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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리가 그것을 허하기만 한다면." 리베카 솔닛의 <야만의 꿈들>은 그녀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준 네바다 핵실험장과 희망을 품는 법을 가르쳐준 요세미티 국립공원이란 장소를 통해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솔닛은 반핵운동을 위해 찾은 장소인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식민지'로서의 미국 서부 역사를 발견했다. ??"핵물리학의 역사, 군비경쟁, 반공주의, 시민 불복종,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권리를 둘러싼 투쟁, 환경 운동, 그리고 유대-기독교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듯한 사막을 향한 신비주의와 광적인 믿음 등이 전부 하나로 합쳐져 네바다 핵실험장을 단지 자연지리학이 아닌 문화지리학의 일부로, 단순히 구체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추상적이기도 한 장소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무언가가 수렴하는 장소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역사들을 맞붙이며, 그로써 역사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우리의 개인적 역사와 공공의 역사와 이야기들 속에서 새로운 연결고리를, 심지어는 충돌까지 발견할 수 있게 된다.-.p.57 그래서 찾은 곳이 요세미티 국립공원. 겉보기엔 핵실험장과 상통하는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장소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 인간들이 자연에 미친 악영향을 고발하고 성찰로 이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말 방대한 내용을 다루는데 놀랍게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그녀의 지성과 필력, 삶에 대한 자세에도 감탄하게 되지만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머리가 다 아팠다. #오웰의장미 도 비슷한 느낌이었음…?? 장소로부터 가르침을 얻으려면 우리의 허락이 선행되어야 하듯이, 솔닛의 책으로부터 무언가 얻고 싶다면 반드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고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고로 난 빼박 재독각. 아하하하하 ?? ??장소 자체가 나의 글쓰기 스승이었다. 장소는 역사, 수렴, 경험의 복잡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어쩌면 그건 작가를 겨냥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소가 제기한 질문 중 일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네바다 핵실험장은 전쟁의 본질과 권력의 본질에 관해 물었다. 40년 동안 네바다 사막에서 한 달에 하나씩 핵폭탄이 터졌음에도 어째서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핵전쟁이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점점 더 강력해지는 핵무기가 취약성과 위험만 강화하는 듯했을 때 그걸 가능하게 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한 걸까? 우리가 폭발하는 작은 항성들과 10만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 독성 물질들을 생성하는 능력, 전면적인 핵전쟁으로 지구 생명체의 상당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 인간적 척도(human scale)의 의미는 과연 얼마나 달라진 걸까? 우리 각자가 벌인 일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가진 권력과 책임은 무엇일까?-p.13~14 ??새로운 장소든 오래된 장소든 내가 있는 장소를 이해하려면 내가 떠나온 장소를 알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완전한 의미의 기억상실증을 가진 사람만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역사와 욕망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러니 때로는 그냥 앉아서 짐을 풀어보는 것이 좋다.-p.58 #도서제공 #반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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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_장소는 그 자체로 대화와 역사와 연구와 사상과 직접행동과 생태학이 수렴하는 곳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소란 그런 힘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_p24
오래전 핵발전소 반대에 대한 극을 올리고 그 지역에서 여름을 보냈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핵의 위해성과 경제학적 논리, 특히 지역민들의 신체에 되물림 되는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놀라고 충격적이여서 지금까지도 그 부정적인 인식은 그대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렇게 위해성이 증명된 장치가 아직도 그 존속에 대한 갑론을박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억들과 생각들을 떠오르게 한 책이 바로 <야만의 꿈들>중, ‘1부, 먼지 미래를 지우다’ 이다. 외계인 루머가 먼저 떠오르는 미국 네바다주였는데, 저자 리베카 솔닛은 이곳의 핵실험들에 주목했다.
핵실험장 부지는 진짜 광산 마을 있었던 지역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황량하고, 가장 인적이 드물며, 가장 적막한 지역“ 이라고 사막 탐험가 마거릿 롱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유목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이 있었고, 광산 가구가 몇몇 있었고, 동식물들이 있는 사막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곳이 어쩌다 지금의 황량한 핵실험장이 되었을까 바로 여기에서 리베카 솔닛의 행보가 시작된다. 핵의 발명부터 냉전시대, 그 시대적 배경을 비롯해서, 방사성 폐기물 처리, 현지 상황, 일선에서 반핵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과의 대화들, 몸으로 체감한 시간 등을 아주 자세하고 논리적으로 적어놓은 것이 바로 ‘야만의 꿈들’ 의 1부 이다.
원주민과의 불공정 계약/조약(쇼쇼니족), 무력적 제압, 오랜 법정 싸움, 방사능 폐기물 문제 등 읽을수록 열 받는 내용들을 이렇게나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저자의 필력 덕분이다. 특히 땅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법률, 관련한 그녀의 섬세한 글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
_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벼룩이 자기가 붙어 있는 개를 소유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땅에 대한 소유권은 사실상 무언가에 대한 특허를 보유하는 것에 더 가깝다. 즉 한 사람은 무언가를 통해 나오는 이익을 독점적으로 취할 권리를 갖지만, 그 무언가라는 것 자체는 일종의 관념 혹은 지역이지 상품이 아니다. 땅이 팔릴 때 이동하는 것도 사람이지 그 땅 자체가 아니다. 그러니 ‘손 넘김’ 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땅쪼가리라는 개념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 어떤 벽이나 도랑도 지표면의 연속성을 깨뜨릴 수 없으며. 땅은 사실상 작은 조각들로 나뉘지도 않는다._p258
땅,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한 이 단락들이 너무 좋았다. 이것만 잘 이해해도 어떤 측면에 집중해서 문제를 받아드려야 할지 짐작 가능할 것이다.
핵실험장과 폭발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들은 이 책을 읽을 이유를 되새기게 해주었다. 그리고 희망적인 행보와 마음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이 책을 공감하며 읽는 것만으로도 그 여정에 나도 한 걸음 다가간 느낌이다.
_..... 논리적 사고가 반드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목적지에 이르게끔 하는 것은 예측이 아닌 여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군비경쟁이 품은 위대한 비밀의 핵심, 네바다 핵실험장의 메사와 크레이터, 그리고 군비경쟁에 맞서는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알아가는 동안 나는 활동가들의 과업과 꿈이 성취되기 직전의 순간을 만났다._p28
2부: _경제 활동(주로 금 채굴)에 필요한 땅을 개척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들은, 말하자면 금이 가득 찬 화석 강바닥에서 흙을 들어내듯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_p297
_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름 ‘테나야’는 그렇게 호수도 인간도 아닌, 요세미티 방문객들이 거의 완전히 망각해버린 불편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 버넬은 새로운 이름이 인간에게 일종의 불멸성을 선사할 것이라고 족장 테니야에게 당당히 말하지만, 버넬이 실제로 하고 있는 행동은 해당 장소에서 테나야가 속한 문화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_p298
원주민에게 불리워지고 있었던 지명을 지우고 다른 이름으로 명명하고 살던 이들을 완전히 치워버리는 침략자들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와닿게 할 수 있을까
많은 영화에서 침탈자들이 원주민들의 집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장면들을 봤었지만, 위의 문단처럼 섬뜩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 이였던 것 같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대한, 이런 숨겨진 역사를 도서 <야만의 꿈들>의 두 번째 챕터에서, 리베카 솔닛이 다뤄주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챕터처럼 바로 이슈안으로 들어가지지는 않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잘 정돈된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광의 묘사들, 관광의 역사와 그 속의 관광객들에 대한 묘사에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어 있어서, 이 안에 숨겨있는 전쟁의 역사를 들춰내는데 저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도서들을 읽어내고 분석하고 장소들에 대한 이해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과 각성이 계속되는데, 아마도 저자가 원하는 바도 이런 것이 아니였을까 싶었다. 이런 생각은 아래의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_어떤 장소를 알아간다는 것은 친구나 연인을 알아가듯 그 장소와 친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를 더 잘 알아간다는 것은 그 장소가 다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낯설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방식으로 참신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르가들지 않는 심오하고도 심란한 방식으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항상 알려져 있었어야 할 사실, 그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사람들을 드러냄으로써 동요를 불러일으킨다고 할까._p447
특히 새비지 라는 인물들을 통해 행해진 이기적인 지배는 그 장소에 대하여 더 이상 마냥 아름답게 볼 수 없게 쐐기를 박는 기분이였다. 결국 이어지는 지금의 핵문제, 사회정의 문제 등등.......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는 너무 힘들었던 ‘야만의 꿈들’이었다. 그냥 모르고 살고 싶다는 유혹에 자주 빠지지만, 알아야한다는 동시대의 책무로 느껴지는 내용들이였기 때문이다. 오래전 부조리에 반항했던 나를 다시 불러오기에 충분했었고, 저자와 같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으로 느껴졌다.
아픈 역사의 장소는 부지런히 밀어버리기 바쁜 우리나라의 분위기도 무척 유감인 것을 한번더 되새기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잊지않음이 최선은 아니겠으나 무엇이든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힘들었지만 단단한 필체로 다룬 자세한 내용에 정말 납득이 되는 독서였다. 필독서로 권하고 싶다.
_빌 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모두을 환영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브리쉘을 발견했는지를 비롯해 원자력을 폐기하고 태양열 발전을 촉구하는 것과 달을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것, 사회정의, 집을 잃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짧은 독백을 마무리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을 떠날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예요. 그들에게 조약을 지키라고 말해주세요. 모두 고맙습니다.”_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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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 번째 리뷰에서 이 책의 목적에 대해 주요하게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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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체포 이상의 더 가혹한 대우를 받지 않은 이유는 돈 그리고 땅과 연관되어 있었다.
나에게 네바다의 이미지는 시체 저장소다. 해리 보슈에서 네바다는 연쇄살인마 '시인'의 시체 저장소였다. 사막의 건조함, 끝도 없이 넓은 광활함,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곳은 살인마들에게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런 네바다는 '눈처럼 새하얀'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미국과 영국은 네바다에서 핵실험을 했다. 40년간 한 달에 하나씩 핵폭탄 실험을 했다. 그러기 위해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을 빼앗았다. 그리고 민간인의 출입을 불허했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솟구치고, 땅은 신음했고, 구름이 퍼져 내려앉은 낙진은 바람 따라 날아갔다. 사람이 덜 사는 곳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폭탄을 터뜨렸다고 하니 아주 계산적이고 치밀한 은폐였다.
리베카 솔닛의 글이 사람들에게 자꾸 읽히는 이유는 자료들을 쌓아두고 방구석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가지고 살아있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글은 우리를 한곳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네바다 핵 실험장을 이야기하면서도 솔닛은 그에 걸쳐진 수많은 가지들을 언급한다.
핵실험을 리허설로 표현한 것은 솔닛의 글이 어떻게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게 되는지를 잘 표현한 말이다. '안보'라는 탈을 쓰고 이루어진 모든 행동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보'의 탈을 쓴 '돈'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자행된 일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건 내 생활 반경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먼 곳의 일이고, 나에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로 대부분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대신한다.
핵실험 책임자들이 발표한 성명 내용을 믿는다면, 그들에게는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려는 의도가 없다. 내가 나방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들이 다운윈더를 생각하는 정도 또한 내가 곤충을 생각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나방의 죽음이란 사소한 일인 듯하고, 시위(그날 아침 고속도로를 점령한 사람들의 힘)도 정부 권력에 맞서는 사소한 힘인 듯하다.
수년간 핵실험장을 찾은 내 행동이 군비경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다. 내가 핵실험장을 찾은 것은 신념에 바탕을 둔 행위였고, 내가 한 일을 영영 정량화할수 없다 해도 아무튼 해보겠다는 결심의 소산이었다. 또 핵실험장을 찾은 행동이 나 자신에게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오로지 신념에 바탕을 둔 행위만은 아니었고, 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답받았다.
솔닛의 글을 읽는 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일이다.
영상을 보는 것처럼 그려지는 유려한 문장들은 생각의 연상작용처럼 이미지를 그려낸다. 네바다 핵실험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헨리 소로를 만나고 불꽃 속으로 사라지는 나방의 춤을 보고 카우보이 밥의 모습을 떠올리며 있는지도 몰랐던 쇼쇼니족의 역사를 그려본다. 이런 생각의 타래가 솔닛을 읽는 기쁨이 아닐까? 솔닛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모든 타래들을 잘 엮어 '글'이라는 직조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솔닛의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답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접 발로 뛰어 작성한 기사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듯이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깊이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돌려놓는다. 리베카 솔닛을 통해 바라본 네바다 핵실험장과 바위에 계란 던지듯 그곳을 찾아 자신들의 신념대로 행동한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어딘가에서 그 보답을 받으리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걸쳐서 나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사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안겨준 리베캇 솔닛. 이 솔직하고 옳은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망칠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가는 지구, 그곳의 유한한 '장소'들이 무지와 욕심들에 사용당하지 않고 대다수 선량한 인간들과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는 많은 생명체들에게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전쟁과 발견이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 버넬이 자신이 가진 인류애를 거주민이 아닌 경치를 위해 몽땅 발휘했다는 사실, 요세미티에 관한 대중의 견해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가 가진 풍경에 관한 견해와 역사에 관한 견해의 간극속에 수많은 잃어버린 이야기와 파괴된 문화와 지워진 이름이 들어차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얼 의미하는 걸까?
2부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먼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행되었던 만행을 담아 낸다.
내게 인디언은 벌거벗고 다니며 사람의 가죽을 벗겨내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종족으로 각인되었다. 그 이유는 어릴때 보았던 서부영화속의 인디언들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들의 만행을 어떻게 포장해왔는지는 서부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게 야만적이고 무서운 종족이었던 인디언들이 얼마나 자연에 동화되어 선하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그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던 백인들의 역사가 자신들의 고난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의 땅을 짓밟고, 모든 걸 다 차지하고서 원래 그 땅의 주인들을 한 곳에 몰아 넣어 자치구와 보존구역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 백인들의 찬란하도록 잔인한 역사. 나는 솔닛이 그러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솔닛 역시 그러한 백인중에 한 명 이니까.
경제 활동(주로 금 채굴)에 필요한 땅을 개척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들은, 말하자면 금이 가득 찬 화석 강바닥에서 흙을 들어내듯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요세미티의 이면에는 금을 캐기 위해 자행됐던 일련의 일들에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구제책이었다. 대자연의 일부분을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며 그 풍광을 널리 알리는 대신 나머지 자연들은 파헤치고, 긁어 모으고, 파괴해버렸다. 그것에 대한 속죄가 국립공원이었다.
요세미티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이 붙이 이름이다. 이 요세미티라는 이름에는 '살인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복자들이 알고 있었던 '회색곰' 은 "방종하고 약탈을 일삼은 성격" 에서 유래되었다. 원주민들에게 '회색곰'은 이런 뜻이었다 그리고 더 정확한 뜻은 "살인자" 였다. 본인들이 정한 이름의 정확한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붙여버린 이름 요세미티. 그러나 그 어디에도 요세미티의 진정한 뜻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회색곰'이라는 원주민어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떤 장소를 알아간다는 것은 친구나 연인을 알아가듯 그 장소와 친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를 더 잘 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방식으로 참신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 심오하고도 심란한 방식으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 인간은 제외되어야 할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진정 청정한 자연인걸까? 인간의 인위적인 행동이 자연을 자연그대로 두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수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자연을 이루는 하나의 개체라면 동물에 속한 인간도 자연의 개체일 것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가장 잘 알았던 원주민 인디언들. 만약 이주민들이 인디언들과 공존했다면 미국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보호'라는 이름하에 관리되고 있는 자연에도 인간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관상용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친화적 손길을 말한다. 그것을 꿰뚫어 보는 솔닛의 시선이 그래서 반갑다.
네바다 핵실험장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통해 솔닛은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발걸음을 이야기했다. 소소해보이는 발걸음들, 신념을 가진 발걸음들, 의지를 가진 발걸음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열심히 한 결과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많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수 많은 무심한 눈들의 촛점을 관심으로 돌리고, 듣지 않는 귀들을 열리게 하고, 침묵하는 입들을 열게 만든다.
<야만의 꿈들>은 솔닛의 글쓰기 출발점이다. 20년 전에 쓰인 이 글은 시간의 차이를 느낄 수 없고, 오히려 더 신선하게 다가온다. 불공정과 불합리를 향한 솔닛의 글은 수 많은 이야기의 가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고 더 뿌리 깊게 각인된다. 나 역시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거 같았던 네바다 핵실험장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이야기를 읽으며 결국 나 역시도 이곳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뻗어나간 구름연기가 우리에게 비가 되어 내렸을 수도 있고, 요세미티 정복의 역사가 우리가 치뤄야 했던 고난의 역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역사적 전쟁에서 이겼고, 우리의 문화를 지켜가고 있지만 수 많은 잔재들도 함께 지고 가고 있다. 내가 가졌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편견들 역시 요세미티가 가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상 모든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무엇 하나도 사소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비효과처럼 우리는 서로의 날개짓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다. 그러니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외면하고, 관심 없었던 것들에 조금씩 시간을 들여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고, 입을 열어야겠다.
솔닛이 솔닛한 <야만의 꿈들> 내가 알지 못한 세상이, 자연이, 장소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읽어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내가 알지 못했다고 해서 이 세상에 나와 상관없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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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반핵운동에 동참하면서 겪은 일련의 시선을 담은 1부의 내용들은 이런 배경적인 여건을 토대로 1950년대 미국 정부가 미국의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전에 이미 토박이처럼 살아가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인 쇼쇼족과의 대립과 시민 불복종에 대한 저항을 담아낸다.
당시 핵폭탄을 터트렸던 나라들인 미국과 영국은 그들이 말한 '실험'이란 용어는 적절한 용어가 아님을 말한다.
자연 초토화 방사성 낙진에 이은 인간들의 삶에 끼친 사례들을 통해 비판하는 그의 글들은 차라리 '리허설'에 가깝다는 말이 맞다고 말하며 냉전시대가 끝났음에도, 1990년 민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영국을 압박하고 동참 거부를 유도한 것은 실로 진정 무엇을 위함인지 묻고 싶어 진다.
반핵 운동가들이 네바다 사막에 들어가 핵실험 중단 요구를 한 이유와 여기에 더해 쇼쇼니족의 동참은 그들의 생존권이 달린 영토 소유권에까지 폭을 넓힌다.
가축 방목을 핑계 삼아 개인 소유의 소들을 몰아 가두는 행위, 솔직히 말하면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토착민으로서 삶의 터전을 이룬 이들은 현재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불리는 인디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무법 자격자로서 영토 소유를 했다는 취지에 법적인 구속을 한다는 행위의 근거에 대한 증거도 없으면서 점차 그들의 터전을 억압하는 교묘한 방식은 무엇을 위함인지, 이는 결국 모두 이권 개입과 돈이 연관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솔닛은 이에 멈추지 않고 물리학자들이 연구를 하면서 산책 걷기를 통해 그들의 연구를 통해 핵폭탄에 개발에 이르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고민과 당시 핵무기 사용에 있어서 오늘날 전 인류를 위협하는 부분에 대한 경고와 미처 이를 인지하지 못한 부분으로 나뉜 부분들을 다룸으로써 핵 발명을 통한 소로의 시민 불복종과 아르카디아, 자연을 합리적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본 유토피아적인 흐름들을 읽는 내내 와닿는 문장으로 이끈다.
저자가 바라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삶,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의 일부란점, 하지만 핵폭탄이란 개발로 이어지고 이를 국가의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지금까지도 사후 문제 발생 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나치와 소련이 벌인 유대인을 다룬 방식과 미국의 현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핵무기에 대한 경고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인지는 하면서도 실제 그런 참상을 겪은 이들마저 함구하고 있다가 인생 말미에 드러내는 부분들, 생존을 위해 미국 법과 다투는 쇼쇼니족 이야기는 레이철 카슨이 쓴 '침묵의 봄'에서 다룬 내용보다도 훨씬 심각함을 경고한다.
인류의 평화는 중요하다.
다만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보호와 인간의 터전의 기본 삶인 땅, 여기에 핵 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요원한 문제로 남을 수도 있음을 다시 느껴보게 했다.
지난 줌 토크에서 솔닛만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들려준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게 한 소로의 산책과 물리학자들의 걷기, 여기에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핵폭탄 발명에 이르면서 결국 자연에서의 걷기가 철학적인 개인 사유에서 온 물음들이었다면 미국의 사막으로 들어간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는 핵폭탄으로 이어져 결국 한 곳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을 연상시켰다.
(참고로 양자역학에 대한 주된 학자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어보면 더욱 재밌게 다가올 듯하다.)
읽는 동안 솔닛처럼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목욕하는 상상, 로이 오비슨, 드와이트 요아캄의 노래가 솔닛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왔을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가 결국은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그녀만의 글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준다.
2부는 요세미티 공원을 중심으로 장소에 대한 폭넓은 내용을 펼친다.
장소란 개념이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그 장소가 지닌 터에 인연과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의 공존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사실들이 솔닛만의 관찰과 사유로 좀 더 깊게 생각해볼 수가 있다.
- 어떤 장소를 알아간다는 것은 친구나 연인을 알아가듯 그 장소와 친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를 더 잘 알아간다는 것은 그 장소가 다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낯설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방식으로 참신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 심오하고도 심란한 방식으로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 P 447
요세미티 공원은 이미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지니고 있지만 솔닛이 밟은 요세미티에 대한 역사는 원주민들에 대한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삶의 터전인 곳에서 백인 개척민들에게 쫓겨난 상황이나 네바다의 원주민들이 자치권과 생존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모습들은 마치 쌍둥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허칭스와 사진작가 찰스 리앤더 위드의 손에 탄생한 최초의 사진은 오늘날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이을 수 있는 최초가 되었으며 이는 요세미티 밸리에서 원주민과 백인 간의 불가피한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음을, 그 속사정은 자연과 전쟁이란 두 상반된 이미지를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듯보인다.
네바다에서도 그렇지만 요세미티에서도 허울 좋은 원주민 보호구역은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어하는 강제이주와 난민수용소란 개념과 다를 바 없고 그들의 삶은 이전보다 더욱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는 과정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그들의 삶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어있다.
문득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 당시 백인들을 공격하던 원주민에 대한 인식이 당시엔 이해할 수없었던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이 책의 내용을 읽노라니 거꾸로 그들의 삶을 빼앗겨버린 그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솔닛은 1부 네바다 핵실험장의 경험을 통해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전반부의 명암이 흑이었다면 2부에서는 희망을 품은 법을 풀어내고 있다.
즉 보호되어야 할 자연이란 공간적인 장소가 인간들의 관점으로 국립공원이란 개념으로 어떻게 보호(?)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이러니와 그 속에서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같은 듯 다른 '자연'이란 의미에 대해 생각할 부분들을 던진다.
1.2부를 통해 저자가 밟은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와 현재의 삶은 자연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미래의 비전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네바다와 요세미티란 두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공존에 대한 의미를, 이제는 변화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일깨워준 책이다.
- 여전히 나는 자연을 경험하는 그런 방식에 애석하게도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보기(looking)는 사진의 영역에서는 훌륭한 행위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연을 우리가 속하지 않는 장소, 우리가 살지 않는 장소, 우리가 침입하는 장소로 보는 관점이다. 관광객은 본질적으로 외부인, 소속되지 않은 사람, 낙원에 있는 이방인이다. - P 350
개인적으로는 '오웰의 장미'보다 이 책이 훨씬 가독성이 좋았다.
가장 근본이 된 솔닛만의 글쓰기의 맛을 느꼈다고 할까? 그녀가 지금까지 지향해온 글로써 다가설 수 있는 걷기, 사막의 침묵과 공허, 자연과의 관계...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분야의 글임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게 쓴 넓은 지식의 활용은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리베카 솔닛의 책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부터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 출판사 도서 협찬으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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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를 알아간다는 건 단지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장소에 담긴 역사를 배우고 인연을 만들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리베카 솔닛은 이 책을 통해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솔닛은 네바다 핵실험장으로 걸어가 그곳에서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희망을 품는 법을 이야기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관념이 구축되면서 보호받아야 할 자연 공간이 국립공원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그곳에서 맺어진 관계를 성찰하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단 한 번도 내가 있는 장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 여기며 소유의 개념으로만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있는 장소는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곳이며 지켜야 하는 곳이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솔닛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고 기후 위기의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어느 가을 날 솔닛은 요세미티 원주민을 만났다. 오랜 시간 이곳에 살아온 원주민들은 그들의 역사와 터전을 지키고 연방정부로부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도심 박물관 디오라마의 설명에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명 앞에서 원주민들이 느꼈을 감정이 솔닛의 글을 통해 내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녀의 글에 따르면 이미 전 세계 수많은 원주민들이 국립공원 조성을 이유로 생활 터전을 잃고 쫓겨났으며 이러한 행위를 야생을 수호하는 것이라 여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이 최선의 보호라 여기는 시각은 원주민들의 행동을 자연 파괴라 규정한다. 원주민들이 주기적으로 숲에 불을 내는 행위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들을 자연에서 몰아냈지만 숲은 오히려 불에 더 취약해져만 갔다. 이런 행위가 반복될수록 오랜 시간 이어져온 정복과 약탈의 역사를 이제는 공존의 역사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이제 장소는 평범한 사람들부터 수많은 활동가와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행동하며 실천하는 이들의 노력 덕분에 변화의 발판이 되고 있다. 솔닛의 글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지속 가능한 새로운 공생관계를 만들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장소라는 공간을 역사적 정치적으로 풀어쓴 이 책을 읽으며 '저항'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장소가 가르쳐 준 희망을 떠올리며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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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지음)/ 반비(펴냄)
무려 20년 전, 처음 이 책이 쓰인 1994년과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난 1부 읽기에서 논픽션의 문장이지만 솔닛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어젠다를 던졌다.
전쟁은 남자들의 문제였지만, 오염은 여자들의 문제가 되었다..... 이 문장은 많은 것을 서사한다. 방사능에 오염은 1세대에 끝나지 않았다. 방사능에 오염된 아이들이 태어났다. 오펜하이머가 했던 말, 과학은 죄를 알고 있다는 문장이 와닿는다.....
세계의 종말을 직접 리허설해 본 국가는 미국과 소련이었다고.... 미국은 심지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시위대들을 체포했다.
솔닛의 가계도 역시 흥미롭다. 아나키스트이자 반핵운동가였던 남동생뿐 아니라, WSP 조직원이었던 무려 1950년대부터 핵실험과 전쟁에 반대한 솔닛의 고모 등의 가계도는 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 환경운동가라는 솔닛의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솔닛 스스로도 이 책을 내가 쓴 대부분이 뿌리를 두고 있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장소의 글쓰기를 몸으로 부여준 리베카 솔닛!!!
정치적 견해와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나라들, 그들의 욕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되고 동지가 되곤 한다. 양심을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솔닛 가문의 사람들, 솔닛의 가계도를 보며 정말 놀라웠던 1장이었다. 2장에서 솔닛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자연스러운 발걸음이 아니라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된 곳, 아와니치족 족장 테나야. 언젠가 원주민은 누군가의 미래를 장식하는 과거가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예언처럼 적중했다.....
자연의 시간과 역사의 시간이 나란히 스르면서도 서로 거의 아무런 영행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 요세미티가 원주민들의 조국이건 전쟁터 건 관광지 건 간에 물은 연기처럼 떠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2장은 요세미티가 이권의 각축장이 되고 원주민들을 내몰려지는 과정을 담았다. 요세미티를 최초로 촬영한 사진가들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요세미티를 찾는 관광객들을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이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다. 누구를 위한 축복인가! 요세미티라는 지명의 설정에도 백인과 원주민 사이의 첨예한 갈등, 해석 차이가 있었다. 누가 침략자인가? 원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보호구역은 이름뿐인 감옥이 되었다.... 요세미티는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켰다. 영국의 훌루ㅠㅇ한 풍경 공원과 마치 흡사한 풍경을 연출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요세미티의 비ㅏ위들은 지질학적인 신비로움을 제공했다.
세상의 보존은 야생에 달려있다. 이 문장에 공감한다....
핵실험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야생동물과 자신의 고향을 빼앗긴 원주민들이 오버랩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물겹다...... 솔닛은 이 책 야만의 꿈들이 자신이 쓴 많은 작품의 뿌리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핵이라는 물질이 일본에 투하되었지만, 일본이 아니더라도 그 어디에서든 한 번은 터뜨리고도 남았을 미국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복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이며, 우럽계 미국인의 역사는 역사에 깊이가 없다는 저주, 역사의 발상지와 판이한 장소에서는 결국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엄청난 저주에 걸려있다.
앞선 세대와 자신의 세대를 나누며, 폭탄 대비 훈련에 대한 언급 부분도 인상깊었다. 훈련을 받을 이유가 없엇던 것은 이미 폭탄이 신념 구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폭탄을 상상하며 훈련하는 쪽과 이미 폭탄을 겪은 세대의 의미다. 우리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아니면 베트남 전을 겪고 온 세대와 아닌 세대...
솔닛 글쓰기의 모든 출발점이었다는 이 책, 작가이면서 활동가인 삶을 그대로 실천한 솔닛의 기록,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핵실험장과 요세미티 국립공원 그 이질적인 두 장소에서의 글쓰기, 우리는 과연 우리 대한민국에서 원주민 혹은 정주민인가? 원래부터 완벽히 우리의 것, 내 것은 없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더많은 환경운동가와 사회 변화를 기대하는 인물들이 앞으로의 20년을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닫는다.
#야만의꿈들, #리베카솔닛, #양미래옮김, #반비, #북리뷰, #북스타그램, #장소의글쓰기, #bookreview, #bookstagram, #독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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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잠시 권력을 맡긴 관리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가 깊고도 엄연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소홀한 틈을 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 책은 1994년 초판이 출간됐다. 그때 바로 읽었다면 훨씬 이입해서 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저자의 '20주년 기념판에 부치는 서문'이 다른 각도에서 가슴에 확 박혔다. 1950년 이전부터 네바다주에서 벌어진 핵실험으로 인한 피해와 그 이면에 숨겨진 금전적 이권 및 진실, 그리고 네바다 주민들과 솔닛을 비롯한 반핵 운동가와 사회활동가들의 길고 긴 여정의 기록이 담겨 있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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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지원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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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꿈들 #리베카솔닛 #반비 #서평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네바다핵실험장 '네바다 핵실험장은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순간이 아닌 10년이라는 세월에 걸친 가르침이었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보낸 수년의 시간과 네바다 핵실험장을 통해 만난 장소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책임감 있는 미 서부 주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르쳐주었다. 장소 자체가 나의 글쓰기 스승이었다. 장소는 역사, 수렴, 경험의 복잡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이를테면 네바다 핵실험장은 전쟁의 본질과 권력의 본질에 관해 물었다. 40년 동안 네바다 사막에서 한 달에 하나씩 핵폭탄이 터졌음에도 어째서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핵전쟁이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우리가 폭발하는 작은 행성들과 10만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 독성 물질들을 생성하는 능력, 전면적인 핵전쟁으로 지구 생명체의 상당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 인간적 척도(human scale) 의 의미는 과연 얼마나 달라진 걸까? 보통 사람들이 가진 권력과 책임은 무엇일까?? 1991년 미국은 1000여 기의 핵무기 폭발을 끝으로 네바다에서의 핵실험을 중단했지만 임계 전 핵실험은 현재에도 지속하고 있다. 네바다 핵실헌장에서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 백인들은 원주민과 협력하는 법, 환경 정치에 관여할 때 토지에 대한 원주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상당수가 그런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소는 그 자체로 대화와 역사와 연구와 사상과 직접행동과 생태학이 수렴하는 곳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소란 그런 힘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우리가 풍경을 그리는 방식이 그 풍경을 대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비롯해, 미래의 일이어야 했을 핵전쟁과 과거에 벌어진 원주민 전쟁에 어떻게 동시에, 그것도 두 전쟁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얻지 못한 채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것이 작가의 관심사이고 이 책을 끌어가는 화두이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의 핵폭발은 실험보다는 리허설에 가까웠다.' '군비경쟁에서 미국 측의 군비를 관리한 물리학자와 관료들은 바로 그곳에서 세상의 종말을 거듭 리허설하고 있었다. 실험 보다는 과시와 눈속임을 동원한 전쟁과 흡사했다,' "톱날처럼 들쭉날쭉한 지평선이 펼쳐진 머큐리 너머를 향해 5년을 걷고서야 마침내 도착한 것도, 그라운드 제로의 은밀한 풍경에 완전히 빨려 들어간 것도 이상한 경험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목적지로의 도착이 아니라 여정 그자체였다." 핵실험장에 가면 죽게 될 지 여부조차 불투명한 채로 그곳에 직접 걸어 들어간 저자가 써낸 이 책을 대체 어떤 호흡으로 읽어내야 하나... 오랜시간 고민을 했다. 핵실험이라는 소재 자체가 너무 버겁고 한편으로는 무지한 내용인데다가 고도의 사유를 품은 저자의 깊이를 느끼기에 나는 너무 얄팍했다. 하지만...그녀의 여정만큼은 함께할 수 있었다. 변화와 각성을 추구하는 그 이상의 메시지를 알아들을만큼..이제는 리베카 솔닛의 문체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중이다. <물, 과거를 망각하다 : 요세미티 국립공원> 리베카 솔닛은 '의미두기'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의미를 광범위한 스케일로 아우르며 그 의미 속으로 스스로 적극적으로 달려들어간다는 점이다. 일종의 자기 타협도 없다. 파고들어 궁금증을 풀어 나가고 서슴치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 내재된 근간을 파내어 꿰뚫는 재주도 가졌고, 신랄하고 냉철한 문체의 깊은 곳엔 사랑과 희망이 반드시 존재한다. <오웰의 장미>에서 이 <야만의 꿈들>로 넘어갈 때 사실...오래 머뭇거렸다. 오웰의 장미에서 빠져 나오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야만의 꿈들의 1부-네바다 핵실험장을 소화하기조차 너무나 힘들었기때문이다. 내가 한해가 저무는 이때에 리베카 솔닛이란 작가를 만난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눈으로 글자를 읽어 내렸음에도 이런 북받치는 감정이 밀려온다는 것은, 내가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지금보다는 성숙해지어 때론.. 몇 문장들의 문맥을 제대로 느끼고 행간에서 챙겨가야 할 메시지를 알아서 해독할 시늉을 하게 될 때는..나란 인간 자체가 지금보다는 괜찮은 인간이 되어 있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 보는 중이다. 서양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말하자면 문화, 전투, 영웅, 부동산 개발업자 등 대부분 이름만 대대손손 이어지고 존재는 잊힌 이름들이 마치 하나의 조각 이불처럼 더 광대한 풍경을 형성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부터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해 여름 시에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캘리포니아-네바다주 지도를 펼쳤을 때 온갖 이름들이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이 모든 이름 중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를 가진 요세미티까지 내게 말을 걸었다. 원래 네바다 핵실험장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나는 요세미티로 향하고 있었다. 원주민을 추격한 마리포사 기병대는 1851년 3월 27일 요세미티 밸리에 발을 들인 최초의 백인 무리가 되었는데, 이 원정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기병대에 소속되었던 라피엣 버넬 (Lafayette Bunnell) 의 회고록 {요세미티의 발견 그리고 사건의 발달인 1851년 원주민 전쟁() 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요세미티 땅을 향한 열광적이며 낭만주의적인 감상과 저널리즘처럼 냉정한 필치로 쓰인 전쟁 이야기가 뒤섞인 이상한 기록이다. 버넬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책에서 내게 절정의 쾌감을 안겨 주고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대목은, 나이 많은 족장 테나야와 부족민들이 기병대에 붙잡힌 후 보호구역이 위치한 보호구역이 위치한 샌와킨 밸리의 평지로 강제 이동을 당하기 전에 테나야 호수에서 벌어진 일을 담은 장면이었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화를 말살하는 일과 어떤 문화를 낭만화하는 일은 따로따로 진행되지만 버넬은 역사적 변화와 두 단계를 하나의 대화 속에 군더더기 없이 담아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가진 끔찍한 측면 중 하나는 원주민을 몰살해야 한다는 버넬과 마리포사 기병대의 판단이 전쟁을 추동하는 일반적인 감정인 무자비한 증오가 아니라 무분별한 행정적 태도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금이 가득 찬 화석 강바닥에서 흙을 들어내듯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혹독한 시련을 겪은 장소이자 미국 풍경의 시금석인 장소다. 나는 내가 요새미티 국립공원 안에 있는 테나야 호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유럽계 미국인들이 풍경을 경험한 방식을 구성하는 여러 특성과 무지와 활홀감과 문제점을 간파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지구상에서 풍경 사진 및 풍경 보호와 관련해 요세미티보다 더 핵심적인 장소는 없으리라 말해도 결코 과정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요세미티 사진에서 누락된 요소들은 우리가 풍경을 이해하는 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전쟁과 발견이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 버넬이 자신이 가진 인류애를 거주민이 아닌 경치를 위해 몽땅 발휘했다는 사실, 요세미티에 관한 대중의 견해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가 가진 풍경에 관한 견해와 역사에 관한 견해의 간극 속에 수많은 잃어버린 이야기와 파괴된 문화와 지워진 이름이 들어차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얼 의미하는 걸까? 자연의 시간과 역사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면서도 서로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 요세미티가 원주민들의 조국이건 전쟁터건 관광지건 간에 물은 연기처럼 떠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아주 짧은 시간에 상당한 변화룰 겪은 장소에 불변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원주민의 본거지였던 요세미티 밸리가 전쟁 지역이 되었다가 관광지로 변모한 속도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할 정도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직접 목격한 버넬 같은 사람은 그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20세기에 어떤 장소가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기억상실 수준의 변화를 겪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수년이 흐른 뒤 그동안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이 책의 배경을 이루는 땅과 문화의 폐허가 아무리 암울해 보일지언정 전경을 꽉 채우고 있는 명랑한 영웅 같은 사람들은 대륙, 세대, 종교 및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우정과 연대를 쌓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때로는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