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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쓸모가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아주 많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에 나를 구원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고 여겼다. 생각의 구덩이에 들어간 게 나였으니 스스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심리 에세이를 읽었던 시절이다. 한편으로는 책으로 위로를 받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무엇도 나를 위로할 수 없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어떤 계기가 나를 변화시켰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변화라는 건 아주 미세한 것이다.
그 시절이 지났다고 해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다. 순간순간 나는 존재의 의미 때문에 괴롭다. 그래서 허무주의 철학자로 평생을 고독과 함께 산 에밀 시오랑의 글에 빠져든다. 철학을 알 필요도 없고 그의 신념이나 텍스트에 등장하는 사상가나 문학가를 몰라도 상관없다. 문장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리고 사색할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깊은 밤, 고요한 새벽에는 에밀 시오랑의 글을 멀리해도 좋다.
‘이 순간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익명의 시간 더미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것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괴로우면서도 동시에 괴롭지 않다. 모든 것은 유일하면서도 동시에 무의미하다.’ (56쪽)
‘슬픔에 끝은 없다. 외로받을 수 없는 모든 종류의 비탄도 시간과 더불어 스러져 간다. 그러나 그 뿌리는 언제나 남아 있다. 그것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견고하고 변질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77쪽)
순간은 곧 사라진다. 시간은 순간으로 채워졌다. 그러니 고통의 순간도 상처받은 시간도 사라질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고통과 상처는 지문처럼 나와 하나로 지낸다.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벽돌처럼 단단한 가슴을 지녀야 할까.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는 강철 영혼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그렇다.
‘나는 아무런 존재도 못 된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무언가가 되려고 원해왔던 까닭에 이 의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일단 자리 잡은 이 의지는 끈질기게 지속되어, 아무리 내던져 버려도 나를 괴롭히고 지배한다. 그것을 과거 속에 집어넣으려 애써도 헛수고다. 되살아나서 나를 괴롭힌다. 한 번도 충족되지 못한 그 소망은 고스란히 살아 있어서 내 명령에 복종하려 들지 않는다. 내 의지와 나 자신 사이에 끼인 나는 어찌해야 옳은가?’ (212쪽)
에밀 시오랑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욕망도 없이 존재 그 자체만 파고드는 삶이었을까 감탄하다 그 역시 욕망의 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한 불행이 태어남이라지만 어쩌겠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내 자신을 견딥니다.’(53쪽)란 말처럼 나를 견디고 삶을 견뎌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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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는 불행한 인간들에게 상당히 위로가 되는 책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가 독자를 위로한다거나 그럴 목적이 조금이라도 있는 책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그 동안 착각하며 살았겠지만, 진실을 알 필요가 있어. 사실 너는 아무 의미도 없고, 시체 냄새 나는 인간에 불과해."라고 말하는 듯 하니까. 하지만 에밀 시오랑의 노골적인 냉소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그의 말이 오롯이 '진실'이라거나 또는 그의 불행이 내게 상대적 쾌감을 주어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아마 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때때로 직면하게 되는 어둠과 고독의 심연, 그게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심지어 이 지적인 철학자이자 수필가는 깊이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철학적 사유들로 자신의 견해를 무장하고 있다. 그마저도 불성실하게 기술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감정적인 동요를 가장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위에서 인용한,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에밀 시오랑은 이 책에서 내내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인간들을 냉소하거나 인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전개해 오다가, 책의 말미에서 정작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본문에서 인간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불안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저 마지막 문장만큼 뿌리깊은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에밀 시오랑은 자신의 삶을 던져 끝없는 불안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면서도, 죽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 않는다. 삶을 일컬어 '죽음을 향한 연습'이라 일컬었던 플라톤이 삶을 전제로 죽음을 바라보았던 반면(이는 '삶을 위한 죽음'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에밀 시오랑은 삶이라는 게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우리 인간들은 탄생이라는 재앙으로 인하여 일생 동안 '자기 자신'을 버텨야 하는 불공평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에밀 시오랑의 말이 일부 참이라면, 인간들은 실제로 다양한 세속적 가치들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을 살고 있으며, 기실 인생은 기쁨보다는 고통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은 아프다. 이러한 명제를 거부하고 싶어하는 부류들도 살면서 자신의 책임 없이 짊어져야 했던 무수히 많은 불행들, 그리고 지금 당장 사소하게 겪고 있는 불편함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밀 시오랑은 니체, 쇼펜하우어, 불교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사상들 그리고 에밀 시오랑에 따르면 고통의 근원은 바로 무지, 집착, 또는 분별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분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에서 '이해' 또는 '인식'이라는 불리는 것은 아마도 존재를 구분하기 시작하는 '분별심'을 이를 것이다. 태어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분멸심을 갖게 된 에밀 시오랑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상상만 해도 크나큰 행복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에밀 시오랑이 1995년 사망에도 이러한 신념을 유지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는 두 차례 저명한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고독 속에 두었으니까. 다만, 에밀 시오랑은 신이 인간들이 택하는 일종의 자위라고 하면서도, 실은 '종교'에 대해 굉장히 의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시오랑의 부모가 종교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야말로 죽음에 대한, 인간들이 취하는 가장 진지한 대답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우리가 타고나길 이 세상에 무자비하게 던져졌고, 우리 삶이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기 쉽다고 하더라도, 꼭 인생 전체를 불행함으로 채워야 할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을까? 운명이 우리의 삶을 상당 부분 이끌고 규정하는 것은 맞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감정적 대응만큼은 우리의 선택이 아닐런지. 이를 에밀 시오랑 식으로 입증하자면, 에밀 시오랑 본인의 불행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스스로 끊임없이 불행을 변론하면서 만들어진 측면도 있지 않은가? 인생에서 모든 것이 믿음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그나마 덜 불행한 쪽의 믿음을 택할 수도 있다.
물론 불행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불행이 요구하는 최대한은 기껏해야 자신의 목숨이고, 불행을 위한 이유는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반면, 행복은 이를 획득하기 위해 성실함과 용기를 필요로 하며, 차후에는 잃을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왔다 가는 이 얄미운 '행복'이라는 녀석을 감내해야 한다(생각만 해도 귀찮을 일이긴 하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선택 역시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을 결정한 뒤 실천할 수 없다면? 그때는 말 그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뭘 고민하나. 내가 가진 돈이 적다고 해서 계속 불평만 하는 쪽과, 그 돈을 가지고서라도 최대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쪽과, 어느 쪽이 나은지는 자명하다(내가 돈을 예로 든 것을 가지고 에밀 시오랑은 역시 '천박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불행할 이유 가득한 세상에서 에밀 시오랑의 책은 우리가 가진 어둠이 자연스러운 것, 아니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우리를 위로해준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결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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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을 말한다.
이 책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을 많이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인간의 태어남이 불행이다' 라는 표현해 대해서 저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했을까가 궁금했었다. 평소에 나도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고통이다.' 라는 어떤 철학자의 글에 대해서 심히 공감하고 있었던 이우도 한 몫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틀에서 벗어난 듯하다. 마치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탈무드 같은 그런 잠언서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우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아포리즘이란 새로운 용어 형식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불교의 바탕 아래 여러가지를 정의 했다. 그래서 그런지 허탈과 허무 번뇌 중심으로 글이 일관되게 기술된 듯하다. 그래서 요즈음에 익숙한 기독교나 천주교 등의 형식에 우리 나라 전체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보니 책이 어렵게 느껴졌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종교는 없지만 일반적인 철학이 개념이나 사유의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경험이 없다보니 어렵게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바삐 현대 생활 속에서 점점 사회의 속도가 높아가는 시점에서 무언가의 명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고, 밥벌이에 급급한 나머지 깊고 넓은 생각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현대 생활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존재니 본질이니 선이니 악이니 등 그런 개념들이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 같다. 정신적으로 비폐해진 현대인들에게 생각의 깊이를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전에 살던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발전된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더욱 나약하지 아는가. 그래서 자살이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시 되어져 경제와 자살률은 반비례하고 있다. 또한 요즈음에는 정신적인 병을 지닌 환자들이 늘고 있다. 공항장애, 불안장애, 불면증 등 수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위로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 나는 순간부터가 불행임으로 그 자체를 샌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저자를 유명한 허무주의 철학자며 수필가이면서 사르트르 이후 최고의 프랑스 지성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저자도 학창시절에 엄청난 불면증과 자살의 유혹애 시달렸으며, 무시무시한 반항아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최고의 지성에 올라 자신의 진리를 책으로 엮은 것이라 이런 좋은 책을 쓰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짧은 글의 단편식으로 엮었다. 옮긴이도 어떤 면을 펴서 그냥 읽어도 좋은 책이라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리고 권하고 싶다. 하루하루라도 좋으니 아니 시간이 많이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읽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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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부정과 '태어남'에 대한 불폄함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 고뇌와 불교적 성찰을 보여주는 책이다.
‘태어남’을 저주하면서도 뜨겁게 사랑한다는 에밀 시오랑의 이 책은, 1973년 출간 당시 유럽 독서계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죽음을 불행으로 여기고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배워온 우리에게도 강렬한 반전으로 다가온다. 심오하고 조금은 우울한 느낌과 함께 부정적으로 다가와 '생'에 대한 철학적 고뇌와 불교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생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고 말한다. 고로 삶의 과정은 태어남이란 불행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또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우연적인것이서 삶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모든것들은 헛된것이라고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재 조명한다. 그렇다면 태어나지 않는것이 가장 좋은 해결 책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난해하고도 깊은 뜻이 있는 듯하지만 슬픈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다. 살면서 죽음은 불행한 일이고, 태어난다는 것은 늘 축복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배웠으며 여겨온 우리의 의식에 반하는 내용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존재=고통이라는 등식을 앞세워 독자를 설득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생각해 보면서, 존재 한다는것과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두가지의 명제를 생각하며 이도저도 아닌곳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존재 그 자체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이 있음이 행복하고, 오늘 존재함이 얼마나 고마운가 하는 생각이 크다. 인생의 낭떨어지에서 헤매여도 존재 그자체에 감사하고 이겨낼수 있는 힘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론 삶이 무의미하고 인생이 허무하다는 느낌과 함께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삶에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 무의미함속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삶속 자체가 의미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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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의 일부를 읽고 우리가 생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배움아닌 배움으로 여겼는데, 그 배움이 거짓이고 믿음이 깨지게 된다. 책을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야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저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계속 읽었다. 탄생은 기쁨이고 죽음은 슬픔이다라는 공식같은 사회 통념속에서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태어남이 불행'이라니? 세상이 그렇게 살만한 가치가 없는 불행한 곳인가 싶었다.
그런데 내용도 놀랍지만 이 책이 이미 1973년에 나왔다는 것이다. 40년 전의 책으로 40년 전 사람들은 이 책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21세기 더 오랜 삶을 위해 의학은 발전하고, 여전히 불노장생의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고 죽음을 죄로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 시대에 저자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탄생부터 불행이라는 이론은 아마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저자는 책을 통해 불교의 사상을 근거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인간 중심의 철학과 종교학을 가지며 그 중심에 있으려는 절대적인 욕구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오만하고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한다.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자는 '삶이 무의미하다' 또는 '삶이 허무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덧없는 욕심과 탐욕, 이기심을 버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에 올라 정신적인 성숙과 함께 평온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다. 종교를 떠나서도 자기 성찰의 기회를 통해 군중속에서 느낄 수 있는 허무감을 없애야 한다. 요즘 우리는 수많은 미디어에 둘러싸여있다. 자기 성찰의 시간보다는 미디어에 의한 환상에 사로잡혀있다. 점점 현실과 자아, 환상의 공간에서 길을 잃고 있는 인간이 많다.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 인간 존재 가치를 깨닫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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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태어났다는 건 축복이란 생각을 뒤집고 있는 이 책은 처음엔 읽으면서 뭔 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곧 재미있게 때론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우롱하는 느낌도 들었고 본질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가졌다. 짧은 단락으로 구성되어 연결성이 없어서 처음엔 익숙지 않았지만 이런 글을 읽는 재미도 나름 괜찮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성경의 한 구절이다. 헛되고 횟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좋아하는 성경의 한 구절인데 어느 날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때도 있었다. 지금은 사는게 너무 바빠서 그런 허무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지만. 아주 가까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할 땐 정말 아주 큰 허무함을 맛보기도 했었다. 결코 채울 필요도 없고 채워지지도 않는 허무함... 루마니아 태생의 허무주의 철학자. 수필가인 시오랑의 이 책은 1973년 출판시에 유럽 독서계에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단다. 생의 가장 비극적인 의미를 조명한, 고뇌의 주옥 같은 글들이란 찬사를 받았다는데 약간은 우울한 느낌의 고뇌로 가득 찬 글들이었다. 난 왜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론 픽-쓴웃음이 나왔을까? 아마 나의 속내를 너무도 잘 나타내어 들켰다는 느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추고 절대 드러내고 싶은 않은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가감없이 잘 표현하고 있었다. 난 늘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공평하게 주어진게 인간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공평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꼭 천년만년을 살 것 같은 믿음 아닌 믿음도 내 맘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시오랑만의 독특하고 날카로운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각이 문체로 잘 표현되어 있어 메모하고픈 문장들이 많았다. -장례식에서 울부짖는 습관을 가진 나라에서 온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겠는가? -p86 아...이 글귀는 왜그리 나의 가슴에 와 닿던지...꼭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얘기하듯 꼬집어 놓은 것 같았다. 어느 날 티비를 통해 본 다른 나라의 엄숙하며 절제된 슬픔의 장례식은 나에게 조금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었기에. 매일 매일 바쁘게 지금 현재만을 몰입하며 살아온 나에게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야기시켜준 도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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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태어남의 저주는 무었일까? 그리고 죽음은 또 어떤 것인가?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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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태어남은 축복이며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태어남이 불행이라니... 그래서 더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 한계(?)를 느겼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엄청 어려움끝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 태어남을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뒤집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우리의 생이 태어남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처가 말하는 3고(苦), 즉 늙음, 죽음, 태어남 중 태어남을 모든 불행의 원천으로 꼽았듯 저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태어나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그 재앙 자체를 피해 달아 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든 재앙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든 어차피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되었는데 책을 읽어가면서 그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밤낮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었다고한다. 늘 자살을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바로 삶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보통사람과는 다른 생각, 다른 삶을 살고있구나 싶은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이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참으로 다르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내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생각또한 100% 옳은 생각 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 것이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해서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것으로 가볍게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이렇게 상반되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을 저자의 생각과 같은 것으로 바꿔야 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동안 슬프로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내 생각과 다른 생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동안의 우을모드도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를 슬프게 했던 것들도 결국에는 서로간에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이 발견해 낸 가장 좋은 것이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하고 모든 것이 영원히 중지된다. 그 얼마나 대단한 특권이며, 커다란 특권의 남용인가! 우리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서도 온 우주를 마음대로 처분하고 그것을 우리의 소멸로 끌고 가는 것이다. 분명, 죽는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p.139)
아무런 야심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며, 커다란 행운이다. 나는 그러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런 노력 또한 야심이라라. (p.213)
인간은 인간이 되어 갈수록 현실에서 잃는 게 많아진다. 그것은 자신의 우월한 본질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다. 그가 자신의 독자성을 끝까지 밀고 간다면, 절대적으로 철두철미한 인간이 된다면, 어떤 종류의 삶의 흔적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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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오욕칠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시시때때로 갖은 바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가 하면, 또다시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 앞에 내몰리는 것이다. 오로지 많은 덕업을 쌓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만이 마음의 헛바람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루에도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고, 일생을 통해서도 나이에 따라 거치는 과정을 피할 수가 없다. 삶의 과정은 권력과 힘이 있어도 예외는 존재하지 않으며, 재산과 명예를 가졌다고 해서 평정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태중에서 죽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보지도 않고 대적자로 여기신다고 말하며 스스로 탄식하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한다. 이런 와중에 위로해야 할 친구들은 찾아와서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준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태어남을 재앙으로 취급하는 것은 금기시돼 왔다. 오히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왔다. 이 책은 루마니아 출신 허무주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이 늙음·죽음·태어남이라는 3고(三苦) 가운데 태어남을 모든 불행의 원천으로 꼽는 불교 철학을 토대로 “진정한 불행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 불행은 공격성, 모든 것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확산과 분노의 원리, 그 근원을 뒤흔들었던 최악의 것을 향한 충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p.19) 라고 과감히 내지른다. 흔히들 어느 정도 염세적인 사람들은 ‘삶은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시오랑은 여기서 한술 더 떠 사람의 생이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자 ‘태어남이란 재앙을 잊고자 미친 듯 날뛰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태어남을 ‘하나의 우연’ ‘한낱 가소로운 우발적 사건’ 정도로 치부한 시오랑은 자신이 보기에 헛되기만 한 삶 반대편에 있는 죽음의 존재에 천착한다. “태어남과 쇠사슬은 동의어다. 태어남은 곧 수갑을 차게 됨을 의미한다.”(p.286)고 했다. 그는 죽음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이 발견해 낸 가장 좋은 것”이라고 봤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하고 영원히 중지되므로 우리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서도 온 우주를 마음대로 처분하고 그것을 소멸로 끌고 가는 것이다”(p.139) 라고 하여 이는 ‘대단한 특권이며, 특권의 남용’이라는 것이다. 그는 “태어남이 하나의 파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때, 삶은 마침내 견딜 만한 것이 되고, 마치 항복한 다음 날처럼 투항한 자의 홀가분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p.245)라고 했다. 이 책에는 삶과 죽음에 관한 대담하면서도 명확한 사유가 마치 수많은 조각의 메모처럼 모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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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손에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화사하게 핀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색채 때문인지 뭔가 절망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제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니 피어있기는 한데 뭔가 사연이 많은 꽃같다. "꽃"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우리는 가끔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우리 인생과 비교하기도 한다. 피고 지는 시기가 다 다르고, 화려하지만 가시를 품은 장미도 그렇고 요염함을 뽐내는 능소화라던지, 들판에 자유롭게 핀 들꽃이 그렇고 순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백합 등 우리 삶도 저마다 다양한 이유를 가지며 피고 지는 꽃과 다름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 자체로서 아름답기만 하다. 우리 삶이 언제나 그랬듯. 내가 생각하는 한 모든 존재의 근원은 그렇다. 필 때도 있으면 질 때도 있고, 기쁨이 있음면 슬픔이 있기 마련이고, 탄생의 기쁨이 있으면 죽음에 대한 미련이 있게 마련이고, 우리 인간은 그러한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돌아보고 죽음의 순간에 뒤늦게 깨닫는 삶일지언정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과정이며 삶은 감사이고, 우리는 그 삶에 열심히 살아줌으로써 생을 부여받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보편의 인간들이 가지는 생각일 것이고 지금까지의 나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를 만났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의 에밀 시오랑. 작가는 모든 존재를 부정한다. 태어남 자체가 불행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꽃들에게는 인간 이전에도 존재했었는데, 인간의 출현으로 끔찍한 경악으로 굳어진 채 아직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사유의 근원은 무엇일까? 작가의 세계관에서 온 탓이겠지만 그 자체 또한 자신의 '부정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작가가 간과한 것이 있다. 태어남이 불행이고 악의 근원이라고 설파하며 모든 형태를 가진 것들을 부정했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기록했던 걸 보면 자신 스스로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단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 그것은 불면증 환자가 날마다 참아 내야 하는 십자가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과연 그 단 한번의 십자가를 불면증환자가 날마다 참아내야 하는 십자가형에 비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인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짐이 날마다 견뎌내야 하는 하루 하루에 비길만큼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의 생각들은 읽는 내내 심기를 건드린다. 허무 철학이 너무나 생소한 나에게 그의 생각들은 분명 불편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발짝 떨어져 있을 땐 그 실체가 부정적으로만 보여 다가설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그 문제 속으로 막상 들어가 보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작가에게는 우리가 갖는 감정, 희망, 기대, 열정 따위 태어나지 않았다면 느끼지 않아도 될 것들이지만 우리가 태어남으로써 보고 듣고 느끼고 울고 기뻐하는 등 이 모든 것들이 의미있는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되려 느껴볼 수 있는 계기의 장을 마련해주었던 것은 아닐까.
어찌보면 작가는 풍랑속에 고요를 평온함을 어떤 감정에도 취우지지 않는 평정을 갈구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이 지금에 이르는 상처를 위로하고자 끊임없이 고뇌했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여겨진다. 그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든 우리가 우리의 근본 뿌리를 연구하고 고민한다는 것은 우리 삶이 그저 그 자체로 유익하고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방증일테니까.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생각의 전환이 된 셈이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지는 못할 테니까. 오히려 그의 생각들을 통해 허접하고 별볼일 없던 나의 삶이지만 감사했고 매 순간이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그가 설파했듯 우리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이니까. 우리 각자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아무려나. 절망적인 삶의 연속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즐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를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었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테니까. 어차피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무의 세계 따위 관심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게 그가 말하는 악일지언정, 그 삶이 우리에게 때론 희망이 되기도 하니까. 살며 살아가며 느끼는 모든 감정들, 만나는 사람들 모두 의미있는 존재 자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니까. 나에게 세계의 전환이 되어 주지 못해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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