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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양, 대한제국의 한성,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경성, 대한민국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서울은 실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어떤 이에게 서울은 근사한 대도시의 모습으로, 어떤 이에게는 한국전쟁 직후 폐허의 모습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화면 너머로 고풍스러운 궁궐이 넓게 펼쳐진 모습으로 기억된다. 오늘날의 서울은 지난 시대의 면면을 모두 품고 있다. 도시를 거니는 것만으로 고즈넉한 조선시대의 한옥 처마를, 붉은 벽돌로 쌓은 개화기의 서양 고전주의 양식 출입구를, 균일하게 따라 지은 전후의 콘크리트 육면체를, 높다랗게 뻗어 올린 근대기의 고층 빌딩을, 독립 오브제로서 개성을 드러내는 현대기의 건물들을 눈 안에 담을 수 있다. 이 책 서울건축사: 건축으로 읽는 629년의 사회문화사는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서울에 남아 있는 문화재와 건축물을 통해 서울이라는 공간의 변천, 서울건축사의 흐름을 통사로 엮어 한눈에 조망케 한다.
나는 먼저 1880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근대기에 주목했다. 학창시절 건축을 전공했던터라 전통건축에 대해서는 연구 문헌과 답사를 통해, 현대건축에 대해서는 거의 실시간으로 쌓이는 정기 간행물과 단행본 책자,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 관련 전문가들의 강연 및 답사로 알 기회가 있었지만 근대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교육과정도 많이 바뀌어 그렇지 않겠지만 당시 건축(학)과에서의 근대건축 교육은 서양 건축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간략했으며 우리 건축 역사에서는 다루지 않았거나 다루었다하여도 2~3명의 건축가에 국한된 일부 건축물만을 공부했던 것이 전부였다. 근대기가 없다고 말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접하자 마자 근래의 최대 관심이기도 한 근대기의 건축에 대해 펼쳤다. 서울에 국한되어 있다고는 하나 많은 부분에서 그렇듯 건축도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며 당시와 지금의 시대상을 견주어 봐도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수 많은 저술을 통해 건축을 이야기하고 있는 임석재 교수는 이 시기를 어떻게 말 해 주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저자는 근대기를 1차 전환기 1880~1907, 근대 형성기 1880~1945, 2차 전환기 1945~1960, 근대 완성기 1960~1990 의 4단계로 구분하였다. 1차 전환기는 다시 개항과 서양 건축의 등장으로, 근대 형성기는 고종의 건축 활동, 서양 세력의 진출과 서양 역사주의 양식의 정착, 일제 강점기의 경성건축과 항일 민족건축으로 나누었으며 2차 전환기는 해방공간과 1950년대로 정하여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1960년부터 1990년에 해당하는 근대 완성기는 국제주의 양식과 고도성장의 신화, 작가주의 형태주의 공간주의 등으로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시기를 나누어 놓고 보니 나의 머리속에도 전체적인 뼈대가 잡힌 느낌이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의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그 건축에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문화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야 서울건축사 근대기를 읽었으니, 조선시대 전통건축(1394~1880)과, 현대기(1990~ )도 빨리 읽어봐야 겠다.
* 내가 반한 글귀들 & 파편적 생각들
건물 차원에서 1차 전환기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저자는 크게 여석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건축 재료에 대한 기본 인식의 변화다. ... 우리의 전통건축에서는 가능하면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는데 서양 근대 건축에서는 인공성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변하였다. ... 둘째 장식의 소멸이다. 재료가 변하면 가정 먼저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장식의 변화다. 한국건축에서 장식은 무엇보다 재료를 쌓아 구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하는 항시적인 결과로 봤다. ... 서양건축에서는 이와 반대로 구조를 먼저 세운 뒤 장식은 표피에 더하는 방식으로 구조와 장식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했다. ... 구조와 장식을 분리하는 특성은 콘크리트가 주요 재료로 등장하면서 오히려 장식 자체의 소멸을 가져오게 되었다. 셋째, 투명 공간에서 불투명 공간으로의 전환이다. 한국의 전통 공간은 내외의 명확한 단절을 가능한 한 피하는 편이었다. ... 반면 서양의 건축 공간은 내외 공간을 명확하게 단절하는 전통이 강하다. 석재 사용에 따른 결과다. ...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근대 재료인 콘크리트는 기본적으로 석재를 대체하는 성격이 강했다. 넷째, 마당을 낀 어울림에서 독립 오브제로의 변화다. ... 가능하면 여러 개의 방과 생활 기능을 한 채의 건물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 단일 육면체가 면적 활용, 시공, 사후 관리 등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미시 요소인 문에 나타난 변화다. ... 문의 기본적인 기능을 실내외 공간을 단절해서 보안을 확보하는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문은 꼭 필요한 정문 하나만 내는 편이었다. 그 대신 도로를 접하는 쪽의 형식화가 발달했는데, 이런 특징을 출입구 형식화라 부른다. 여섯째, 비대칭에서 대칭으로의 변화다.(210~214p)
근대형성기에는 그 누구보다 고종의 역할이 컸다. 고종의 건축 활동 방향은 건축 양식과 목적 등에 따라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양 건축을 받아들여 근대화의 추진력으로 삼았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을 필두로 독립문(1897), 구 대한의원 본관(1908, 현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기기국 번사창(1884) 등이 대표적인 예다. ... 둘째, 의도적인 민족건축 혹은 전통건축의 자연스러운 연속, 중첩 현상이다.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1903~1904 추정)과 승재정(1900년대 추정), 이재준 가옥(1900년경 추정),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댁 재실(1906), 우정총국(1884), 황학정(1898) 등이 대표적인 예다. 셋째, 도시공원과 수원시설 등의 도시기반시설을 조성했다. 탑골공원(1897), 장충단(1900), 고종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전(1902), 뚝섬수원지 제1정수장(1908) 등이 대표적인 예다. 넷째, 이상의 종합화로서의 덕수궁 건설이다.(218~219p) 개인적으로 이중 눈에 띄는 건축물로 현재 서울특별시 수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뚝섬수원지 제1정수장을 들 수 있겠는데, 전체적으로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나 출입구는 석재로 되어있고 창문은 또 아치다. 이절적인 것들의 집합인데 저자는 이를 두고 출입구만 소품화된 개선문으로 처리해서 형식화를 가했으며, 서양만의 지붕 천장 구조방식 등을 통해 서양식 가치관이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건축적 증거라고 하고 있다.(240p)
1880년~1945년에 이르는 근대 형성기에는 서양 세력의 진출과 서양 역사주의 양식의 청작기라고 하였다. 저자는 서양 세력의 활동은 양면적이었다고 한다. 부정적 평가에는 이들이 서양 제국들의 제3세계 침투에 교두보 역할을 했다거나 기독교계 선교단체의 경우 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선교에만 치중했으며 궁극적으로 한국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서양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긍정적 평가에는 여러모로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기틀을 닦았으며 특히 일제처럼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거나 물질과 인력을 착취하지 않고 순수하게 교육, 구호, 의료 등의 민간 분야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이 있다. ... 이상의 배경 아래 근대기 초반 한양에 진출해서 서양 건축을 이끈 주축은 크게 공사관, 프랑스 가톨릭, 미국 개신교회와 선교사학, 영국성공회와 구세군 등 네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더하여 특정 세력에 의해 주도되지는 않았지만 서양 세력과 함께 등장한 서양식 주택도 근대 형성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255~256p) 이 시기의 중요한 건축물로는 한국 개신교의 유일한 19세기 건물인 정동교회다. 정동교회의 건축적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건물 외관은 19세기 유럽 중세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안 고딕에 가까웠다. 빅토리안 고딕 양식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교회에 애용되었는데, 아펜젤러가 이 양식을 적용하여 경성에 지은 것이었다. 순수하게 조형성만 보아도 깔끔하고 보기 좋은 외관을 자랑하며 특히 아치창의 장식 처리가 섬세하다. 둘째, 실내에서는 신도석 사이의 기둥열을 돌 기둥이 아닌 목조 기둥으로 세운 점이 특이하다. 아마 처음 지을 당시나 1926년 증축 때의 상태가 보존되고 있다고 추정된다. 셋째, 단지의 배치 구성이 마을 분위기를 이룬다. 이 또한 영국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배치 구성이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들이 광활한 대지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애용하는 교회 배치 형식이 되었다. 정동교회의 설계자는 일본인이었으나 건축주 아펜젤러가 일정한 방향을 제시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명동성당과 여러 면에서 좋은 짝을 이룬다. 우선 범기독교의 양대 축인 개신교와 가톨릭의 교회 건축을 각각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는다.(266~267p)
1910~1945 시간동안의 일제강점기도 우리로서는 근대형성기에 속한다. 일제강점기의 건축에 대해서는 다섯 단계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첫째, 고종과 서양세력에 의해 시작한 근대기 건축의 연장선, 둘째 포괄적 의미에서 본 우리 현대건축의 일부, 셋째, 일제가 남긴 침략의 흔적이라는 별도의 문화재 항목 넷째, 일제가 훼손한 우리의 소중한 전통건축과 복원의 작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상을 종합해서 최종적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되돌아보는 물리적 증거 활용 부분이다. 더불어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유럽 역사주의, 근대 건축, 전체주의, 일본식 주택, 항일 민족건축 등의 다섯가지 주제로도 이 시기의 건축을 분류해 설명해주고 있다.(290~291p) 이중 개인적으로 주목한 부분은 고종과 서양세력에 의해 시작한 근대기 건축의 연장선이기도 하며 그래서 근대 건축이라는 주제로 포괄할 수 있는 창경궁 식물원 대온실과 경성제국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이공학부 본관(현 다산관)과 이공학부 전기전자관(현 전기정보공학관)이었다. 대온실은 철재와 유리만으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건물이라는 점, 건축 자체의 아름다움과 구조적인 특성 때문이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건축은 수직성과 수평성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어 있는 형태의 특이함, 반복적인 건축어휘 등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물론 항일 민족건축도 비폭력 문화운동으로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세부적 내용으로, 주로 종교를 중심으로한 반일정신이 반영된 건물이 있었다. 봉황각(1912), 천도교 중앙총부(1921), 천도교 중앙대교당(1921), 심우장(1933), 조계사(창건 1910, 개축 1937) 등이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좀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국민 계몽을 위한 교육기관이 있으며 그 외 조선왕실 관련 건축 활동(동국대학교 정각원, 황학정 등)과 일제강점기에 경성을 점령했던 일본식 주택 및 근대 한옥 역시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 중 주목할 만한 건축으로는 불교계에서 항일을 대표했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용운이 말년을 지낸 심우장이 있다고 할 것이다. 보통 우리네 집들은 채광 등의 이유로 남향을 선호하는데, 이 집은 북향이라고 한다. 남촉에 있는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반대편으로 정문을 내다보니 북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과 부엌을 배치한 평면과 전체적인 모습은 한옥을 유지하면서도 툇마루가 사라지고 전면 유리면을 달아 대청이 거실처럼 변한 부분은 근대 한옥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313p)
우리나라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2차 전환기(1945~1960)에 들어섰다. 저자는 다시 네 가지 이유를 들며 이 시기가 왜 전환기였는지도 설명해주고 있다. 우선 중첩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시대에서 산업시대로 넘어가는 패러다임의 변화 한복판에서 양 시대의 건축이 공존했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이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손으로 시작한 본격적인 근대건축이 시작했다는 것이다. 1차 전환기가 최초의 의미였다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의미로서의 근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었다. 한계와 문제점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던 이 시기에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자체가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들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출발점을 이루었으며 이것을 이끄는 건축주들도 비로소 민간 건축이라 부를 수 있는 주체가 형성되었다는 얘기였다. 세번째로 든 이유는 일정한 근대적 완성도를 보이는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서양권의 건축 역시 전환기에 해당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저자는 위와 같은 배경 아래 서울의 2차 전환기 건축에는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첫째 일제 잔재의 청산, 둘째 정치 공간으로서의 건물, 셋째 서양 전통건축의 연속 현상, 넷째 근대 건축의 씨앗으로서 일반 콘크리트 건물의 등장, 다섯째 작가주의의 탄생, 여섯째 골목길의 초기 토대 형성 등이다.(324~326p) 이 시기 개인적으로 주목한 건축은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도 쓰이곤 하는 사립대학교들의 유서깊은 건축물들이다. 대부분 석재로 지어졌고, 비례와 대칭성이 보이며 세로나 가로로 높거나 길어 분위기를 압도하며 열주가 보이기도 하여 외국에서나 볼법한 건물들이다. 즉 서양의 전통건축인 고전주의 양식 건물을 옮겨온 것 같은데 왜 하필 서양의 고전주의 건축이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고려대학교, 경성제국대학 등이 해방 후에도 주요 대학으로 남으면서 대학이라는 최고 학부의 건물에는 서양 고전주의가 적합하는 선례, 인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첫 이유였고,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을 추종하며 그 들의 건축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 서양에서도 교육기관 건물에는 고전주의가 잘 어울린다는 선례,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교에 가장 적합한 건축 역시 서양의 전통건축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서양 고전주의 양식의 권위와 품격을 활용한 위상 정립 때문이었다는 것이다.(339~340p)
1960년부터 1990년에 해당하는 시간은 근대 완성기다. 근대 완성기는 다시 국제주의 양식과 고도성장의 신화, 작가주의 형태주의 공간주의 등으로 살피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국제주의다. 한강의 기적이 있엇던 이 시기에는 박스형 육면체가 서울의 도시와 건축을 완전히 대체하였으며, 한국 근대건축 2세대가 등장했고, 대형공간이 탄생했으며, 외국 건축가들의 진출이 있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건물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이다. 유리와 철로 대변할 수 있는 커튼월의 표준형이 완성되었고 높이 면에서도 당시의 기술력을 감안할 때 지금의 100층 건물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다수의 서울 시민들이 최초의 이른바 모던 체험을 하게 된 건물이었으며 산업적 측면에서 봤을 때도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건설 기술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컸다고 한다.(367~368p) 다음으로 눈길을 끈 건축물은 을지한국빌딩이었다.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정보원, 삼성본관 및 현대빌딩과 같은 사회적 역사성은 없지만 건축계에서는 도시건축의 수작으로 오랜 기간 평가되어 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몸통 전면에 커튼월을 사용하면서 양옆 모서리 부분은 화강암으로 마감해서 안정감을 높였다. 건물 중간에는 외피를 따낸 뒤 벽체를 안으로 밀어 넣어 발코니 공간을 확보한 스카이워크(하늘공원) 라는 층을 둔 점이 특이했다. 이 층은 내부에서는 옥외 휴게 공간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공간을 확보하는 한편 외관에서는 도시 외부를 향해 건물의 인상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조형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 고층 건물의 역사로 좁혀 보면 이런 처리는 근대 건축의 흐름이 이전까지의 엄격한 육면체 표준형에서 점차 벗어나 다원주의로 넘어가는 효시로 볼 수 있다. 또한 서울 시내에서 가장 복잡한 곳 가운데 하나인 을지로 사거리의 남동쪽 모서리에 위치하는데 특이하게 건물을 45도로 틀어서 배치했다. 이는 건물이 도심과 접하는 면을 늘린 것으로 세상과 얼굴을 맞대고 싶어 하는 소통의 의지를 드러내는 배치다. 앞과 같은 조형적 서비스를 통한 건물의 다양한 인상은 이런 대편 효과를 배가 한다.(374p) 을지한국빌딩에 이러한 가치와 의미가 있었는지 몰랐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근대건축을 간략히 표현해보자면 삼일빌딩 전과 후로 나뉘는 것 같다.
근대완성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은 일명 건축 작가가 등장했다는 것이며 형태와 공간에 보다 더 집중하여 건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첫째, 우선 크게 보면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동시대 건축의 흐름을 따르는 경향이 뚜렸했다. 1960~1980 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구조주의가 대표적인 양식으로, 주로 김수근이 이 양식을 완성도 높게 구사했다. 둘째 김중업은 구조주의와는 거리를 두었으며 자신만의 조형성을 추구하면서 형태주의를 이끌었다. 앞서 살폈던 구조주의도 형태주의 계열에 속했는데 이렇게 보면 형태미학을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공통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이희태가 주도했던 구성주의로 구조주의와 형태주의가 3차원 구조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면 구성주의는 건물 외피의 2차원 면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경향을 뜻했다. 넷째, 다시 김수근이 주도했던 공간주의로 말 그대로 건축의 기본을 형태가 아닌 공간으로 복 실내에 다양한 공간 구성을 시도한 경향이다. 다섯째, 이 3인 이외의 건축갇르은 대체로 3인이 이끌었던 경향의 영향권 내에서 각자 창의력을 발휘하여 다양한 작가주의 작품들을 남겼다. 크게 보면 형태주의 계열이 가장 두드러졌고 구성주의가 그 뒤를 이었으며 구조주의와 공간주의는 김수근의 개성이 워낙 강한 탓에 후속 건축가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여섯째 우림나의 상황에서 비롯된 신기념비주의, 전통논의, 서양 고전주의의 유행 등을 들 수 있다. 이 세 주제는 건축가 개인의 작가주의를 넘어 사회적 의미가 강한 논의를 이끌었다. 일곱째 1986년의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의 서울올림픽대회를 개최했던 체육시설을 중심으로 구조미학이 융성했다. 여덟째 재료에서는 이 시기가 대표적인 벽돌 건축의 전성시대였다.(392~393p) 퇴계로와 을지로가 만나는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출구 인근에는 둥글둥글한 백색 건축물이 있다. 예전엔 서산부인과라고 불리던, 지금은 새한빌딩이다. 흔히 볼 수 없는 낯선 형태다. 이 건물은 서울건축사에서 최초의 곡선 비정형 건물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398p) 이후 수많은 비정형 건물이 등장했지만 이 정도의 자연스러움과 우아한 자태를 갖춘 예는 아직 나오지 않은 듯 보인다. 특히 현재로 올수록 비정형 건물에 대한 설계와 시공 기술 모두 혁혁한 발전이 있었고 건축주의 자본력도 훨씬 증대했으며 외국의 선례도 참고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등 여러 면에서 비정형을 구사할 여건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지만 서산부인과는 이 모든 점을 뛰어넘어 비정형 건물의 진수를 보여준다.(398p) 서산부인과가 1965년도에 지어졌으니 가히 그 우수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시기 김중업, 김수근과 함께 또 다른 한 명의 중요한 건축가가 있으니 바로 이희태다. 건축가 이희태는 혜화동성당(1960), 서강대학교 예수회(1962), 절두산성당(1967), 남산 국립극장(1972) 등 한국적 모더니즘을 정착시킨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혜화동성당은 기독교 건축에서 명동성당과 정동교회로 대표되는 붉은 벽돌에 첨탑을 벗어난 최초의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표면에 심판자 예수의 돋을새김을 새긴 미색 석재의 단일 입체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것을 근대 건축의 콘크리트 기둥열이 받치고 있다. 측면에서도 버팀벽이나 아치 같은 중세 요소가 사라졌으며 근대 건축의 육면체 창으로 구획했다. 그러메도 명동성당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첨탑은 아니지만, 붉은 벽돌의 높은 육면체탑을 세웠으며 측면에서도 창 이회의 벽체를 붉은 벽돌로 마감했다. 기둥의 위치에 낮게 돌출한 사각형 벽기둥을 세운 것과 창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장착한 것 역시 중세 성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408p) 건축을 공부하던 당시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1980년대부터 1990년대는 또한 건축에 있어서의 한국성 논의가 절정에 다다른 때였다. 나는 그 후로도 20여 년이 지나서 건축가 이희태를 알았는데, 아마도 그를 알고부터 근대건축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혜화동성당에 이어, 나를 또 한 번 매료시킨 건축물은 절두산성당이었다. 근대기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이 건축에서 장소성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문 내용에서 저자도 건축물이 지어진 장소에 대해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아마도 서문에서 밝힌 양식주의와 장소성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미약하여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을 것이다. 아뭏튼 여러가지 이유에서 절두산성당은 근대건축의 정수이며 감동의 건축, 나아가 좋은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절두산성당이 담아내야 하는 조형성은 복합적이었다. 순교의 종교적 의미, 외세가 들어오던 길목이라는 지리적 의미, 자연지형과의 조화 등 최소한 세가지 조형성이 요구되었다. 절두산성당은 이를 잘 조화해서 표현했으며 한국 전통 건축미가 그 통합의 비결이었다. 우선 부드러운 수평선을 드리우는 큰 지붕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절두산성당을 주로 원경에서 보게 되는 위치를 고려해서 세부 요소보다는 덩어리 중심의 전체적인 모습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한국의 기와지붕과 초가 및 노아의 방주 등 여러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모두 이 건물에 요구되는 조형성에 합당한 상징적 이미지들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 교회의 대표 이미지와 한국적 미의 대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해서 조화해낸 것이다. 이는 곧 서양성과 한국성의 통합이다. 다음으로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중요한데, 배흘임 없는 일직선 콘크리트 쌍기둥을 사용했고 기둥머리는 돌출한 블록 형태로 처리했다. 이 역시 한국의 목조 기둥과 서양의 고전 오더를 동시에 연상시키며 지붕과 함께 복합적 조형성을 상징한다. 이상의 건축적 특징들은 기독교 건축의 기준에서도 중요하다. 혜화동성당에서 시도했던 탈 명동성당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주는 1990년대 이후 현대기의 교회 건축에서 대표 이미지의 하나가 되는데 절두산성당이 그 효시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절두산성당에서도 탑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명동성당의 날카로운 첨탑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곡선 윤곽의 판재요소로 변화했다. 여기에서도 건물 전체에서 표현했던 한국성과 서양성의 통합을 읽을 수 잇다. 황룡사의 치미가 연상되는 대목에서는 한국성이, 르코르뷔지에의 옥상 조형물을 닮은 점에서는 서양성과 근대성이 각각 연상된다.(411~4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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