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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삶에 대한 완벽한 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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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를 아시나요?몸의 철학과 교차에 관한 이야기를 한 현상학자입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 졸업하기 위해서는 철학 논문을 한 편 써야 했는데요.논문을 쓸 때 주요하게 인용한 철학자가 바로 메를로-퐁티입니다. 몸의 철학을 했기 때문에 타인에 관해서도 풍부한 견해를 남겼고, 덕분에 논문을 완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창 논문에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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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를 아시나요?
몸의 철학과 교차에 관한 이야기를 한 현상학자입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 졸업하기 위해서는 철학 논문을 한 편 써야 했는데요.
논문을 쓸 때 주요하게 인용한 철학자가 바로 메를로-퐁티입니다. 
몸의 철학을 했기 때문에 타인에 관해서도 풍부한 견해를 남겼고, 덕분에 논문을 완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창 논문에 필요한 자료조사를 할 때 메를로-퐁티가 지각에 관해 쓴 글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각은 상영 시간에 늦은 채 영화관에 중간에 들어온 사람의 것처럼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조차도 완전히 알지 못한 상태로 죽습니다. 
하지만 그게 비극은 아니죠. 

심지어 그렇게 죽은 사람 중 분석하고 기록할 만한 사람들의 인생을 글로 쓴 전기조차도 모든 걸 기술하기보다는 주제를 정하고 글을 쓰는, 어쩌면 인생보다 불완전하지만 인생의 어떤 부분보다는 더욱 완전한...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 읻다 서포터즈 넘나리 2기의 마지막 활동 도서는 읻다의 무크지 교차 3화 『전기, 삶에서 글로』 입니다!

바보 같이 활동 도서 고를 때 제목만 보고
"역시 인간은 전기(electricity)없으면 안 돼... 전기 중요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어떻게 전기(not biography)로 무크지를 쓸까 궁금했는데,
막상 교차 중 한 권을 읽겠다고 결심하고 목차를 살펴보니 위인전 같은 전기더라고요! (??바보)

4호까지 나온 무크지 교차는 『전기, 삶에서 글로』 외에도
『지식의 사회, 사회의 지식』, 『물질의 삶』, 『전쟁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로 모든 잡지가 흥미로웠지만 『전기, 삶에서 글로』를 고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최근에 카프카에 관심이 생겼는데, 카프카의 전기를 다룬 내용이 있었고요
보부아르 전기를 다룬 내용과 사르트르가 쓴 귀스타브 플로뵈르의 전기를 다룬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가 카프카 타계 100주년이라 여러 문학 출판사에서 이를 기념하는 책을 출간하고 있어서 자연히 카프카에 관한 관심이 느는 중인데 마침 그의 생애를 다룬 책을 리뷰한다니 완전 럭키비키 아니겠습니까?
또 명색이 실존철학으로 게임까지 만든 사람이라, 게임에 등장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이름이 보여서 이 책이 저에게 딱 맞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다만 간과한 건 제가 계간 『창작과 비평』을 거의 10권 가량 읽으면서도 한 번도 완독한 적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심지어 리뷰만 있는 형식이 처음인 잡지를 기한 내에 다 읽을 수 없는데 욕심이 앞서서 무작정 이 책을 고른 바람에 역시나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책의 ⅓ 정도는 읽었고, 그 중에서도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이 많으니 그걸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요. 

1. 표지
『전기, 삶에서 글로』의 표지는 까만 글씨와 초록 글씨가 겹친 디자인인데요, 가장 잘 보이는 까만 글씨가 반대로 찍혀있습니다. 
여기 어떤 의미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목을 끈다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표지 뒷면이 코팅 때문에 요철이 생겨서 글씨가 바로 보이는 거 아니겠어요?
표지를 넘기는 짧은 순간 속에서도 반대인 것과 바른 것이 교차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무크지의 이름인 '교차' 답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2. 서문
기획위원이신 김영옥 선생님이 '전기'라는 장르 자체를 쓴 서문을 읽으면서 예상치 못한 생각거리를 많이 얻었습니다. 
삶을 기록하는 글로서의 전기는 비문(비석에 남기는 글), 의사가 쓰는 진단서, 판결문 등 일상 속에서 접하는 수많은 텍스트라는 해석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전기'를 주제로 고르면서 어떤 글을 쓰고 받을 것인지에 관한 고민에서 저에게는 없는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일을 진행할 때 물론 섬세한 것도 챙기려고 노력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계곡의 쏟아지는 물처럼 일하는 편이라 섬세해야 할 부분에서 그러지 못하는 게 항상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아쉬움의 차원이 노력에서 태생으로 옮겨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아요. 
정말 고려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썼다는 글의 내용이 그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3. 강민혁, <삶과 로고스가 함께 거주하는 미래의 철학>
일단 철학자를 다룬다고 하면 흥미가 생기는 저에게 너무 잘 맞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이 리뷰한 책은 디오게네스가 쓴 철학자들의 전기인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입니다. 
제가 아는 책 중에는 『철학의 뒤안길』과 비슷한데, 좀 더 철학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 같았습니다. 

이 글의 첫두 문단이 정말 매력적이라서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 해요. 

이 책은 기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별을 관찰하다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진 사람, 나이 들어서 리라를 배우며 쉬지 않고 춤을 추는 사람, 여름에는 뜨거운 모래 위에 몸을 굴리고 겨울에는 눈 덮인 조각상을 껴안으며 단련하는 사람, 폭우를 피해 자신을 쇠똥에 묻고 쇠똥의 열기로 몸이 마르기를 바란 사람, 참주의 코를 물어뜯고 자신의 혀를 깨물어 참주에게 뱉었다는 사람... 이들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기 힘든 방황과 기행을 펼쳐 보인다. 평생 방황의 운명을 타고난 이들은 바로 철학자들이다.

철학은 삶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므로, 삶이야말로 철학이 구성되는 장소임이 틀림없다. 철학자는 삶을 철학으로 일궈내고 그것을 담론의 형태로 바꾸어 나간다. 언어적 형상을 갖추지 않은 비담론적인 것들이 언어적 형상이 있는 담론적인 것으로 변환된다. 그러나 철학 담론은 변화하는 삶을 완전히 담을 수 없고, 오히려 변화하는 삶이 철학의 담론적 구성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이 구절은 위에서 얘기한 메를로-퐁티의 지각에 관한 비유와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고, 삶을 다루지만 다 다룰 수는 없는 전기의 특성까지 한 번에 설명하는 것 같아서 전체 글 중 가장 마움에 드는 구절입니다. 

그저 철학에 대한 흥미를 돋우기 위해 철학자의 삶을 끼워 넣은 게 아니라 그들의 철학 자체가 삶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의식이 있어서 이런 책을 썼다는 점이 큰 감동이었습니다. 

4. 강초롱, <철학을 살아내고자 한 철학자, 보부아르>
저는 학교에서 실존철학을 배우면서도 보부아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아서 을유문화사 이벤트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도 가지고 있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보부아르를 짧게나마 다룬 책도 있어서, 배운 건 아니고 혼자서 더듬더듬 그의 철학을 읽어 본 수준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보부아르에 대한 학문적 편견이 적었나봐요. 

이 글을 읽으면서 보부아르에 대한 평가가 보통 사르트르의 제자, 그의 철학은 사르트르의 변형 정도로 여겨졌다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 이게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여성 철학자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수가 많았다는 건 공부하다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한 몫을 하는 여성 철학자는 정말 귀한데, 그런 철학자조차 사르트르와의 비교 연구 수준에서 그 가치를 소진했다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났어요. 

그런 점에서 이 글이 리뷰한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은 사르트르와 그의 철학을 비교하여 기술한 전기가 아니라 보부아르의 독자적인 철학과 그런 철학을 구축하기까지 그의 시행착오를 잘 담아낸 전기 같았습니다. 
학문의 관점에서 보부아르의 입지와 현실, 가능성과 가치까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강초롱 선생님의 글이 매끄러워서, 논평이나 사설이 있다면 더 찾아보고 싶을 정도로 글이 매우 좋았어요. 



적은 양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읻다가 철학 텍스트에 신경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원래도 희소성 있는 철학 텍스트를 많이 번역하고 또 편집 방식도 훌륭하지만, 리뷰라는 형식으로 다방면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을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알게 되어서 뿌듯했습니다. 

이 책을 고른 진짜 목적이었던 카프카 평전 리뷰는 아직 읽지 못했는데, 서평을 제출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보겠습니다. 

사실 리뷰를 읽어서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은 효과를 얻길 바랐으나 원본이 되는 책과는 또다른 종류의 글을 읽은 것 같아서, 읽고 싶은 책만 더 늘어났어요. 
저처럼 시간 대비 효율의 편익을 얻고자 하시는 분들은 되려 장바구니만 더 채워가실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
YES마니아 : 로얄 s********7 2024.06.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삶과 로고스가 함께 거주하는 미래의 철학'을 읽고
"'삶과 로고스가 함께 거주하는 미래의 철학'을 읽고" 내용보기
교차 3호에 실린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의 서평을 읽었다. 글쓴이는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인 강민혁이고, 과거에 작성된 저자 약력을 보면 은행원으로 일하신다고 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은 분들 중 20대 후반-30대 중반 즈음에 불현듯 삶이 철학과 포개져 읽고 쓰는 삶을 살게 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이인'
"'삶과 로고스가 함께 거주하는 미래의 철학'을 읽고" 내용보기

교차 3호에 실린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의 서평을 읽었다. 글쓴이는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인 강민혁이고, 과거에 작성된 저자 약력을 보면 은행원으로 일하신다고 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은 분들 중 20대 후반-30대 중반 즈음에 불현듯 삶이 철학과 포개져 읽고 쓰는 삶을 살게 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이인' 작가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 걸까. 그리고 철학자들은 왜 철학을 하는 걸까.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의 말에 그 저의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동안 나는 플라톤에서부터 니체, 푸코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고, 내가 읽고 좋았던 작품이면 뭐든 친구들과 함께 읽었다. 그때마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읽고 함께 철학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필자 강조)이라는 것을 말이다. 친구들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 주는 플라톤, 니체, 푸코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들의 텍스트를 악착같이 읽어 내고, 그 세계를 향유하는 기쁨은 엄청나다. 그런 순간이 되면, 어디 써먹을지 모르는데, 왜 이 어려운 글을 읽느냐는 볼멘소리가 쏙 들어가고, 오로지 책읽기가 주는 쾌락에 빠져 더 이상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강민혁에게 철학은 무엇보다 쾌락과 기쁨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욕망을 근원적으로 공유하고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어원을 '지혜를 사랑하는 것', '지혜와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풀이한다. 서평에서 강민혁은 철학자를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득도한 자', 세속에 초연한 초인적, 초월적 인물이 아니라 고정된 지혜/진리로 환원되지 않은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길 주저하지 않고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더 좋은 앎을 얻기 위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 내게 철학자는 이런 이미지에 가까워서 '지혜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란 표현에 밑줄을 그었다.

 

3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는 이런 철학자를 두고 “지혜로운 자”라기보다 “지혜를 소중히 하는 사람aspazomenos”이라 말한다.

<삶과 로고스가 함께 거주하는 미래의 철학>, 69쪽

소중히 여긴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소중한 A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 이를 어느 철학책에서는 '좋은 것'과 '옳은 것'의 대비, 이익과 지혜(진리)의 대비로 풀어내기도 했다. 일반적인 학문-지식은 대개 그 자체로 삶의 문제에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과학적 지식이 우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비존재/없음이 아니라 존재/있음이 왜 있는지 묻는 형이상학이나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를 묻는 철학적 인간학(막스 셸러), 혹은 물을 수 있는 것과 물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철학 훈련을 받지 못한 나로선 '철학'을 논할 때면 꽤 강한 압박감을 느낀다. 워낙 재야의 고수들이 많고, 학문적 엄정함과 엄밀함을 추구하는 분야다 보니 벙벙하고 엉성하게 얘기하면 혼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린달까... 하지만 오류가 좀 있을지언정 자유롭게 철학을 얘기하고 향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긴 블로그니까 !!) 철학은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다. 그래서 철학(예술도 여기 포함되는 듯)은 병든 자가 하는 활동이라는 말도 있다(<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 관련 경우가 인용된다). 삶을 건강하게 충족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굳이 현상 이면의 본질이나 의미에 매달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철학함-예술함은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이성복의 유명한 시구를 빌려 보자면 모두 병들었으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 아픔을 감각하고 세계의 아픔을 사유하는 활동이랄까.

 

철학의 난점은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삶의 합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보통 철학의 쓸모를 논할 때 철학적 앎을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곤 한다. 철학은 현실과 유리된 이상ideal에 불과하다는 거다. 강민혁 또한 서평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적인 삶을 설명하려는 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삶이 철학보다 앞서 가는 '제논의 역설' 같은 현상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정말 철학은 과시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일까. 더러운 현실을 지금 당장 직접 바꿀 순 없으니 아름다운 생각의 성체를 지으려는 중얼거림에 다름 없는가. 그래서 나는 철학이 앎-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방법 혹은 사유의 태도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철학자들의 '사랑론', '사랑의 철학'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 연애'에 실용적인 도움을 얻긴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연애 상담이 훨씬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사랑관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기모순이 덜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랑 개념과 역할을 순응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정립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아마도... 분명히...

강민혁은 생애와 사상, 삶과 철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서평 초반부에서 이렇게 적는다. 삶은 철학을 발명한다.

철학은 삶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므로, 삶이야말로 철학이 구성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철학자는 삶을 철학으로 일궈내고 그것을 담론의 형태로 바꾸어 나간다. 언어적 형상을 갖추지 않은 비담론적인 것들이 언어적 형상이 있는 담론적인 것으로 변환된다. 그러나 철학 담론은 변화하는 삶을 완전히 담을 수 없고, 오히려 변화하는 삶이 철학의 담론적 구성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철학이 기하학, 천문학처럼 발명된 것이라는 디오게네스의 서술은 흥미롭다.(서론 11절) 삶은 철학을 발명한다. 삶과 철학 사이의 본질적 관계 때문에 철학 담론은 삶의 방식대로 만들어진다. 이 발명품은 삶 주위를 돌며 삶을 닮으려 무던히 애를 쓰지만, 정확히 포개지는 일은 없다.

<삶과 로고스가 함께 거주하는 미래의 철학>, 69~70쪽

삶과 철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일상과 유리되어 있는 것 같은 고차원적 지성 활동인 ‘철학함’도 삶의 물질적 기반 위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삶에서 철학이 자연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철학적 사고를 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 같고, 일상에서 흘러가는 사유를 철학적 형식으로 전환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고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해 보여서다. 그렇지만 철학자의 삶에서 배태되지 않는 철학은 없다. 칸트가 늦잠 자고, 불규칙하게 살았더라면 그의 비판 철학은 없었을지도 모른다(혹은 지금과 모습이 꽤 달라졌을 지도 모르고). 고대 그리스 아테네, 18세기 프로이센의 예나, 19세기 말-20세기 초 빈, 20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등 도시라는 환경도 철학자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고. 근대 이후 철학이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닮는 전략을 통해 근대 학문으로서 요구되는 정합성, 체계성, 전문성, '과학성' 등을 충족시키고자 했다고 들었다(어제 동아리 모임에서 S님이 지적해준 내용). 강민혁도 주석에서 원래 철학자들은 외교관 등 다른 직업을 겸하면서 철학을 했는데 대학에 '철학과'에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생기면서 전문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며 '논문'을 생산하는 사람이 철학자가 된 변화를 지적한다. 어찌 보면 '문창과 교수' 출신 작가들에 대한 설명/비판과 되게 유사하다고 느꼈는데 이건 일단 넘어가기로... 그러다 보니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철학이 커다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 생물학에서 특정 유전자, 특정 세포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듯(그런 부분을 통해 '생명의 원리' 같은 전체 보편을 설명하는) 삶 바깥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세계 내에서 탐구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그러다 보니 전문가를 제외한 일반인에게 철학이 현실에 쓸모 없고,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 다른 하나는 철학의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적 글쓰기도 존재하지만 변증술-대화의 줄기도 존재하는데 후자가 거의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강민혁의 서평은 바로 이 변증술의 전통, 대화로써 철학을 하는 가치를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경유해 적극적으로 소환한다. 이런 변증술, 대화의 철학함은 소설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밀란 쿤데라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사실 한 편의 소설, 희곡처럼 재밌게 읽힌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헤르만 프랭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을 같이 읽으면 을매나 좋을까... (<최초의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도)

서평의 마지막 부분은 '진실을 말하기''진실에 대한 용기'를 논하는 파레시아로 채워진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예전에 약간 치졸한? 느낌의 변명으로 번역되곤 했던)은 파레시아의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엄청 의미심장해 보일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배경으로 철학자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12부작 드라마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서평을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외모와 성격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재밌더라. 센세들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달까... 한국 배우로 캐스팅을 하면 누가 어울리려나. 촬영 쉬는 시간에 하이데거 논문을 읽는다는 유태오 배우 말곤 딱히 떠오르지 않네...

p.s '철학자의 생애''철학자 전기' 분야 하면 그린비의 인물 시리즈 'he-story', 고명섭의 '극장' 시리즈 정도가 떠오르는데 '철학자 전기'도 재밌는 것 같다. 딱 들어맞는 예시는 아니지만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그랬고, 이상길의 <아틀라스의 발>이 그랬다.

y********7 2023.10.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