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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인문학은 찬밥 신세였다. 이력서에 전공 학과에 인문, 사회계열이 적혀 있으면 바로 쓰레기통행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인문학의 위기’가 팽배한 시절, 색다른 시도가 행해졌다. 하늘을 지붕 삼아 생활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가 진행됐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빠듯한 이들에게 소용없을 것 같았던 시도였지만 나름의 성과를 냈다 들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진 게 아니었던지, 오늘 난 한 권의 책을 접했다. <교도소 대학>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에는 계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교양은 사람을 어떻게 높이는가’라는 부제를 통하지 않더라도 교도소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익히 상상 가능하다. 고의였건 실수였건, 지난날의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는 죽거나 다쳤으며 경제적으로 파산에 이르기도 했다. 죄를 범한 이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사회로부터 격리된 상태에 놓이며, 일상 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제약을 겪는다. 일명 죗값을 치르고 있는 그들을 대상으로 대학이 열렸다. 이 책은 출소 후 먹고 살기 위해서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보편적인 생각과는 사뭇 다른 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교도소 대학의 중심에는 바드교도소사업단이 존재했다. 그들은 교도소를 주목했고, 최대한 감옥 밖 대학과 비슷한 환경을 재소자들에게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교육받을 이들을 선발했는데, 말이 준대학 과정이지 이에 응한 이들이 보여줄 지적 수준에 대해 난 사실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실제 이들의 논술은 엉망이었고, 면접과정에서 보인 동문서답은 앞날에 대한 걱정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다들 간절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일 이 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는다면 가족 중 처음으로 고등 교육의 기회를 누리는 것이었다. 선발을 도맡은 측에서도 존재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읽어내고자 애썼다.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듯하나 분명 교집합이 존재했다. 양자 모두가 세심함을 발휘했기에 ‘교도소 대학’은 가능했다. 복지는 곧잘 도전에 직면한다. 가장 가난한 이들만을 선별해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 하에 보편적 복지의 날개는 꺾이며, 오로지 복지에 의존하는 이들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우려 속에서 개개인은 자신의 근로 능력을 증명해 보일 의무를 부여 받는다. 일반 사회에서도 그러한데, 특수한 환경이라 칭할 수 있는 교도소에서의 교육 기회 부여는 더더욱 강력한 공격을 받기 련이다. 실제 미국에서는 정당성에 의문을 품는 흐름이 전개된 끝에 한동안 교도소 대학 관련 지원이 끊기기도 했다. 토대가 안정적이지 못한 관계로 매순간이 아슬아슬했다. 재소자들은 자신들을 교육하는 이들을 의심했다. 그들이 교도소 측과 한 패일 거라 생각했고,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쉬이 했다. 교도소 대학을 이끈 이들은 정부와 교도소의 시선을 끊임없이 느꼈다. 이 과정이 그들이 원하는 성과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대학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갈등에 시달렸다. 아마도 가명이겠지만, 다양한 이름들이 펼쳐놓는 논의를 접하며 난 처한 상황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는 잊게 됐다. 순전히 지적인 호기심으로 충분한 이들 중 일부는 감옥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어느 시점부터 너무도 편해진 게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에게 불편함을 선사하고자 이 과정에 지원했다고 고백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어떠한 성장을 가져다 주었을지,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사실 말해주지 않았다. 저자가 직접 교육치는 않았으나 비슷한 과정을 거쳐 사회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모두에게 희망적인 이상향을 제시해줄 뿐이었다. 15년에서 20년 혹은 그 이상의 형기를 살다 나온 이들이 이후 성공적인 제 삶을 살았을 거라 믿는 건 지나친 긍정일 수도 있어 않으련다. 다만, 학습이라 하는 건 제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욕구를 다스려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교도소 대학에서의 경험이 그들에게 약간이나마 성숙의 기회를 제공했으리라고 난 생각한다. 그건 스스로를 드높이는 일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시작부터 창대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주변과 타협하며 많은 박수를 이끌어낸 노블과 사람들의 공감을 얻진 못했으나 뚝심으로 자신의 목소리른 낸 조지프 모두 그런 의미에서 새로이 살기 시작했다. 부디 그들이 지난날보단 절망에서 멀어졌기를. 우리나라에서 노숙인 인문학 강좌가 시작된 게 2005년이라고 한다. 벌써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괜찮은 때인 거 같다. 그것이 ‘한국형 교도소 대학’ 설립 논의가 꼭 아닐지라도. 공동체가 위협 받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에 적합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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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_<교도소 대학-가장 낮은 곳에서 교양은 사람은 어떻게 높이는가?>. 대니얼 카포위츠(2017). 장상미(2022). 서울: 유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소년 교도소에서 독서수업을 시작한 후 교도소 내의 청소년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점은 교육학을 공부한다는 나도 수형시설 내의 청소년을 교육의 대상으로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년 교도소에 관심을 가지고 해외의 논문이나 책들을 읽어가면서 부러움이 몰려왔다.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우리나라 소년수들의 처지와 달리 해외에서는 "교도소 교육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도소 교육에 관심이 있었고 많은 연구와 실천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인 교육은 일단 미뤄두고 청소년들만 생각했을 때, 그럼 우리는 이 아이들을 수형 시설에 가두어두고 저절로 좋은 시민이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요구한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범죄자에게 돈을 쓰는 것이 아깝다고 한다. 나도 한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밥을 먹는 것이 괜찮은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범죄자에 대해 매몰찼다. 하지만 소년수들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 범죄 행위가 이 한 사람 전부를 상징해도 되는가 하는 점이다. 범죄의 순간이 있었고 그 죗값을 수형 시설에 감금된 것으로, 다시 말해 자유를 일정 시간 박탈당하는 것으로 치르고 있지만 이 한 사람의 전체 존재를 죄명으로 모두 덮어버려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분노의 표현과 증오의 충족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조두순과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다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정서적 문제, 범죄의 무겁고 가벼움과 상관없이 피해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 등은 정말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소년수들 보다 더 심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고 뻔뻔하게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사법은 또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따라오는 것이다. '범죄자'라는 이름을 둘러싸고 너무나 많은 논란거리가 있겠으나 나는 청소년 수형자들의 교육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질 결심을 했다. 그런 차원에서 이 글을 읽었고 내용과 느낀 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대니얼 카포위츠는 자유교양대학으로서 바드교도사업단이 하는 역할을 "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의 폭이 넓은 공간을 펼쳐놓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정이라는 이름으로 복종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빅토르 오시아틴스키의 말을 인용한다. "입헌주의는... 복종과 반란 사이에서 가능한 한 많은 선택지를 생성해 내는 정치 형태이다." 그 많은 선택지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비판하거나 추앙하거나 급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 복잡함 속에 머물면서 민감한 태도를 갖춤으로써 판단력을 키워간다고 카포위츠는 말한다. 저자가 교도소 대학의 필요를 느낀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미국 내의 인종에 따른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교도소가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교도소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불평등 재생산 기관"(296)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인종이란 "대단히 강력한 착오"(103)라고 밝히지만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종을 기준으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은 '대량구금'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사람을 구금하는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에 의하면(124) 뉴욕주 인구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 비율이 약 15%인데 수감 인구 중에서는 50%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카포위츠는 죄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구금하는 것으로 더 근본적이고 커다란 결함이 있는 사회의 구조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질문하는지도 모르겠다. 카포위츠는 교도소 내 학생들이 대학을 통해 '진부한 통념'에 저항하기를, 그래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그렇다고 대학이 그들에게 어떤 정체성을 직접 규정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경계한다.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학생에게 달린 일이다. 카포위츠는 교도소 대학과 담장 밖의 대학이 전혀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교도소 내에도 대학의 학업을 우수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한 생각인데 나도 무심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학습 면에서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연히 그들이 학교에서 좋은 학생이 아니었을 거라고 여기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학업 능력은 우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교만하고 어이없는 생각이었는지 이 책 덕분에 깨달았다. 그런데 왜 교양교육인가? 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사회에 복귀했을 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직업교육이 아닌가? 도대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미국의 헌법 같은 교양교육이 이들에게 밥을 먹여준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 제기는 교도소 측에서도 빈번히 제시될 뿐만 아니라 재소자 자신들에게서도 제기된다고 카포위츠는 말한다. 교도소 대학의 입학설명 시간에 한 여성은 이렇게 질문한다. "그래서 그게 여기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바로 써먹고 구직도 할 수 있게 해 주는 직업 교육, 육아 교실보다 나은 게 뭔가요?" 카포위츠는 더 나은 게 없다고 답한다. 교양교육은 확실히 직접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생계의 문제가 절박한 이들에게 교양교육이 필요한 것인가? 좀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질문은 대학입시를 앞둔 우리나라의 학생도 똑같이 던지는 질문이다. "대학 입시에 필요도 없는데 이 공부를 왜 해야 해요?" 생계든 대학 입시든 무언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 교양교육인 것 같다. 교양교육은 일차적으로 사람 자체를 위한 교육이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2차적인 문제에는 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실용성의 측면에서 교양교육은 무력하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재소자 교육에서 쉽게 폄하당한다고 카포위츠는 말한다. 그럼 하등 쓸모없게 느껴지는 교양교육을 왜 받아야 하는 걸까? 카포위츠는 바로 자유교양학이 다루는 주제는 바로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그것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발전시켜온 다양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단 '직업교육'과 '자유교양교육'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부터 깨트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립하는 항도 아니고 선택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파생적으로 교도소 대학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취업률이 상당히 높았음을 지적한다. 교도소와 대학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목적을 지향하는 관계 속에서 카포위츠가 교도소 내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변화'에 대한 그의 낙관적인 신념 때문이다. 사람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교육만큼 허망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가 말하는 변화가 교정의 관점에서 개인의 행동의 변화나 교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교육이 구조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에 주목한다. 어떻게 인문교양교육이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학생들이 교도소 내에서 "시공간의 전환을 경험하는 것"(117)을 통해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학생들은 평소 수감시설에서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대해지면서 복종과 순종의 압박을 느끼지만 대학 수업 시간만큼은 그 교도소의 시공간 중 일부가 대학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잠시 자신이 수형자라는 사실을 잊고 인류가 쌓아 온 지식의 세계 속으로 그들과 평등한 멤버가 되어 참여하는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던, 미국의 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노예제에 대해 생각해 보며, <죄와 벌>의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경험일까? 범죄자로 우리 사회의 멤버에서 추방당한 정체성에서 잠시 벗어나 동등한 자격을 가진 구성원으로 지적 구성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경험일까? 카포위츠는 그것이 재소자 학생들이 "진지한 학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며 거기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재소자 한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교도소 내부 지형을 바꾸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학생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 자신의 범죄 자체, 사회적 맥락, 처벌의 경험 등 사적인 특수성을 끌어오는 것을 지양한다. 그저 학문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학생으로 존재하고 실력을 발휘하기를 기대받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놀란 점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카포위츠가 이것을 한 사람의 변화로 보지 않고 구조의 변화로 본 것이다. 한 재소자가 학생으로서 존재할 때 일어나는 변화는 교도소라는 교정시설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의 변화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 카포위츠는 두 가지 유혹에 저항해야 함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그들을 형사사법 또는 교정 체계에 따라 정의하려는 유혹이다. 예를 들면 어떤 한 사람을 절도범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두 번째 유혹은 그들을 사회적 약자('서발턴'으로 상징되는)로 보고 특별한 학습과정을 설계하려는 욕구이다. 카포위츠는 이 두 가지 유혹을 극복하고 교도소 외부나 내부 모두 동일한 대학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도소 학생들은 교도소에 신체가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 이외에 학생으로서 기대되는 정도의 차이는 없다. 어쩌면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수업 시간에는 시공간이 전환되는 경험을 통해 일시적으로 망각할 수 있는 사실일 수 있다. 그는 학생에 대한 동일한 기대가 가장 강력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저항인지 밝히지는 않지만 맥락상 인종에 따른 불평등의 재생산 또는 사법 체계의 그늘에 가리어진 구조에 대한 우리들의 비반성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추측된다. 결론에서 그는 대학과 교도소가 특권과 불평등의 재생산에 나란히 역할을 하며, 미국에서 불평등은 이 두 가지의 생애 경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정리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교도소 대학은 그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도소 내에 대학을 설립하고 유지하려는 학자들과 그들의 뜻에 동감하여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부러워졌다. 물론 미국이 더 나아서가 아니다. 어느 곳에나 각각의 맥락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관여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다. 그럼 난 뭘 할 수 있지. 난 미미하다. 하지만 미미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수들이 사법계에서도, 교육학계에서도 교육의 대상으로 고민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교육의 고민이 전무하다면 과장이겠지만 최소한 경험 한 바, 문헌을 찾아본 바 부족하다. 카포위츠가 우려하는 것처럼 그들의 정체성 전체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변화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사람으로 설정하고, '교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 "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의 폭이 넓은 공간을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상벌을 가하는 것,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재소자 이외의 정체성을 경험하는 것이 차단되는 것, 그런 시간을 3년, 5년, 15년을 보낸 청소년은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지금은 질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미미한 내가 할 수 있는 미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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