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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애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북클러버 첫 리뷰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자 필연과 같다. 나는 예스24 인터뷰나 회사에서 독서매니아로 책 소개 등을 받을 때마다 잊지 않고 소개하는 책이 바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기 때문이다. 왜 이 책을 최애의 책으로 꼽는가? "진정한 국제인이란 단순이 언어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곳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 위에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이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론에 공감하기 떄문이다. 유홍준 교수님도 비슷한 말을 하셨다.
나의 문화유산답가기 12 : 서울편4는 구입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사실 그동안 쌍둥이 육아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책 다음 후속편이 나오지 않아 아껴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책이 너무나 좋다.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체만으로 휴식이 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이 책을 읽고 그 장소로 떠나서 교수님이 알려준 지식 + 그 느낌에 나만의 해석이 더해질 때 내가 더 커지고, 힐링을 얻는 느낌이다.
고려시대 후기 3경이자, 조선시대 500년 도읍으로 또 일제시대 경성을 거쳐, 해방이후 우리나라 수도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서울은 애초에 가지고 있던 한양도성을 넘어 넓어지고 깊어졌다. 대도시 서울은 이 책 4권으로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고, 1,000만 인구와 수도권에서 매일 유입되었다가 돌아가는 인구까지 합쳐져 계속 그 이야기가 양산되고 만들어지는 도시다. 그런 대도시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섬세하게 통찰하는 한 편 지금까지 서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서울은 저자 유홍준 교수님의 고향이다. '서울토박이'로 영남대 교수 시절을 제외한 오랜 세월을 '서울인'으로 살아온 저자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서울의 오랜 도시이자 부자의 도시인 성북동이다. 성북동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서울 도성은 지명의 방향으로 나타내는 도시 이름이 많다. 성북동은 한양 도성의 북쪽에 만들어진 동네라는 이름이다. 강남은 한강 남쪽, 한남은 한성의 남쪽, 성동은 성의 동쪽 동네 등 서울을 대표하는 성(城)과 강(江)이 많은 도시 지명을 만들어내고 있다.
성북동하면 많은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 또는 그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여기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사실 이 집들은 1970년대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만들어진 신흥 저택이다.
정조시대 유명한 체제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번암 채제공은 북문도화를 유람한 모습을 글로 남겨놓았다. 정조 8년(1784년) 봄,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있던 노재상 채제공은 아들 채홍원을 데리고 벗과 친지 5~6명과 함께 도성 안팎의 경치 좋은 곳을 노닐고 오는 네편의 기행문을 썼는데,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유북저동기>라는 성북동 유람기이다.
그 당시만 해도 성북동은 성 북쪽의 개발이 덜 된 도성의 외곽기능이 다수였다. 또 다리를 건너니 어영둔(성북둔)이 나왔다. 정원과 건물이 제법 넉넉해 보였다. 둔사 밖에는 작은 연못에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꽃이 물에 거꾸로 비쳐 꽃 그림자가 아물거리고 줄기가 구부러져 암벽과 맞닿아 활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병풍이나 장막 같았다. (...) 혹 가다가 혹 앉아 있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 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 도성의 인사들은 고관에서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 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p.2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특징은 장소와 더불어 많은 인문학적 지식, 그 지역에 대한 옛 기록이 함께 나오는 즐거움이 있다. 사실 우리가 보는 유적지는 과거를 보기는 하지만 오늘 현재의 모습이다. 결국 그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 유적이 지나온 시기가 모두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되는 것인데 그것들을 함께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성북동 골짜기에는 유명한 명사들의 별서와 별장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정원과 원림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춘파 황윤명이라는 내시 고관의 별서였다가 의친왕 이강의 별서가 되는 명소가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불우한 시대를 살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왕손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의친왕 이강이 살았던 곳이다. 성북동 문인촌은 나도 대학교 시절 가보았다. 유명한 소설가인 이태준의 이야기가 나온다. 최순우 옛집과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그리고 내가 대학시절 정말 좋아하던 간송 미술관 등이 남아있는 곳이 성북동이다. 성북동 답사만 해도 몇 일은 걸릴 것 같다. 다시 대학생 시절 성북동을 돌아다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내가 도심 속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결혼 전 아내와도 종종 갔던 선정릉이다. 나는 '천원의 행복'이라고 칭했고, 대학시절 마음이 답답하면 종종 간 곳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기 마음이 답답하거나 생각이 필요하면 가장 많이 갔던 곳이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 왕이 되기까지 살았던 잠저인 운현궁, 올라가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 사육신 묘, 근처 밥이 싸고 학교가 너무나 에뻤던 경희대 등이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스팟이었는데, 대학교 4학년 부터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선정릉을 많이 찾아갔다.
선정릉은 성종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능침이 있고, 왕비가 셋이나 있었지만 홀로 묻히게 된 중종의 정릉이 합쳐진 명칭이다. '뭬야?'로 유명한 드라마의 문정왕후 윤씨가 남편과 묻히기 위해 중종의 묘를 이장하면서까지 강남한복판에 묻히게 했지만 여기는 주변보다 저지대라 침수가 잦았고, 결국 임진왜란 시기에는 도성침탈의 주요 길목으로 범릉적에 의해 능이 훼손되기까지에 이른다. 지금 성종과 중종의 묘는 사실상 주인이 없는 허묘다.
선정릉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이 리뷰를 한 장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인데, 나중에 책을 보시면 된다. 조선 왕릉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그 보전됨이나 의미 등을 통해 우리 역사의 또 한 편에 남겨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유홍준 교수님이 주장한 태종대왕 헌릉, 세종대왕 영릉, 세조대왕 광릉, 성종대왕 선릉은 나도 찬성한다. 역사에 어느 정도 해박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도 릉이름만 들으면 얼핏 안 떠오르는 능이 많은데, 이렇게 하면 어느 왕의 묘인지 잘 구별되서 좋을 것 같은데 당시 문화재청장일 떄 추진하다가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국회의원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봉은사는 예전 서울 기준으로 하면 강남쪽의 한적한 곳의 절이었겠지만, 지금은 서울이 팽창하면서 도심속에 있는 사찰로 변경되었다.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는 강서구 가양동과 허준박물관의 허준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사를 좋아하는 나도 허준박물관 같은 것은 있는지 몰랐다. 다음에 한 번 가보리라. 허준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은 허준 정오표다. 나 역시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많았다.
특히 의과에 합격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미암 유희춘의 추천으로 의관이 된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마지막은 서울의 북쪽으로 우리에겐 무덤, 공동묘지로 잘 알려진 망우리다. 작가 김영하는 도시에서 꼭 공동묘지를 방문해 본다고 했다. 그 속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유명인이 묻혀있는 무덤은 일부러라도 가보면서 그를 추억해 본다고 했는데, 망우리에는 위창 오세창의 무덤과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소파 방정환, 만해 한용운 등 수많은 근대 유명인들이 묻혀 있고, 그 무덤을 통해 그들을 다시 추억해본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로 유명한 시인 김상용의 묘까지 저자의 손길과 글은 지나간 선인의 옛 자취와 일생을 살려낸다.
자연과 풍류를 사랑한 한양의 선비들과 한양에서 생활하면서 도시의 곳곳에 흔적을 남기며 함께 살아간 아녀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한 서울은 시대와 문화를 앞당긴 수많은 명사와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있다. 서울의 도심은 많이 개발됐지만 그 주변부는 아직도 골목골목 사람의 향기가 많이 남아 있다. 서울에 꽤 오래 살았고, 지금도 수도권에 거주하지만 유명한 곳만 가보았고, 나름의 좋아하는 장소는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지나간 곳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서울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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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 서울편 3 사대문 안동네 유홍준 창비/2022.10.25. sanbaram
서울의 사대문 안동네와 북한산 답사한 내용을 실은 것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이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옛날 추억을 더듬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양의 진산인 북악산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서쪽 지역인 서촌과 그 뒷산인 인왕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옛날 정취가 많이 남아 있는 북촌을 소개한다. 외국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사동의 정취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산을 소개 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은 함께 출간된 ‘강북과 강남 : 한양 도성 밖 역사의 체취’편과 앞뒤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한다. 1993년 서울시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 조사했다.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 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은 “서울시민 1,100만 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명에 불과 했다.(p.59)”고 한다. 그러니 저자 또한 서울토박이의 한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생각 되었다. 먼저 일제를 거치고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의 “후원 서쪽 칠궁과 맞닿은 곳에는 경농재와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다. 임금이 해마다 봄이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 경농재에 거동하여 각 도에서 올라온 곡식의 종자를 팔도배미에 심는 친경 행사를 치렀다.(p.34)”고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논을 팔도를 상징하는 8개로 나누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곡식의 종자를 심었다니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생각된다. 이어서 서울 사대문안 동네의 특징 중 몇몇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p.106)”고 서촌의 특성을 설명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궁이 계속 지어졌다. 그러다 그 후궁이 죽으면 폐궁되기도 하고 다음 왕들의 후궁이 들어와 살기도 하여 각 궁의 내력은 아주 복잡하다고 한다. 옥이동은 경복궁과 가까워 일찍부터 궁들이 여럿 들어와 세종대왕 후궁을 위한 자수궁, 문종의 후궁을 위한 수성궁, 정조의 후궁 경우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서촌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 좋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늦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길 역시 S자로 휘어 있어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이 섞여 살았다.(p.154)”고 한다 그런데 현재 북촌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산 것은 도심과 가까운 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북촌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서울로 이주해와 서울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을 때, 이들은 주로 충무로와 회현동 일대의 남촌에 자리 잡았다. 북촌 한옥 밀집지구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 밀집 지구의 풍경은 일제시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 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북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북촌8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촌 8경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이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p.152)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 재(灰)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p.163)” 재동초등학교는 1895년 8월 10일에 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이다. 첫 번째는 경운동의 교동초등학교로 1894년 9월에 관립교동왕실학료로 개교하여 왕실 종친과 귀족 자제들만 입학 대상으로 했으나 이듬해부터 일반인 학생도 입학을 허가했다. 북촌 고개 중에서 맹현은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북촌 8경을 거닐다보면 한옥밀집지구 옆 동네에는 금박연, 전통공예체험관, 한옥협동조합, 전통 발효공방, 누비공방, 매듭공방 등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한옥들이 많다. 이는 서울시가 한옥 30여 채를 보유하여 공공건물과 전통 공방으로 대여해준 것이다.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 매입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 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유리창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는 고서점 거리로, 뉴욕의 소호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아르바트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는 전통문화 거리다.(p.201)”라고 인사동을 소개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 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 터 인근 수송 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입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 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원을 지불했다(p.219)”고 한다. 한남서림은 1959년에 매각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명신당필방’이라는 문방사우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는 100년 이상 된 유적, 유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대신 서울시는 100년은 못 되었지만 미래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50년 이상 된 근현대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p.235)” 인사동에서 ‘서울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노포로는 통문관, 통인가게, 선천집, 수도약국 등이 있다. 민예품 가게들은 인사동길 대로변에서 밀려나 인사동 10길을 비롯한 샛길에 흩어져 있지만 인사동의 저력은 여전해서 2020년 ‘인사동 문화축제’팜플릿에 실린 민예품 가게를 헤아려보면 30여 곳에 이른다. 1980년대의 고미술상과 화랑 들이 거의 다 인사동을 떠났고 대안 공간으로서 그림마당 민이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 거리로서 인사동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동산방화랑, 선화랑, 노화랑, 관훈미술관, 백악미술관, 경인미술관, 가나아트 등 자가 건물을 갖고 있는 화랑과 전시장 들은 지금도 건재하며 미술 거리로서의 권위와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19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 전총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 거리.(p.271)” 최무규의 쌈지길 건물은 새로 인사동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관광객과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는 공간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쌈지길 건물의 기본 개념은 기존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고만고만한 가게들(70여 곳)이 최대한 많이 입주할 수 있도록 1층에서 옥상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치 500미터 길이의 인사동길을 말아 올린 것 같이 디자인해 사람들이 1,2,3,4층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25도의 낮은 경사로를 따라 편안하게 상가 앞을 걷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p.315)” 이로써 한양은 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사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 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 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추사는 무학대사비나 도선국사비라고 전해오던 것을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재발견했다. 그는 북한산 순수비 측면에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이를 두 차례 찾아와 고증했음을 다음과 같이 새겨두었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이를 통해 추사의 식견과 진흥왕 순수비의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수비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품을 옛 자리에 세워놓고 그 전말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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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 서울편 3 사대문 안동네 유홍준 창비/2022.10.25.
서울의 사대문 안동네와 북한산 답사한 내용을 실은 것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이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옛날 추억을 더듬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양의 진산인 북악산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서쪽 지역인 서촌과 그 뒷산인 인왕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옛날 정취가 많이 남아 있는 북촌을 소개한다. 외국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사동의 정취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산을 소개 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은 함께 출간된 ‘강북과 강남 : 한양 도성 밖 역사의 체취’편과 앞뒤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한다. 1993년 서울시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 조사했다.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 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은 “서울시민 1,100만 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명에 불과 했다.(p.59)”고 한다. 그러니 저자 또한 서울토박이의 한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생각 되었다. 먼저 일제를 거치고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의 “후원 서쪽 칠궁과 맞닿은 곳에는 경농재와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다. 임금이 해마다 봄이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 경농재에 거동하여 각 도에서 올라온 곡식의 종자를 팔도배미에 심는 친경 행사를 치렀다.(p.34)”고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논을 팔도를 상징하는 8개로 나누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곡식의 종자를 심었다니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생각된다. 이어서 서울 사대문안 동네의 특징 중 몇몇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p.106)”고 서촌의 특성을 설명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궁이 계속 지어졌다. 그러다 그 후궁이 죽으면 폐궁되기도 하고 다음 왕들의 후궁이 들어와 살기도 하여 각 궁의 내력은 아주 복잡하다고 한다. 옥이동은 경복궁과 가까워 일찍부터 궁들이 여럿 들어와 세종대왕 후궁을 위한 자수궁, 문종의 후궁을 위한 수성궁, 정조의 후궁 경우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서촌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 좋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늦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길 역시 S자로 휘어 있어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 나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이 섞여 살았다.(p.154)”고 한다 그런데 현재 북촌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산 것은 도심과 가까운 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북촌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서울로 이주해와 서울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을 때, 이들은 주로 충무로와 회현동 일대의 남촌에 자리 잡았다. 북촌 한옥 밀집지구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 밀집 지구의 풍경은 일제시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 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북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북촌8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촌 8경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이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p.152)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 재(灰)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p.163)” 재동초등학교는 1895년 8월 10일에 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이다. 첫 번째는 경운동의 교동초등학교로 1894년 9월에 관립교동왕실학료로 개교하여 왕실 종친과 귀족 자제들만 입학 대상으로 했으나 이듬해부터 일반인 학생도 입학을 허가했다. 북촌 고개 중에서 맹현은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북촌 8경을 거닐다보면 한옥밀집지구 옆 동네에는 금박연, 전통공예체험관, 한옥협동조합, 전통 발효공방, 누비공방, 매듭공방 등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한옥들이 많다. 이는 서울시가 한옥 30여 채를 보유하여 공공건물과 전통 공방으로 대여해준 것이다.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 매입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 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유리창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는 고서점 거리로, 뉴욕의 소호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아르바트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는 전통문화 거리다.(p.201)”라고 인사동을 소개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 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 터 인근 수송 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입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 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원을 지불했다(p.219)”고 한다. 한남서림은 1959년에 매각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명신당필방’이라는 문방사우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는 100년 이상 된 유적, 유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대신 서울시는 100년은 못 되었지만 미래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50년 이상 된 근현대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p.235)” 인사동에서 ‘서울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노포로는 통문관, 통인가게, 선천집, 수도약국 등이 있다. 민예품 가게들은 인사동길 대로변에서 밀려나 인사동 10길을 비롯한 샛길에 흩어져 있지만 인사동의 저력은 여전해서 2020년 ‘인사동 문화축제’팜플릿에 실린 민예품 가게를 헤아려보면 30여 곳에 이른다. 1980년대의 고미술상과 화랑 들이 거의 다 인사동을 떠났고 대안 공간으로서 그림마당 민이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 거리로서 인사동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동산방화랑, 선화랑, 노화랑, 관훈미술관, 백악미술관, 경인미술관, 가나아트 등 자가 건물을 갖고 있는 화랑과 전시장 들은 지금도 건재하며 미술 거리로서의 권위와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19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 전총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 거리.(p.271)” 최무규의 쌈지길 건물은 새로 인사동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관광객과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는 공간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쌈지길 건물의 기본 개념은 기존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고만고만한 가게들(70여 곳)이 최대한 많이 입주할 수 있도록 1층에서 옥상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된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치 500미터 길이의 인사동길을 말아 올린 것 같이 디자인해 사람들이 1,2,3,4층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25도의 낮은 경사로를 따라 편안하게 상가 앞을 걷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p.315)” 이로써 한양은 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사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 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 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추사는 무학대사비나 도선국사비라고 전해오던 것을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재발견했다. 그는 북한산 순수비 측면에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이를 두 차례 찾아와 고증했음을 다음과 같이 새겨두었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이를 통해 추사의 식견과 진흥왕 순수비의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수비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품을 옛 자리에 세워놓고 그 전말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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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는 서울편 4권으로 강북과 강남 한양도성 밖 체취들을 엮었다. 당초 저자는 서울편 1,2권에서 조선왕실의 유적을 살펴보고 3권에서는 서울의 묵은 동네 이야기를, 마지막 권인 4권에서는 한강과 북한산을 다루겠다고 했었다. 대체적으로 그의 구상대로 답사가 이루어졌지만 한강 유역의 이야기가 빠져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4권에서 그가 답사한 지역은 강북의 성북동과 망우리 그리고 강남지역은 선정릉과 봉은사, 가양동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이었지만 근현대들어 서울의 팽창과 함께 지금은 서울의 공간이 된 곳들이다.
성북동은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김광섭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란 시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한양도성 축조 당시에는 성곽 바깥쪽 10리 이내는 자연녹지로 보존했고 이를 ‘성저십리’라 했다고 한다. 성저십리 안에는 중요한 국가 의례를 행하는 제단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동대문 제기동 밖에 있는 선농단이고 다른 하나가 성북동의 선잠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영조시대 한양도성 북쪽 성곽에 맞붙어 있는 성북동 산동네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때 사람들이 복숭아를 많이 심어 해마다 봄이 되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유람지가 되면서 별장과 별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후 1930년대 들어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우리 근현대 문화사의 핵심적인 현장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태준, 김용준, 김환기, 한용운, 김광섭 등 문인과 화가들의 자취를 따라 성북동 답사를 한다.
성북동과 더불어 저자가 강북의 문화유산으로 소개하는 곳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이다. 1970~80년대 망우리 하면 생각나는 것은 우선 공동묘지였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0년대 서울의 인구가 급속히 팽창하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 이장시키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40년간 조성되었다고 한다. 1973년 폐장 이후 망우리묘지공원, 망우리공원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올해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묘지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박인환, 이중섭, 조봉암, 한용운, 오세창, 방정환, 안창호 등 역사인물 50여명의 묘지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을 찾아보며 근현대 우리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의 답사길을 책에서나마 뒤쫓으며 한때는 기피대상이었던 공동묘지가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알아간다.
한강 이남의 문화유산인 선정릉은 조선 9대 왕인 성종과 성종의 비 정현왕후의 선릉, 11대 중종의 정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선정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2009년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모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제외하려고 하였으나 강남의 빌딩숲 속에서도 보존되고 있는 것이 높이 평가되면서 포함된 과정을 저자는 소개한다. 봉은사는 조선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보우스님을 앞세워 선교 양종을 부활시킬 때 선종의 수사찰이 되었고 지금은 조계종 총무원의 직할교구에 속한다고 한다. 오늘날 일반인의 눈에는 도심 속 녹지로 편안함을 주지만 보은사의 역사를 더듬어 가다 보면 조선시대 불교정책의 부침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어 그는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들 모두는 강서구립미술관, 구립박물관으로 미술관은 겸재 정선이 65세부터 70세까지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 그리고 박물관은 허준의 관향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답사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 소개하고 보존하려는 이들의 노고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저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을 완간하면서 이제 그 끝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30여년에 걸쳐 국내편 12권, 일본편 4권, 중국편 3권 등 총 19권의 답사기를 펴낸 저자의 긴 여정을 나 또한 뒤따라왔다. 그러면서 알지 못했던 것, 무심코 지나쳤던 것 들에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와 미를 알게 되었다.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답사기를 읽는 순간, 순간에는 많은 기쁨을 느꼈고 다음편이 언제나올지 설레이며 기다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찾아보아야 할 곳이 많지만 ‘국토박물관 순례’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아쉬움이 들면서도 아직 한 권이 남았다는 기대감에 그의 답사기를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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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빠짐없이 챙겨보는 책이다. 처음엔 다음편이 언제 나올지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때가 되면 나오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이다. 책을 손에서 놓은 지가 반년을 훌쩍 넘기면서 선뜻 책에 손이 가질 않는다. 그러던 차 근 5년만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을 대하니 아직까지는 나와 책과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의 서울편 1,2권에서 궁궐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왕실유적을 답사한 저자는 자신의 체험적 서울이야기를 3권에 담았다고 한다. 서울이 고향이라는 그는 자신이 자라고 성장했던 동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는 서울이 고향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았다. 결혼을 하면서 거주지는 서울 근교로 변했지만 근무처가 지방사업장으로 바뀌기 전까지 서울에서 생활을 했다. 더군다나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을 한 지리적 위치가 저자의 답사위치의 인근이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살았던 시기의 서울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시간의 공백은 있지만 지금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절이 아니었는지라 저자의 글에서 아련한 향수마저 느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3권에서 저자가 다루는 곳은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서촌, 북촌, 인사동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뒤쪽에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고 좌우에 서촌과 북촌, 인사동이 있으니 말그대로 사대문 안동네, 즉 서울의 구도심이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고, 현대에는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금단의 땅이 되었다가 근래에야 개방되었다. 그곳에는 문무과 시험을 치르던 경복궁 후원의 경무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이 모여 있는 칠궁, 공신들이 모여 제를 올리는 회맹단 등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 북악산 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과 함께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으로 불렸다. 북악산이 금단의 땅이었던 반면 인왕산 계곡은 곳곳에 수려한 풍광이 자리잡고 있어 조선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근현대에 들어 옛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저자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향유하는 방법에 대한 청사진이 명확히 세워지길 역설하고 있다.
서촌과 북촌은 서울의 오래된 동네로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몰려 요즘은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서촌이란 조선시대에는 서소문 정동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으나 지금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지칭한다. 서촌의 길들은 하나같이 곡선이고 적당한 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도시계획이 아니라 물길을 따라 자연스레 길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길 중간중간에는 작은 한옥들이 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엔 역사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 끝에는 유적지가 있다’(106쪽)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반해 북촌은 조선시대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를 남촌, 북쪽동네를 북촌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한옥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한옥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저자는 근대들어 서촌과 북촌에서 살았던 많은 문인과 예술인, 정치인들을 살펴보며 마을의 변천과정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고향인 서촌마을의 이야기에는 저자의 어린시절 기억이 함께하고 있어 나 또한 답사기를 읽는 내내 먼 남쪽 고향마을을 떠올리기도 했다. 인사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꼽힌다. 저자는 출판사와 서점이 모여 있다가 한국전쟁이후 고서점거리로 부활하는 역사, 1960~1970년대 미술의 거리로 변천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그곳에서 터를 잡았던 예술계의 인사들, 그리고 그곳의 독특했던 음식점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밖에도 사대문 안은 아니지만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을 소개하고 있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 남쪽에 만경대가 있어 삼각산으로도 불린다. 북한산의 유적으로는 한양의 방위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축성한 북한산성이 있고, 중흥사, 태고사, 도선사를 비롯한 30여개의 사찰이 수많은 불교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비봉의 낡은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추사 김정희의 자취를 따라가는 답사는 유적과 그것을 찾아내고 보존하는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젊은 날 북한산을 찾은 적이 많이 있었지만 그곳의 유적에 대해 특별한 기억은 없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불변의 진리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저자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은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3권에서 사대문 안을 다룬 저자는 4권에서는 한양도성 밖을 다루고 있다. 3,4권이 동시에 출간되어 3권을 읽고 다음권을 기다리지 않아 좋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은 도통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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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서울편 4 강북과 강남 유홍준 창비/2022.10.25.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는 서울시 중에서 사대문 밖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을 답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금했던 성저십리를 포함하여 양주군, 광주군, 고양군, 양천현의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의 ‘성북동,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지역’의 답사기다. 주로 역사적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하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예술인들에 대한 활동내용과 시대 상황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사대문 밖의 서울로 개발이 되면서부터 현재가 있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유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사대문 밖 역사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p.5)” 이들 왕릉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왕릉의 구조나 각 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아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또한 서울 시민이나 문화유산 답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답사코스 등을 안내하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10리 지역은 ‘성저 10리’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p.7)”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행사는 2개의 제단이 있었다. 하나는 동대문 밖 제기동의 선농단으로 역대 왕들은 해마다 친히 밭을 경작하며 농경을 장려했다. 이를 친경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곳 성북동의 선잠단이다. 성북동에는 300년 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 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라고 예찬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었다고 말한다.
“별장과 별서는 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 정확히 말해서 원림으로 꾸며져 있다.(p.31)” 정원과 원림은 개념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원과 원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원은 주택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수려한 곳에 살림집, 서재, 정자 등 건물을 적절한 곳에 비치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정반대인 셈이다. 성북동에 있던 별장, 별서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은 ‘서울 성북동 별서’다. 영벽지를 중심으로 건물을 위쪽으로 배치해 창밖으로 이 못 풍경을 즐기게 되어 있다. 또한 북정마을에는 ‘비둘기공원’이라는 쉼터가 있다. 원래는 ‘성북동 가로쉼터’라고 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했다. 한쪽 벽에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 전문을 3개의 시판에 나누어 나란히 붙이고 벽에는 비둘기 모양의 작은 조형물도 설치했다고 설명한다.
“선정릉은 조선왕조 9개 왕인 성종의 선릉과 11대 중종의 정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거리에 있다.(p.151)” 능의 입구에 있는 홍살문은 지붕도 없고 문짝도 없는 붉은 기둥문이다.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여기가 민이 아닌 관의 공간임을 알려주는 표지물로 조선시대 능뿐 아니라 지방의 관아와 향교 앞에도 세워졌다. 중국에 패방이 있고, 일본에 도라이가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홍살문이 있다. 중국의 패방은 웅장하고 권위적이며, 일본의 도라이는 단순하면서 날렵한 형태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홍살문은 나무 기둥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붉은색을 칠해 여기가 위엄 있는 곳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문정왕후는 1545년 중종이 죽자 11세로 즉위한 아들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1553년 명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8년간 조선불교를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p.208)” 명종 7년에는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부활시켜 선종의 예비합격자 400명 중 최종적으로 33명을 선발했다. 보우 스님이 주관한 첫 승과 시험이 봉은사 앞뜰에서 시행되어 이곳은 승과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합격자 중에는 서산대사 휴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율곡 이이는 <요승 보우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과격한 제목 때문에 율곡 선생이 보우 스님의 처벌에 앞장섰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곡집>에 실려 있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보우 스님을 참수하지 말고 귀양 보내라는 내용이다. 보우 스님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 중 제주목사 변협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장살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당을 비롯한 의승군의 맹활약으로 전란 후 조선 불교는 새로운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중들은 전란을 치르면서 불교에 많이 귀의했다. 죽음의 문제에 무관심한 유교와 달리 불교는 삶의 고난 앞에서 희망을, 죽음 앞에서는 내세의 위안을 말했다. 황실과 일부 사대부들까지 절집을 찾아와 복을 빌며 시주하고 기도드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났다. 나라에서는 이제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p.219)”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나말 여초의 철불에 힘 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과 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고 불상의 생김새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5년간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로 ‘양천향교’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고, 허준미술관은 그의 관향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엔 ‘허가바위’가 있다.(p.240)”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는 고을엔 반드시 향교가 있었다. 유교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향교에서는 교와 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과 교육이 행해지는 명륜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사 고을엔 90명, 각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학업은 7,8세부터 서당에서 시작되고 향교의 입학은 16세부터로 제한했다. 이는 16세부터가 바로 균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향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 진사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현재 남한에만 234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그 많은 향교 중 서울특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양천향교라고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p.279)”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 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 보낸 것도 감동적이라며 선조의 또 다른 일면을 소개한다.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시 한다. 둘째, 처방은 요점만 간추린다. 셋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어의로 있던 허준은 선조가 죽자 귀향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죽어 파주의 민통선 안에 그 묘가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의 사상이 깔려 있어 한 줌의 재가 되는 화장 문화를 낳았다. 이에 반해 유교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했던 것이다.(p.291)” 봉분을 조성하는 문화는 산지가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천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주택 크기에 제한을 두고 호화주택을 금지했듯이 분묘에서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한동안 매장이 대세였지만 요즘은 궁벽한 농촌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 동시에 매장보다 화장이 더 선호되고 있고 개인 분묘가 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새로 조성되는 공동묘지는 공원묘원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있다.
“특히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묘소를 오르는 길은 편안한 산책길이면서 서울 시내와 한강이 보이는 전망을 품고 있다.(p.327)” 점차 공동묘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전환된다면 이제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역사인물을 만나는 공원이 될 것이다. 화장 문화가 대세로 변해서 앞으로는 예전과 같은 장례문화는 더욱 간소화 되고 동네 뒷산의 공동묘지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하는 문화 중에 조선시대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 외곽의 답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와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도움 주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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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서울편 4 강북과 강남 유홍준 창비/2022.10.25. sanbaram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는 서울시 중에서 사대문 밖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을 답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금했던 성저십리를 포함하여 양주군, 광주군, 고양군, 양천현의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의 ‘성북동,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지역’의 답사기다. 주로 역사적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하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예술인들에 대한 활동내용과 시대 상황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사대문 밖의 서울로 개발이 되면서부터 현재가 있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유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사대문 밖 역사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p.5)” 이들 왕릉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왕릉의 구조나 각 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아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또한 서울 시민이나 문화유산 답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답사코스 등을 안내하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10리 지역은 ‘성저 10리’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p.7)”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행사는 2개의 제단이 있었다. 하나는 동대문 밖 제기동의 선농단으로 역대 왕들은 해마다 친히 밭을 경작하며 농경을 장려했다. 이를 친경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곳 성북동의 선잠단이다. 성북동에는 300년 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 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라고 예찬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었다고 말한다.
“별장과 별서는 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 정확히 말해서 원림으로 꾸며져 있다.(p.31)” 정원과 원림은 개념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원과 원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원은 주택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수려한 곳에 살림집, 서재, 정자 등 건물을 적절한 곳에 비치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정반대인 셈이다. 성북동에 있던 별장, 별서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은 ‘서울 성북동 별서’다. 영벽지를 중심으로 건물을 위쪽으로 배치해 창밖으로 이 못 풍경을 즐기게 되어 있다. 또한 북정마을에는 ‘비둘기공원’이라는 쉼터가 있다. 원래는 ‘성북동 가로쉼터’라고 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했다. 한쪽 벽에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 전문을 3개의 시판에 나누어 나란히 붙이고 벽에는 비둘기 모양의 작은 조형물도 설치했다고 설명한다.
“선정릉은 조선왕조 9개 왕인 성종의 선릉과 11대 중종의 정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거리에 있다.(p.151)” 능의 입구에 있는 홍살문은 지붕도 없고 문짝도 없는 붉은 기둥문이다.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여기가 민이 아닌 관의 공간임을 알려주는 표지물로 조선시대 능뿐 아니라 지방의 관아와 향교 앞에도 세워졌다. 중국에 패방이 있고, 일본에 도라이가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홍살문이 있다. 중국의 패방은 웅장하고 권위적이며, 일본의 도라이는 단순하면서 날렵한 형태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홍살문은 나무 기둥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붉은색을 칠해 여기가 위엄 있는 곳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문정왕후는 1545년 중종이 죽자 11세로 즉위한 아들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1553년 명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8년간 조선불교를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p.208)” 명종 7년에는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부활시켜 선종의 예비합격자 400명 중 최종적으로 33명을 선발했다. 보우 스님이 주관한 첫 승과 시험이 봉은사 앞뜰에서 시행되어 이곳은 승과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합격자 중에는 서산대사 휴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율곡 이이는 <요승 보우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과격한 제목 때문에 율곡 선생이 보우 스님의 처벌에 앞장섰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곡집>에 실려 있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보우 스님을 참수하지 말고 귀양 보내라는 내용이다. 보우 스님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 중 제주목사 변협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장살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당을 비롯한 의승군의 맹활약으로 전란 후 조선 불교는 새로운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중들은 전란을 치르면서 불교에 많이 귀의했다. 죽음의 문제에 무관심한 유교와 달리 불교는 삶의 고난 앞에서 희망을, 죽음 앞에서는 내세의 위안을 말했다. 황실과 일부 사대부들까지 절집을 찾아와 복을 빌며 시주하고 기도드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났다. 나라에서는 이제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p.219)”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나말 여초의 철불에 힘 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과 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고 불상의 생김새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5년간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로 ‘양천향교’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고, 허준미술관은 그의 관향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엔 ‘허가바위’가 있다.(p.240)”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는 고을엔 반드시 향교가 있었다. 유교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향교에서는 교와 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과 교육이 행해지는 명륜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사 고을엔 90명, 각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학업은 7,8세부터 서당에서 시작되고 향교의 입학은 16세부터로 제한했다. 이는 16세부터가 바로 균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향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 진사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현재 남한에만 234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그 많은 향교 중 서울특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양천향교라고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p.279)”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 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 보낸 것도 감동적이라며 선조의 또 다른 일면을 소개한다.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시 한다. 둘째, 처방은 요점만 간추린다. 셋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어의로 있던 허준은 선조가 죽자 귀향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죽어 파주의 민통선 안에 그 묘가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의 사상이 깔려 있어 한 줌의 재가 되는 화장 문화를 낳았다. 이에 반해 유교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했던 것이다.(p.291)” 봉분을 조성하는 문화는 산지가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천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주택 크기에 제한을 두고 호화주택을 금지했듯이 분묘에서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한동안 매장이 대세였지만 요즘은 궁벽한 농촌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 동시에 매장보다 화장이 더 선호되고 있고 개인 분묘가 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새로 조성되는 공동묘지는 공원묘원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있다.
“특히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묘소를 오르는 길은 편안한 산책길이면서 서울 시내와 한강이 보이는 전망을 품고 있다.(p.327)” 점차 공동묘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전환된다면 이제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역사인물을 만나는 공원이 될 것이다. 화장 문화가 대세로 변해서 앞으로는 예전과 같은 장례문화는 더욱 간소화 되고 동네 뒷산의 공동묘지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하는 문화 중에 조선시대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 외곽의 답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와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도움 주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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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편 3권은 저자의 고향인 서울 이야기다. 저자와 가까운 시간에서 먼 과거의 시간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장소와 얽혀 있는 역사와 문화를 전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가까운 만큼, 저자가 직접 부딪혀 살아 온 만큼, 더 생생하게 느껴졌고 장소에 대한 친근감이 들었다. 시리즈이 어느 권보다도 편안했고 재미있었다. 8개의 소제목으로 전하는 서울 사대문 안동네 이야기의 시작은 북악산이다.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과 청와대를 소개하고 있다. 오래 전에는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며 북악산 쪽에 놓인 청와대가 보이지 않았었다. 이 무슨 소리냐 할 수도,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존재하나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느날 멀리 파란 지붕, 청와대가 눈에 들어와서 신기하다 생각했었다. 청와대가 개방된지 꽤 되었으니 한번 가보고는 싶은데 '서울촌놈'인지라 여지껏 못가고 있다. 하여 책을 통해 보는 청와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청와대의 현대적 건물들이야 그리 궁금하지 않은데, 기록도 없고 유래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침류각과 미남불이라 불리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침류각은 사진으로 보여지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저자는 '기품이 당당하다', '품위있고 아름다운'이라고 적고 있다. 나는 왜인지 한서린 모습으로 느껴진다. '1900년 전후에 지어진 왕가의 건축이 분명하다'라는데 왜 기록도 없고 유래가 확인되지 않는지 그 불명확함이 신비스럽게 생각된다. 궁궐 물길 흐르는 곳에 지어졌던 건물이라는데 사진으로 보이는 옹골찬 모습, 기품이 당당한 모습과 기록 없음이 비밀스럽고 그래서 더 궁금하고 보고 싶다. 다음으로 서촌 소개로 넘어가는데, 지금 북촌의 젠트리피케이션과 관광객의 소란과 노상 방뇨 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1박2일에 저자가 출연해 북촌을 소개한 이후라고 주민이 말한 것을 실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서촌의 매력을 또 전하면 북촌마냥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잠시 들었다. 이 책이 22년 10월 발간이니 현재 서촌은 무사하다. TV와 도서의 차이가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촌 이야기의 마지막 백운동 소개에서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글씨로 새겨진 백운동천이 나온다. 김가진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가 며느리가 쓴 <장강일기>, 손자가 쓴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에 대한 소개를 읽자마자 바로 yes24에서 두 책을 구입했다. 지금 손에 들어와 있는데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어지는 서촌의 인왕산 소개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조선왕의 그 수많은 후궁들은 왕의 죽음 후 다 어디에 살게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왕이 죽으면 궁을 나와 옥인동에 궁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도 없는 궁에 갇혀 사는 것보다야 궁궐을 나와 사는 게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외국인 방송인 파비앙이 우리 문화유산에 그토록 관심이 많고 해박한지 몰랐다. 나의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문외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네번째로 북촌을 말하고 있는데 저자가 얼마나 북촌을 아끼는지가 글에서 느껴졌다. 외국인들까지 모두 가보는데 여지껏 가보지 못한 북촌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이 떠나는 추세라는데 미안하지만 소란스러운 관광객 사이에 끼고 싶다. 주민에게 불편과 불쾌감을 주지 않는 관광객으로서 말이다. (봉숭아학당의 맹구처럼 손 번쩍 들고) 인사동은 이 서울촌놈인 저도 가보았습니다. 화랑, 전통찻집, 조금 솥밥 등등으로 기억되는 인사동의 역사를 세세히 전해들으니 곳곳이 친숙하고 속을 들여다 보는 듯이 느껴졌다. 다시 평일의 조금은 한산하고 고즈넉한 인사동길을 걷고 싶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사대문 밖에 사는 것이니까. 목포에서 3살에 상경한 이후 홍대 앞 언저리를 떠나 본 것이 서른 네살 이후고 가평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도 내 집은 성산동에 있다. 가보지 못한 곳, 알지 못하는 곳이 이리도 많으니 '서울 촌놈'이라는 말이 내게 딱 맞다. 저자의 고향 이야기는 참말로 재미있었습니다. 이 시리즈 전권을 읽고 있는데 모든 권이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다음이 언제나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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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편 3번째는 시대는 돌고 돈다는 말이 와 닿듯이 서촌, 북촌, 인사동 같은 요즘 뜨는 핫 플레이스를 돌아본다. 원래는 서울 사대문 안의 오래된 동네로 조선시대부터 재조양반이나 중인들이 살아온 지역인데 이제는 도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통을 간직한 서울의 쉴 휴(休)자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서울의 배산인 북한산의 문화유산을 답사한다.
사대문 안동네들은 예로부터 한옥과 전통상점이 있고, 오래된 거리와 역사의 현장이 위치해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심이다. 오늘날 서울의 주요 관광 명소이자 우리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외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다. 저자는 이 오랜 동네들을 거닐며 조선의 수도로 지금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한 복판으로 땅의 유구한 역사와 사람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다.
시작은 북악산이다. 북악산은 도성 방어의 핵심이라는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고, 이어서 그 자락에 조선총독 관저와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계속 출입이 통제되어 신비와 경외의 장소로 사람들에게 접근이 불허된 지역이었다. 근래에 전면 개방되어 시민들이 찾고 있다.
경북궁 후원 시기 칠궁과 청와대 등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문화유산이 많이 의미있는 답사처여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개방되어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복궁 서쪽 동네 서촌이다. 지금은 관광객이 많이 찾고, 핫플레이스로 떠올랐지만 근현대를 거치면서 이완영, 윤덕영 등 유력자들의 거처가 모여있었다. 이곳은 저자의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해 소년 유홍준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북촌과 인사동 이야기 등도 나오고 저자의 문화재 청장 시절 비봉에 복제비가 세워진 이야기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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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27) 언론에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출간 기사를 보고 저녁에 할머니제사가 있어서 부모님댁에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시끄한 표정속에 미소를 지으시는걸 보시고 제가 행복했습니다 이미 아버님 책장엔 답사기 전권 시리즈로 꽂혀있었는데 이번 발간된 책으로 인해 더 빛날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버지는 책한권을 서너번씩 꼭 정독을 하십니다 재밌게 보겠습니다 유홍준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팬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