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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 서울편 3 사대문 안동네 유홍준 창비/2022.10.25. sanbaram
서울의 사대문 안동네와 북한산 답사한 내용을 실은 것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이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옛날 추억을 더듬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양의 진산인 북악산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서쪽 지역인 서촌과 그 뒷산인 인왕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옛날 정취가 많이 남아 있는 북촌을 소개한다. 외국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사동의 정취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산을 소개 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은 함께 출간된 ‘강북과 강남 : 한양 도성 밖 역사의 체취’편과 앞뒤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한다. 1993년 서울시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 조사했다.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 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은 “서울시민 1,100만 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명에 불과 했다.(p.59)”고 한다. 그러니 저자 또한 서울토박이의 한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생각 되었다. 먼저 일제를 거치고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의 “후원 서쪽 칠궁과 맞닿은 곳에는 경농재와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다. 임금이 해마다 봄이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 경농재에 거동하여 각 도에서 올라온 곡식의 종자를 팔도배미에 심는 친경 행사를 치렀다.(p.34)”고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논을 팔도를 상징하는 8개로 나누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곡식의 종자를 심었다니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생각된다. 이어서 서울 사대문안 동네의 특징 중 몇몇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p.106)”고 서촌의 특성을 설명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궁이 계속 지어졌다. 그러다 그 후궁이 죽으면 폐궁되기도 하고 다음 왕들의 후궁이 들어와 살기도 하여 각 궁의 내력은 아주 복잡하다고 한다. 옥이동은 경복궁과 가까워 일찍부터 궁들이 여럿 들어와 세종대왕 후궁을 위한 자수궁, 문종의 후궁을 위한 수성궁, 정조의 후궁 경우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서촌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 좋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늦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길 역시 S자로 휘어 있어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이 섞여 살았다.(p.154)”고 한다 그런데 현재 북촌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산 것은 도심과 가까운 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북촌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서울로 이주해와 서울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을 때, 이들은 주로 충무로와 회현동 일대의 남촌에 자리 잡았다. 북촌 한옥 밀집지구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 밀집 지구의 풍경은 일제시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 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북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북촌8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촌 8경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이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p.152)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 재(灰)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p.163)” 재동초등학교는 1895년 8월 10일에 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이다. 첫 번째는 경운동의 교동초등학교로 1894년 9월에 관립교동왕실학료로 개교하여 왕실 종친과 귀족 자제들만 입학 대상으로 했으나 이듬해부터 일반인 학생도 입학을 허가했다. 북촌 고개 중에서 맹현은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북촌 8경을 거닐다보면 한옥밀집지구 옆 동네에는 금박연, 전통공예체험관, 한옥협동조합, 전통 발효공방, 누비공방, 매듭공방 등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한옥들이 많다. 이는 서울시가 한옥 30여 채를 보유하여 공공건물과 전통 공방으로 대여해준 것이다.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 매입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 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유리창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는 고서점 거리로, 뉴욕의 소호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아르바트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는 전통문화 거리다.(p.201)”라고 인사동을 소개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 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 터 인근 수송 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입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 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원을 지불했다(p.219)”고 한다. 한남서림은 1959년에 매각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명신당필방’이라는 문방사우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는 100년 이상 된 유적, 유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대신 서울시는 100년은 못 되었지만 미래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50년 이상 된 근현대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p.235)” 인사동에서 ‘서울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노포로는 통문관, 통인가게, 선천집, 수도약국 등이 있다. 민예품 가게들은 인사동길 대로변에서 밀려나 인사동 10길을 비롯한 샛길에 흩어져 있지만 인사동의 저력은 여전해서 2020년 ‘인사동 문화축제’팜플릿에 실린 민예품 가게를 헤아려보면 30여 곳에 이른다. 1980년대의 고미술상과 화랑 들이 거의 다 인사동을 떠났고 대안 공간으로서 그림마당 민이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 거리로서 인사동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동산방화랑, 선화랑, 노화랑, 관훈미술관, 백악미술관, 경인미술관, 가나아트 등 자가 건물을 갖고 있는 화랑과 전시장 들은 지금도 건재하며 미술 거리로서의 권위와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19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 전총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 거리.(p.271)” 최무규의 쌈지길 건물은 새로 인사동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관광객과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는 공간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쌈지길 건물의 기본 개념은 기존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고만고만한 가게들(70여 곳)이 최대한 많이 입주할 수 있도록 1층에서 옥상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치 500미터 길이의 인사동길을 말아 올린 것 같이 디자인해 사람들이 1,2,3,4층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25도의 낮은 경사로를 따라 편안하게 상가 앞을 걷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p.315)” 이로써 한양은 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사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 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 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추사는 무학대사비나 도선국사비라고 전해오던 것을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재발견했다. 그는 북한산 순수비 측면에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이를 두 차례 찾아와 고증했음을 다음과 같이 새겨두었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이를 통해 추사의 식견과 진흥왕 순수비의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수비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품을 옛 자리에 세워놓고 그 전말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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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 서울편 3 사대문 안동네 유홍준 창비/2022.10.25.
서울의 사대문 안동네와 북한산 답사한 내용을 실은 것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이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옛날 추억을 더듬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양의 진산인 북악산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서쪽 지역인 서촌과 그 뒷산인 인왕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옛날 정취가 많이 남아 있는 북촌을 소개한다. 외국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사동의 정취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산을 소개 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은 함께 출간된 ‘강북과 강남 : 한양 도성 밖 역사의 체취’편과 앞뒤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한다. 1993년 서울시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 조사했다.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 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은 “서울시민 1,100만 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명에 불과 했다.(p.59)”고 한다. 그러니 저자 또한 서울토박이의 한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생각 되었다. 먼저 일제를 거치고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의 “후원 서쪽 칠궁과 맞닿은 곳에는 경농재와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다. 임금이 해마다 봄이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 경농재에 거동하여 각 도에서 올라온 곡식의 종자를 팔도배미에 심는 친경 행사를 치렀다.(p.34)”고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논을 팔도를 상징하는 8개로 나누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곡식의 종자를 심었다니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생각된다. 이어서 서울 사대문안 동네의 특징 중 몇몇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p.106)”고 서촌의 특성을 설명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궁이 계속 지어졌다. 그러다 그 후궁이 죽으면 폐궁되기도 하고 다음 왕들의 후궁이 들어와 살기도 하여 각 궁의 내력은 아주 복잡하다고 한다. 옥이동은 경복궁과 가까워 일찍부터 궁들이 여럿 들어와 세종대왕 후궁을 위한 자수궁, 문종의 후궁을 위한 수성궁, 정조의 후궁 경우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서촌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 좋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늦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길 역시 S자로 휘어 있어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이 섞여 살았다.(p.154)”고 한다 그런데 현재 북촌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산 것은 도심과 가까운 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북촌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서울로 이주해와 서울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을 때, 이들은 주로 충무로와 회현동 일대의 남촌에 자리 잡았다. 북촌 한옥 밀집지구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 밀집 지구의 풍경은 일제시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 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북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북촌8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촌 8경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이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p.152)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 재(灰)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p.163)” 재동초등학교는 1895년 8월 10일에 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이다. 첫 번째는 경운동의 교동초등학교로 1894년 9월에 관립교동왕실학료로 개교하여 왕실 종친과 귀족 자제들만 입학 대상으로 했으나 이듬해부터 일반인 학생도 입학을 허가했다. 북촌 고개 중에서 맹현은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북촌 8경을 거닐다보면 한옥밀집지구 옆 동네에는 금박연, 전통공예체험관, 한옥협동조합, 전통 발효공방, 누비공방, 매듭공방 등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한옥들이 많다. 이는 서울시가 한옥 30여 채를 보유하여 공공건물과 전통 공방으로 대여해준 것이다.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 매입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 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유리창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는 고서점 거리로, 뉴욕의 소호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아르바트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는 전통문화 거리다.(p.201)”라고 인사동을 소개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 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 터 인근 수송 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입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 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원을 지불했다(p.219)”고 한다. 한남서림은 1959년에 매각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명신당필방’이라는 문방사우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는 100년 이상 된 유적, 유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대신 서울시는 100년은 못 되었지만 미래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50년 이상 된 근현대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p.235)” 인사동에서 ‘서울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노포로는 통문관, 통인가게, 선천집, 수도약국 등이 있다. 민예품 가게들은 인사동길 대로변에서 밀려나 인사동 10길을 비롯한 샛길에 흩어져 있지만 인사동의 저력은 여전해서 2020년 ‘인사동 문화축제’팜플릿에 실린 민예품 가게를 헤아려보면 30여 곳에 이른다. 1980년대의 고미술상과 화랑 들이 거의 다 인사동을 떠났고 대안 공간으로서 그림마당 민이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 거리로서 인사동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동산방화랑, 선화랑, 노화랑, 관훈미술관, 백악미술관, 경인미술관, 가나아트 등 자가 건물을 갖고 있는 화랑과 전시장 들은 지금도 건재하며 미술 거리로서의 권위와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19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 전총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 거리.(p.271)” 최무규의 쌈지길 건물은 새로 인사동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관광객과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는 공간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쌈지길 건물의 기본 개념은 기존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고만고만한 가게들(70여 곳)이 최대한 많이 입주할 수 있도록 1층에서 옥상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치 500미터 길이의 인사동길을 말아 올린 것 같이 디자인해 사람들이 1,2,3,4층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25도의 낮은 경사로를 따라 편안하게 상가 앞을 걷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p.315)” 이로써 한양은 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사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 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 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추사는 무학대사비나 도선국사비라고 전해오던 것을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재발견했다. 그는 북한산 순수비 측면에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이를 두 차례 찾아와 고증했음을 다음과 같이 새겨두었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이를 통해 추사의 식견과 진흥왕 순수비의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수비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품을 옛 자리에 세워놓고 그 전말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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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빠짐없이 챙겨보는 책이다. 처음엔 다음편이 언제 나올지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때가 되면 나오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이다. 책을 손에서 놓은 지가 반년을 훌쩍 넘기면서 선뜻 책에 손이 가질 않는다. 그러던 차 근 5년만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을 대하니 아직까지는 나와 책과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의 서울편 1,2권에서 궁궐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왕실유적을 답사한 저자는 자신의 체험적 서울이야기를 3권에 담았다고 한다. 서울이 고향이라는 그는 자신이 자라고 성장했던 동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는 서울이 고향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았다. 결혼을 하면서 거주지는 서울 근교로 변했지만 근무처가 지방사업장으로 바뀌기 전까지 서울에서 생활을 했다. 더군다나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을 한 지리적 위치가 저자의 답사위치의 인근이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살았던 시기의 서울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시간의 공백은 있지만 지금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절이 아니었는지라 저자의 글에서 아련한 향수마저 느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3권에서 저자가 다루는 곳은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서촌, 북촌, 인사동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뒤쪽에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고 좌우에 서촌과 북촌, 인사동이 있으니 말그대로 사대문 안동네, 즉 서울의 구도심이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고, 현대에는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금단의 땅이 되었다가 근래에야 개방되었다. 그곳에는 문무과 시험을 치르던 경복궁 후원의 경무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이 모여 있는 칠궁, 공신들이 모여 제를 올리는 회맹단 등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 북악산 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과 함께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으로 불렸다. 북악산이 금단의 땅이었던 반면 인왕산 계곡은 곳곳에 수려한 풍광이 자리잡고 있어 조선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근현대에 들어 옛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저자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향유하는 방법에 대한 청사진이 명확히 세워지길 역설하고 있다.
서촌과 북촌은 서울의 오래된 동네로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몰려 요즘은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서촌이란 조선시대에는 서소문 정동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으나 지금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지칭한다. 서촌의 길들은 하나같이 곡선이고 적당한 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도시계획이 아니라 물길을 따라 자연스레 길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길 중간중간에는 작은 한옥들이 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엔 역사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106쪽)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반해 북촌은 조선시대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를 남촌, 북쪽동네를 북촌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한옥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한옥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저자는 근대들어 서촌과 북촌에서 살았던 많은 문인과 예술인, 정치인들을 살펴보며 마을의 변천과정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고향인 서촌마을의 이야기에는 저자의 어린시절 기억이 함께하고 있어 나 또한 답사기를 읽는 내내 먼 남쪽 고향마을을 떠올리기도 했다. 인사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꼽힌다. 저자는 출판사와 서점이 모여 있다가 한국전쟁이후 고서점거리로 부활하는 역사, 1960~1970년대 미술의 거리로 변천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그곳에서 터를 잡았던 예술계의 인사들, 그리고 그곳의 독특했던 음식점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밖에도 사대문 안은 아니지만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을 소개하고 있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 남쪽에 만경대가 있어 삼각산으로도 불린다. 북한산의 유적으로는 한양의 방위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축성한 북한산성이 있고, 중흥사, 태고사, 도선사를 비롯한 30여개의 사찰이 수많은 불교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비봉의 낡은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추사 김정희의 자취를 따라가는 답사는 유적과 그것을 찾아내고 보존하는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젊은 날 북한산을 찾은 적이 많이 있었지만 그곳의 유적에 대해 특별한 기억은 없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불변의 진리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저자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은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3권에서 사대문 안을 다룬 저자는 4권에서는 한양도성 밖을 다루고 있다. 3,4권이 동시에 출간되어 3권을 읽고 다음권을 기다리지 않아 좋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은 도통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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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편 3권은 저자의 고향인 서울 이야기다. 저자와 가까운 시간에서 먼 과거의 시간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장소와 얽혀 있는 역사와 문화를 전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가까운 만큼, 저자가 직접 부딪혀 살아 온 만큼, 더 생생하게 느껴졌고 장소에 대한 친근감이 들었다. 시리즈이 어느 권보다도 편안했고 재미있었다. 8개의 소제목으로 전하는 서울 사대문 안동네 이야기의 시작은 북악산이다.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과 청와대를 소개하고 있다. 오래 전에는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며 북악산 쪽에 놓인 청와대가 보이지 않았었다. 이 무슨 소리냐 할 수도,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존재하나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느날 멀리 파란 지붕, 청와대가 눈에 들어와서 신기하다 생각했었다. 청와대가 개방된지 꽤 되었으니 한번 가보고는 싶은데 '서울촌놈'인지라 여지껏 못가고 있다. 하여 책을 통해 보는 청와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청와대의 현대적 건물들이야 그리 궁금하지 않은데, 기록도 없고 유래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침류각과 미남불이라 불리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침류각은 사진으로 보여지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저자는 '기품이 당당하다', '품위있고 아름다운'이라고 적고 있다. 나는 왜인지 한서린 모습으로 느껴진다. '1900년 전후에 지어진 왕가의 건축이 분명하다'라는데 왜 기록도 없고 유래가 확인되지 않는지 그 불명확함이 신비스럽게 생각된다. 궁궐 물길 흐르는 곳에 지어졌던 건물이라는데 사진으로 보이는 옹골찬 모습, 기품이 당당한 모습과 기록 없음이 비밀스럽고 그래서 더 궁금하고 보고 싶다. 다음으로 서촌 소개로 넘어가는데, 지금 북촌의 젠트리피케이션과 관광객의 소란과 노상 방뇨 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1박2일에 저자가 출연해 북촌을 소개한 이후라고 주민이 말한 것을 실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서촌의 매력을 또 전하면 북촌마냥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잠시 들었다. 이 책이 22년 10월 발간이니 현재 서촌은 무사하다. TV와 도서의 차이가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촌 이야기의 마지막 백운동 소개에서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글씨로 새겨진 백운동천이 나온다. 김가진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가 며느리가 쓴 <장강일기>, 손자가 쓴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에 대한 소개를 읽자마자 바로 yes24에서 두 책을 구입했다. 지금 손에 들어와 있는데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어지는 서촌의 인왕산 소개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조선왕의 그 수많은 후궁들은 왕의 죽음 후 다 어디에 살게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왕이 죽으면 궁을 나와 옥인동에 궁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도 없는 궁에 갇혀 사는 것보다야 궁궐을 나와 사는 게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외국인 방송인 파비앙이 우리 문화유산에 그토록 관심이 많고 해박한지 몰랐다. 나의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문외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네번째로 북촌을 말하고 있는데 저자가 얼마나 북촌을 아끼는지가 글에서 느껴졌다. 외국인들까지 모두 가보는데 여지껏 가보지 못한 북촌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이 떠나는 추세라는데 미안하지만 소란스러운 관광객 사이에 끼고 싶다. 주민에게 불편과 불쾌감을 주지 않는 관광객으로서 말이다. (봉숭아학당의 맹구처럼 손 번쩍 들고) 인사동은 이 서울촌놈인 저도 가보았습니다. 화랑, 전통찻집, 조금 솥밥 등등으로 기억되는 인사동의 역사를 세세히 전해들으니 곳곳이 친숙하고 속을 들여다 보는 듯이 느껴졌다. 다시 평일의 조금은 한산하고 고즈넉한 인사동길을 걷고 싶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사대문 밖에 사는 것이니까. 목포에서 3살에 상경한 이후 홍대 앞 언저리를 떠나 본 것이 서른 네살 이후고 가평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도 내 집은 성산동에 있다. 가보지 못한 곳, 알지 못하는 곳이 이리도 많으니 '서울 촌놈'이라는 말이 내게 딱 맞다. 저자의 고향 이야기는 참말로 재미있었습니다. 이 시리즈 전권을 읽고 있는데 모든 권이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다음이 언제나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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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편 3번째는 시대는 돌고 돈다는 말이 와 닿듯이 서촌, 북촌, 인사동 같은 요즘 뜨는 핫 플레이스를 돌아본다. 원래는 서울 사대문 안의 오래된 동네로 조선시대부터 재조양반이나 중인들이 살아온 지역인데 이제는 도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통을 간직한 서울의 쉴 휴(休)자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서울의 배산인 북한산의 문화유산을 답사한다.
사대문 안동네들은 예로부터 한옥과 전통상점이 있고, 오래된 거리와 역사의 현장이 위치해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심이다. 오늘날 서울의 주요 관광 명소이자 우리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외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다. 저자는 이 오랜 동네들을 거닐며 조선의 수도로 지금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한 복판으로 땅의 유구한 역사와 사람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다.
시작은 북악산이다. 북악산은 도성 방어의 핵심이라는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고, 이어서 그 자락에 조선총독 관저와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계속 출입이 통제되어 신비와 경외의 장소로 사람들에게 접근이 불허된 지역이었다. 근래에 전면 개방되어 시민들이 찾고 있다.
경북궁 후원 시기 칠궁과 청와대 등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문화유산이 많이 의미있는 답사처여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개방되어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복궁 서쪽 동네 서촌이다. 지금은 관광객이 많이 찾고, 핫플레이스로 떠올랐지만 근현대를 거치면서 이완영, 윤덕영 등 유력자들의 거처가 모여있었다. 이곳은 저자의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해 소년 유홍준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북촌과 인사동 이야기 등도 나오고 저자의 문화재 청장 시절 비봉에 복제비가 세워진 이야기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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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작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서울편3' 리뷰입니다. 거의 30년전 읽기 시작했는데 19권째네요.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는데 이 번 책은 기존의 전문적인 역사이야기나 건물들의 설명보다는 친근한 이웃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읽었어요. 작가님의 인사동에 대한 사랑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 안에 살고 있지만 생업이 바빠 가보지 못한 곳을 잘 설명해 주셔서 마치 구석구석 살펴보고 온 듯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 새로운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고, 여러 사진들을 보면서 매우 이해가 빠르고 기억에 남았습니다. 지루하지도 않고 책장을 술술 넘기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국내 연작물 가운데 하나이다. 수험생활을 할 때, 한국사에 대한 관심도와 흥미가 높았지만 문화재 파트에 대해서는 암기의 부담감 때문인지 유독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책을 접하고 나서 그러한 나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유홍준 작가님의 방대한 지식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그것을 독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풀어내는 능력 내지는 필력..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만큼은 나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넘쳐나는 것을 느꼈다. 평생 곁에 두고 사귈 수 있는 벗을 얻은 느낌이다.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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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시리즈는 30년전 1편을 시작으로 보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1편과 2편까지 보았고 서울3편을 보기위해 책을 구매하였다. 서울 3편은 서촌과 북촌 인사동 등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오래된 동네와 분한산의 문화유산을 답사한 내용이다. 서울 여행을 하고자 하는 분이라면 서울편들을 모두 읽으시고 여행을 하신다면 그 여행은 더 값지리라 생각한다. 일독을 권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