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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그리고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 늘상 흘려보내지만 사실은 단순하지 않은 것. '먹다'라는 행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든 생각을 적어보자면,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말 안 먹거나 정말 많이 먹는다. 안 먹는 경우에는 '식욕' 자체가 줄어들어서 밥 대신 커피 한 잔만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든다. 뭐가 먹고 싶다는 생각도 안들고, 목마름 정도? 점점 기운은 없어지고, 휘청휘청 거리기 시작하고. 반대로 정말 많이 먹는 경우에는 위가 욕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 배부르다는 걸 아는데도 다 먹고 싶고, 더 먹고 싶고. 그래서 계속 입에 무언가를 넣게 된다. 식사 시간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도 입이 심심하다며 먹고 먹고 먹고. 그렇지만 둘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 살 빠지겠네'하는 묘한 기대감, 혹은 맛있는 것을 끊임없이 먹겠다는 즐거움으로 조금 기분이 나아지나 싶지만 결국은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가 없다. 우회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 * 어떤 젊은 여성이 음식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권력과 지배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 빠져드는 악순환의 늪이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폭군처럼 군림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은, 점점 더 날씬해지면서, 동시에 의사를 이기고 모든 사람의 뜻을 꺾으면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점점 더 커진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체중계의 바늘이 내려가면 갈수록 상황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고, 모든 것은 정상이며, 그저 자신이 예외적이고 초인적인 여자일 뿐이라는 환상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환상이 병적인 환각, 점점 더 심각한 고립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한다. 거식증이 '심리적인 병'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병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공장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식용 가축의 사료로 쓸 콩이나, 농산물 가공업에 쓸 팜유 같은 일차 원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차 원료가 주로 재배되는 가난한 국가에서는 이런 작물들을 재배하느라 정작 그 나라 국민들의 식량을 키울 지역 농업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라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재배한 작물을 원료로 다른 나라에서 생산한 감자칩이나 쇠고기 스테이크를 사먹을 만큼의 돈을 벌지 못한다. 흔히들 우리를 먹이는 것은 자연이며 우리가 먹는 것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밭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들판의 풀을 뜯어먹는 가축, 그러니까 자연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를 먹이는 것은 산업이다. * 음식은 스스로를 조절하는 강력한 수단이고, 이 수단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거나 기운을 북돋고자 하는 것은 괜찮은 생각이다. 하지만 음식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에너지가 되어야지 구체적인 행동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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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Parler, 2012년 저자 - 미셸 퓌에슈 ‘나는 오늘도’라는 총 아홉 권짜리 철학 에세이의 하나이다. 각권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저자가 그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사랑하다’, ‘설명하다’, ‘먹다’ 등등이 있다. 내가 고른 책은 ‘말하다’이다. 책은 무척이나 얇고 그림까지 들어있어서, 다른 철학에세이에 비하면 그리 많은 글이 들어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생각의 범위는 다른 책 못지않게 폭이 넓고 깊었다. 아, 이런 식으로 생각이 뻗어갈 수도 있구나하는 감탄도 들었다. 시작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평범하고 사소한 것이지만, 이후 진행은 그 이상이었다. 저자는 말하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얘기한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동물들이나 기계가 인간과 똑같이 말을 한다면, 그것들이 끔찍할 정도로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 말한다. 하긴 그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돼지나 소를 잡아먹는데 상당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살려달라고 비는 돼지나 소의 목을 어떻게 칠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그런 돼지나 소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같은 인간끼리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말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초반 20페이지까지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저자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 같았다. 저자가 의도한 대로 생각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논리의 힘인가? 이후 저자는 말이라는 것이 인류 문명의 발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풀어놓는다. 말이 있어서 후세에 기술을 전달하기 쉬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을 배우는 것은 바로 세상을 배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또한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야 누군지 알고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논한다. 이 부분에서 문득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떠올랐다. 아, 그런 거구나. 그래서 시인은 내가 상대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고 했던 것이구나. 그래서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누군가 불러주길 원했던 것이구나. 예전에 단지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시의 내용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그 때보다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 그건 망상이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저자는 말과 감정의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사람사이에 말이 끼치는 영향도 언급한다. 하고 싶은 말, 하기 싫은 말, 감추고 싶은 말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읽으면서 무척이나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대화는 합의에 이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는 문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렇지’라고 중얼거렸다. 지금 사회를 보면 그 대화가 부족해서 벌어진 많은 불행한 일들이 많다. 작게는 내 주변도 그렇고, 넓게는 나라 전반을 봐도 그렇다. 대화가 없으니 이해도 없고 배려도 없고 합의도 없다. ‘말’이라는 아주 좋은 수단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침묵도 얘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침묵을 못 견디는지 원인을 파악하며, 그것이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침묵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음, 내가 생각하기에 침묵이 필요하긴 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여유는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단기간의 침묵이어야지, 끝없는 침묵은 절대 좋지 않다고 본다.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저자의 논리에 휘말려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휘말림이었다. 어쩐지 내 생각이 깊어지고 폭이 넓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지만, 괜찮았다. 다른 시리즈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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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고프지 않으면 밥을 먹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도 거의 없다. ‘맛있는 이것을 먹어야 해.’하는 간절함이 아닌, 배가 고프면 길을 가다가 김밥 한 줄을 입에 물고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적도 많고. 일반적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은 끼니때가 되었으니 밥을 먹자, 는 주의다. 그게 싫은 건 아니고 그저 먹는 것에 대해 나와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면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먼저 식사하러 가자고 하거나, 다른 이가 식사하러 가자고 하는 말에 같이 나서는 경우가 많다. 정말 안 가고 싶은데 억지로 따라나선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 그래서 먹는다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질 때도 있고 귀찮을 때도 있다. ‘사람이 먹는 행위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나?’ 하는 조금 웃긴 생각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먹지 않는 행위를 바라는 게 우선이 아니라 어차피 살아가는 동안 먹는 행위를 이어가야 한다면 그 시간을 좀 더 행복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야 하는 게 빠른 해결책이다. ‘나는, 오늘도’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먹다』는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먹는 행위, 음식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내적·외적 모습을 알게 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모습에서 정신적인 문제를 보게 하고, 음식을 둘러싼 사소한 자리 앞에서 사회적인 모습을 보게 한다. 먹는다는 것에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시선을 둘 수 있다.
‘먹는다’는 행위에 나도 세세하게 인지하지 못했던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먹는 것은 본능적 욕구다. 흔한 말로 먹어야 생명 유지하고 사는 것이기에 인간의 본능에 충실히 따르는 하나의 행위다. 또한, 먹는 것은 우리에게 사소한 기쁨을 안겨주는 가벼운 욕구이기도 하다. 거의 4시간에 한 번씩 먹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으며,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우리 몸의 위가 비어 느끼는 식욕에 불과하다. 그 식욕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아닌 때가 많은 듯하다. 오직 먹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하면서 먹는 경우가 많다. TV를 보면서, 바쁜 일 처리를 위해 길을 걸으면서, 휴대기기를 만지면서 먹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먹는다는 것은 사소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관능적이고 강렬한 즐거움을 소소하게 즐길 수도 있다.
먹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알아갈 수도 있다. 먹는 음식에 따라,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주는 대로 먹거나, 엄마가 차려주는 대로 먹거나 하면서 본인이 선택해서 먹는 음식이 아닐 경우 내가 무엇을 먹는지, 좋아하는지 분명하게 얘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음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먹는 것에 있어서 스스로 주체적이지 못하게 되면서 내면에 쌓여가는 것은 더 나아가 성장하면서, 사회에 나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 우려도 만든다. 음식에 대한 자기조절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균형 잡힌 적당한 식사량으로 건강을 지키는 것 역시 자신이 관리해야 한다. 자기관리라는 것이 신체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고 보면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음식을 통해 다른 문화에 접근하기도 한다. 한국 사람이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한국 안에 살면서 한국 음식만 먹는다면(안다면) 더 넓은 세계와 문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다른 나라의 음식을 알고 먹게 되면서 다른 문화를 접하고 배우게 되는 과정이 이어진다. 음식을 통해 문화적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음식과 사고방식, 다른 문화의 전통을 보게 된다. 먹는 방식이 다른 다양한 음식, 손님과 함께하는 식사자리, 어떤 자세와 태도로 먹느냐 하는 것에 따라 다른 음식문화가 보인다. 잘 차려진 밥상에 앉아 숟가락만 드는 경우도 있고, 뷔페처럼 차려진 곳에서 자신이 먹을 음식과 양을 적당히 덜어 와서 먹는 방식도 있다. 수저를 사용하는 곳도 있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거나 맨손으로 먹기도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곳도 있고, 각자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방문하는 곳도 있다. 그 나라, 혹은 그 공간에서의 음식문화는 그곳의 환경과 습관에 맞춰있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보다 먼저 이해의 시선을 갖고 그 문화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음식은 삶과 문화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며, 개인과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이다. (19페이지)
음식을 통해, 먹는 자리를 통해 사회성과 융통성을 배운다. 왜 우리는 “언제 밥이나 같이 한번 먹자.” 라는 인사를 자주 할까? 그게 빈말이든 다음번의 구체적인 약속으로 이어지든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이 익숙하다. 예전 우리 어른들의 말로는 “식사하셨어요?” 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은 밤새 안녕했느냐는(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던 때) 인사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은 어떤 화합이나 대화를 이어가는 계기가 된다. 학교생활, 사회생활, 가족 사이에서도 밥을 함께 먹는 자리는 대화의 장이 되기 쉽다. 서로의 근황을 전하고, 어떤 정보가 오가기도 하고,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도 한다. 서로가 일로 미팅 시간이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면, 함께 음식을 먹는 자리는 부족한 교류의 시간을 만드는 자리가 된다. 또한, 어려운 얘기를 꺼낼 자리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포만감을 느끼는 때가 육체적인 만족감과 함께 온전한 마음의 행복을 가져오는 때라고 한다. 그럴 때가 사업상의 식사라면 계약서를 꺼내 서명을 받기 좋을 때이고, 집안에서의 식사라면 성적표나 카드대금 명세서를 꺼내기에 적절한 시점이라고 한다. ^^ 웃음이 나면서도 공감의 시선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배가 부를 때 너그러워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이해와 공감, 결속력을 다지는 시간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반면, 혼자 먹는 행위는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로 간주하기도 한다. 어려웠던 시절에 음식이 부족해서, 나눠 먹는데 엄격한 규칙이 필요했던 때의 기억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혼자서 먹는 행위는 다른 이에게 아무런 방해도 불편도 주지 않음에도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혼자 먹는 것 자체에 대한 이런 시선을 버려도 좋지 않을까. 오늘날의 모습은 내가 봐도 혼자 먹는 경우가 흔하다. 나부터도 혼자 먹을 때가 많다. 같이 먹을 시간을 놓칠 수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게 불편해서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혼자서 먹는 것은 내가 택하는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본다. 바쁜 세상에서 포장음식이 흔하고, 누군가와 같이 먹을 마음이 없거나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때 식당에서 혼자 먹는 사람, 많다. 어느 식당에는 1인용 좌석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으니 오늘날의 음식문화의 한 형태로 받아들인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은, 이렇게 혼자 먹는 것을 바라보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할 듯하다. 또한, 혼자 먹는다는 것은 어떤 자리로부터 피하고 싶거나 거부하고 싶은 의사를 비치는 한 형태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불편하고 마음속의 증오나 미움이 들끓는 상대와 함께라면 따로 식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그 자리가 편할 수도 없거니와 맛있게 먹는다는 즐거움의 본능을 앗아가고 있지 않겠나.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피하는 게 반항으로 보일지라도 사랑과 유대가 없는 불편한 식사는 나도 거절하고 싶어진다.
음식문화는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하게 변화되어왔고 발전해왔다. 땅에서 재배해서 우리 식탁에 음식으로 오르기까지 직접 만들었던 많은 것들이 기계화 산업화되었다. 사람들의 식성만큼이나 음식이 걸어온 과정도 많이 달라진 것이다. 그 음식 속에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화가 담겨 있고, 우리 각자의 습관과 내가 세운 문화 역시 녹아들어 있다. 폭식이나 거식을 통해 음식이 우리 자신에게 가져오는 병이나 정신적인 문제를 보게 했고,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함께했다. 먹는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주기도 했으며,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한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과의 공존을 꾀하기도 하고, 행복과 조화를 창조하는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의 당연한 이치를 말하면서, 그렇다면 먹는 것이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기쁨을 전한다. 먹을 때마다 항상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데, 먹는 것이 즐겁기도 하다는 것은 행운이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마다 이런 행운을 매번 새롭게 경험한다. (10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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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 입은 삐뚫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등등 말과 관련된 속담이 아주 많습니다. 그만큼 말에 대한 중요성, 영향력 등은 무척 큰 편인데요.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만큼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때로는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하고 커다란 짐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말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소르본 대학의 철학교수 미셸 퓌에슈는 급변화하는 21세기를 살아야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시리즈를 9권을 집필했는데요. 저는 그 중에 6번째 주제인 "말하다"를 만나보았습니다.
책을 펼치면 말에 대한 이야기를 편하게 시작합니다. 수 많은 동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말", 이러한 고유한 능력을 동물들을 예를 들어서 풀어놓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계가 정해져 있는 반응으로 말 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말을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말은 소리를 내어 하는 말도 있지만 다른 방벙으로 인간의 언어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수화와 같은 것이나 침묵, 눈빛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렇게 책에서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말'의 범위나 개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생각의 크기를 점점 더 크게 해주는 듯 합니다.
말의 힘은 강력합니다. 우리는 말로 이어지는 수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정합니다. 그렇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와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말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해서 오해를 사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말을 하지 않아서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말을 통해 싸우기도 하고 말을 통해 화해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은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고 변하면서 늘 존재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작가도 그런 의도로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의 여러 가지 능력 중, 사람의 얼굴이나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말로 인해 상처를 받아보고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생각없는 말', '무의미한 말', '해로운 말' 등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답니다. 아직도 여전히 내가 뱉어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실수, 후회, 아쉬움이 많이 느껴지는데요. 좀 더 긍정적으로 좀 더 희망적으로 좀 더 예쁜 말, 즐거운 말, 행복한 말을 많이 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합니다. 그렇게 스스로와 또 대화를 나눕니다. <나는, 오늘도 시리즈>를 전 권 읽어봐야겠습니다.
나에게 진실하게 말하기, 너에게 진실하게 말하기.....너와 함께 즐겁게 말하기, 그 안에서 너를 더 이해하기, 그리고 네가 나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돕기. 그렇게 나 자신이 되기, 매일매일 조금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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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여,
무릇 다른일을 생각하기에 앞서
걸을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라.
안그러면 멀리 못 갈지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그러니 여느 때보다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낭만주의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근대사회의 무제는 자연과의
접촉을 상실한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자연이란 단순히 꽃이나 새뿐만 아니라
우리의 깊은 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본성과 닿아 있을 때만 진정한 사랑과 시적 감수성, 도덕이 가능하다."
단순한 것들의 힘
요즘 걷기 열풍이 이런 단순함과 느림의 미학으로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가까운 곳을 아이들과 함께 걸어야겠다.
휴대폰은 잠시 꺼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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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인간이 간헐적인 색약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안 건 젠가를 할 때였다.
특정 색의 젠가를 빼야 하는데 계속 반대되는 색의 젠가를 빼는 것이었다. 어떨 땐 정상일 때도 있는데 다른 때는 보색이 대비되서
보인다나. 그래서 그 녀석은 나의 도움으로 인해 젠가 게임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나 게임을 좋아하는 녀석이 뻘쭘해하니 안 돼 보이기도 했다.
보색으로도 모든 게 잘 보인다고 변명처럼 말할 때 '그래도 그 녀석이 좋아하는 석양은 잘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고.
갑자기 영화 홍보가 뜬금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옥자는 여러가지로 이 책의 주제를 아주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미자는 돼지 즉 옥자와 교감을 나누었지만, 삼계탕은 맛있게 먹었다. 옥자와는 대화하지만 닭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 이 장면에서 옥자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단번에 장르는 괴수 영화로 다시 바뀌어버릴 게 뻔하다. 영화는 옥자의 침묵 덕분에 옥자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온화하게 흘러간다. 옥자를 좋아하는 미자에게 삼겹살을 먹는 건 금기이다. 이는 옥자가 싫어할 것이란 미자의 생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에 호기심이 왕성해지기 시작한 우리 집 강아지도 보신탕 앞에선 주춤거린 듯하다. 그러나 옥자가 말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지능이 높아졌다면 어땠을까. 그도 미자가 인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을까? 아님 메트로폴리스의 주인공 로봇처럼 '친구'를
죽인 세상이 미워서 닥치는대로 세상을 파괴했을까? 어쩌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종'차를 근거로 한 폭력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만들어진 타자화의 절정이 동물착취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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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이미지는 오렌지색! 그런데 이건 책을 한번 더 포장한거랍니다. 오렌지색 포장지를 들춰내면 보이는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올빼미,강아지 등등의 동물들도 섞여 보여요.
미셸 피에슈의 글도 참 감칠맛 나고 좋지만 그에 곁들어진 브루노 샤젤의 일러스트도 참 맘에 들었어요.
파리 소르본 대학의 철학교수님이시라는데 참 아이들이 읽는 철학 맛보기 시리즈를 집필하신 분이시라 그런지 철학책이지만 전혀 어렵게 읽히지 않더라구요.
마스다 미리의 여자공감단2기 미션을 완료하고 받은 책들 중 한 권인데 전 이 책을 소장하고 싶더라구요. 글밥은 적당하고 일러스트는 톡톡 튀는 느낌?
그때 받은 책들 중 위서현 아나운서가 쓴 에세이는 지인께 선물로 드렸구요. 김난도의 내일은 참 감동적으로 읽었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미션완료 선물로 받은 이 철학책이 참 맘에 듭니다. 9권 시리즈인데요. 나는,오늘도라는 타이틀 아래 사랑하다,설명하다,수치심,걷다,먹다,말하다,원하다,버리다,살다 이렇게 9권이 있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학동네출판사 안에 이봄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더욱 더 이봄에 관심 가고 다른 시리즈들도 다 사서 읽어보고 소장하고 싶어진답니다.
오늘도 나는... 이 철학책 시리즈 안 읽어보셨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철학책은 졸리고 지루할거란 편견은 확 접구요 ㅎㅎㅎ
책의 마지막에 이런 글귀가 나온답니다. [침묵은 사실 대화의 일부이다.침묵에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페이지가 참 깊은 울림을 주네요.
인디언들처럼 우리도 어떤 문장이나 대화를 끝낼 때 "휴!난 말했어"라고 말하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진실하게 말하려 애썼고. 뱀처럼 간사하게 말하지 않았으며, 신뢰와 진심을 담아 말의 힘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또한 대화에 참여했지만 모든 대화를 독차지하려 하지 않았고, 말하는 만큼이나 중요한 행동을 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 행동이란 듣고, 귀 기울이고, 이해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듣고 귀 기울이고 이해하는 것이라는 마지막 글귀!
참 말이 많고 시끄러운 아줌마 슈가슉아도 중요한 때에는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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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정말 신기한 점 중 하나는 세계에서 이렇게 보편적이고 당연하게 섭식 장애를 강요하는 나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작품에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옆나라 일본은 어마어마하게 먹는 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주인공이 특정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집만 찾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밴드나 아이돌을 한다면서 왠지 케이크만 어마어마하게 먹어대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더군다나 가족끼리 둘러앉아 식사하는 풍경, 혼자서 음식을 만끽하는 풍경, 도저히 한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듯한 대량의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대는 풍경,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명상에 잠기는 풍경 등 먹는 장면도 굉장히 다양하게 등장한다. 또한, 미국 드라마같은 데서는 친구들과 만찬을 즐길 때 내내 라자냐가 등장한다. 영국 드라마에서는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옷 다음으로 음식이 그 작품의 준비성과 품격을 증명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내 기억으로는 혼술남녀라는 드라마와 아름답다라는 영화, 혀라는 소설 외에 먹을 것을 심도있게 다룬 매체가 그닥 없다. 우리나라의 한 소설가가 계속 먹는 장면을 심오하게 다루긴 하지만, 단지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다룰 뿐 독창성이 없다. 토를 맛깔나게 하는 배명훈의 단편이 최근 나왔지만 그것도 그저 단편일 뿐이다. 이로 볼 때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굉장히 예외적인 작품이고, 장르도 글로벌하다. 서양 언어에는 맛을 표현하는 어휘가 우리말에 비해서 엄청 풍부하다 하는데, 나는 그것을 교육의 힘이라 봅니다. 콘코디아 언어마을이란 데서는 맛에 대한 토론으로 언어를 배운다고 하더라.
또한 햄버거병에 대해서 따져보자.
물론 아기에게 햄버거를 먹인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있고 클 것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햄버거를 먹이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 없고, 왜 그 때 아이에게 햄버거를 먹였는가 하는 사전 과정은 모두들 알고 싶지 않은가보다. 사실 그들도 하나같이 섭식 장애로 일컬여질 만큼 말도 안 되는 음식들을 먹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형적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맘충이 무식하니까, 라는 이유 외엔 알고 싶지 않겠다. 또한 전형적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들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먹인 적이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겠다.
김훈이 라면을 굉장히 그리워하는 산문을 썼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거의 60년 동안 맛이 강렬한 분식에 의해 지배되었었다는 소리도 된다.
그런 화학 식품을 그리워하는 자가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을 한 것도 또한 있을 법하다. 여성은 먹고 싶은 걸 먹을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특이한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결국 OECD에 뭔가로 승부를 걸고 싶다면 음식문화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권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괜히 무안해지니 맛에 대해 공부할 시간에 수학 문제집이나 풀라고 잔소리하고 있다.
먹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한 권으로 간추린 빵의 역사라는 책이 목침과 맞먹는 두께로 되어 있듯이 먹는 걸 사랑하는 건 어렵다.
사회, 정치, 환경, 심지어 초자아에 대한 극복까지 통달해야 우리는 야밤에 치맥을 먹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건강에는 해로우니 가끔 하길 바란다. 그리고 아침 치맥도 꽤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걸 귀찮아한다면 이미 당신은 반은 죽어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장담한다. 일단 흥미있어하는 음료나 음식의 역사에 대한 책부터 찾아 읽어보라. 상당한 재미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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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가 무력시위로 가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이미 촛불시위에서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상태이다.
어딘가로 떨궈서 무언가를 불태우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 이상(...) 촛불시위는 이미 가두시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이었다.
옛날 광우병 시위는 사실상 바보같은 경찰들이 살수차로 촛불의 불을 끔으로써 손에 든 건 없고 분노는 쌓이니 그 많은 사람들이 가두시위에서
무력시위로 변모한 바가 있지 않나 싶다. 나도 그 당시땐 걷기보다는 엄청 뛰어다녔다. 그러나 최근에 박근혜 탄핵 시위는 아예 살수차를 불러오지
못하게 됨으로써 완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된 바가 있다. 좋은 현상이던 나쁜 현상이던, 문재인이 그 점에서 상당히 전략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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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행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면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말로 완벽하게 전해지지는 않는다는 느낌. '작다'라는 단어를 썼을 때, 서로 머리 속에서 그리는 크기가 다르듯이. 단어에 갖는 구체적인 의미가 사람마다 달라서, 생각을 생각만큼 말로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한 느낌. 오래 전부터 이런 느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답을 얻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의사소통의 부족한 점들은 더 많은 소통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 영어는 국제어인 동시에 몇몇 민족들에게는 모국어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애써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이런 민족들은 이미 국제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으니 복 받은 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면 맞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도 부작용이 있다. 영어권 민족들은 '희귀'언어권에 사는 다른 민족들(네덜란드인이나 덴마크인 같은)에 비해 외국어를 훨씬 적게 배우며, 따라서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을 접할 기회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바뀌기라도 하는 날에는-중국어가 국제어가 될 가능성도 큰데, 중국어는 서구인들이 배우기에 매우 어려운 언어이다-더욱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여러 언어를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여행에만 편리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근본적 구조를 결정하기에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마치 여러 개의 소프트웨어를 가진 것처럼 다양한 사고력과 감수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유연성과 풍요로움은 열린 사고와 관용으로 이어진다.
* 단어 하나하나마다 고유한 울림이 있고
* 여기서 이야기란 단순한 인사나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대화, 그러니까 중요한 일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그 일을 더 깊이 이해하고 가늠하게 되는 대화를 말한다. 때론 그저 상황을 음미하기 위한 대화도 그렇다.
*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 내밀한 영역을 가질 권리가 있다. 심지어는 의사나 부모님, 연인에게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말을 하라고 훈계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이런 태도에는 존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내세울 수 없고, 오히려 도덕을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만일 침묵을 견딜 수 없고, 끊임없이 말을 하고 싶고 누군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줄 마음이 있는지 계속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