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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나의 저물지 않는 여름 - 여성 살해에 눈감는 세상에서 품는 삶의 의지
"릴리아나의 저물지 않는 여름 - 여성 살해에 눈감는 세상에서 품는 삶의 의지" 내용보기
겨울의 한가운데서 나는 영원히 저물지 않는 여름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 알베르 카뮈곧 번역본이 나오리라 생각되는 <릴리아나의 저물지 않는 여름Liliana’s Invincible Summer>은 국내에 <타이가 열병>으로 잘 알려진 작가 크리스티나 리베라 가르사가 1990년 7월 16일 전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살해당한 동생 릴리아나 리베라 가르사의 사건을 되짚으며 재조명한 회고록이
"릴리아나의 저물지 않는 여름 - 여성 살해에 눈감는 세상에서 품는 삶의 의지" 내용보기

겨울의 한가운데서 나는 영원히 저물지 않는 여름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 알베르 카뮈


곧 번역본이 나오리라 생각되는 <릴리아나의 저물지 않는 여름Liliana’s Invincible Summer>은 국내에 <타이가 열병>으로 잘 알려진 작가 크리스티나 리베라 가르사가 1990년 7월 16일 전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살해당한 동생 릴리아나 리베라 가르사의 사건을 되짚으며 재조명한 회고록이다. 

릴리아나를 떠나보낸 지 29년 3개월 2일째 되는 날, 크리스티나는 릴리아나의 사건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멕시코시티 검찰청을 찾는다. 하지만 온종일 여러 부처로 내돌려지며 똑같은 절차를 여러 번 밟은 끝에 들은 답변은 릴리아나의 사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30년 전, 추잡한 말로 피해자를 탓하는 분위기 속에서 숨죽인 채 슬픔에 침잠한 그 세월, 그 30년 동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뒤늦게 페미사이드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며 한낱 치정 사건으로 취급되었던 이 끔찍한 범죄를 설명할 언어가 생기고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거리로 나선 끝에 서서히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이렇게 바뀐 듯 바뀌지 않은 세상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 릴리아나의 사건 기록이라는 현실을 마주한 크리스티나는, 릴리아나처럼 남성의 폭력에 스러져간 수많은 여성을 떠올리며 릴리아나가 남긴 일기와 편지, 친구들의 증언을 통해 그 당시 릴리아나의 삶을, 사건의 정황을 복원하기로 한다.

이 회고록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은 친구들의 증언 중 릴리아나를 좋아했던 남자들이 남긴 절절하고도 애정 어린 안타까운 추억이 릴리아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지긋지긋하고 끔찍스러웠을 수 있다는 것을, 릴리아나가 남긴 글을 통해 깨달았을 때였다.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들의 끈질긴 구애는, 거절할수록 오기를 부리며 더 집착하는 듯한 그들의 구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포장지를 뜯고 나면 어찌나 뻔뻔스러운 자기애로 뭉쳐 있는지, 릴리아나를 살해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앙헬 곤살레스 라모스와 여성을 스토킹하고, 죽이고, 때리고, 착취하는 전 세계 가해 남성들의 집요한 일면과 어쩌면 그리도 닮아 있는지…. 

한국만 해도 얼마나 많은 여성이 매년, 매주, 매일 전 남자친구에게, 전 남편에게, 사귀는 남자친구에게, 인생의 동반자로 믿고 있던 남편에게, 직장 동료에게, 일면식도 없는 남자에게 스토킹 당하고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성희롱, 디지털 성범죄와 무차별 폭행은 얼마나 만연한지, 이 수많은 죽음과 피해 앞에서도 어째서 피해 여성의 안전은 늘 뒷전인지, 판사들과 경찰들은 어쩌면 그렇게 가해 남성들에게 너그러워 '다만'과 '집행유예'를 남발하고 당연히 취해야 할 조처를 하지 않아 살 수 있었던 수많은 여성을 죽음으로 내모는지, 이 모든 것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데도 세상은 어쩌면 이렇게나 조용한지. 직접 피해를 겪지 않은 여성들도 끝없이 계속되는 이 죽음의 행렬을, 과거에서 현재로 메아리치는 이 잔인한 현실을, 가해 남성을 지우고 피해 여성을 탓하는 염불과 너무도 기이한 무관심 속에서 마주하지 않을 길이 없다.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잔혹한 폭력과 살해 행위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성들의 머릿속에 자리한 집단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How I wish we were no longer fairies in a land of ice.


릴리아나의 삶에는 수많은 여성의 삶이 겹친다. 익숙했던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했던 여성들.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에서 사랑이 아닌 공포를 경험한 여성들.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방황했던 여성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가해 남성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여성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살해당한 여성들. 릴리아나 리베라 가르사. 그 앞뒤로 수없이 포개지는 사랑스러운 이름들. 차마 부를 수 없었던 그 이름들을 이제는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생기로 가득했던 삶을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회고록을 읽는 동안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언어로 승화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쓰인 글들을 생각했다. 수백 번 폭발하며 세상을 집어삼켜도 모자랄 생각과 감정들을 벼리어 정제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쓰인 책 한 권이 얼마나 큰 울림를 주는지, 얼마나 오래 세상에 남아 기억될 수 있는지. 



In the midst of winter I finally found there was, within me, an invincible summer.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옥죄려는 매서운 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릴리아나. 릴리아나가 품었던 불굴의 여름(invincible summer)은 그렇게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넘어 우리 곁에 찾아왔다. 여전히 남성들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시신이 소리 없이 쌓이는 냉담한 세상에서 영원히 저물지 않는 기억으로, 그 차가운 현실 앞에서 우리 안의 여름이 뜨겁게 타오를 수 있도록.

YES마니아 : 로얄 p*****e 2026.11.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