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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읽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시집이었다. 실제로 정말 죄를 짓고 싶다거나, 내 마음이 어떤 죄를 짓고 싶은 상태는 조금도 아니었지만..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라는 표현에 담긴 인간의 연약하고 외롭고 우울한 정서, 고독한 방황, 슬픈 체념, 현실에 낙담되며 버려지고 쓸쓸한 흐린 저녁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알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제목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받은 내 느낌이 과연 시인의 생각과 표현과 실제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고, 시인의 이력을 보니 매우 화려하였다.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무려 시와 동시, 평론 세 분야에서 등단을 하신 것이다. 솔직히 한 분야에서 한번 등단하기도 어려운데... 메이저 신문사에서 각기 다르게 등단..-_-;
문학적인 재능과 글 솜씨, 객관적인 실력은 이미 검증되고 차고 넘치게 인정받은 분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으로 계신다니.. 제자들도 볼텐데..허투루 시집을 낼 것 같지도 않고..ㅎㅎ
역시나 첫장부터 제대로 시집이란 생각이 든다 ^0^ 만족! 시집을 종종 읽는 편인데.. 안타깝게도 진짜 시다운 시가 많이 실린 시집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집은 정돈된 시어와 문장, 매끄럽고 자연스런 문맥에 감탄이 나왔다. 저녁이란 주제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제목에 어울리는 시들의 통일성!
시인은 사실 저녁에 홀로 외롭게 남겨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자발적인 의지로 저녁을 붙잡고 저녁 한 가운데로 들어간 것.. 그렇게 시를 연구하고 공부하며 애틋하게 품고 사랑하고 있는 시인의 묵상과 시론을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시집으로 추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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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짓고 싶은 저녁
시집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본다. 아니 보았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무언가 조금은 달라진 것도 같다. 이십 대 시절의 나는 마치 살코기를 뜯어먹듯이 시를 분석해서 읽곤 했었다. 시인의 생각과 시인의 마음이 어떤 표현과 어떤 그림으로 작품에 녹아들었는지 알고자 했었다. 때때로 그 마음이 아리고 슬프면 슬퍼했고, 그저 조용하고 낙낙했으면 나도 그저 조용히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문득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에 시집을 다시 읽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공감이다. 눈으로 시를 읽으면서 풍경과 상황을 다시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것이 전부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격이다.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시를 읽고 난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해두자.
문신 시인의 시집을 읽다보면 많은 아릿한 감정들이 다가온다. 흐림. 쓰라림. 비. 안개. 그림자. 혹은 삶의 무게감. 추억. 풍경들. 섬세한 시선의 이동. 그리고 근심. 눈물. 어쩌면 이런 느낌의 감정들은 내 것이고, 나는 되려 시를 통해 나의 감정 몇 가지를 다시 찾아 불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나는 지하철에서 한 사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봤었다. 대낮의 지하철은 한가했고 그래서 유독 그 사람이 눈에 띄었던가. 아니면 그 사내가 더 오래전에 내 은사와 외적으로 닮았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지하철 의자에 반만 엉덩이를 걸친 채 굵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울던 사내의 얼굴은 참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던 장면이다. (이 이야기를 참 많이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는가도 싶다) 그로부터 또 몇 년 후쯤. 다른 장소에서 우연치 않게 그 사내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 그는 인도와 차도 사이에 있는 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도 사내는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이 예전의 그 사람이라는 게 분명한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그 사내의 얼굴에서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본 사내의 분위기가 역시나 닮아있었던 것이 다였을 뿐이다 그런데 무엇이 또 내 눈을 잡아끌었던 것일까. 그 역시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언젠가 눈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시인에게 있어 감정의 표현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 것도 같다. 사람들은 글을 쓰는 이들이 감정 표현에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단 말이다. 이를테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온몸으로 심하게 앓고 난 후에 더딘 회복에 지쳐서 내뱉는 혼자만의 신음 같은 고백인지도 모른다. 감정 표현은 사실 쉬운 게 아니다. 그 중에서도 세상 모든 것들에 반응하는 이들의 눈물은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더란 말이다.
시인의 작품 중에 울음... 눈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더라.
“오늘, 다시 울기로 하자/어제까지의 울음은 곡(哭)에 불과했다 어깨를 들썩이는 일이 없도록 하자/눈이 퉁퉁 붓도록/ 혹은 콧등이 뭉개지도록 발악하는 일도/ 악다구니도 그치고/한 시절이 떠들썩했더라는 후일담이 없도록/ 울자,/횡설과 수설에 갇혀/부끄럽게 우는 울음은 울음이 아니다/ 청승도 울분도 없도록/울되/ 아침저녁으로 울음을 익히는/짐승들처럼/ 우리도 때때로 배우고 다지는 울음을 울도록 하자/” -다시 울기 중 일부 인용-p82
그가 말하길 ‘맑고 찰랑거리는 울음을 울자-p82’고 하더라. 그러기에는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서인지 시인은 ‘마른 갈댓잎이라도 질끈 악물어야 하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 면면 모든 것에 예민하고 여리고 아프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들이 세상 밖으로 승화해 만들어내는 것들이 보이는 것 같은 것은 그저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에서 내가 너무 나아가면 오버 페이스가 되는 거다. 그러니 분위기를 좀 바꿔보자. 아니다. 틀렸다.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건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싶다.
그냥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기억에 자리한 몇 편의 시를 간단히 적어놓고 가야 할 것 같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득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중간 생략) 시내버스 어딘가에서/흑,/울음이 터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저녁이다// 이 버스가 막다른 곳에서 돌아 나오지 못해도 좋을 저녁이다”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일부 인용p20-
적어놓고 보니 또 울음 이야기가 됐다. 그렇다고 시집이 다 무겁지는 않다고 꼭 말을 해야할 것만 같은 상황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작 ‘눈길’을 연상케 했던 시 ‘폭설 아침p39’ 혹은 ‘어미가 밥을 안치는 저녁p41’과 같은 작품에 나름대로 좋을 호(好)자를 적어놓았다. 문득 나란 존재가 과연 삶을 관망하는 시선을 과연 논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갖게 했던 시 ‘장설p61’을 마지막으로 언급하려한다.
“잘못된 것이 잘되는 일보다 잘된 일이 잘못되는 경우의 수를 다 셈하기 전까지/ 눈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살아생전, 이라는 말처럼/ 어떤 후회가 산등성이를 넘어 자욱하게 밀려들 것이다// 장설이라,/조촐한 밥상을 앞에 둔 성당 주임신부의 기도를 전해듣듯// 낮게, 더 낮게, 좀 더 낮게/엎드리는 일이 남았다//” -장설의 일부 인용-p61∼62-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감이 느껴지는 장르인 것은 틀림없다. 깊은 우물과 같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게 부끄럽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어쩌면 시를 너무 쉽게 읽어내는 일 자체도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나도 같이 낮게 낮게 엎드려야 할 것 같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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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고를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이 시집은 제목이 끌렸다. 왜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일까? "죽기 딱 좋은 날이군~"이라는 영화 《신세계》의 대사가 떠오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렇게 이 시집을 읽게 되었다.
1부에 무거운 습기가 가득한 분위기였다면 2부는 촉촉한 듯 분사되는 수분으로 더 빠르게 메마르는 건조한 분위기의 시들을 만나게 된다. 3부의 시들은 내가 썼던 시들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시인의 시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나 그런 감성이 느껴지고 그래서인지 뭔가 익숙하다. 내가 추구하는 시의 방향성과 맞기 때문일까? 익숙한 듯 낯선 시를 읽으며 잠시 생각에 들게 되는 시간을 만났다. 4부는 시인의 자서전 같은 시들을 만나게 된다. 치열하고 끈질기게는 아니더라도 가늘고 길게 시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는 나와 다른 삶이다. 그러나 그런 시인의 시를 통해 다시 그 끈에 더 두꺼운 풀을 메기고 손에 감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쩌자고 시를 배웠을까'라는 생각도 하며 낄낄거리진 않으나 이 글을 적고 있고 아침이라 혼자임을 잠시 잊는 시간이다.
시인보다 치열하지도 않으면서 시를 붙잡고 있어 손이 간 게 이 시집을 읽은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모르겠다. 내가 그냥 지나치며 들었던 이야기들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고, 평소 내가 쓰던 스타일의 시를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방향성을 얻을 수 있었던 시집이라 전하며 리뷰를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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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가 밥을 안치는 저녁
늙은 어미가 밥을 푼다 이혼하고 돌아와 말없이 먹는 밥은 뜨겁다. 밥숟가락이 흰밥을 떠 약간 흰 허공을 날아 내 입속으로 들어오는 사이 흐린 텔레비전에는 밥숟가락 같은 혜성이 또다른 허공을 날악단다. 60년 만에 혜서은 지구를 지나가다. 나는 한 생이 60년이면 충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미는 이미 한 생에 또한 생을 얼마쯤 덧살고 있고 이혼한 나느 한 새에 미치지 못했다 그 알량한 생이 궁금해 오늘 밤에는 혜성이 늙은 어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어미가 밥을 안치는 저녁이 지나면, 늙을 일도 없을 것이다. (-41-)
자화상
이중섭 , 1955년 종이에 연필 48.5 X 31cm
꿈에 중섭의 아이들을 만났다 tk나흘 전에 큰 눈이 내린 듯 처마 끝이 꽁꽁했다. 중섭의 아이들은 칭찬 같은 볼을 하고 있었다. 드러낸 아랫도리가 퍼랬다. 아이들은 연신 고개를 치켜올려 하늘을 쳐다보고는 그새 땅바닥에 엎드려 곱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하늘을 그린다고 큰 아이가 말했다. 새를 그린다고 작은 아이가 말했다. 아이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중섭이 가난을 끄덕이고 있었다. 겨울 하늘이 쓱쓱 스케치해 놓은 아이들의 얼굴답게 짱짱했다. 또 눈이 퍼부을 듯 중섭은 눈이 까맸다 목탄처럼 까맸다. (-65-)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편린 속에서, 그 한 때를 기억한다.우리는 죄를 짓고 살아간다.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죄를 느끼며 살아가며,그 죄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갈 때가 있었다. 시인은 어떨 때 죄를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양심에 따라 살아갈 필요성에 대해서 ,나름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였었다.
시는 법과 제도에 규정된 죄가 아닌, 도덕에 근거한 죄를 언급하고 있다. 큰 죄는 아니지만, 눈치를 살피게 되고,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읺을 때이다. 양심에 찔리는 일들로, 가난이 있었고, 이혼이 있었다. 나약하고, 연약한 할머니에 준하는 어머니가 퍼다주는 따스한 밥은 아들의 마음 한 컨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결혼 후, 아내와 살았던 아들은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홀아비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노쇠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경을 엿볼 수 있으며,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때,그 죄는 소멸된다.
가난이 죄가 아니지만, 죄가 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민페가 되는 것은 죄로 규정된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하루 하루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드물었다.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죄가 될 수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 가난한 삶도 죄가 될 때가 있다. 나의 소소한 가난이 나의 자식 대에 되물림 된다는 것은 평생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가 된다. 그러한 것은 가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도 죄가 되는 이유는 내 몸이 부모가 물려준 소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고유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