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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을 먹고 부지런히 남편과 산책을 나가 동네 한바퀴를 걷는다. 퇴근한 가족들이 모인 집에는 노란 불이 켜지고, 가족들의 실루엣이 창문을 통해 어른거린다. 저녁을 준비하는 혹은 식탁에 놓인 음식들의 냄새가 난다. 주말이라면 백야드에서 스테이크라도 굽는지 흥청거리는 음악과 흥얼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넘쳐난다.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말한다. "우리가 둘이길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와서 참 다행이고. 만약 배고픈 상태로 혼자 나왔다면 아마 무척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슬플 거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성냥 팔이 소녀가 거리에서 집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감정과 비슷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건 1) 혼자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2)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내가 이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내 스스로를 성냥 팔이 소녀와 동일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느낄 감정이 창밖에서 성냥 팔이 소녀가 느꼈을 바로 그 감정이었을 테니깐.
김승일의 『항상 조금 추운 극장』 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는데, 한 축은 시인으로서 그가 생각하는 시에 관한 생각들, 크게 보자면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고, 다른 한 축은 생활인으로서 그가 느끼는 일상의 감정들에 관한 것들인데, 이 감정의 지배적인 정서는 '춥다'는 것이다. 시인은 1987년생이니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시들이 젊은 시인의 시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화자가 한기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실내에 있지도 못하고, 외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성냥팔이같은 화자.
정설은 아니지만,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산업혁명 시기에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아동노동자들의 이야기라는 설명이 있다. 가정에서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노동현장에 내던져진 아동들이 성냥공장에서 중노동에 착취당하다가 인 중독에 걸려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면 성냥 몇 갑과 함께 공장에서도 내쫓겨져 길거리를 떠돌다 객사하는 일이 실제로 빈번했다고 한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추위 속에서 결국 죽게 되는 '성냥팔이 소녀'는 결코 메타포가 아니라 지금 대부분의 청년들의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더욱 가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시인이 '성냥 팔이 소녀'처럼 비극적이거나 비참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는 '반려'의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와 고양이. 그리고 시. 그것들이 시인을 가난과 차가운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함께 견디고 버티기는 한다. 그 점이 중요하고, 김승일의 '시론'(2부의 대부분이 시와 에세이의 상당 부분)의 일정 부분도 그 점에 관한 것이다.
시는 중요하지 않다. 시는 내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아닌 것. 그것이 반려다. (p.110)
지금 시대에서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반려'라고 한다면, 시인에게 있어 시는 고양이이고 시는 아내이기도 하다(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내가 추운 현실을 춥지 않다고 느끼는 것도 함께 손잡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온기가 있다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 책도 내게 그렇게 온기를 주는 '반려'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성냥 팔이 소녀'들이 얼어죽지 않도록, 그들에게 마지막 성냥이 되어줄 '반려'가 그들 곁에 있기를. 그들의 현실이 혹독하더라도 그 한파 같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반려'가 그들과 함께 하길. 여러분, 시도 그런 반려가 되어줄 수 있답니다.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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