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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예민한 촉수로 문학의 가장자리까지 보듬어가며 있는 힘껏 끌어안는 존재! 언더스토리에서 페가수스의 별자리까지, 덕분에 문학의 드넓은 지대를 사유하는 일은 참 즐겁다!
비평가란 가장 예민한 촉수로 문학의 가장자리까지 보듬어가며 있는 힘껏 끌어안는 존재가 아닐까. 문장의 숨결 하나하나, 시공간을 유영하는 서사 하나하나까지 더듬어 만지며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영원성을 부여하는 문학의 자리 곳곳에 이들이 있다. 박혜진 비평가는 적은 빛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 즉 그늘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하층식물(언더스토리)에게서 가장 문학적인 것을 발견한다. 그늘을 견디기 위해 곰팡이를 매개로 소통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이들처럼, 절실하고 애틋한 심층의 연결에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향과 영양을 준다고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그래서 따듯하다.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이 땅의 홀로바이온트들을 위하여
급진적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닌 ‘홀로바이온트’다.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복합적인 유기체로서 문학은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생명체의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홀로바이온트라는 개념에서 들여다보자면 한강이 그려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이미 그렇게 존재했다. 박혜진 비평가는 ‘식물과 식물을 연결해 주는 균사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한강의 소설은 믿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속에서 그려진 제주 4.3 항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고통일 뿐이지만, 그 이름 없는 고통들을 내 쪽으로 바짝 옮겨 와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넘치는 고통을 내 쪽으로 받아 삼키는 결합이며 싸워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가짐으로써 없애는 극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이 땅의 홀로바이온트들을 위한, 연결자로서의 문학에게 우리는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은 실패의 언어다. 그리고 실패의 언어로 문학은 쓴다. 이때 문학의 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이 아니다. 계급적 사회적 문화적, 이른바 공동체의 무의식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숨겨진 것, 찾아야 하는 것이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문학에 있어 ‘나’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회적, 젠더적, 문화적 주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그에 기반한 공동체의 무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재발견하게 한다. 모든 문학의 형식과 내용은 정치적 무의식이라 불리는 것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으며 모든 문학은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읽혀야 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결론이 내게는 문학과 문학을 발견하는 비평의 출발인 셈이다. 문학사는 무의식의 역사다. / 12p
언더스토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시작과 끝은 탄생과 죽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끔찍한 학살로 비참하게 죽었거나 실종되어 죽음조차 완료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인간 아닌” 존재이지만 “아직 인간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의 인간이거나 인간이지 않은 존재는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인선과 경하에게 연결되어 두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채 서로 연결되는 존재인 나무를 심는 행위는 묘지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행위이기만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과 살아 있는 이들의 목숨을 연결시킴으로써 계속되고 있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이들과 연결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역사적 인간이고 역사 속 인간이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비평 중에서 35p
박혜진 비평가는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속의 두셰이코라는 인물에게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신념임을 자각한다. 알아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행동하는 사람. 우리 시대는 지식이 아니라 감정이 더 필요한 시대임을 가까이 느낀다. 또한 자기 욕망의 화자가 됨으로써 극도로 황폐한 상태에 도달한 허연의 시를 들여다보며 그럼에도 이 잔인한 형벌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종류의 생명체와 구분되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김숨의 『L의 운동화』에서는 복원가로서의 예술, 다시 말해 무수하게 사라진 것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는 문학에게서 사라짐이란 잃어버림의 동의어가 아님을 헤아려본다.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간파는 모든 현대소설의 출발점이거나 종착점이다. /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비평 중에서 48p
‘현대’라는 이름의 종교가 있다면 ‘말씀’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자아를 구분하라. ‘분열의 관리’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이 시대의 율법이다. 자아의 분열은 현대인의 병증을 거쳐 이제는 현대인을 정의하는 본질이 된 것만 같다. 분열은 현대의 난제이며, 그런 점에서 현대문학의 역사는 자아분열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 허연론 비평 중에서 61p
생의 모든 도면은 기억이라는 언어로 쓰인다. 기억을 뒤적이기 위해 우리는 대화에 나선다. 기억을 끌어내는 대화란 때로는 삼월의 눈처럼 조용히 내리지만 때로는 위험물을 감추고 있는 지뢰처럼 무섭게 폭발한다. 시간을 가로지르며 예측할 수 없게 오가는 그들의 대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일상적이고 이상적인 대화를 통해 소실되었던 과거가 복원되고 빛바래 멈춰 버린 추억이 재생된다. 여기 실린 다섯 편의 희곡은 개인에 있어, 또 역사에 있어, 잘려 나간 시간의 틈새를 메우는 한끗의 숨이다. 이 숨으로 인해 비어 있던 공간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접혀 있던 시간이 펴지고 잘려 나간 이야기가 돌아온다. 없는 줄 알았던 존재들을 환대하는 소박한 목소리의 세계. 본디 이것은 위대한 대화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배삼식이라는 위대한 문학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 배삼식론 중에서 118p
개인적으로 박혜진 비평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강혜빈의 소설 「밤의 팔레트」와 김금희의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를 감각하는 지점이다. 그녀는 「밤의 팔레트」에서 섞임의 상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꿰매는 것과 섞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꿰매는 것은 외부 요소에 의해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상태에 지나지 않고 실밥을 풀면 고정된 상태는 금방 해체되고 말지만, 뒤섞인 물방울은 한번 결합하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섞임은 곧 새로운 상태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는 사랑은 두 사람이 한 개의 원을 채우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박혜진 비평가는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의 도식에 따라 사랑의 총량의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은 오히려 한 개의 원이 또 다른 원을 만들어 내는 증식의 연산임을 감각한다. 한 사람이 더 많이 채우면 다른 한 사람은 적게 채우는 식이 아니라 어떤 마음은 다른 마음과 붙어서 더 커지고 어떤 마음은 조그맣게 사라지는 것, 즉 수십 수백 개의 원을 만드는 사랑은 ‘차라리 비눗방울을 만드는 행위’와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랑은 계속 비눗방울을 부는 것, 일시적인 꿰맴이 아니라 섞음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나는 사랑의 자리에 문학을 끼워 넣어도 무방할 것 같다.
“훔쳐보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시/ 아무것도 훔쳐보고 싶지 않은 사람”. 이 글의 도입부에 배치한 유계영의 「시」 일부를 불러 본다. 아직 서른네 살밖에 안 먹은 화자가 다 죽은 사람처럼 미소를 잃고 아무것도 훔쳐보고 싶은 게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세상이 지루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있어서 남몰래 보고 싶은 게 없어진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아닐까. 가장 훔쳐보고 싶은 것은 ‘나’이고 아직 다 보지 못한 것도 ‘나’이다. 내가 쪼개지면서 다른 나와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자리를 증식하는 일이다. 가장자리가 많아질 때 세계와의 접점도 많아진다. / 유계영론 중에서 164p
완전한 끝은 탄생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끝과 끝이 만나 사라지는 소실점은 너머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새롭게 시작되는 점이다. 이편에서는 사라지는 소실점이지만 저편에서는 생겨나는 출발점이다. 인간 존재 자체에는 목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무목적성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무관하게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고 목적과 무관하게 평가받을 수 있다. 이유 없음은 허무가 아니라 자유의 근거다. 이것은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했던 말이다. / 양안다론 중에서 335p
현대의 폭력은 죽이지 않고 죽게 만든다. / 구병모, 『네 이웃의 식탁』 박민정, 『미스 플라이트』 비평 중에서 370p
페가수스에 대해 박혜진 비평가는 ‘메두사의 죽음에서 태어났고 번개라는 불길한 예언의 메신저로 일했으며 대체로 난폭하지만 때로는 길들여지기도 하는 존재. 언제나 누군가에게 속하지만 누구에게도 완전히 속하지는 않는 존재.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고립되어 있고 유연함 이면에 불안정을 숨기고 있는 하얀색의 우울, 우울의 전령’이라 정의한다. 나는 어쩌면 이 땅의 모든 문학가들이 그런 페가수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번개는 옮겨지고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며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은 우리 정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겠지만 그들의 계속되는 날갯짓 덕분에 우리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안내된다. 다만 나는 그들의 고단한 날갯짓을 다 헤아릴 길이 없어서 비평가들의 언어를 빌려본다. 저 하늘의 별자리가 ‘페가수스’임을 명명해주는 그들이 있어 나는 좀 더 반짝이는 밤하늘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게 언더스토리에서 페가수스의 별자리까지, 박혜진 비평가가 열어 보여준 문학 세계 덕분에 보다 넓은 지대를 확보하는 되는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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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집은 처음이다.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비평집까지도 만나는 기회가 오면서 더 확장되는 시선을 가져보는 광폭의 행보가 시작된다. 국문학을 전공한 민음사의 문학편집자인 저자의 비평 활동부터가 눈에 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비평집들에게도 눈길이 간다. 이 비평집에도 많은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비평글들을 다수 만나게 된다. 덕분에 읽지 않은 작품들까지도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읽은 작품들의 비평글들을 차례로 만나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언더스토리'라는 의미부터가 설명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과의 호흡들에 들숨과 날숨을 호흡하면서 읽었던 작품들이 다시금 회상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시 소환된 작품 속의 인물들과 이야기들과 사건들은 선명하게 다시 소환되면서 재독하는 기분으로 비평집의 글들을 마주하게 한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의 비평부터 만나본다. 눈송이의 구조는... 타인의 넘치는 고통을 내 쪽으로 받아 삼키는 결합이며 싸워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가짐으로써 없애는 극복이다. (37쪽) 책표지의 눈송이 그림이 가지는 의미를 비평집에서 만나게 된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지긋하게 떠올려보면서 읽게 한다. 한강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역사의 공백에서 찾아낸 이름 없는 고통들을 내 쪽으로 옮겨 와 자라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9쪽) 한강 작가의 작품들에 존재하는 역사와 고통들을 작품들마다 떠올려보게 한다. 그래서 신작소설이 출간되면 바짝 긴장하면서 소설을 읽게 된다. 이 비평집에는 많은 사유들이 존재한다. 국문학을 전공한 직업이 가지는 관점들을 신선하게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으며 특별했다.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소설의 비평도 담겨있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 작가 (273쪽) 저자의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와 함께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이 소개된다. 무언가에 빠져든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지긋하게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 알기에 마치 그 공간에 있는 듯 바라보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빠져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떠올려보면서 비평글을 읽게 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276 나의 슬픔도 새 바람 속에서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다. 290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273 푸코.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끈질긴 사색과 집념. 276
비평집은 또 다른 길이다. 같은 작품을 읽고 다른 누군가가 사유한 흔적들을 다시 걷는 시간이 주는 의미는 성장의 의미가 된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독서를 마주하면서 접점을 만나기도 하고 또 다른 시선들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꽤 신선하였던 시간들이 된다. 비평집에 대해서도 관심이 샘솟는다. 미처 몰랐던 책 한 권이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독서의자 곁에서 나의 독서방향등을 밝히는 등불이 될 듯하다. 읽어야 할 책들을 소개받고 독서 후 활동으로도 펼쳐드는 책 한 권으로 여러 번, 자주 펼쳐질 비평집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계속 읽어야 할 책이 된다. <언더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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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스토리>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출판사 민음사에서 일해 온 문학 편집자이자, 2015년 '조선일보' 신출문예에 당선되며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 평론가 박혜진의 첫 비평집니다. 박혜진은 누적 130만부가량 팔린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펴낸 편집자이자 월간 <릿터>의 편집장이며, 동시에 문학을 읽고 그 속으로 포착되는 의미들을 건져내는 비평가이다. 많은 비평가가 치열하게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을 정체성으로 삼아 살고 있지만, 더욱이 그에게 문학은 생업니다. 하나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편집자로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문학잡지를 기획하는 편집장으로서 그의 선택은 모두 생생한 문학비평의 연속이다. 시대를 비추는 소설을 펴내고, 순간의 화두를 담아내는 잡지를 만들며 문학과 삶을 떼지 않는 그가 작가와 작품에 대해 쓴 비평들을 모아 묶는다. 때문에 <언더스토리>에는 그가 편집자로서 감응했던 한 권의 책, 혹은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한 비평가로서의 지지가 담겼다. 김혜진, 조남주, 배삼식, 서유미, 정용준 등 미더운 작가와 작품에 대해 박혜진은 예리한 독해와 더불어 다정한 믿음을 건넨다.
이 책에서 박혜진은 문학은 '언더스토리'라고 말한다. 박혜진은 인간사회도 식물들의 방식을 닮아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 공동체를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그 절실하고 애틋한 심층의 연결에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향과 영양을 준다는 박혜진의 글에 공감한다. 박혜진은 이 책은 그늘진 중간층에서 생성되는 심층의 이야기에서 오늘의 문학을 찾는다고 말한다. 키워드는 모두 네 개로, 모두 인간, 자아, 사랑과 우울, 그리고 윤리이다.
"문학은 언더스토리다. 언더스토리는 하층식생 혹은 하목층을 가리키는 말로 숲 지붕과 숲 바닥 사이에 사는 생물을 뜻하는 산림학 용어다. 곰팡이나 이끼를 비롯해 어린 나무인 묘목이나 높이가 2미터 이내로 땅속에서부터 줄기가 갈라져 나오는 관목 같은 내음성 식물(그물에서 견디는 능력이 큰 식물)들이 언더스토리에 속한다. 태양빛의 상당 부분은 숲의 지붕에 해당하는 임관충 식물들이 받아먹기 때문에 중간층, 즉 언더스토리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늘 빛이 부족하다. 내게 있어 문학은 적은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을 환대하는 집이다."
박혜진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소설에 관한 비평 제목으로 '다시 만난 인간: 스키어, 운전자, 알레스기 환자'라는 글을 썼다. 박혜진은 이 소설은 자연을 즐기거나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자연으로부터 영향 받는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동물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느끼는 우울하고 미친 노파이자 '예언자'로 읽어야 할 것 같은 한 사람의 탄생이다.
"소설이 우울의 정조를 짙게 깔고 있다면 이때의 우울은 두셰이코의 멜랑콜리한 성정에서 기인한다. 부인은 고통과 함께 살아가기에,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진실을 훨씬 예민하게 감각한다. 그러니까 토카르추크의 생태주의적 소설은 일단 두셰이코라는 희한한 인물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살인 사건은 그다음 문제다. 그 결과 두셰이코는 간혹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겐 세상을 느끼는 관점이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다는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관점과 감각이 총동원된 초인적인 캐릭터다. 스키어와 운전자, 그리고 알레르기 환자로 인간을 구분하는 이 소설은 자연을 즐기거나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자연으로부터 영향 받는 존재를 만들어 냈다."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읽는 내내 "인식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난다."라는 블레이크의 시구절을 생각했다. 인식의 문이 닦이면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가학적인 폭력들이 무한히 드러난다. 이 소설이 바로 그 인식의 문이다. 인간보다 약한 존재들과 연대하기 위해 점성학의 시점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시적 언어로 인간을 노래하는 어느 고독하고 우울한 노인의 예언서. 혹은 미래가 궁금한 '오늘'을 위해 펼쳐진 점괘. 믿을지 말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신념이 능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박혜진은 진은영의 <가족>과 유계영의 <가족사진>은 절묘한 지점에서 상반된 방식으로 가족에 대한 감각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가족>이 비교적 익숙한 가족 서사 위에서 시상을 전개한다면 <가족사진>은 익숙한 가족 서사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진은영의 <가족>에서 가족은 나를 포함하는 동시에 나를 배제하는 모순적인 구조물이므로, 나를 소유하면서, 그 소유로 인해 내가 소유되는 것을 보여준다. 박혜진은 가족은 변화하는 내 생장의 조건들을 따라오지 못하고, 그로 인해 '나'와 가족의 불일치는 점점 더 커지고, <가족>은 이 불일치를 통해 가족과 가부장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구조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두드러지게 하는 시라고 이야기한다. 박혜진은 이에 반해 <가족사진>은 정물화된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생명의 공간인 밖과 죽음의 공간인 안을 구분하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개별 주체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 <가족>과 구분되는 정적 이미지로 가득하다고 이야기한다.
"<가족>은 화분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감정에 빗대어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의 본질을 그러낸다. 시는 밖과 안을 대비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바깥은 꽃과 화분이 빛나고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의 공간인 데 반해 집은 아무리 환하고 예쁘던 꽃과 화분도 결국 시들어 버리는 죽음의 공간이다. 밖에서 좋아 보이던 것들이 우리 집에 오면 밖에서 밖을 때만큼 좋아 보이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조건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던 상태에서 나만의 소유가 되었다는 상태 변화에 있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열린 존재를 앞에 두고 있을 때 존재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생긴다. 거리는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거리가 있어야 나 아닌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가능한 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 그러나 누군가의 소유가 되었을 때 거리는 위협받는다. 소유란 다름 아닌 포함 관계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거리는 공존할 수 없다. 거리가 존재할 때조차 소유 안에서 발생하는 거리라는 점에서, 그때 발생하는 거리와 이전의 거리는 같은 것일 수 없다. 거리가 존재하지 않을 때 서로 다른 두 개체는 불편하고 불안한 관계에 이르고, 서로 다른 두 개의 개체는 공존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예컨대 꽃과 화분이라면, 그들 각각의 존재 방식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의 방식으로 변화한다. 서로 다른 개체가 하나의 방식으로 정의될 때 발생하는 파괴, 화분의 죽음은 단지 물리적인 죽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소유 관계와 그로 인한 거리의 소멸은 가족이라는 관계에 내재된 갈등의 본질을 관통한다."
박혜진은 임선우의 <유령의 마음으로>에서 유령은 '나'보다 '나'의 감정에 훨씬 더 충실하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슬픔에 잠길 때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고 기쁠 때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화가 날 일이 있으면 주인공은 내지 못하는 대신 화를 대신 냈다. 유령은 '나'와 분리된 '나'의 감정이라는 박혜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타인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타인이라는 짐을 짊어져야 한다. 타인으로 인해 무거워져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정우에 대한 사랑이 소멸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픈 정우를 두고 변심했다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모든 것에 결별을 고하고 그를 떠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심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변심했다는 사실일 주는 죄책감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 이전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가벼웠을 것이다. 정우에게 묶여 있는 자신이 무겁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사실은 정우와 결별하고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견디는 것이 무거운 일이다. '나'는 자신의 감정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자 비로소 자신과 만난다. 나와 정우의 결합이 해제되기 위해 '나'로부터 '나'의 감정의 분리되어야 했다. 유령의 존재를 통해 '나' 스스로는 꺼내지 못했던 마음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유령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와 정우의 결별이 이루어진다. '나'는 이제 조금 더 살아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정우의 상태에 동일시하고 있던 자신과도 결별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혜진은 고립과 불안정에서 비롯되는 비이성적인 공포와 입증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연쇄하는 가운데 지속되는 예감은 손보미 소설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의 모습이자 이따금 고개 드는 우리 내면의 모습이며 무엇보다 하얀색의 우울, 죽음에서 시작된 페가수스의 불안한 삶을 닮았다고 말한다.
"손보미가 그의 소설을 통해 누적하고 있는 특수한 감정들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그러나 아직은 명명되지 못한 감정들의 양태들이지만 여러 인물들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감정 상태는 있다. 바로 우울이다. 요컨대 손보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읽는 일은 손보미 소설의 핵심을 지나는 일인 동시에 손보미 소설의 변화를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일시적인 기분 상태를 의미하는 슬픔과 구분되는 이들의 우울감은 미래에 대한 기분 나쁜 불안감으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은 생각이라기보다 비이성적 공포에 가깝다. 불행이라는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할 때, 불행이 한 사람에게 비치는 영향을 궁금해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손보미의 소설은 불행에 맞선 인생들의 조용한 방어전이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하는 감정들을 사후 해석의 손길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들여다보려고 한다."
박혜진은 양안다의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는 언어화할 수 없는 우울한 감정들이 시차를 두고 도착하는 절망의 돌림도래라고 말한다. 박혜진은 끝났는가 하면 다시 시작되고 시작되기 무섭게 끝나는 이 나날의 돌림노래는 우리 감정의 그림자를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고 이야기한다. 박혜진은 양안다의 시는 고통의 기원을 탐색하거나 원인을 찾으려고 골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양안다의 시에 등장하는 병증의 주체들은 그 병증을 인식하고 병의 끝까지 상상한다. 박혜진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을 때까지 밀고 나가므로 우리는 종종 더할 수 없이 자기 파괴적인 구절을 만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상상하는 소실점은 소실점 너머에 닿기 위한 시선이다라는 박혜진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소실점은 멀리서 바라볼 때 평행한 두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는 것같이 보이는 점이다. 두 직선의 끝과 끝을 연장했을 때 만나면서 너머로 사라지는 지점이기도 하고 볼 수 있는 공간 중에서 가장 먼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만나지 않는 두 선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실제로는 평행하지만 우리 눈에는 모든 선이 한 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 눈이 원근법의 원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원근법에 따라 바라볼 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라짐의 공간이 생겨난다. 소실점이 만들어내는 끝의 공간, 사라짐의 공간, 이곳과 저곳을 연상시키는 환상의 공간은 양안다가 구축해내는 유일무이한 시적 공간이자 형용할 수 없는 재난 상태에 직면한 훼손된 마음의 공간이기도 한 바, <숲의 소실점을 향해>는 나날의 소실점에 대한 기록이라 하겠다."
박혜진은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는 한 여성의 죽음을 스캔들의 프레임으로 소비하려 드는 태도에 강력히 반하는 구조를 취한다고 말한다. <미스 플라이트>는 오명을 뒤집어쓴 여인의 미스터리한 죽음의 배후를 그녀가 살았던 삶의 이야기로 전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을 추구한다는 박혜진의 글에 공감한다. 박혜진은 박민정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의 소비자가 될 것인지 물으며, 이 질문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대의 폭력은 죽이지 않고 죽게 만든다는 박혜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죽은 사람은 쉽게 오해된다.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삶을 살아온 한 인간의 삶이 죽음의 시점을 기준으로 단일하고 평면적인 그것으로 납작해진다. 왜 죽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놓치는 것들 중에는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가 죽었는가.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이든 간에 소비되지 않아야 한다. 죽음을 소비한다는 건 피해자를 지우는 가장 전형적이고 비열한 가해의 논리가 되기 때문인데, 그것은 피해자를 한 번 더 죽이는 폭력이다."
문학비평이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소설가나 시인 못지 않게 자기만의 혜안으로 작품과 작가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 책에서 박혜진은 이와 같은 문학비평가로서의 삶의 길을 날카로운 눈과 따스한 마음으로 걸어간 흔적의 글을 보여주어 인상적이다. 좋은 비평이란 작품의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한 이야기와 세계를 독자에게 연결해주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박혜진은 분명 좋은 비평가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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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평론가는 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를 통해 꾸준히 접하였는데, 한국문학 중에서 좋은 작품을 소개해주어서 ‘단순한 진심’ 등의 좋은 소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팟캐스트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사용하는 언어가 무척 훌륭하여 책을 통해 그 언어의 마술을 다시 접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평소 방송 등에서 사용한 언어보다 훨씬 무겁고 진지하여 다소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는데, 아직 접해보지 못한 작품들의 평론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82년생 김지영’의 편집자이고 이를 최고 히트작으로 뽑아서인지 페미니즘 관련 글이 많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읽는 82년생 김지영이나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김혜진의 소설 등에[ 대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좋았던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대한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말라는 작가의 생각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좀 더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과 내가 한 이해가 과연 바로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글을 읽었고, 글을 읽은 후에도 생각이 분명해진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작품으로부터 받은 느낌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소설들이라 생각하여 이 소설집에 대한 다른 분들의 평론도 찾아서 읽고 비교해보고 싶다) 팟캐스트에서 박혜진 평론가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도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 중 하나이고 드라마화 되기도 했던 ’어느 한낮의 연애‘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인데, 사랑 이야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숲 속에서 숨어있는 식물들 간의 연결을 의미하는 언더스토리로 지었기 떄문인지 작품 속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의 의미에 대해 상당히 세밀하게 분석하였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의미가 아주 쉬운 작품은 아니었지만 (이해를 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 책 속의 평론을 읽으면서 작품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ㅂh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