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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펼치고 천천히 “시”를 읽던 때가 도대체 언제였던가? 한 때는 나도 하늘과 별과 시에 눈물방울 찍어내던 감성 소녀였건만, 세상사에 시달리는 어른이 되고 만 지금 “시는 무슨 시!?”라며 무심한 인간이 되었다. 집의 책장을 훑어보니, 시집이라고는 딱 한 권뿐이었다. 이래저래 인생에 치여 살다보니 이렇게 팍팍하고 메마르게 되었구나... 그런데 독서 모임에서 “인생의 역사”라는 시화집을 읽자고 한다. 솔직히 제목만으로는 썩 내키질 않았다. 인생도 별로고, 역사는 더더욱... 거기다 시화집이라고? 그래도 읽자고 하니, 어쨌든 책을 사들고 왔는데, 한마디로 뜻밖이었고 기대 이상이었다. 생업이 빡세서 책을 맘 놓고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불고하고, 이 책은 꽤 짧은 시간에 다 읽어냈다. 그리고 참 가느다랗긴 하지만, “감성”이란 것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이 책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냅다 달려가기만 하던 인생에 아주 잠시나마 브레이크를 걸고 내 앞에 놓인 삶을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이미 알고 있던 작품도 있고, 새로이 알게 된 작품도 있는데, 나와는 다른 시각, 또는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시의 해석 방법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시화집의 제목이 왜 “인생의 역사”일까?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이었다. 좀 더 감상적이고 예쁜 제목을 달지, 뭔가 밋밋하기도 재미없기도 한데다 무겁게까지 느껴지는 “인생의 역사”라... 인생이 뭐지? 그냥,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살아지는 게 인생 아닌가? 그런데, 작가는 아니란다. 책 머리말 첫 문장부터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이 책이 ‘인간이라는 직업 (알렉상드르 졸리앵)’을 가진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나도 인간이라는 직업을 갖고 태어나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인생을 살고 있기에, 얼마든지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있겠구나.
책은 5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의 제목이 ‘고통의 각’이다. 고통의 뾰족한 각으로 시작된 인생은 2부 사랑의 면으로 이어지고, 3부 죽음의 점을 지나, 4부 역사의 선을 긋는다. 그 선으로 결국 5부 인생의 원이 완성된다. 각 부마다 잊지 못할 시와 글귀가 가득하지만 각자 자신이 걷고 있는 인생의 길에서 마음에 와 닿는 시 몇 편을 이 중에서 건져 올린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지 않을까
인생은 어차피 고통임을 느끼고 있는 요즘, 1부 고통의 각의 글들이 무겁게 마음에 다가온다. 그 중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에서는 욥의 마지막 말이 소개 되는데, “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면서, 아직도 되풀이 되는 현실의 고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일상을 살다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사건, 사고를 만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에게 이런 문장들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이들이 이 글을 꼭 읽었으면 한다. 위로가 되든 아니든...
참으로 섬세하고 예민하게 인생을 들여다 본 저자 덕에 내 인생을 다시 보듬게 된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고, 한 번 택한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책은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동감하며, 그래도 이왕 걸어온 내 인생이 그리 헛되지만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앞으로 걸어갈 길은 또 어떻게 가야 할지를 가늠해 본다.
마지막 편으로 실려 있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다시 읽어본다. 여러 갈래의 길이 펼쳐지듯. 이 시의 해석 또한 여러 갈래 일 수밖에 없다. 내가 택한 길이 비록 꼭 옳은 길이었는지, ‘험로를 택한 자’였는지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한 눈 팔지 않고 여기까지 왔음에 스스로에게 지난날을 미화 시키는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일까?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또 두 갈래 길이 나타나지 말란 법이 있을까? 그 두 갈래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할까? 책을 덮으며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밥 딜런의 노래처럼 다가오는 후배들에게 나의 길을 비켜 줘야 할 때, 때 맞춰 그 길을 비켜 줘야 함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언제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펼쳐 읽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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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때부터 좋아한 박하사탕 두 알 양쪽 볼 빵빵하게 넣고 이 글을 쓴다. 2부가 1부보다 훨씬 진하다. 신형철 표 명언들(아포리즘)로 가득하다. 포근한 일상의 웃음과 함께 해서 그런지 한 편 한 편 소중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셰익스피어 이야기로 시작해서 더 만족스러운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가 낳은 페스티발과 근대영어의 창시자. 이탈리아의 시풍을 영국적 소네트로 재창출한. 그의 시와 희곡은 ‘운문’이라 각운을 맞추며 비유와 대구의 배틀 장소가 된다. 어휘가 제한적인 시대인데도 그 한계에 구속되지 않고 생생한 데생처럼 묘사한다. 어려운 대사를 외워 연기하는 배우들은 더 훌륭하고. 인간세상의 대부분이 필멸하기에 예술가들은 시간을 고정forever frozen still시키고자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변하고 소멸하는 속성에 저항하는 하나의 몸부림이자 투쟁이 된다. 나도 소설 ‘스토너’의 초입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번에 전율했었다. 소네트 한 편이 불러들이는 긴장감이란. 한사람의 인생 장악은 독자에게로 옮겨 붙는다. 팽팽하게 끊길 듯 놓지 않는 고무줄 같은 삶이 나와 너무 닮아서, 독서토론 때 엄청 씹었던 기억이 난다. 닮은 사람은 답답해. 진지함과 다크함은 내가 2~3인분하면 되니까 빠져. 지금과 비교하면 16세기에는 짧은 인생이 배로 두려웠을 것이다. 신형철의 73번 해석은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안의 청년에게 이 시를 읽어주면서 삶을 더 사랑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고집이 세고 기억력도 나쁘다(81).” 때가 되어야 들리는 말이 있다. 대학 은사님이 선물했던 책을 최근에 읽었다(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ㅎㅎ). 삼십 년 후에 당도한 말. 불시착 안 되고 도착한 게 어디여^^. 볼 때마다 “너 나 싫어하지!” 하시는데도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안궁금으로 정정. 이상형 발표 시간에 내 얘기에 “그런 사람 없다”고 저주한 분, 나빠.
사실 나는 시를 어려워한다. 조금 보여주고 알아서 알아들어, 이거 폭력 아닌가?^^. 반면 지인들은 대체로 시를 암송하며 만만하게 본다. 신 평론가는 번역시를 읽을 때면 “성실한 실패작”을 대하는 심경이라며 “포기하기보다는 평생을 두고 읽어야겠다고 결심(87)”한단다. 초점과 스케일이 애초에 다르다. 시를 읽게끔 유혹하는 문장도 남다르다.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87).” 이런 교육과 연습을 딥따 받은 지인들은 사회에서 소통하기 귀찮은 존재가 된다. 문학전공자들끼리 몰려다닐 때 민망해서 웃는 일이 잦다. 자꾸 디테일하게 별의 별 것들을 다 물어. 시인 릴케를 내가 쉽게 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쏘아진 화살이라던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시니컬한 개탄이 섞인다. “연인들이여, 그때에도 너희들은 ‘영원한’ 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 너희들이 발돋움하며 입술을 맞대고 서로 마실 때 / 아, 얼마나 그때 기이하게도 마시는 자는 그 행위로부터 멀어져 가는가!” 소멸과 사라짐은 자연 현상임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사랑은 시간을 멈추고 장소를 보존한다. 그것은 ‘순수한 지속’이다. 그런데 릴케의 요점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모든 ‘첫’들이 지나고 나면 연인들은 ‘멀어진다는 것’(89)”이다. 그러니 좀 이르더라도 두 눈 딱 감자. 지독한 러버인 저자가 격정적 사랑으로 사랑이 탕진되지 않도록 ‘살며시 어루만지는’ ‘절제하는’ 사랑을 말할 때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90)”이라는 문장에 백분 공감한다. 구원 환상이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미지 모두 천상계의 이야기로 위험하다. 특히 상상 속에 만들어진 신격화는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환상을 쫓고 옥죄는 거라 만류하고 싶다. 감정이 활화산이다 일순 휴화산이 되어버려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흐를 확률이 높다.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연민인가를 두고 고민해본 적이 다들 있을 거다.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라는 ‘사랑의 발명’ 믿음에 빠진 사람들을 볼 때면 신기하고 부럽다. 인내하고 기다리며 헌신하겠다는 건데. 엄마의 지독한 희생과 책임짐을 봐버려서 굳이 나서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동정이 사랑으로 도약할 수는 없다는 것(96)”만 인지한다면 ‘심퍼시의 힘’을 긍정하고 싶다. “나와 네가 근원적으로 닮았음을 발견하는 때, 고유한 ‘나’는 없고 다만 아픈 ‘우리’가 있을 뿐임을 깨닫는 때가 있는데, 그때의 감정을 ‘동정’이라 한다면, ‘사랑’이 그것과 다른 것일 수가 없다고(95).”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 아모블로 우트 시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가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96).” 불가능과 무의미까지 이겨내도록 ‘신 대신’ 그 사람 곁에 있어주겠다는 지원자들 대단.
최근 경험한 감정 뭉치를 들여다보며 적어도 앞뒤 재고 계산하진 않았음에 안도했다. 영단어 퓨어(pure)는 순수한, 정통의, 뜻을 지니는데 이 둘이 묘하게 맞닿아 있는 뫼비우스 띠 같다. 순수한 게 찐眞이여 인증 같아서. ‘무정한 신’에게 기분 상할 뻔 했다가 슬쩍 딜을 넣었다. 안 들어주시면 ‘네메시스’의 버키보다 더 폭발할 거예요. 셰익스피어 비극들 모조리 읽은 입은 조심하셔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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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작가의 책을 읽을라치면 겁부터 난다. 평론가라고 하니 우선은 어려울거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는다. 그러다 일전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으면서 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시화집이라 해서 낼름 읽기 시작했다. 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시를 빌미로 풀어가는 인생의 역사라니 읽기에 무리 없으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어차피 시에 대한 해석은 읽는 자의 몫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기에 설사 오독을 한다 해도 겁(?)이 날게 없어서이기도 하다.
시화는 시를 읽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이는 일이다. 작가는 시화가 자신의 글쓰기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2016년 한겨레신문의 칼럼 ‘신형철의 격주시화’에 연재한 25편의 글과 시화 대신 자유롭게 쓴 글을 부록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먼저 각 장의 제목에 눈길이 머문다. 각(角), 면(面), 점(點), 선(線), 원(圓), 묘(描)가 고통과 사랑, 죽음, 역사, 인생 그리고 부록인 반복과 대응한다. 나만의 해석이지만 모두 도형과 관련이 있다. 각과 면과 점과 선이 모여 원을 이루니 고통과 사랑, 죽음, 역사가 모여 인생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그리니(描) 곧 반복일 것이다. 읽어본 시보다 알지 못하는 시가 대부분이지만 저자의 풀이를 따라 읽어가면서 나에 대해,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부제가 상고시대의 시 <공무도하가>부터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까지로 되어 있으니 한편으로는 고통과 사랑이 바로 인생인 셈이다.
책과 같이 온 엽서에는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이 책에 그런 문장이 하나라도 있다면 저는 얼마나 좋을까요.’라는 작가의 글이 적혀있다. 책에 나온 글 중에서 따로 모아 적어 놓은 글들을 보며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은 어느 것일지를 생각해본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러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43쪽)
‘구조가 폭력적일 때 그 구조의 온순한 구성원으로 살아온 사람은 축소해 말해도 결국 ‘구조적 가해자’일 것이다.’ (61쪽)
‘사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96쪽)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122쪽)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131쪽)
‘조금 아는 사람이 위험한 것은 그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안다.’ (172쪽)
‘자신감이 좀 붙으면, 예전에 두려워하던 이가 귀찮아지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무렵이 가장 바쁠 때다. 그러나 그것은 잘되고 있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만 그것을 모른다.’ (207쪽)
‘대체로 희망과 절망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다. 현실의 대부분은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냥 무명無明의 시간인 것이다.’ (226쪽)
‘인생이란 결국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왜 살고 나서 돌아보면 그 많은 날은 가뭇없고 속절없는가. 왜 우리는 그 나날들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234쪽)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은 그 시를 처음 읽었던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시이다. 시인의 시(詩)와 작가의 이야기(話)를 함께 읽으면서 먼 옛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모처럼 좋은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느낌에 마음이 환해진다.
사랑의 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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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이에게 건네는 인(생의 역)사
시와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보니 독자의 주관적인 생각을 보태어 이렇게 말해보려 한다. 인간은 삶의 모서리(각)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모서리에서 만나는 면과 면처럼 서로 사랑을 꿈꾸고 발견하기도 한다. 고통과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 가닿는 끝은 죽음이라는 종착'점'이다. 이 점과 점을 잇대면 선이 되듯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맞게 되는) 죽음과 죽음(은 또다른 태어남을 의미하기도 하기에)이 이어지며 역사를 이룬다. 이러한 고통, 사랑, 죽음, 역사가 원을 그리듯 순환하고, 그 원과 다른 원이 겹쳐지거나 포개지면서 저마다의 인생이 그려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저자의 득남 소식이다. (늦었지만 이 지면을 빌려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혹자는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느냐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책머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그가 아이에게 건네는 선물인 동시에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다짐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혀졌다. 비록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세상에 던져진 아들에게 부모이자 인생의 선배로서 시화(詩話)를 통해 "어떻게 있을(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주고 싶은 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조심(操心)'스럽게 자신이 겪은 시들 가운데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을 다해 자신이 겪은 시들을 아이 앞에 놓아둔다. 아이뿐 아니라 부모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의 삶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이것이 결국 아이의 삶을 보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조심(操心)을 '조심(彫心)'하면서 나만의 방식-각 주제별로 시 하나씩을 고르고 내 생각을 덧붙임-으로 '인(생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재구성해본다.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지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답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개인의 고통이 개인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연인과 이웃으로 연결됨을, 나아가 어찌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을,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라며 짧은 시에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십년 전 발표된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천년은 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앞서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인류가 오랫동안 갈구하고 추구한 가치인 까닭에. 저자에 따르면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는 시인 랭보와 달리, 이영광 시인은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곁을 오롯이 지켜야 하며 "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다"고 말하는 상대를 향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윌리스 스티븐스는 「아이스크림의 황제」에서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라고 선언한다.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끝내 녹고야마는 운명을 갖고 있듯이 우리도 달콤한 삶 끝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저자 역시 "산다는 것은, 언젠가 녹아내릴 유한한 달콤함을 누리는 일"이라며 공감을 표한다. 윤동주 시인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쉽게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의 문장을 뒤집어 읽으면서 쉽게 사는 인생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저자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으리라. 이처럼 우리는 개인(個人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分人이라고 보는 어느 일본 소설가도 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이자 타인으로서, 또는 자식이자 부모로서 어제까지 각자의 문체로 인생의 역사를 써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도 변함없이 몸과 마음으로 겪은 것들에 대하여 자기만의 행(行)을 쓰고 그것을 연(聯)으로 잇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그날, 내 두 손 위에 시집 한 권이 놓여 있기를 (이제는 간헐적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우리 아이에게도 건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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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p.7) 이 책은 ‘인간이라는 직업’(알렉상드르 졸리앵)을 가진 모두를 위한 것이니까. (p.9)
신형철 작가는 ‘내가 읽은 시’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겪은 시’라며 서두를 연다. 확실히 처음부터 확 끌리는 필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니 이 책을 마주하는 내가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이 있기는 하되 그것이 질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렇다. 위대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답에 놀라본 적이 별로 없다. 그 답은 너무 소박하거나 반대로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p.87)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p.90)
윤동주의 '최후의 나'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어정쩡한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이제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어준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p.175~176)
카프카의 문학은 "인생이라는 화마를 잡기 위한 '맞불'"(「극지의 시」이라는 것.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놓는 불이 맞붙이고,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p.211)
시를 좋아하지 내가 제대로 시를 이해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투성이인 나에겐 시에 대한 해석을 담은 글귀들은 이런 나의 갈증을 풀어준다. 시라고 하면 뭔가 신비감 속에서 감춰진 무언가를 찾아내야 할 것 같은데 신형철은 이런 시를 아주 친절하고 상세히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비유해 풀어준다. 감히 혼자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시를 펼쳐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신형철 작가님의 책 중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일 뿐이다. 그의 문학평론 집은 사실 읽었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문학적 수준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그의 4년 만의 신작인 『인생의 역사』가 시를 이야기한다고 하니 사실 이걸 내가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고 도전 정신으로 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이 도전은 기대 이상의 만족과 함께 인덱스를 붙이다 붙이다 이건 재독을 꼭 해야겠다 다짐하며 감탄과 경이로 책을 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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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했는데, 국어점수가 수학점수에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의 코스를 걸어온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뭐 시랑 잘 안 맞는다는 말을 어렵게 하고 있는 중이다. 책 속의 갈림길처럼 안 가본 곳을 선택했으나.. 책의 해석과 결말과 전혀 다른 엉뚱 발랄한 코스를 개척 또는 도전 개고생 코스를 탐험한 것일까? 소설은 지루해서 잘 안 보기도 하고, 시는 참 먼 존재일지도. 책더미 속을 보다 작년에 김수영의 책도 한 권 봤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일까?
고통, 사랑, 죽음, 역사, 인생이란 제목 속에 시를 보여주고, 시의 속살을 들춰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며 시집이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어떤 편은 국어 선생님처럼 시를 자근자근 씹어먹을 것처럼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사람의 관점과 생각이란 참 미묘하고 대단하단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우와 대단하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너무 작은 일에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게 다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게 만들어 준 인생 조연들의 노력의 결과 때문일지도.
이상한 일은 주말 영화를 보다 어떤 장면과 이야기를 보다 떠오른 생각이 책과 아무런 인연 없이 연결되던 일이다. 짧아지는 기억력 때문에 가까운 시간의 것이 생각날 수도 있지만, 나도 그 이야기를 이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키워보게 된다.
때가 되면 먹는 것인지, 먹어야 할 때가 되어 먹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매일 밥을 먹는다. 아무 맛도 없이 퍼먹기 바쁠 때도 있고, 마지못해 먹어주는 때도 있다. 가끔 오래 꼭꼭 씹으며 담백함을 넘어 단맛을 이해하는 것처럼 읽어볼 만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운 좋게 퇴근길 지하철에서 앉게 됐다.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읽는데 내 좌우에 자리가 또 났다. 젊은 처자들하고 눈이 마주쳐서 오른쪽으로 비켜줬지. 오른쪽 총각 녀석은 책 근처에 전화기를 껐다 켰다 돌리며 쉬지 않고 코를 들어마신다. 짜증과 측은한 마음이 심하게 교차한다. 그런데 왼쪽 처자는 중국 사람인가 보네? 톤 높은 말투로 쉬지 않고 전화기에 재잘거리는데 알 수 없는 말이 귀속을 쉬지 않고 파고든다. 중국어를 배웠어야 말이라도 붙여보지. 책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고, 짜증보단 '아! 아까 왼쪽으로 방댕이를 틀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만 가득 안고 가다.. 일어날까 말까를 한참 고민하다 내렸다. '진작 일어날걸!'이란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지하철을 내려 날도 춥고 덜 걷겠다는 욕심에 마을버스를 탔다. 신입같지 않은 새로운 마을머스 기사 아저씨는 온 동네를 빵빵거리며 비키라고 지적질하기 바쁘시다. 새로운 인물등장을 알리는 다양한 방법인가? 요란한 버스를 뒤로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이 녀석은 오늘 하루종일 같은 걸 묻고 또 묻고. 벌써 그럴 나이가 아닌데 걱정이네. 늦게 밥도 먹고 책도 마무리하고, 시간의 굴레 속에 존재하는 여기에 시간이 물 흐르듯 가고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이젠 곧 기절놀이를 해야겠다. 인생 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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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님의 문장은 내 문장같다. 문학을 통해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도, 다른 언어를 지닌 평론가의 문장으로써 내 감정을 서술해냈음을 아는 즐거움이 있다. 예약구매로 책을 받아 토요일 아침, 편안하지만 깊이 있는 문학에세이를 읽는다. 이전 책을 읽을 때보다 나이가 든 나도 경험이 깊어져 시를 다시 겪고 있고 아버지가 된 평론가의 글은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을 지녀 행간을 조이지 않고 느슨하게 시가 나를 조금은 사랑해 준다고 느끼듯이 글을 썼구나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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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고, 문장 좋은 신형철의 시화집이다. 시화(詩話)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시나 시인에 관한 이야기', '시에 관한 비평, 해설, 고증과 시인의 일화 따위를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정의해 두고 있다.
나는 '시나 시인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크지 않다. 오랫동안 책을 읽어오긴 했지만, 시집을 구매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상점 거치대에 기다리며 읽어보라고 놓아둔, 오래되고 낡은 시집을 두어 번 읽은 게 고작이다. 지금 막 기억이 났는데, 한 오 년 전에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을 구매하긴 했다. 읽지는 않았다. 이 시집도 신형철의 해설을 듣고 구매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시를 읽을 깜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신형철에 의하면 '이젠 좀 알겠다 싶으면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고, 어쩐지 점점 더 모르겠다 싶으면 당신은 좀 알게 된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에 관해서 나는 둘 다 속하지 않은 완전한 무지에 해당한다. 나는 동시(동시를 낮춰 보는 것은 아님) 수준을 넘어서는 시에 관해서는 해석의 어떤 단서도 쉽게 찾지 못해왔다. <인생의 역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는 짧고, 신형철의 해설이 비교적 길게 이어진다. 나는 무슨 어려운 문제 풀이하듯 시를 들여다본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오랫동안 남아있던 수학 난제 앞에 선 기분. 나는 내가 그 시를 속 시원히 풀어내지 못할 것을 안다. 영화에서는 난제를 우연히 누군가 간단히 풀어주기도 하던데, 내게 그 귀인은 신형철이었던가? 여하튼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서 '왜 나는 저 실마리를 그냥 지나쳤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정밀하게 계획하여 단단한 결론으로 숨 가쁘게 논리를 연결하는 그의 글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고...
글 잘 쓰고 문장 좋은 신형철이지만,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가 선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낀다. 인간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글과 비슷한 데가 있다. 어느 하나도 놓치거나 지나침 없이 충분히 배려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검토하여 진심이 왜곡되지 않도록 정성을 들이는 그의 태도 말이다.
시는 여전히 어렵지만, 신형철의 글이 시를 읽을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나름의 해석을 동반한 시 읽기를 시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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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석같은 책을 발견한 느낌입니다. 북클럽 추천 글이 너무 좋아서 기대하고 저자와의 만남도 앞두고 있어 설레이네요. 강력히 추천합니다. 문학을 전공해서인지 더욱 가까이 느껴지고 아니어도 한 꼭지씩 두고두고 읽을만합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문장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반갑도 고맙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사유가 깊어져야 하는 것이겠지요. 자극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 주는 가치가 있는 첵입니다. 마음도 따뜻해 지네요. 이 가을 이 시화집이 많은 분들 마음 깊은 곳에 침투(?)하리라 생각합니다. |
| 신형철님의 팬이라 어떤 책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무작정 구입부터 했다. 배송받고나서 시에 관한 책인 것에 아차했다. 시는 내게 아직은 너무나도 어려운 문학이다. 그래서 구매한 것에 한 5초는 후회했던 것 같다. 1페이지부터 읽는 것을 포기하고 시 제목 중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것을 골라 먼저 읽어보았다. 역시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뒷장을 넘겨 신형철님의 글을 읽고 5분도 안되어서 머릿속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체험을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는구나! 내 손은 1페이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