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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연일체를 이루거나 아예 별개로 뻗어나가는...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
"혼연일체를 이루거나 아예 별개로 뻗어나가는...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 내용보기
“나는 이 글들을 내 대표작이 되었으면 하는 작품을 써야 하는 시간에 딴짓을 하는 기분으로 쓰곤 했다. 이런 글을 300개나 쓰라는 임무를 나 자신에게 맡기는 건 토할 때까지 억지로 줄담배를 피우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는 토하지 않았으니까.” (p.61)     세라 망구소의 《300개의 단상》은 300개의 아포리즘을 모아 놓은 책이다. 책의 크기가 작고 얇아서
"혼연일체를 이루거나 아예 별개로 뻗어나가는...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 내용보기

  “나는 이 글들을 내 대표작이 되었으면 하는 작품을 써야 하는 시간에 딴짓을 하는 기분으로 쓰곤 했다. 이런 글을 300개나 쓰라는 임무를 나 자신에게 맡기는 건 토할 때까지 억지로 줄담배를 피우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는 토하지 않았으니까.” (p.61)

 

  세라 망구소의 《300개의 단상》은 300개의 아포리즘을 모아 놓은 책이다. 책의 크기가 작고 얇아서 차의 뒷좌석에 툭 던져 놓았다가, 잠깐 짬이 날 때 허리를 틀어 책을 집어 자세를 고쳐 잡은 다음, 93.1에 주파수를 맞춰 놓고 몇 페이지 읽고, 다시 뒷좌석으로 툭 던져 놓았다가, 아버지 투석 병원 올라가는 길에 다시 집어서 가지고 올라가,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읽었더니 금세 다 읽어버렸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 생기는 문제는 너무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타인 전체를 대조군으로 삼으면 당신이 가장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것과 가장 낙관적으로 바라는 것이 동시에 현실로 다가온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인 것처럼, 비정상인 동시에 다른 모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p.7)

 

  금세, 라고는 했지만 정말 금세, 는 아니고 짬짬이 읽다 보니 며칠은 걸렸다. 어떤 단상은 몇 번 눈을 깜박이는 동안 지나가기도 했지만 또 다른 단상은 몇 번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는 모자라 길게 시간의 공을 들여야 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로 작가의 단상과 혼연일체를 이루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작가의 것과는 아예 별개일 수도 있는 나만의 단상을 만들어내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수업 시간에 여러 개의 자루에 든 온갖 뼈와 적갈색 공작용 점토 덩어리를 가지고 고양이의 뼈대를 조립한 적이 있다. 척추를 만들기로 한 내 친구는 뼈 사이사이에 서둘러 점토를 끼워 붙였다. 나는 턱뼈만, 딱 그 관절 하나만 붙들고 두 개의 뼈를 완벽하게 연결하려고 애를 썼다. 겨우 열 살밖에 안 됐을 때부터 나는 작은 일 하나라도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사실 내가 지금껏 별로 변하지 않았으며 변화 같은 건 전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p.21)

 

  책에 있는 단상이 모두 예리하고 깊어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진부한 것은 진부한 대로 단순한 것은 단순한 대로 나름의 접착면 같은 것이 있어서, 읽고 생각하기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작가의 단상들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책을 읽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모욕하거든 그 모욕을 칭찬으로 알아들은 척하라. 그러면 그 사람을 몹시 화나게 할 수 있다.” (p.35)

 

  작은 생각조차 붙들고 있기 어려울만큼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얇은 책을 읽을 때 더 빨리 시간이 가고 두꺼운 책을 읽을 때 시간이 조금 더 더디게 흘러간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세라 망구소의 두 권의 책을 읽는 동안에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해가 바뀌었구나 2023년이 되었구나, 라며 절절히 감응할 새도 주지 않고 바야흐로 2월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적응을 잘 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기 삶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여기저기로 골고루 분배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다.” (p.41)

 

  그렇게 해가 바뀌고 쉰다섯 살이 되었다. 현 대통령이 한 살을 깎아 준다고 했다는데 어쩌면 그의 재임기간 중 유일한 치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의 은총을 등에 업는다고 하여도, 나의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는 올해 모두 쉰 살이 넘어버렸다. 병원 가는 길에 이 사실을 넌지시 아버지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한바탕 크게 웃다가 곧바로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무섭다 야...

 

  “마흔 살이 되면 우리는 비극적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사람으로 갑작스레 변하고 만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 기회는 있다. 대단히 흥미로워질 만큼 장수하다가 죽을 기회가.” (p.90)


세라 망구소 Sarah Manguso / 서제인 역 / 300개의 단상 / 필로우 / 123쪽 / 2022 (2017)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3.02.0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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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는 오브제를 대하는 쓰는 자의 태도란... 세랑 망구소, 망각 일기
"일기라는 오브제를 대하는 쓰는 자의 태도란... 세랑 망구소, 망각 일기" 내용보기
나의 소망 중 하나는 하루에 세 번이나 네 번 정도 일기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뜨면 세면을 마친 다음 운동을 한다. 이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을 하기 전에 그날의 첫 번째 일기를 쓴다. 나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게 될 것인데 서점의 안과 밖을 청소하면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한 다음, 서점 안에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두 번째 일
"일기라는 오브제를 대하는 쓰는 자의 태도란... 세랑 망구소, 망각 일기" 내용보기

  나의 소망 중 하나는 하루에 세 번이나 네 번 정도 일기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뜨면 세면을 마친 다음 운동을 한다. 이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을 하기 전에 그날의 첫 번째 일기를 쓴다. 나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게 될 것인데 서점의 안과 밖을 청소하면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한 다음, 서점 안에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두 번째 일기를 쓸 것이다.

 

  “모든 순간을 기록하려 했지만, 시간은 순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순간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은 순간 말고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 그래서 나는 텅빈 시간처럼 보이는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려 애썼다. 내 작문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20분, 30분, 40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한 다음, 거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시간에 관한 글을 쓰게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직전의 시간에 관한 글을 그 시간 직후에 다 같이 읽으려고 항상 교실과 복사실을 달음질로 오갔다.” (p.9)

 

  저녁이 되면 서점은 다른 사람에게 인계되어 운영될 것이고 나는 퇴근을 하여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것이다. 저녁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세 번째 일기를 쓸 것인데 이 세 번째 일기는 주로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으로 제한하고 싶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와 먼저 영상 매체를 그 다음에는 인쇄 매체를 보고, 그 날의 마지막 일기를 작성한 다음 잠자리에 들 것이다.   

 

  “2000년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었다. 1996년에는 중요한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서 그해 일기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 고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장은 이미 갈가리 찢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못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그 일이 전부였다는 확신을 품고 싶다.” (p.25)

 

  어려서 작성한 몇 권의 일기 노트가 있었는데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분실되기도 하였고 부러 버리기도 하였다. 오 년 전이던가 마지막 이사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일기 노트를 버렸다. 거기에는 대학 일학년 겨울 방학에 계룡산과 서해를 돌아 서울로 돌아오는 4박 5일(맞나 모르겠다)의 여정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그날 마신 술의 종류와 양이 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내게는 아무런 생각도, 어떤 자의식도 없었고, 다만 소리를 빽빽 지르고 또 소리를 빽빽 지르는 자그마한 생명체와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만 생겼다... 한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다음에는 스물한 살, 스물두 살···. 그러다 엄마가 되었고, 그러고 나니 스물하나와 스물둘의 차이라든가 서른여덟과 서른아홉의 차이조차 더는 분간하지 못하게 됐다.” (pp.62~63)

 

  노트는 모두 사라졌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에 2015년부터의 일기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의 일기는 데스크탑의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는데 들여다본 지 오래 되었다. 1990년대의 일기에는 보다 신변잡기인 그리고 은밀하며 때로 추상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을 텐데, 그래서 먼지 쌓인 하드 드라이브를 구동시키고 다른 곳으로 옮겨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지금 나는 일기가 내가 잊은 순간의 모음집이라고, 내가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어가 끝낼 수도 있는 기록이라고, 말하자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언젠가는 내가 잊은 몇몇 순간들, 내가 스스로 잊어도 된다고 허락한 순간들, 내 뇌가 애초에 잊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 내가 기꺼이 잊고 또 쓰기를 통해 기꺼이 되살려낸 순간들을 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경험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니다. 경험은 쓰기다.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 //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있다. 이제 내 목표는 모든 것을 잊고 말끔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저 사랑에 관한 아주 애매모호한 기억만, 내가 위대한 결속의 주체였던 순간에 대한 기억만 간직한 채로.” (p.96)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의 초반부는 일기라는 오브제의 개념화와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한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어 제목에 있는 ‘일기’와 맞장구를 치는 부분이다. 그런가하면 책의 중반 이후는 여성인 작가가 겪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진다. 사실 그 기간 작가는 일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든 쓰는 행위로부터 멀어지고 마는데, 어쩌면 그 부분이 한국어 제목 ‘망각’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라 망구소 Sarah Manguso / 양미래 역 / 망각 일기 (Ongoingness : The End of a Diary) / 필로우 / 111쪽 / 2022 (2016)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3.01.08.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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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
"여운" 내용보기
주변에서 강력 추천 받아서 산 책인데쉽게 읽히고 짧지만 깊이는 깊어요 . .힘들때마다 꺼내서 읽을 수 있는 책일거 같습니다300개의 단상이라는 제목처럼 좋은 글이 많아서 좋은거 같아요작가님 다른 책도 사서 읽어봐야겠어여~!! ㅎㅎㅎ
"여운" 내용보기

주변에서 강력 추천 받아서 산 책인데

쉽게 읽히고 짧지만 깊이는 깊어요 . .

힘들때마다 꺼내서 읽을 수 있는 책일거 같습니다

300개의 단상이라는 제목처럼 

좋은 글이 많아서 좋은거 같아요

작가님 다른 책도 사서 읽어봐야겠어여~!! ㅎㅎㅎ

d****e 2026.03.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