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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평민사에서 나온 한국희곡명작선에 특이한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정으래비.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 궁금해서 책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들꽃상여><조선의 여자><은행나무 꽃>등 여러 권의 희곡집을 낸 최기우 극작가의 작품이었다. 작가와 제목만으로 몰입은 충분했다. 정으래비. 그는 모반사건, 기축옥사로 기억되는 정여립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왜 정여립을 정으래비라고 했을까? 전라도 사투리로 정여립을 정으래비로 불리지 않나 싶다. 첫 장은 정여립과 선조의 대화로 시작한다. 둘은 투명한 빙벽을 두고 마주섰다. 선조의 냉랭한 말투와 날카로운 눈빛. 신하인 정여립의 단호한 진언은 파란을 예고하는 듯하다. 결국 정여립은 홍문관 수찬 자리를 내놓고 진안 죽도로 낙향한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는 점점 늘어나는데...... 서인의 대표는 정철이다. 관동별곡과 속미인곡으로 익숙한 이름 정철은 동인이다. 정철은 동인이었다가 서인 세력으로 이탈한 정여립을 배신자로 간주한다. 당쟁 속에서 정권을 단단히 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던 정철은 대동계를 조직해 전라도 지역 양반과 백성에게 신임을 얻고 있는 정여립을 지목한다. 정여립을 죽이면 백성의 동요가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경진 물음에 정철은 이렇게 대답한다. "백성이란 조금의 동요에는 크게 소리를 내지만, 그걸 누르는 힘이 강하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마련이지요." p. 25 정치인들에게 백성은 그저 정치적 도구일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오로지 권력. 그에 반해 정여립은 천하가 백성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천하를 어찌 어느 한 사람의 것이라 하겠는가. 천하의 주인은 천하에 있거늘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이기 때문이다." p. 29 사상이 이러하니 정철을 더 미워했을 터. 그에게 대동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어울리며 대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양반인 자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모두 함께 어울린다고 주장하니 백성에게는 반갑고 흥이 나는 일이겠지만 권력을 쥔 양반에게는 두려운 일이 분명하다. 결국 정여립은 모반을 일으킨 우두머리로 지목된다. 그를 비롯해 관련 인물 1000여명이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전라도 지역의 사람 씨를 말리는 피비린내나는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살아 남은 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이야기는 이 책 2막에 드러난다. 무대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어린아이의 애달픈 목소리가 시체 위를 헤집고 다닌다. 광희문 밖을 서성거리는 거렁뱅이들이 등장하자 무겁게 가라 앉은 분위기가 블랙홀처럼 빨려 나간다. 언뜻보면 이들은 거렁뱅이지만 거렁뱅이가 아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대동계 대원부터 정여립의 친적집 종, 그리고 정철의 종복까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어떤 기분일까? 죽지 않았지만 죽은 거나 진배없는 삶은 지옥이나 진배 없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현상금에 눈이 먼 사람들은 정철이 그러했듯 없는 죄를 만들어 발고하려 한다. 조건이나 증거 따위는 필요 없다. 만들어 내면 그만인 것이다. 더구나 거렁뱅이다. 누가 거렁뱅이의 말을 믿겠는가. "패자에게는 어떤 누명을 씌워도 항변할 길이 없는 법. 후에 정여립을 떠올리는 자가 있다면 새로운 역사가 쓰이겠지." p. 73 작가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높낮이가 없고, 서로 오가는데 문턱이 없고, 대문이 있지만, 잠그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나라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천하는 만백성의 것, 누구의 것도 아닌 천하는 천하의 천하인 세상이야 말로 내가 중심이 아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하늘, 땅 모든 자연 만물을 대등하게 대하고 섬기는 자세는 정치계에 가장 필요한 사상이 아닐까. 김포졸은 정철 대감의 편지를 공개하겠다는 걸쇠의 말에 그만 멈추라고 한다. 김포절, 그가 혹시 정여립일까? 아니면 길삼봉? 누가 되었든 더는 서로를 죽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이 세상이 좀 더 대등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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