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 군도는 1819년부터 매년 500척의 포경선들의 휴식을 취하고 물자를 보급받는 태평양 포경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인과 미국인의 첫 만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1853년 1월 28일(철종 4년 음력 12월 21일), 용당포로 온 포경선 사우스아메리카 호에서 처음 만났다. (-18-) 안재창 형제가 탄 첫 이민선은 파도가 심한 겨울에 태평양을 건너 1903년 1월 13일 새벽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모든 이민자들은 호놀룰루 에 도착하면 우선 부두 앞 검역섬으로 보내져 검역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한인 이민 제1진의 경우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가 추진했던 것이기 때문에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피어선 목사의 도움으로 검역섬에 보내지지 않았다. (-45-) 안재창은 한구 유학생들을 명절이나 방학 때에 집에 데려와 한국음식을 해 먹이고 함께 향수를 달랬다. 마음이 습습한 그는 어려운 학생들을 곧잘 도와 주었다. 한 예로 오마하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공부하던 방사겸이 약혼자가 만주에서 상해를 거쳐 오므로 샌프란시스코로 마중을 가야겠다고 돈을 꿔 달라고 했을 때 안재창은 100달러를 선듯 내준 일이 있었는데, 방사겸은 평생 그를 고맙게 여겼다. (-98-) 3.1독립선언 이후 북미 대한인국민민회 중앙총회는 조국 광복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를 실천하고자 우선 한인들을 파악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조직해 나갔다. 하와이로 건너 갔다가 다시 본토로 이주한 1천 명이 채 안되었던 1919년 3월 당시 한인들은 탄광, 동광, 수은광, 사탕무 농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내고 있었다. (-133-)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재미 한인학생회가 미국 전역에 조직되었을 대, 디트로이트에도 지부를 설치할 만큼의 학생들이 있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2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으며,그들은 실업학교나 주립공대를 다녔다. 학생들 주에는 유일한 ,이기붕, 조규섭,한백선, 그리고 시베리아와 영국을 거쳐서 온 민병기 등이 있었다. (-152-) 정안회사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하 1층과 지상 1층로 된 건물이었다. 건물 뒤에는 정안회사의 용달 트럭 8대와 2인용 배달차 들을 주차할 수 있는 차고가 있었다. 건물 정면에는 700달러를 들여 크게 제작한 네온 사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 중앙에는 'Jhung & Co'라는 큰 글자가 있었고 그 밑에 'Fine Chop Suey'라고 쓰인 글자가 있었다. 또한 간판 가장자리에 붉은색과 푸른색 줄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새로 지은 정안회사 건물 사진은 <신한민보> 1면에 실렸다. (-187-)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총생산량은 1929년 의 530만대에서 1932에는 4분의 1인 130만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계 경제공황의 초기였던 1932년, 디트로이트 시는 실직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디트로이트 시의 은행, 시청, 모든 공공기관들 그리고 사립자선단체들은 모두 파산했다. 따라서 시교육청의 지원을 받는 공립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급식을 못 주게 되었다. (-232-) 재미한족 연합회가 생긴 후 미국 본토에서는 연합회를 창설한 북미대한인국민회가 전시 재미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반면 하와이에서는 전시 계엄령이 내려져서 하와이 한인 단체들은 군정부의 감시를 받아서 전처럼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272-)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난 이공계통을 전공한 중국인 2세들과 결혼했고 2년만 한인 2세와 결혼했다. 로잘리 박사는 은퇴하기 전부터 한국은 여러 번 방문했다. 1989년에는 이화여대 100주년 기념식에 이화동창의 딸로서, 1994년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인 청주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하동 정씨 직계 조상의 족보까지 복사하며 열성을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 정양필에 관한 글도 남겼다. (-306-) '찹수이'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색적 문화의 산물로 1920년대 비서 구식 하류 사회 음악인 재즈와 함께 유행하기 시작하여 상류층으로,그리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찹수이' 장사는 노동집약적이고, 이윤이 낮고 , 값에 비해 양이 많고, 미국인의 주식이 아니라서 기호와 취향이 변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모험적 사업이었다. (-315-) 독림운동하면 떠오르는 인물 도산 안청호가 있다. 그 도산 안창호의 삼촌 안재창이었다.그는 조카 안창호 복사의 권유에 따라서, 하와이 이민을 1902년에 하였다. 사탕수수 노동자가 필요했던 하와이 원주민에게, 일본인보다, 중국인보다 성실한 조선인이 제격이었다.그렇게 안재창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고, 1907년 미국 유타주에 도착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던 그 때,안재창은 미국 본토에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안재창은, '찹수이'가공제품을 만들어서 팔았고, 정안회사를 주식회사로 키우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였고, 미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미국 국채를 사들였다. 미국이 전쟁에서 주도하고 이겨야만, 일본이 무너지고, 조선이 해방된다는 계산이 있었다. 미국은 경제가 호황 국면이었으나, 1929년 당시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덩달아 , 정안회사도 허리띠를 졸라 매야했다. 10년간의 경제 대공황이 지났고, 1945년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그가 걸어온 미국 에서,독립운동의 산 역사, 한인 이주자들을 뒤에서 도와주고, 협력하였다.그 과정에서,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이기붕 부총리와의 만남도 가지게 된다. 미국에서, 외로움,, 조선에 대한 향수를 견디며 살아온 안재창은 1963년 세상을 떠났다. |
|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한인의 미국 이주가 시작됐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발견하길 꿈꾸었다. 주권 잃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이민은 생존을 위해 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능성 중 하나였다. 주어진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계를 사용해 편하게 노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도 셈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 동안 고된 배 멀미에 시달린 끝에야 사람들은 육지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턴 고행의 연속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동양인을 멸시하는 시선이 팽배한 시대였다. 당시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던 일본은 자국민들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들을 지켜줄 국가는 없었다. 그저 부닥치는 게 최선이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배우자를 찾았다. 직접 대면해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기회는 없었다. 그저 사진만 한 번 보고 바로 결혼을 결심했다. 이른바 ‘사진 결혼’이다. 그렇게 맺어진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모국을 알지 못했다. 우리말 대신 영어를 제 나라 말로 여기며 성장했는데, 미국 땅을 벗어날 계획이 없다는 조건 하에서는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물론 부모 세대는 나이가 들수록 귀국을 갈망했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후로는 더더욱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생을 살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일부는 성공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자녀 세대를 고려해 이국땅에 남기로 했다. 2세, 3세, 생김새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삶의 방식은 참으로 다른 이들이 그렇게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살게 됐다. 대략적으로 이민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안재창은 이민 1세대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이다. 1873년 태어난 그는 물려받은 농토도 하나 없어 가난한 삶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야만 했다. 사회가 그런 이들을 필요로 했다. 남아도는 노동력을 흡수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하와이 사회의 부름을 받은 안재창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홀로 미국으로 향했다. 아내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 그랬다고도 한다.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어쨌건 그는 미국에서 앞서 언급한 사진 결혼을 통해 배우자를 맞이했다. 그렇게 탄생한 가족은 한국에 남은 본래의 가족들이 유명을 달리한 후에도 크게 방황 않고 미국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돼 주었다. 그는 불법체류자였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사탕무 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내 정원사로서 유능함을 뽐냈고,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돼 갔다. 그렇지만 언어의 장벽만은 뚫지 못했다. 이민 사회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주류 사회에서까지 인정받기란 쉽지가 않았다. 1952년 미국이민국법이 바뀌어 미국 시민권을 받을 기회가 생겼지만 시험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자녀 세대로도 이어졌다. 정양필과 조오흥이 유창한 영어를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성공을 거머쥐었고 자녀세대의 성공도 이끌었던데 반해 안재창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안재창 가족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낯선 세상에 속하고자 할 때 겪게 될 바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민자들과 그 자녀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아니 한 이들이 훨씬 많다. 우린 낯선 곳에서의 삶은 대한민국 내에서보다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망각한 채 오로지 성공을 이룬 이들만을 조명하느라 바빴다. 이민자로서의 대표성을 띤다 할 수 있는 안재창의 삶을 들여다보면 정안회사의 흥망성쇠를 읽을 수 있다. 직접 숙주를 키워가며 그가 만들어낸 ‘찹수이’는 본격적인 경기 침체가 도래하기 전까지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시장의 요구에 부응한 덕분에 거둔 성공이었다. 매출의 증대와 함께 서양인들이 지닌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허물었다. 정안회사는 말끔한 공정을 자랑했다. 철두철미에 가까운 위생상태가 상품이 만들어지는 내내 유지됐다. 적잖은 한인들이 정안회사에 기대 성공했다. 정안회사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자녀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정안회사에서 얻은 경험과 아이디어로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해 성공을 써내려갔다. 미국 사회를 덮친 불경기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경기침체와 함께 디트로이트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활력을 잃은 도시에서 백인들은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를 메운 건 흑인들이었다. 그와 함께 정안회사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50대에 들어선 안재창과 동업자들은 시장의 변화를 읽어내는데 서툴렀고 또 다른 혁신을 만들어낼 만큼 영민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난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이의 고생을 밑천 삼아 성공을 거둬들이곤 한다. 안재창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행보는 한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1998년 그 공을 인정받아 안재창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63년 세상을 떴다. 미국 사회의 이주민들은 안창호와 이승만, 박용만 등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안재창은 무게감이 다소 떨어지는 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인이라면 그를 통해 일자리를 얻었고 또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을 소개 받았다. 광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어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금을 보탰다. 파벌이 생성되고 갈등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생전에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하여 그가 지닌 중요성이 작아지는 건 아니다. 그가 이민을 결단하던 그 순간을 잊어선 안 된다. 미약했던 그 시작은 창대한 현대를 낳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