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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 >.이 세 작품이 헤밍웨이하면 생각나는 작품이다. 그 중 읽은 책은 <노인과 바다>뿐인데, 솔직히 말하면 두 작품에 비해 두께가 얇았기 때문에 선택했던 거였다. 난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읽혔고, 어느 정도는 작가가 던지는 메세지를 알겠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그후 많은 시간이 흐르고 두 번째로 만난 책이 이 책이다. 단편소설 모음집으로는 처음인데, 헤밍웨이는 70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고 한다. 책에는 총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나마 쉽게 읽혔다고 생각하는 소설이 표제작인 <킬리만자로의 눈>이었고, 다른 작품들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 작가는 소설에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지를 담지 않을까싶은데, 쉽지 않았다.
<킬리만자로의 눈> 아프리카에 사냥을 왔다가 가시에 긁힌 다리에 괴저가 생겨 죽어가고 있는 해리. 그의 아내는 비행기가 올 것이고,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하며 용기를 주고 사랑을 표현하는 반면, 해리는 거의 포기한 상태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죽음을 인식하며 회상하는 그의 과거는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고, 글감으로 생각했던 것들은 글이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그는 짙은 허무감에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해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인식했는데, 킬리만자로의 네모진 정상이 자신이 가고 있는 곳으로 그려졌다. 왜 킬리만자로여야 했을까? 킬리만자로는 19,710피트 높이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신의 집을 뜻하는 '은가예 은가이'라 불린다. 서쪽 정상 부근에는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한 구가 있다. 표범이 그 고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p12 이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되었고, 해리가 마지막으로 본 곳도 킬리만자로의 정상이었다. 해리는,헤밍웨이는 표범이 그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우리가 결코 얻을 수 없는 답인지도 모르겠다.
<킬러들> 한 식당에 두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의 목적은 식당에 밥을 먹으러 오는 한 남자 올레 안드레슨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세 명의 직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레 안드레슨이 식당에 오지 않아 두 남자는 떠났다. 그들이 떠난 후 올레 안드레슨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는 의견과 이런 일에는 엮이지 말아야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그 중 닉은 안드레슨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지만 고맙다는 말마 할 뿐 그 마을을 떠날 생각도 어떤 대처방법도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는 닉은 마을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킬러와 대상이 된 안드레슨보다는 식당에 있던 세 사람의 행동에 눈이 갔다. 엮이지 말자고 하는 사람, 생각은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는 사람,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 가장 힘든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삶에 관여한다는 것, 실이 많을까? 덕이 많을까?
<흰코끼리 같은 산등성이> 여자는 지금 무언가를 앞두고 있다. 남자는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한다면 그들의 관계는 훨씬 더 좋아질거라고 말했다. 여자는 썩 내켜하지는 않는듯하지만 남자의 의견에 따르려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도, 이들의 관계는 정말 괜찮은 걸까? 남자의 행동은 폭력으로 보였다.
<미시간 북부에서> 대장간을 하는 짐 길모어는 D.J스미스의 집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리즈 코츠는 스미스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리즈는 항상 짐 길모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짐은 그녀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짐이 이웃들과 사슴 사냥을 떠났다 돌아온 날 그들은 함께 있게 되었다. 리즈 코츠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려워 했지만 싫지 않았고, 해야만 했지만 두려운 일이라고 했고, 잠들어 있는 짐을 챙기면서 정작 본인은 울고 있고.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명확한 그녀의 감정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고는 선창을 가로질러 걸었고 잠자리로 가기 위해 모래 길 위로 올라왔다. 차가운 안개가 만으로부터 나무숲을 통과해 올라오고 있었다. '라는 그 장소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는 감상은 남았다.
<혁명가> 헤밍웨이는 1918년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3페이지의 정말 짧은 소설은 1919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해서인지 소설은 헤밍웨이를 떠올리게 했다. 이 소설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힘들었고, 좋아하는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는 정도로 만족해야했다.
<빗속의 고양이>
이탈리아의 한 호텔에 묵고 있는 미국인 부부가 있었다. 아내는 비 내리는 날 창밖을 내다보다가 녹색 테이블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데려오고싶어했다. 밖으로 나갔지만 그새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오고가는 중에 인사를 나눴던 호텔 운영자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가 인사를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매우 하찮으면서도 동시에 중요하다고 느꼈고, 최고로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다. 남편은 아내에게 막 대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계속적으로 자기 얘기만을 하는 것에는 역정을 냈다. 고양이를 원한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그녀에게 하녀가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주인님이 이걸 부인께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요."
메이드에게 영어로 말했을 때 메이드는 왜 긴장했지? 커다란 고양이를 가지고 오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 소설에서 난 무엇을 느껴야하는 거지? 7페이지의 이 단편에서 헤밍웨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역자 이정서는 주어와 동사, 수식어, 문장의 쉼표와 대명사 등을 최대한 원래대로 맞추는 번역, 작가가 쓴 서술구조 그대로의 번역, 직역을 강조하는 번역가다. 역자는 <빗속의 고양이>를 다른 번역가의 의역과 비교하면서 이 단편에 대한 해설도 곁들이고 있었다. 우리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은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하나의 반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비로서 이해가 되었다. 사실, 작품 해설이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 못챘겠지만. 헤밍웨이도 그것을 노렸던 걸까? 아니면 더 깊은 뜻이 있는 것일까?
여섯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의문만 남았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할까? 내 이해력을 탓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헤밍웨이는 평소 좋은 작품에 대해 '빙산 이론'을 펼쳤습니다.빙산의 일각처럼 작품 속에서 알고 있는 것의 8분의 1만 드러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이론입니다.'라는 작품해설을 읽으니 조금 위로가 되었다. 드러낸 8분의 1도 다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하다. 헤밍웨이 작품 평론집을 읽어봐야하나 싶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들을 만났다는데 일단 의의를 두고, 다시금 읽어봐야할듯하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탁월한 감상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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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미국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오랜 세월 청소년 권장 도서에서 빠지지 않는 [노인과 바다]일 것이고 말이다. 나는 그의 [무기여 잘있거라]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아직 접해보지는 못했으나 [노인과 바다]를 통해 엿본 그의 작품세계는 풍부한 상징성과 단호하고 간결한 문체로 너무도 취향과 결이 맞았다. 다만 [노인과 바다]의 경우는 지나치게 공식을 대입하듯 원형과 상징이 난무해 깊이를 느끼는 와중에도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만의 독자적인 문체와 은유는 이후 그의 다른 작품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의 다른 작품과 만나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해 알아 가던 중, 헤밍웨이는 장편에서 많은 비평과 이론을 마주하지만, 중편과 단편에서는 어김없는 호평을 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과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다가 본서의 서평단 모집 소식을 알게 되어 서평단에 응모하게 되었다. 본서의 서평단 모집이 매혹적이었던 이유는 첫째로 앞서 말했던 바대로 헤밍웨이가 진가를 발휘한다는 단편이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쉼표 하나 가벼이 여기지 않는 바른 번역을 추구한다는 새움출판사의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본이라는 데 있었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본은 [노인과 바다], [이방인], [위대한 개츠비], [어린 왕자]에 이어 본서 [킬리만자로의 눈]까지 다섯 번째 만남이다. 물론 모든 만남이 기호에 맞았던 건 아니다. [어린 왕자]의 경우에는 다소 불만족이 크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외의 모든 번역본에서 이정서 번역가님에 대한 선호도가 깊어졌기에 본서와의 만남이 기대가 컸다. 헤밍웨이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이정서 번역본이라는 데서 오는 호감도가 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번역에 대한 평가 같은 건 거의 없을 것이다. 번역에 대해 비평할 정도로 원문과 번역본의 차이를 감각할 수준도 없을뿐더러 번역본들 간의 미묘하거나 현격할 차이를 알아챌 문학적 소양도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단편을 읽은 바 그저 단편에 맞는 짧은 감상만 남겨 보려 한다.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대표적 단편을 제외하자면 전체적으로 단편치고도 너무 짧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섯 번째 단편인 [혁명가]의 경우에는 흔히 말하는 한잎소설 또는 엽편소설로 일컬어지는 초단편이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단편집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단편에서 발휘되는 헤밍웨이의 힘은 그의 하드보일드 문체라는 독보적인 문체적 특징과 만나 역량을 넘치게 다하는 듯하기도 했다. 말할 듯 말하지 않는 이면들을 독자가 무한히 상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 보여지는 여백의 미와 닮아있다고도 보인다. 이 단편들에서 마치 생략되어있는 듯한 인물들의 정서와 반응과 의도는 독자의 궁금함과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고 있다.
개별적인 감상을 모두 적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문학과의 만남이 서투른 내게는 읽어내지 못한 이면들이 많이 남았던 단편집이기도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인상 깊었던 몇 편에 대한 감상은 꼭 남기고 싶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상징적 은유와 작가 자신의 내면이 반영된 인물과 작가의 죽음에 대한 관념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어느 독자에게나 인상 깊을 단편이 아닌가 싶다. 산과 눈과 새들과 나무와 하이에나로 이어지는 원형들은 죽음 그리고 지상과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들을 상징하고 있다. 총은 추측컨대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었다. 다른 존재의 생과 사를 결정짓는 이 무기는 무엇보다 강력한 통제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를 통해 총의 사용법을 배운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타자인 사냥감들의 생명을 끝내며 생의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죽음을 앞둔 그는 그런 통제하려는 의지(이는 생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자체를 내려놓았음을 총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가벼운 여행을 가진 아프리카에서 처음 겪는 감염으로 다리가 썩어가며 죽음을 앞두고 있다.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죽음을 앞둔 불안과 공황에 빠진 그는 연금술에서의 흑화 과정에 들어선 인격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연인 또는 배우자는 이성과 희망, 부와 성(性),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정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죽음을 향하며 그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그의 대극을 상징하고 있다. 희망을 갖고자 하고 안정을 꿈꾸게 하려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회상하는 폭력과 다른 여인과의 사랑과 또 다른 여인과의 희열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를 내면에서 돌아보며 정리하고 있는 개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에 대한 묘사들은 작가가 얼마나 이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지를 엿보게도 한다. 헤밍웨이의 짧은 이력만을 알고 보아도 이 마초적인 작가로 묘사된 인물이 헤밍웨이의 분신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악화일로인 그에게 그녀는 거듭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만 꿈속에서 그는 그의 친구가 몰고 온 비행기를 타고 흑화의 과정에서 마지막 내적 재앙을 상징할지 모를 메뚜기 떼 너머로 친구가 가리키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본다. 그가 숨을 다한 순간 그것을 모르는 그녀는, 밤 깊은 아프리카의 캠프에 들이닥친 하이에나로 인해 불안에 휩싸인다. 그렇게 그가 완성에 이르는 순간 그녀 또한 흑화의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인상 깊은 단편은 헤밍웨이가 자살을 하기 이전부터 죽음에 대한 인상을 얼마나 강렬히 지니고 있었던지와 그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해방이나 안정을 찾는 전환적인 의미가 더 깊었음을 엿보게 해 준다. 이 작품의 독자마다 자신의 감상이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죽음을 하나의 완성에 이르는 전환으로 감상 짓게 하는 힘이 담긴 소설이라고 생각되었다.
[킬러들]의 경우 이 작품에는 어떤 상징들이 숨어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숨겨진 상징을 읽어내기보다 표현을 절제하고 인물의 정서와 의도를 숨기며 독자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고 궁금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무엇보다 탁월하게 느껴졌다. 킬러들은 안드레슨을 왜 죽이려 하는지 안드레슨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체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는 다음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체념하고 말 것인지 닉과 조지 등은 신고하고 떠날 건지 말 건지 모두 다음 장면과 인물들의 행위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는 이 주제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는 상징인 산이 흰 코끼리 같지만 흰 코끼리가 아니라는데 함의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주는 척하지만 가스라이팅 하고 있고 주고받는 대사를 보면 여자도 알면서 당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 대사로 반복되는 화제로 보아 그녀 역시 당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듯 했던 여자가 혹시 상황을 장악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대미였다. 흰 코끼리 같지만 산등성이이듯 사랑 같지만 사랑이 아니고 가스라이팅 같지만 실체를 보면 가스라이팅도 아니라는 것을 은유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미시간 북부에서]의 영어 제목은 [Up in Michigan]인데 번역가의 말처럼 지도상의 위인 북부라기보다는 상공인 위 즉 하늘을 말하는 것 같다. 헤밍웨이는 아마도 미시간의 하늘 위라는 개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소설이었는지 문학과는 다소 성긴 나로서는 파악하기 쉽지 않은 단편이다. 다시 읽는다해도 리즈가 흐느낀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세상(미시간)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담담히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 단편집은 [혁명가]와 [빗속의 고양이]로 마무리 지어진다.
은유가 뚜렷한 소설 외의 단편들에서는 모두 문학을 좋아하고 함께하기를 즐기는 분들이 아니라면 다소 난해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학도 미술이나 클래식처럼 보고 듣기를 즐기며 오래 하지 않으면 소양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라는 감상이 무엇보다 가장 크다. 아무래도 무예나 내공처럼 공력을 쌓기 위해 들이는 공이 있어야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다 읽어내어지지는 않는 것이구나 했다. 한마디로 내게는 읽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소설들이 아니었다.
번역에 있어서는 읽다 보면 어느 문장들에서는 영문을 쉼표를 이어가며 직역한 부분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줄 한줄 원문의 느낌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으며 번역해낼 것인가 하는 번역가의 고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해도 직역이, 매끄러운 한글 문장으로 번역한 문장이 주는 친숙함과는 다를 것이기에 부담스러울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소 윤색한 듯한 문장이 더 낫다고 느껴지는지 아니면 직역이라도 원문이 주는 감각에 가까운 문장을 읽고 감상을 가져 보고 싶은지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독자 개개인의 기호가 다를 것이지만 쫓기듯 고전들을 읽어나가는 게 아닌 분들이라면 다양한 번역본을 경험해 보실 필요도 있다고 여겨진다.
헤밍웨이의 호평 받는 단편들에 대해 원문에 가까운 감상을 가져 보고 싶은 분들이라며 새움출판사의 움라우트 세계문학선을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다. 작품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을 만나는 시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으로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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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원문을 읽지 못하는 영알못에게는 출판사의 번역에 의존한다. 책의 말미에 있는 <빗속의 고양이>의 기존 작품 번역과 비교 번역문을 보며 수많은 명작이 쓰인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오지만 게으름의 끝판왕이 해낼 수 있을지... 인친님 중 한 분이 올해는 원서 읽기에 도전한다는데 동참해 볼까 고민을 해 봐야겠다.
노인과 바다로 너무나 유명한 헤밍웨이의 단편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단편들은 문체가 짧고 간결해서 읽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의 글은 <빙산 이론>으로 함축되어 있는 작품들이라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면 작품을 읽고 나서 '뭐지?'하고 갸웃한다.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은 <나는 늘 빙산의 원칙에 따라 글을 쓰려고 노력해요. 우리 눈에 보이는 부분마다 물밑으로는 8분의 7이 있죠. 아는 건 뭐든 없앨 수 있어요. 그럴수록 빙산은 더욱 단단해지죠. 그게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 헤밍웨이의 말/ 마음산책>에서 나왔다. 그는 내용의 8분의 1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단편들을 읽고 나니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다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식당을 찾아왔다 그냥 간 킬러 이야기, 여름 날 기차역에 앉아 흰 코끼리를 닮은 산등성이를 보면 술을 마시는 두 남녀, 시골 대장간의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 이탈리아에 피난 온 헝가리의 어린 혁명가, 창밖의 빗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여자와 남편 등의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단편들은 쉽게 읽혀지만 헤밍웨이가 빙산 아래 숨겨둔 생각을 읽어내기에는 어려웠다.
주제작인 킬리만자로의 눈은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을 찾아 여행을 가다 다리를 다친 남자와 그를 간호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작가 해리는 가볍게 다친 다리를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다리가 썩어간다. 이 주일이 넘게 고립된 곳에서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공포라는 단어와 한 쌍처럼 따라다닌다. 그런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본 킬리만자로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실제일까? 허상일까? 환영일까? 무엇이 진짜일까? 비극과 희극을 교묘히 교차해놓아 헷갈린다. 글의 구조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결말이 있어 우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읽고 나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작품은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였다. 옮긴이의 작품 해설이 따로 없어 한참을 고민하였다. 몇 번을 읽어보며 몇몇의 단어들을 조합해 보기는 했지만 역시 작품 해설이 필요했다. 검색을 하여 몇몇 글을 읽어보서야 아! 하는 깨우침의 탄성이 나왔다.(바보 같은 표정이었을 듯)
몇 번 반복하다 찾아낸 단어는 <수술>이었다 두 남녀는 마드리드로 수술을 하러 가는 길인듯 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원하지 않으면 (수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수술) 하는 것을 정말 원하는지 물어본다. 남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여자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여행 가방에 모든 호텔에 라벨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지내는 사람들 같다. 그런 이들에게 어쩌면 아이는 구속일 수도 있다.
이 글은 <"당신 기분이 나아진 건가?" -중략- " 내게 나쁠 건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좋아." P95>라고 끝이 난다. (많이 공개되어 인용함) 수술을 하여도 나를 사랑하는냐고 물었던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하였기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서평을 쓰려 검색을 하다 마음산책에서 펴낸 <헤밍웨이의 말>에 대한 리뷰를 읽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 그의 문체, 삶 등을 알 수 있는 그의 말들이 담겨있다. 그가 왜 마지막에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져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 이정서는 <번역은 직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직역의 의미는 '작가가 쓴 문장의 서술 구조를 살려주는 번역'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번역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작품의 의미는 전달이 된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비교 번역문을 보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봄 출판사에 이정서 번역가의 작품이 더 있어 찾아 읽어봐야겠다. 특히 좋아하는 <어린 왕자>의 번역본도 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책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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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렇게 훌륭한 책을 접할 기회를 주신 "YES24" 와 도서출판 "새움"에 이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당장 지금 이 YES24에서 허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검색해 보면 거짓말 안보태고 수십권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고전이고 유명하고 익숙하다 못해 허밍웨이에 대한 단답형 문제가 나와도 답할수 있는 이 유명한 작품을 왜 또 굳이 새로운 번역을 낼 필요가 있는냐에 대한 질문이 있을겁니다. 왜? 굳이? 그런데 여기서 우리나라의 과거 수십년전 출판계이자 지금의 출판에 있어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학교에서 선정해 주는 세계 명작 동화, 중고등학교 권장 세계 명작의 목록에서 "아 우리는 이게 세계 명작이고 이게 명작의 기준이며 이게 상식이다." 하고 단정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재미난건 세계 명작이라고 하는 그 작품이 정작 그 유럽에서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거나 정작 그 원작의 나라에서는 본인들의 국민 작가 국민 작품들은 따로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세계 명작이라고 초등학교부터 어른이되서도 알고 있는 목록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바로 수십년전 일본에서 정해진 목록의 답습" 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가 읽고 있는 세계 명작의 번역이란 것도 수십년전 일본에서 한 번역의 중역 (그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거치고 다시 우리언어로 번역하는 것) 에 지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직 까지도요. - 혹자는 이렇게 반복되는 번역이 굳이 필요하냐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 하지만 우리가 아는 "논어" 그리고 "불경", 심지어 "성경"조차 계속해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논어는 주소 (주석과 그 주석을 해석한 소통본)가 수백가지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불경은 삼장법사의 천축시절 부터 2차세계대전 이후 팔리어경전의 발견과 그 대장경의 비교까지 그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성경은 히브리어를 다시 번역하고 그 번역의 정밀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즉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해서 번역이 다 끝난건 아닙니다. 그 번역은 계속되어서 시대상에 맞는 어휘, 이해가능한 설정을 계속 바꿔나가고 그 오류를 찾아가는 과정이지요. 그런데 이 킬리만자로의 눈의 새번역도 그러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책이라고 봅니다. 물론 혹자는 이것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이 나올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의 지적과 것도 번역의 과정이지요. 실제로 우리가 아는 성경도 그러한 과정을 오랜기간 거친 책이며 아직도 그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번역에 대해서 한번더 생각 할 기회를 만든 훌륭한 책이라고 봅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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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헤밍웨이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았다ㆍ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이고, 문장이 아주 함축적이었으며, 또 자살로 생을 마감한 헤밍웨이의 불안한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 전개가 자꾸 작가를 떠올리게 했다ㆍ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지켜볼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행동할까ㆍ 그 불안하고, 날카롭고, 어쩌지 못하고, 감사하고 싶은 천 갈래의 마음들이 이 소설에는 날것처럼 잘 드러난다. 아프리카 대평원, 사파리 중 사소한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작가와 그의 연인,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상처주고 모욕하며 사랑하는, 그렇게 죽어가는 주인공은 헤밍웨이 자신에 다름아니었다ㆍ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게, 막힘없이 잘 읽히는 번역도 참 좋았다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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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도서를 접할때면 우리는 번역자체에 의지를 하여 내용을 파악하고 받아들이고 해야한다. 100% 의존적으로. 가끔 잘못 번역된 영화를 보면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에 시청에 방해가 되곤 했다. 새움 출판사에서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시리즈 중 "허밍웨이의 단편집 모음_킬리만자로의 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쉽게도 다른 번역본을 먼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전체맥락을 비교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대로된 번역을 접해 본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많은 단편집 중, 가장 유명한 킬리만자로의 눈 부분을 이야기 해 보자면,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찾은 아프리카에서 썩어가는 다리로 인해 다가오는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 해리 그리고 그의 연인. 함께 고통스러운 공간에서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지켜볼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해 보며 읽게 된다. 직면하는 공포속에서 나탈날법한 많은 감정들을 함께 느껴보게 되는.. 아주 일부분만을 언급했지만, 기회가 되어 킬리만자로의 눈 영화도 한번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본과 좀 달라서 비평을 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지만 그래도 그레고리팩의 젊은시절을 볼 수 있다는건 기쁘지 아니한가 >_< 덕분에 허밍웨이 관해 알게되어 참 좋았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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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때 읽고, 다시 읽은 헤밍웨이 단편들.. 특히 좋아했었던 ‘킬리만자로의 눈’인데, 이번에 만난 이 소설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기 때문인 것은 당연하고, 너무 오래전이라서 였을 수도 있고, 그때의 번역과 이 책의 번역에 차이가 있어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또 고전의 매력, 거장의 힘이구나 싶어지는 것이... 오랜만에 포근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에는, 킬리만자로 자락에서 다리가 괴저되어 가는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야생 동물들과 완성하지 못한 소설, 그리고 아내와의 기억이 있다.
킬리만자로 정상 부근에서 발견된 표범 사체 한 구, 그 표범이 그 높은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로 시작하는 소설은 한 남자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투영하고 있었다. 죽음을 예감하며 느끼는 공포와 회한이 헤밍웨이 특유의 단백함 속에 녹아있었다. 지금 읽은 킬리만자로의 눈은 무엇보다도 삶, 그 자체였다.
_그래. 이제 그는 죽음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한 가지 그가 항상 두려워했던 것은 고통이었다.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누구 못지않게 고통을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지독한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느꼈을 즈음, 그 고통은 멈추었다._p53
뒤 이어지는 다른 작품들 중에서도 ‘빗속의 고양이’는 작품 해설편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오역과 이번의 직역을 비교해 놓은 내용이 흥미로웠다. 아마도 나도 이전 번역으로 이 소설을 접했을 것이다. 약간은 은유적인 소설이라서 사실 느낌적인 면에서는 많은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 내가 읽은 ‘빗속의 고양이’는 소통의 어려움과 부부간의 무관심에 더 신경이 쓰였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보편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_미국인 아내가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창밖 바로 아래서 고양이 한 마리가 빗물이 떨어지고 있는 녹색 테이블을 중 하나 밑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떨어지는 빗방울에 닿지 않을 만큼 자신을 작게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내려가서 저 새끼 고양이를 데려와야겠어.” 미국인 아내가 말했다._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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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지음)/ 새움 (펴냄)
1961년 7월 3일은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가 사망한 날이다. 그의 말년은 심한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시달렸다고 한다. 헤밍웨이 내겐 너무 먼 작가... 물론 모든 작가들이 그렇지만^^ 작품에서 묻어나는 여성 편력, 마초의 삶에 나는 많은 의문을 품었었다. 이전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2권을 읽었을 때 전쟁의 묘사가 생생했다. 지금 읽고 있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묘사하는 전쟁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권이 끝났을 때 나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렇다면 죽음에 냄새가 있는가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스로 삶을 마치는 사람들의 죽음은 그렇게 돌연 찾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ㅜ.ㅜ ( 일찍 삶을 마친 다자이 오사무의 글에서도 깊게 드리운 죽음의 냄새.....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는 아마도... 아마도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고.....)
나는 소설가 헤밍웨이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헤밍웨이를 더 좋아했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 종군 기자의 경험을 담은 책들. 전쟁에 반대하면서 그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죽음은 늘 단순하게 혹은 담담하게 드러난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주인공 해리 역시 죽음과 딜 하지 않는다. 작가인 해리는 썩어들어가는 다리의 고통으로 작가로서의 삶까지 포기하고 만다. 만약 내가 해리였다면? 살고 싶었을 텐데.... 작가 활동도 끝까지 하고 싶었을 것이다 ㅜ.ㅜ ... 주인공 해리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사뭇 담담했다. 자신의 돈 많은 아내 헬렌 혹은 여성을 암캐라고 부르는 것에 뜨아했는데, 글쎄 그 장면은 내 좁은 식견으로 아직도 해석이 불가하다......
같은 책에 수록된 〈킬러들〉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을 찾아온 킬러들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등장인물에 헤밍웨이는 본인을 투영한 걸까? 이 짧은 소설이 두 번이나 영화로 회자되었다는 작품,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는 두 남녀가 수술을 하자, 하지말자로 끝없이 논쟁하는 데 결말을 알고 나면 아휴, 이 남자에게 정말 화난다!!! 〈빗 속의 고양이〉의 주인공 남자와 비교되었는데 전자는 수다스럽고 온갖 말로만 사랑하는 남자였고 후자는 말이 없고 그야말로 무관심 그 자체다. 세상에 남자가 둘 밖에 없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최악이군...ㅎㅎㅎㅎ
쥭음이 이제 그를 덮쳐왔지만, 더 이상 어떤 형태도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p56
이번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정서 역자가 〈빗속의 고양이〉를 비교 번역 해 놓은 부분이다. 책의 3분의 1분량을 할애해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직역이 중요성이다. 「작가가 쓴 문장의 서술 구조를 살려주는 번역, 동사는 동사대로, 수식어는 수식어대로, 쉼표는 쉼표대로, 원래 작가가 쓴 문장 성분을 무시하고 의역하면 원래의 의미가 변질될 것은 당연하다 고 서문에 밝힌다.」 두꺼운 영어 사전에 의존했던 과거의 번역에 비해 요즘의 번역은 최첨단 장비를 사용할 수 있으니 시대에 맞는 새 번역이 필요하다는 역자의 생각이다.
『이방인』을 시작으로 움라우트 원전으로 읽는 세계문학은 꾸준히 출간 중이다. 헤밍웨이의 짧은 단편들, 하드보일드한 문체와 잘 어울리는 번역이었다. 간결할수록 생각할거리는 더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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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킬리만자로의눈 킬리만자로는 19,710피트 높이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신의 집을 뜻하는 ‘은가예 은가이’라 불린다. 서쪽 정상 부근에는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한 구가 있다. 표범이 그 고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12p - “나는 어떤 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 사내는 말했다.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고.” 26p -“어쨌든, 나는 고양이를 원해.” 그녀가 말했다. “고양이를 원해. 이제 고양이를 원한다구. 내가 긴 머리칼이나 다른 재미를 가질 수 없다면, 고양이쯤은 가져도 되잖아.” 조지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광장에 불이 들어온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120p - 6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는 <킬리만자로의 눈> 인간 내면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짧지만 긴 여운을 주었다. 특히 ‘킬리만자로의 눈’ 과 ‘빗속의 고양이’ 가 나에겐 그러했는데, 킬리만자로의 눈은 다리가 괴사되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주인공이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 쓰지못함에 대한 후회들을 상기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에대해 이야기하는, 내적욕망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그 순간이 인상깊었다. 빗속의 고양이는 내게 좀 신비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소설에 쓰여진 이야기보다 그 뒤에 숨겨진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외로움 가득한 여자, 그여자를 홀대하는 남편, 갑자기 사라진 고양이와 갑자기 등장한 고양이, 그리고 호텔주인 무언가 신비롭고 몽환적인 소설이 탄생할것만 같았는데 이야기가 너무 빨리 끝나 아쉬웠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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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건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야." 주인공 해리는 한때 글을 썼으나 어느 순간 작가로서 이미 끝나 있었고, 그 즈음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는 아내의 많은 돈으로 최상의 곳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았고, 이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음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어울리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의 세계에 관해 써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아프리카를 택했던 그는 영양 떼의 사진을 찍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가시에 무릎이 긁혔고, 그 상처를 가볍게 생각하고 안이하게 넘겼던 탓에 상처는 감염되어 괴저를 일으켰다. 극심하던 통증이 공포심과 함께 사라진 지금, 해리에게 남은 것은 극심한 피로감과 그의 곁에 다가온 죽음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그렇게 통증이 사라지고 죽음을 예감한 그는 야전침대에 누워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 기억들 속에서 그는 여태껏 내버려 두고 시작하기를 늦추었던 것들에 대해 떠올리고는 후회하고 아쉬워하지만 지금은 이미 늦어버렸다.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힘겨운 그는 자신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던 지독한 상처의 고통이 멈춘 지금 다른 모든 것들처럼 죽어가는 것도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어 그렇게 기다리던 비행기가 소리와 함께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데…….
<새움>에서 출판되는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시리즈를 기다린 독자 중의 한 명으로, 『킬리만자로의 눈』의 발간은 가뭄에 단비처럼 설레고도 기쁜 소식이었다. 이 시리즈를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책은 번역자의 개인적인 해석이 많이 반영된 의역을 지양하고, 원작자가 쓴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게 문장 구조, 쉼표 하나조차 원문에 충실한 직역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헤밍웨이의 단편 6개의 모음으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킬리만자로의 눈」 이외에 「킬러들」,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 「미시간 북부에서」, 「혁명가」, 「빗속의 고양이」가 들어있다. 3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단편 「혁명가」를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이미 이전에 원서로 읽어 보았던 소설들인데, 직역에 가까운 번역의 책을 읽으니 원서로 읽었을 때의 영어 문장들이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첫 문장에서 해리가 "신기한 건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야."라고 말하며 죽음을 예감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해리는 현실에 안주하고 스스로와 타협해버렸기에 능력이 둔화되고 의지가 나약해져버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죽음을 마주하고 보니 자신의 지난 삶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다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시도해 볼 기회조차 없음에 지난날을 후회하지만 더 이상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육체는 고통을 지웠지만 그의 정신은 삶에 대한 후회로 고통을 새겼다.
소설은 살아가면서 편안한 현실에 안주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우리의 목표는 그저 그것을 꿈꾸는 것만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타성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여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그다음을 기약하며 계획을 세우는 것에 그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과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고통이 없는 성취는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 시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눈 덮인 킬리만자로 정상이 해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고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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