움 없는 것에 대해 서운해하고 친정 덕을 보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것을 깊이 반성한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가정이 해체되는 현대사회에서 '가녀장의 시대'에 슬아와 웅이와 복희 그리고 웅이와 복희의 모부들과 연결된 가족의 모습은 보급이 시급한 가족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간 이슬아를 발행하는 이슬아 작가의 성실함과 우직함에 그리고 직업 의식에 존경을 표한다. 꼭 먼저 태어나야만 배울 것이 있는 것은 아닐거다. 작가라는 직업으로 한정지었지만 사실 많은 직장인들의 애환과 부담을 가녀장 이슬아에 투영하여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이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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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를 잘 아는 독자라면 알 수 있다. 이슬아 작가는 소설도 이슬아답게 쓴다는 것을. 그렇다. 이슬아 작가의 첫 장편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이슬아 작가다운 소설이다.
《가녀장의 시대》의 등장인물부터 모두 낯익다. 가녀장이자 낮잠 출판사의 대표 이슬아 작가, 이슬아 작가의 모부이자 낮잠 출판사의 직원인 복희와 웅이. 그리고 반려묘 숙희와 남희.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드는 이 소설은 작가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캐릭터가 매우 생생하다.
업무 시간에는 대표와 직원 모드로, 업무 외 시간에는 모부 사이와 가녀장의 체제 사이를 오가는 낮잠 출판사. 그들의 일상이 시트콤처럼 각양각색으로 펼쳐진다. 이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소설 속 자기 자신을 가정을 책임지는 대표와 작가로서의 위엄을 펼쳐지다가도 한순간에 자신을 무장해제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쉴 새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 책이 나오는 인쇄기 앞에서 최고의 책을 만들기 위해 수십번 인쇄기를 돌려 원하는 색상을 출력하게 하는 열정. 아.. 역시 가녀장은 다르구나 하며 애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도 복희와 웅이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고 낮잠을 자는 이슬아 작가를 보며 복희와 웅이는 이슬아 작가의 전작이자 베스트셀러 에세이인 <부지런한 사랑>을 인용해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무장해제시킨다.
자신의 가사노동이 정당한 보수를 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사는 듯한 복희, 무거운 가부장을 내려놓고 직원이자 모부의 삶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웅이. 소설을 읽다보면 마치 이 가족의 진짜 모습이 이러지 않을까 생각하게 할 만큼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가족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지만 은연중에 상처를 주기 쉽다. 상대방이 베푸는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서로를 섭섭하게 한다. 소설 속 낮잠출판사 또한 화기애애하지만 완벽할 수 없다. 각자의 일에 치중하다보면 상대방의 수고를 몰라줄 때도 있다. 이러한 경우 해결책은 출판사답게 책으로 서로의 마음을 위로한다. 책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말하고 당신이 있어 내가 있을 수 있다며 고마움을 전한다.
《가녀장의 시대》는 어떤 권위도 또는 위엄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서로의 모습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존중한다. 때로는 모부의 마음으로 걱정되기도 하지만 가녀장이기에 존중해주고 가녀장 또한 동등한 직원이자 모부로서의 생각과 사생활을 지켜나가며 아웅다웅 살아간다. 서로의 존재가 너무 당연하지만 때때로 이들이 영원할 수 없다는 자각 앞에 더욱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이들의 모습은 애틋하기까지한다.
소설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 소설이 진행중임을 알 수 있다. 이슬아 작가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복희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웅이는 청소기를 밀며 청소를 하고 있겠지. 이슬아 작가답게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 역시 이슬아 작가다운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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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의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면서 청소 노동자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은 머릿수건, 검은 작업복을 입은 남녀 청소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분주하고도 조용하였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핫플레이스에서 그들의 노동 덕분에 아주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이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 식당가의 직원들은 밝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고객들의 눈에 띄는 복장을 하면서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두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암묵적인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이 소설의 어머니의 가사노동의 가치와도 연관성을 떠올리게 된다. 가부장 시대의 여성의 노동은 놀고먹는 여자로 임신과 출산, 요리, 설거지, 청소, 빨래, 육아 돌봄 등 모든 가사 노동은 무가치로 치부된다. 현대사회는 맞벌이 시대이지만 여성은 임신, 출산, 양육, 요리, 수많은 집안일을 남편과 어떤 분배를 하고 협의했는지가 궁금해진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가사노동의 가치와 요리라는 고유성의 가치를 조밀하게 들여다보고 들추어낸다. 같은 요리이지만 누군가의 요리 솜씨는 고유성과 절대적 가치를 내포하면서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찮은 가사노동자, 하녀와 다름없는 가치로 여성의 수많은 삶과 노동을 뒷마당으로 밀어버린 것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절대적 가부장의 시대는 지금도 고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질타하는 유쾌하고 시원한 소설이다. 시원시원한 큰 파도가 되어 여름을 강타하는 장편소설이다. 모부라고 명명하는 작품의 의미, 가녀장의 의미는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 가치를 부가하는 소설이다. 가부장 시대의 관습에 아직도 길들여지고 의심하지 않고 답습하는 삶을 고수하고 있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시원한 맛을 선사하는 소설이다. 딸에게 선물하고 아들에게 선물하면서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면 좋을 이야기이다. 평등이라는 의미가 가정에 어느 정도 흐르고 있는지 둘러보게 하는 소설이다. 요리는 누가 하는지, 요리를 누구와 함께 하는지, 살림은 모두가 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공평하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지대한 목표가 되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안락하고 누군가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불공평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우리 사회는 얼마나 불공정하고 불평등한지 차분히 둘러보게 하는 소설이다. 마감이 있는 삶도 있지만 마감이 없는 삶에 대해서 작가는 직시한다. 누군가의 노동은 휴식과 자유가 존재하지만 누군가는 오늘도 계속되는 노동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슬아라는 딸은 낮잠 출판사의 대표이다. 그리고 직원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용한다. 월급과 상여금도 지급되며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회사이다. 수직적인 구조의 회사이지만 일반적인 회사와 다른 존중이 흐르는 회사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슬아 어머니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가난해서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하여 입학이 취소된다. 이어진 어머니의 사회생활, 결혼과 며느리의 삶이 조명된다. 수많은 여성들이 가난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는 시대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영특하지만 딸은 교육받을 기회를 잃고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을 받는 시대적 상황까지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주어진 삶에 반기를 들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던 어머니는 깊은 속내를 딸은 헤아린다. 슬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이유도 전해진다. 문학을 좋아했지만 떠나보낸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딸인 슬아는 문학을 힘껏 붙들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떠나보내는 것과 힘껏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즐거움이 뒤따른다. 힘겹고 고충이 있을지라도 좋아하는 일은 나만이 즐기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노브라를 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등장한다.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는 폭력, 선배가 후배를 향한 폭행이 등장한다. 식당 일을 하는 노동자를 향한 정확한 호칭이 없는 사회에 대해서도 직시한다. 아들에게만 집을 주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매섭게 질타한다. 잘못된 관습들을 고수하는 사회에 시원한 파도 같은 매서움을 던진 소설이다. 갑갑하게 쌓여있던 것들을 시원하게 대신 쏟아내주는 소설이라 좋아하는 작가이다. 더불어 『날씨와 얼굴』 책 내용들까지도 오버랩하면서 작가의 진중한 목소리와 라이프 스타일을 다시 상기한 시간이다. |
| 여러가지로 현실에 없을 법하지만 널리널리 평범하게 있으면 좋겠다 싶은 이야기라서 그런지 내내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흡입력 있어요.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캐스팅이 가장 먼저 궁금해지긴 했습니다. 잘 만들어지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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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님의 책은 모두 구매해 읽어보는터라 이번 가녀장의 시대 발간이 엄청 기다려졌었어요. 이미 딜리버리로 읽어보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 이슬아 작가님 특유의 신선함을 이번에도 풍성하게 느낄 수 있었던 소설 같았습니다. 가녀장이라는 시선도 독특했고 가족시트콤 같으면서도 에세이 같으면서도 소설의 느낌을 두루 느낄 수 있는.. 저는 읽는 내내 역시 이슬아 작가님 답구나 하며 재밌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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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미나고 유쾌한 이야기 속에 많은 가르침이 있어서 그걸 순간 순간 깨닫을때마다 너무 행복하다. 슬아는 숱한 거절 지시를 내린다.수락하는 일들은 그녀만의 다섯가지 주요 동기중에서 2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돈 재미 의무 의미 아름다움 중 한가지만 충족하거나 아무것도 충족이 안되면 빠르게 거절한다. 나에게도 이런 기준을 세워 모든 것들을 이고지고 살지말고 가볍고 쿨하게 살아야겠다라는 큰 가르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