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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5>에서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반도에서의 변화, 즉 프랑크족의 이탈리아 정복에 이은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한편 저자가 보기에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연대기는 허약해서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즉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 비잔틴제국은 끊임없이 제국의 강역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는데, 전성기의 로마제국을 이끌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황제가 없었고,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제위를 둘러싸고 권력싸움이나 벌이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로마제국 쇠망사5>에서 다루고 있는 600년 기간동안 모두 60명이 황제가 재위했는데, 이는 아이작 뉴턴의 연대기 규칙에서 말하는 안정된 제국에서의 황제의 평균재위기간이 18-20년인 것과 비교된다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비잔틴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야만족(저자는 일관되게 라틴민족이 아니면 야만족으로 정리하는 모습입니다)들이 점점 세를 키워 압박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정적인 요소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아랍부족들을 하나로 묶어낸 것을 계기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동쪽으로는 인도북부까지 무서운 기세로 강역을 넓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잔틴의 영토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슬람교의 성립과정과 칼리프시대에 이어 우마이야왕조를 거쳐 압바스왕조에 이르기까지 아랍부족의 전성기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슬람이 빠르게 세력을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와 금식, 자선이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의무라는 단순하고 합리적인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관용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다만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서 후(後) 우마이야왕조와 압바스왕조 사이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압바스왕조가 우마이야왕조를 무너뜨렸을 때 극적으로 살아남은 왕족이 이베리아반도까지 달아나 후(後) 우마이야왕조로서 압바스왕조와 서로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사라센제국이라는 용어는 유럽사람들이 통상 이해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신봉자들이 이룩한 대제국의 총칭’으로 7세기 중엽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처음 아랍계부족들에 의한 우마이야왕조와 압바스왕조가 성립하였다가 압바스왕조가 무너진 다음에는 중국 북부에서 이주해온 투르크계 부족들에 의한 셀주크왕조와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에는 몽골계의 티무르제국, 무굴제국 및 사파위제국 등이 중동지역에서 명멸했으며 이집트 지역에는 파티마왕조가 있었습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대식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랍부족이 세력을 키워가는 것에 더하여 비잔틴제국의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인과 헝가리인(마자르족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이 서진하고, 러시아의 슬라브족이 남진하면서 제국을 압박한 것도 결국 보상금을 쥐어주면서 충돌을 피하는 양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교리의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는 분파들이 생기면서 서로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다가 세력을 얻지 못한 분파를 탄압하거나, 이들이 탄압을 피해 타국으로 피한 것도 제국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사라센문명이 인류문명에 기여한 바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시대 꽃피웠던 다양한 문야의 학문적 성과들은 로마를거쳐 중세로 넘어가면서 사장되어 잊혀졌던 것을 사라센사람들이 이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철학, 의학,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진보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라틴민족 외에는 야만족이라고 바라본 협소한 시각 때문이었는지 지나치게 저평가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5>에서 새롭게 파악한 점은 9세기 무렵 슬라브족이 네 차례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더 공부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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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도도한 흐름의 연속이고 빈공간과 진공상태는 오래 참지는 못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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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 같았던 로마는 동서 분리를 즈음하여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동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 속에 로마는 존속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좀 심하게 말하면) 껍데기만 남은 모습에서 옛 로마의 지중해의 여왕으로서의 영광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로마의 쇠퇴는 다른 모든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운명의 부침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현상이 아니었고, 서양의 역사가 로마라는 한 국가의 역사를 벗어나서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상호작용하는 역사로, 그리고 아랍인, 사라센인, 투르크인, 중국인 등 전혀 다른 문화체계와의 교류의 역사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현상도 아니었다. 하나의 국가로서 로마의 빛은 점점 사라져갔지만, 다른 국가들의 모태이자 이웃으로서 로마의 의미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적어도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의미는 크게 줄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판도에서 형성된 ‘신성로마제국’은 로마의 위세와 영광에 기댄 명칭일 뿐 로마를 계승했다고 보기에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동로마제국’은 여전히 실체적 권력이긴 하였으나, 사방을 둘러싼 이민족의 침략과 내부의 정치적 분열로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이나 겨우 유지하는 찌질한(!!!)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에드워드 기번이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로마제국 쇠망사] 집필을 종결하려고 하였던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2.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이후 약 800년 동안 동로마제국은 혼란과 빈약함을 노출시켰다. 이 당시 동로마제국의 정체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 보통 우리가 ‘제국’이라고 하면 창시자의 직계 또는 방계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세습하는 법이다. 간단히 말해 혈통(lineage)에 따른 왕위의 세습인데, 이 당시 동로마제국에서는 이렇게 황가(皇家)를 이룬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다. 황제의 자리는 반역과 폭동, 모함과 음모로 점철되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모함하며, 형제 사이에 옥좌를 두고 서로 죽이며, 친밀한 친구 사이가 갈라서고, 어제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돌변하고, 황위를 목표로 한 폭동과 암살의 무한쟁탈이 벌어진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딱 맞는 형국! 그리고 여기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도덕적 타락, 제국 신하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겹치면서 동로마 제국은 천혜의 요새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약소국으로 축소되었다.
크리스트교는 허약해진 제국 곳곳에서 망조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삼위일체 논쟁과 성육신 논쟁에 이어서 또 다른 신학논쟁과 파벌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성상(聖像) 숭배 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은 로마 신민들간의 불화를 부르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서 그나마 한 형제라는 인식을 유지했던 교회를 라틴 교회(로마 교황)와 비잔티움 교회(그리스 정교회, 동로마 황제)로 두 동강 내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의 문제로 콜로세움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박해는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박해가 나타난다. 즉,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성상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절차와 형식, 권위에 따른 차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약탈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주장에 외곬으로 빠진 광신(狂信)은 국가의 안위에마저 큰 해악을 끼쳤다. 바울파와 야고보파라는 근본주의적 종파는 사라센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도시의 안위를 팔아넘긴다. 라틴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의 대립은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의 탐욕과 어우러져 라틴 제국들에 의한 비잔티움 약탈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하였고, 동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하던 급박한 시기에 유럽 제국들이 보여주었던 수수방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3. 한편 이탈리아의 로마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로마 교황이 신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세속의 영역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샤를마뉴 대제나 오토대제와 같은 서유럽 황제들과 교황이 서로간의 이해를 위해 결탁하는 수준이었다. 황제는 ‘로마제국의 계승자’, ‘크리스트교의 보호자’라는 명분을 얻었고, 로마 교황은 성상 숭배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던 동로마제국 황제의 무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방패라는 실리를 얻은 것이다.
처음에는 무력을 보유한 황제의 권한이 강했으므로 무게추가 황제 쪽에 쏠렸다. 오죽했으면 교황이 서거한 후 선출되는 새로운 교황은 교회의 수호자인 황제가 승인하고 동의를 표시하지 않으면 정식 교황이 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침에 취약한 속세의 권력에 비해 일관된 종교적 열정을 등에 업은 교황의 권한은 점차로 힘을 얻기 시작하여 세속의 권력과 재산을 두고 황제와 맞서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교회 재산의 출발은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청의 유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기부한 로마 주변의 토지와 약간의 재산이었지만 이는 곧 후대 황제들이 지켜야 하는 관습으로 고착되었고, 교황청에 대한 황제의 기부는 이후 더욱 확대되어 카롤링거 왕조는 동로마제국 황제가 임명하였던 로마 총독령을 교황에게 넘김으로써 교황의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을 대내외적으로 높여주게 된다.
이제 천상의 권한이라던 교황권은 속세로 내려온다. 몇몇 교황들은 탐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일례로 황제 소유의 토지를 교황에게 기부한다는 서류를 날조하여 교회의 재산으로 삼으려 했던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나아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각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 즉,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은 교황과 황제의 힘의 균형관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이익이 있는 곳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긴 곳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 서양의 중세 초기를 관통하는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이 지역(이탈리아 전 지역)들을 차지하기 위한 거래에서 교황들은 야심과 탐욕을 드러내 심한 비난을 받는다. 그리스도교 사제라면 자기 직분의 덕목을 훼손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통치하기 힘든 지상의 왕국을 겸손하게 거절했어야 마땅하다. 충실한 신하, 아니 관대한 적들조차도 야만족의 전리품을 나눠 갖는 데 그처럼 안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134)
(교황청의 목표는) 추기경 회의에 선거의 자유와 독립성을 주고 황제와 로마 민중의 권리를 영원히 폐지하는 것, 서로마 제국을 교회의 봉토 또는 성직록(聖職祿)으로 증여하고 재점유하며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을 지상의 왕과 왕국으로 확대하는 것.(p.160)
4. 로마의 역사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슬람교이다. 이 신흥종교는 믿음을 보유한 사람들의 신념과 가치관에서부터 소소한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유사하였지만,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을 들고 정복을 통한 확장과 포교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차이점을 보였다. 마호메트가 사망한 후 10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슬람교도들은 아라비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예루살렘,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유럽 땅 스페인에까지 세력을 미친다.
이슬람교가 크리스트교 못지않은 세계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에 대한 이해수준이 매우 낮은 내 입장에서 비판의 칼을 들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기번이 많은 역사적 문헌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확장 과정에서 내가 받은 인상 정도를 쓰려고 한다.
이슬람교 전파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관용은 [로마제국 쇠망사] 전체를 통해서 지겹도록 반복되어 온 크리스트교의 획일성과 폭력성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신선했다. 사실 폭력과 정복을 수반한 포교 방식은 이슬람교에 대한 가장 큰 비판지점 중에 하나였다. ‘코란과 칼’ 중에서 양자택일 하는 식의 이슬람 포교방식, 그러니까 코란을 선택할 경우에는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철저한 파괴와 박해를 가한다는 이슬람교의 포교는 무척이나 비인간적이면서 폭력적인 것이다. 그런데 에드워드 기번은 약간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포교 과정에서 잔혹한 면이 분명 있었으나, 그러한 면은 어느 종교이든지 다른 종교와의 초기 접촉 과정에서 거의 예외없이 발생하였던 것이며, 오히려 이슬람교는 박해 못지않게 상당한 관용을 베풀어 정복지에서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크리스트교의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아프리카, 스페인을 정복한 후, 칼리프들은 다음과 같은 관용을 베풀었다.
11세기 혁명 후(이슬람의 동방, 아프리카, 스페인 정복) 터키 제국의 유대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들은 아랍 칼리프들이 허용한 양심의 자유를 즐겼다. (중략) 가톨릭교도들은 이집트의 교회를 같이 썼고, 동방의 모든 종파들은 관용이라는 공동의 혜택을 받았다. 대주교와 주교, 성직자의 지위, 면책권, 국내 관할권은 행정관이 보호해 주었다. (p.3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슬람교 역시 근본주의적 신앙이 불러일으킨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런 부정적인 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사건이 당대 최고의 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렸던 것이었다. 70만권에 이르던 인류의 지적 보고에 대한 처리를 묻던 현지 사령관에 대한 칼리프의 아래와 같은 대답은 그야말로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의 글이 신의 서적과 의견이 일치한다면 (중복되어서) 쓸모없으니 보존할 필요가 없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해로운 글들이므로 마땅히 파기해야 할 것이다. (p.323)
5. 앞서도 언급했지만 원래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 저술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끝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기번은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 계속 저술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서 마지막 두 권에 대한 계획 가운데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동로마제국 800년의 역사를 과감히 압축할 것이며, 둘째, 서로마 제국의 판도에서 번영하기 시작한 과거의 ‘야만족’ 및 ‘이민족’ 왕국들과 동로마 제국의 이웃에서 발흥하는 이슬람 등 새로운 문화와의 관계 속에 로마사를 서술하겠다는 점이었다.
기번의 이런 편집 방향 덕분인지 [로마제국 쇠망사 5]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동로마제국의 역사나 황제들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속세의 권한을 얻기 위하여 무진장 애쓰던 교권(교황)의 노력이었다. 서양의 중세를 일컫는 ‘신권(神權)에 의한 사회 전반에 대한 지배’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물질적, 정신적 기틀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는 셈이다. 둘째는 이슬람교의 발흥이다. 알라를 유일신으로 따르는 이 신흥종교는 최초 발원지인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북부와 스페인,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휩쓸었고, 궁극적으로는 ‘로마사’의 종언을 울리는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5]는 읽는 내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노(老)제국 로마와 떠오르는 새로운 역사의 주역들 사이의 대조를 느끼게 해 준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유럽의 프랑크족과 게르만족이, 뒷부분에서는 아랍민족과 투르크인들이 로마와 대조되는 새로운 주역들이다. 이런 흥미진진한 대비 과정 속에서 동로마제국 쇠락의 원인이 단순한 ‘역사적 운명’이 아니라 황족을 비롯한 신하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무능함,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는 크리스트교의 세속적 권력 추구와 무관용성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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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 5권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며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는 시대의 동로마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제목에서 흔히 연상할 법한 내용과 달리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고 말하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한참 뒤까지 이야기가 이어진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세력과 동로마 세력이 본격적으로 맞부딪히기 시작하는 시대, 동로마의 사회 문화 제도 등의 요소와 함께 당시 동로마의 역사적 이야기를 밀도 있고 알차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주석이 풍부한 점도 좋은데, 18세에 쓰인 책이어서 오늘날에는 틀린 가설로 증명된 것 등에 대해서 설명을 잘 해 주고 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본문 내용 자체에만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어요. #연말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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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5권>은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비잔티움의 정세변화를 한 장(chapter)에 담고 대부분의 분량을 비잔티움의 인접지역의 변화를 소개한다. 중앙아시아아, 중동, 그리고 서유럽에서 일어난 다사다난으로 인해 비잔티움(동로마)이 겪는 고난을 담고 있으며 비잔티움의 노쇠한 운명은 간혹 발휘되는 용기와 기백 혹은 천운으로 적군에 맞서 작은 승리를 얻어내기도 하지만 망국으로 가는 흐름을 꺽지는 못한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 5권>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중앙아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뒤흔든 이슬람의 부상을 다루고 있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설된 이슬람교는 메카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하고(헤지라) 그곳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힘을 키워나간다. 무함마드의 이슬람은 수 년이 지나지 않아 강력한 결집력을 가진 세력을 형성하고 이윽고 메카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메카를 수중에 넣은 후 점차 영향력을 넓혀간다. 기번의 말을 빌리자면 '이슬람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체제보다 순수하고, 모세의 율법보다 관용적이었기에'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어졌다. 더욱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한다면 재산과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서 정복자에게 굴복한 많은 이들은 개종을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유일신 알라만을 숭배하며 모든 인류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사명을 띤 이슬람은 모든 이단에게 혹독한 벌(현세와 내세 모두에서)을 가하는 것이 지상과제라 생각했다. 여느 종교가 그렇듯 이슬람 또한 상황에 따라 가변적 자세를 취하는데 예를 들자면 비잔티움의 헤라클리우스에게 패배하고 그리스도교의 신민들의 자유와 교역등을 보장하는 등의 예외를 둔다.
비잔티움이 간헐적으로 세를 과시하던 것과 달리 성장기의 이슬람은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가 된다. 두 차례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668~675년, 그리고 716~718년에 이루어졌는데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함락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비잔팀움 제국에 위협과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수도를 향하는 제국의 변방을 약탈함으로써 물질적 실리 또한 챙길 수 있었다.
이슬람은 721년부터 프랑크왕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이 소아시아를 비롯한 동로마제국의 변방, 그리고 과거 페르시아 영토까지 영역을 확장해 서유럽을 넘보기에 이른 것이다. 승리를 이어가며 진격하던 이슬은 723년 카를 마르텔에 막혀 패배함으로써 프랑크왕국 점령은 수포로 돌아간다(카를 마르텔의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이다.).
무함마드(마호메트) 사후 뒤를이은 바크르, 우마르 등이 치세가 끝나고 무아위야가 세운 우마이야 왕조가 등장해 아랍을 지배하게 된다. 무함마드가 세운 이슬람의 전통은 그가 죽은 후에도 당분간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경쟁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750년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은 압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쫒아내고 권력을 차지했고 우마이야의 후손은 스페인으로 도망쳐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했다. 10세기가 되자 아프리카 북부에서는 마호메트이 딸 파티마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파티마 왕조가 들어섰다.
어느 왕조나 그렇듯 창건 초기의 치세는 건실하고 진취적이며 효율적인 통치를 하지만 안정의 세대가 거듭될수록 향락과 타락에 물들어 망국으로 치닺는 것처럼 압바스 왕조 또한 같은 과정을 겪는다. 과거 로마제국이 그러했듯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영욕의 부침을 겪었고 후대들의 사치와 나태는 이슬람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켰다.
9세기의 이슬람은 크레타, 시칠리아를 점령했고 이탈리아 변방, 로마까지 약탈할 정도로 세력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타락한 압바스 왕조의 지배력에 균열이 생겼고 내란으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한 때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던 이슬람은 9세기 말(963ㅡ975년) 비잔티움의 니케포루스 포카스와 요하네스 치미스케스가 펼친 동방원정으로 바그다드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고 킬리키아와 안티오크 그리고 키프로스 등을 잃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헤라클리우스 이후 줄곧 수난과 공포를 심어줬던 이슬람에게 부분적 설욕을 했다라고 할 수 있는데 분명한 것은 비잔티움과 이슬람 모두 전성기의 힘을 잃었다는 것은 서로에게 위안과 안심을 주었을 것이다.
11세기에 이르자 비잔티움 제국은 서쪽의 노르만과 동쪽의 투크르족의 침략을 받고 이탈리아와 아시아의 일부를 잃는다. 제국의 위력은 적들에게 경시되었고 실제로 비잔티움은 지속적으로 약해져 갔다.
<로마제국 쇠망사 5권>은 이전 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 대한 방대한 역사를 싣고 있는데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을 더욱 부치긴 이슬람에 대한 설명에 큰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기번의 서술을 읽다보면 이슬람교 뿐 아니라 종교라는 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문장에서 이슬람교가 가진 특성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이슬람 초기 신앙과 예언자의 말에 힘입어 두려움 없이 맹종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오래전 로마 제국이 번창하던 시기 카이사를 따르던 로마 군단의 위용을 떠올리게 했다.
적군을 마주해 생사의 기로에 선 병사들에게 지휘관들이 던진 한 마디 "천국이 그대를 앞에 있고 지옥의 불길이 그대들 뒤에 있다."는 종교에 심취한 병사들의 후퇴없는 결사항전을 가능하게 했고 실제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함마드와 그의 사상을 열렬히 따랐던 '신의 칼'이라 불린 할리드 장군 또한 독실한 이슬람교도로서 신의로부터의 사명(이단의 멸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의 용기와 활약으로 이슬람이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의 동방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군대는 상대방에게 3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는데 '코란이냐, 조공이냐, 칼이냐'가 그것이다. 상승세를 탄 이슬람 군대를 제압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았고 극렬히 저항할 수 있는 세력도 드문 상태에서 많은 도시들은 조공이나 코란을 선택했고 신앙적 이유든, 제국에 대한 충성의 이유든 '칼'을 선택했던 도시들은 처참하게 유린당하곤 했다.
기번이 소개한 이슬람의 일화 가운데 하나를 더 적어보며 <로마제국 쇠망사 5권>에 대한 리뷰를 마무리하려 한다.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전리품 가운데 유일하게 약탈당하지 않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칼리프인 우마르의 한 마디 "그리스인들의 글이 신의 서적과 일치한다면 쓸모없으니 보존할 필요가 없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해로운 글이므로 마땅히 파기해야 할 것이다."에 의해 방대한 양의 서적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기번은 이 일화에 대해 꾸며진 것이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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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 권은 1776년 2월 17일 간행되었다. 기번은 무역과 열대농업 감독관이라는 수입이 좋은 한직을 얻었고, 1781년 제2권과 제3권을 간행했다. 1782년 감독관직이 폐지되어 수입이 많이 줄어들자 기번은 영국을 떠나 로잔으로 갔고, 그곳에서 3권을 더 저술해 1788년 5월 8일에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