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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비정한 사실주의와 불온한 초현실주의가 길항하는 난해한 텍스트였다. 광활해서 방위를 가늠할 수 없이 막연했고 조밀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몽롱했다.”
서울을 떠나온지 얼추 십년 더하기 일년이 되어간다. 시골에 와서 한동안 서울을 너무도 그리워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딱히 내게 친절하지 않았음에도 서울이 남겨준 그리움의 병은 꽤 깊었다. 시골의 일상은 너무 외로웠고 따분했고 나른했다. 지금은 시골이 주는 안락과 평안에 익숙해져 도시가 갑갑하게 느껴지지만, 불과 십년 전만해도 서울에 가고 싶어 밤새 베갯잇을 적시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이 왜, 그리웠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오매불망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명동거리에서 데이트 하다가 인파에 밟혀 죽을 뻔하였고 명동 지하도에서 출입구를 찾지 못해 수십번 헤매다가 울었던 기억,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시청 앞 광장에서 4강 신화를 목격한 직후, 기쁨에 취해 난생처음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홀린 듯 프리허그를 하고 다녔던 기억과 민주주의 투쟁의 성지나 다름없는 명동성당앞에서 항시 대기중이었던 전경들이 아직 머릿 속에 남겨져있는 서울의 풍경이다.
그런 서울을 하나의 난해한 텍스트로서 읽는 독창적인 실험 글쓰기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문화평론가 류신스타일 문화비평이다. 저자 류신은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을 오가며 느껴지는 서울의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독일의 유명한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죽기 전 1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연구이자 미완의 작품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벤야민이 파리의 물신적 성격을 읽어내었듯이 자본주의의 원초적 트라우마를 벤야민의 눈으로 서울의 아케이드를 탐색하고 벤야민의 사유이미지를 그려보며 '21세기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색다른 문화비평 포스트모더니즘을 완성하고 있다. 여기서 아케이드는 본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일컫는다. 이 아케이드는 19세기 초반 파리 도심의 상가 모델로 도입되어 번성하다가 백화점의 등장으로 몰락했다. (이 책에서 아케이드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뿌리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아케이드의 본질을 이렇게 직시했다. 서울이라는 텍스트를 벤야민화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인물은 '도시속 이방인'이자 한국 최초의 거리 산책자인 '구보씨' 이다. 소설도 아니고 평론도 아닌 글, 소설이면서 동시에 평론인 글, '창작과 비평'을 합체하여 소설처럼 읽히는 재미있는 문학평론을 쓰기 위해 벤야민의 눈으로 서울을 보고 벤야민처럼 사유하기 위해 적합한 역할을 해줄 화자인 구보씨와 함께 서울을 산책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것처럼, 서울을 이루고 있는 뼈대들 -영등포에서는 타임스퀘어, 버스, 63빌딩, 경북궁에서는 근정전 화랑과 통인시장, 광화문, 청계천, 서울광장 분수대, 롯데호텔에서는 백화점과 지하도, 이동통신대리점, 세운상가, 홍대입구에서는 르네상스 안경점, 편의점, 주유소, 롯데월드, 코엑스몰에서는 네일숍, 헤어숍 메가박스, 강남역에서 강남대로와 엔제리너스- 을 기존의 만들어진 이미지의 서울이 아닌, 우연하게 포착된 이미지의 파편을 통해 진짜 서울의 풍경을 독해한다. 경북궁에서 치욕의 역사를 지닌 아케이드로서 , 자본주의의 신화와 영광이 좌절된 유토피아의 세운상가 아케이드를 편의점, 가두판매점에서 읽어내는 피로 사회의 아케이드를 , 화려한 도시의 외관에 감춰진 맨얼굴의 진실들이 요소요소 파헤쳐진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의 과정은 잠들어 있던 도시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며 새롭게 사유이미지가 생성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마치 벤야민이 대도시가 소비한 것, 소홀히 한 것, 망각한 것, 망가뜨린 것, 버린 것을 수집하고 분류해서, 그 파편 속에서 의미를 구원하려고 하는 과정과도 같다. 구보씨는 이렇게 자본주의의 심장, 서울을 해체하고 조립하여 전혀 다른 의미의 서울을 만들고 있다,
파리의 시인이자 도시의 외로운 산책자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읽고 있던 중 이 책을 만났다. 구보씨의 걸음에서 보들레르가 , 벤야민이 노래하고 있었다. 도시의 일상이 주는 허무와 공허, 자본주의의 물신이 대중에 주입하는 현혹의 이미지를 벗어나 창작과 비평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혀 서울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그 어떤 철학서보다 더 흥미로운 사유의 장을 선보인다. 저자는 서울을 외면할 도리가 없다면 서울을 이해하는 것이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듯 서울의 뼈대를 파헤쳐 자본주의 삶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과정을 통해 도시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서울 곳곳에 감추어져 있던 자본주의의 공공 영역인 아케이드가 바로 우리의 삶의 본질이자 무늬이며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도시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아케이드' 실체라는 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모두 보들레르가 되어 노래할 것이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더러운 수도여! ' 라고 ~-파리의 우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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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책이 소설처럼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속에 등장하는 구보라는 인물을 등장시켰다. 박태원의 소설 속 구보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헤매는 산책자로 나오는데 2013년의 구보는 현대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다. 산책이라고 해서 꼭 걷는 것만은 아니다. 지하철과 버스와 택시를 이용해서 가야할 곳을 찾아간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생전에 파리에 등장한 아케이드를 통해서 자본주의를 탐사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는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이런 벤야민의 미완된 기획에 흥미를 갖고 그것을 서울에 적용해보고자 했다. 저자가 바라본 서울의 아케이드는 유리 돔이 설치된 곳 뿐 만이 아니라 지하도나 대형 쇼핑몰, 종합 전시장, 전통 시장, 버스 정류장 등 어디든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사용한 곳을 대상으로 했다. 벤자민이 ‘일상의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관상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 듯이 저자도 서울을 이해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거대한 것을 탐색하기 보다는 서울 거리를 채우고 있는 소소한 것을 대상으로 삼아 등장인물로 하여금 체험하게 하면서 서울의 현재를 이해하도록 했다. 그러나 저자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소설 같이 읽히는 문학 평론이므로 서울의 거리를 들여다보면서 저자가 떠올린 것은 시와 소설, 그림과 사진 등 이었다. 이것들을 딱딱하기만 한 비평의 전문용어를 써서 독자들을 질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처럼 이야기를 갖고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고자 시도한 것이 이 책의 구성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도시 서울에 대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이미지화 시켜 놓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울 어디를 가든 이미 그곳에 대해 한 마디쯤 풀어놓은 소설이 있고 시가 있다는 사실은 서울이 그만큼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많은 텍스트와 그림, 사진들을 적재적소에 붙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가장 많이 인용했으며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의 작품을 수없이 인용했다. 영등포에서 출발해서 경복궁, 홍대, 삼성역, 강남역 등을 거쳐 다시 영등포로 돌아오면서 저자는 서울의 모습을 보려고 한 시도가 실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묻고 있다. 결국 저자가 돌아본 서울의 소소한 모습을 통해 동시대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던 시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서울 아케이드는 굳이 서울이 아니어도, 아케이드가 아니어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어디든 그곳을 살펴봄으로써 그 안에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인용된 작품의 수가 너무 많아서 몰입이 잘 되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하지만 기획이 참신하고 재미있어서 저자가 의도한데로 비평서라기보다는 산문집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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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싫었지만, 삶의 터전이었다는 저자, 그래서 서울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 거리를 걸었다고 한다. 무작정 걷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 속에 은폐되고 망각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찾기 위해 산책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서울의 거리를 독해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과 소설가 구보씨를 소환하여, 당시의 파리와 경성을 지금의 서울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백화점의 등장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파리의 쇼핑공간이었던 아케이드에 대해 탐사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차용하고, 박태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 구보씨를 불러내어,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아케이드의 광의의 개념을 사용하여 서울을 관찰하고 있다. 서울에 대한 나의 감정도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다. 저자마냥 서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근 20년을 서울에서 살았거나, 아니면 서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출퇴근을 하였다. 그리고 삶의 터전이 서울에서 다른 곳으로 바뀐지도 그 정도는 아니래도 얼추 비슷하게 되어간다. 그래서 저자가 불러낸 ‘소설가 구보씨’를 패러디한 삼인칭 화자, 구보씨는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 소시민의 모습이자,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라는 느낌마저 갖게 만들었다. 책에서 구보씨는,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상품자본주의의 기원에 천착했듯이,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곳에서 감지되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살았던, 거닐었던 그곳과 비교하기에 바빴다. 구보씨가 책에서 이동하거나 걸었던 그 길은 나에게도 퍽이나 익숙한 길이다. 영등포에서 시청 앞까지는 매일 시내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이용하여 등하교 혹은 출퇴근을 하던 길이었다. 그가 산책했던 시청 앞 서울광장 주위, 덕수궁, 광화문 그리고 청계천 거리는 하교 후, 혹은 퇴근 후,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가 산책하는 길 곳곳이 책을 읽는 나에게는 추억의 단면이 되어 찾아왔다. 그렇기에 그가 그곳에서 감지했던 우리사회 욕망의 근원이나, 인간의 욕망을 농락하는 자본주의의 검은 입들은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지를 않는다. 하기사 내가 생활했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소설가 구보씨가 거닐었던 1930년대 경성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 정도는 아니래도, 얼추 비슷한 정도의 변화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서울거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마 몇 개의 대형건물들이나 관공서 혹은 궁의 이름만 같을 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변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그리고 알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구보씨가 만난 건물들, 그리고 아케이드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쉽게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또한 그것은 아케이드의 교활한 상품 물신이나, 자본의 악마는 그곳이 아니래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책 속에서 수많은 소설과 시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 소설과 시들을 통하여 서울이라는 공간을, 그리고 광의의 아케이드라는 개념을 통하여 근현대의 욕망이 응축된 서울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나는 왠지 모를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에 집착한다. 비록 저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사유를 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구보씨가 산책하는 거리에서 과거의 기억을 찾아 헤매었다. 서울이란 나처럼 이렇게 사유해 볼 수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듯이..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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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진면목을 문학적 몽타쥬 형식으로 그려내는 재미있는 책이다. 만 하루동안 서울시내를 돌아보며 서울의 일상을 돌아본다. 영등포에서 출발해 광화문과 을지로 일대, 홍대 입구, 코엑스, 가로수길, 강남역 등을 거닐면서 미시적 방법으로 서울의 맨얼굴을 추적한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거기에 어울리는 다양한 텍스트와 그림과 사진과 이에 대한 해석을 뒤섞으면서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욕망의 근원을 추적한다. 이런 점에서 남산 N타워에 올라 서울시내를 조망해보는 방식의 여행가적 도시 인상기와 차별된다. 지극히 미시적이고 사실적인 서울의 이미지들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현재와 다른 삶의 양식, 다른 도시의 모습을 꿈꾸게 만든다.
화려한 도시의 외면에 가려진 서울의 불편한 진실의 맨얼굴을 채집하는데 문학 텍스트가 좋은 자료로 활용된다.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를 비롯해 동시대 문학에서 서울과 서울살이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서는 ‘오래된 것’을 ‘없애야 할 것’으로 혼동하는 개발 욕망의 야만적 태도를 지적하고,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는 편의점에서 소비자라는 비교적 평등한 정체성을 획득하고 안심하는 현대 도시인을 발견해 내는 것도 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 참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매개물로 문학과 예술작품들이 적절이 인용된다.
저자가 발견한 서울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근현대적 욕망이 응축되어 드러나는 자본주의 모습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국적 자본들과 뒤범벅 된 소비 자본주의 천국의 파편의 모습들이다. 저자는 강북의 신세계, 롯데백화점은 물론 강남의 코엑스몰, 홍대입구에서 우리 앞에 나타난 유명명품점을 비롯해 탐앤탐스, 스타벅스, 베스킨라빈스, 네일숍, 메가박스, 맥도날드, 올리브영 같은 국적불명의 장소들을 방문한다. 거기에서 피로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은 쇼핑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한 캐어를 통해 불안정한 삶이 주는 두려움을 구매와 소유 행위로 덮으려는 현대인을 목격한다. 이런 현대인들의 욕망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 위해 활용되는 것이 소설 한 문장, 시 한 구절, 그림 한 점이다.
이야기 전개방식에서 도시관상학자 벤야민과 구보를 이용하고 있는 점도 재미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자본주의의 뿌리를 찾고자 했던 벤야민, 서울을 산보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묘사했던 소설가 구보씨를 현재의 서울로 불러들여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날카롭게 조망한다.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이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구상에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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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자 놓을 수 없어 앉은 자리에서 통째로 읽어냈다. 서울에 살지 않지만 ‘서울을’ 살아온 서울소요자의 애증의 기록에 크게 공감한 탓이기도 했고 ‘구보씨’의 서울 산책기가 잘 읽히는 소설의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시아케이드를 누비며 현재 서울이 가진 사회문화적 의미를 비평하고 있는 구보씨의 이야기는 분명 문화비평의 족보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형식은 저자가 원했던 서사비평(epic-criticism)이면서 ‘구보씨’의 로맨티시즘(소설roman+비평criticism)이기도 한 새로운 시도이다. 그 과감한 시도가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구보씨’의 여행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도 준다. 과감했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섬세한 시선이지만 간결한 문체와 심플한 구성 덕에 서사비평의 첫발을 근사하게 닦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울을 소요하면서도 그 사유이미지는 세계 곳곳, 문학작품, 회화, 조각 곳곳으로 확대되고 다소 비평에 가까운 구보씨의 서울아케이드 초고가 인서트 되는 지점 등이 매우 적절해서 내겐 홀라당 한권을 그 자리에서 읽어낼 수 있을 만큼 흥미롭고 즐거운 독서였다. 이 책의 매력은 그 형식의 흥미로움만이 아니다. 저자는 구보씨에게 ‘완전한 책’(a total book)인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 개념을 빌어 현대 서울의 새로운 ‘산책자’를 탄생시킨다. 벤야민의 산책자에서 나아가 서울에서 살아내고 있는 산책자를 아케이드의 소비자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사람을 매개하고 그 안을 누비는 이들의 삶으로 매일 매일 의미를 바꿔 입는 아케이드, 모든 산책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진 터전으로서의 해석이다. 그 방식이 뒷골목의 소소한 풍경이나 자연이 공존하는 도시여서라거나 비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도시탈출이 가능하다는 식이 아닌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저자의 말대로 더욱 견고해진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 안에서 서울을 살아내는 아케이드 산책자는 벤야민의 구경꾼이거나 기계적인 자본주의 재생산자로 보는 냉소적 시각이 다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저자는 구보씨를 통해 강남역 강철의 사거리에서도 위압되지 않을 수 있는 의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했던 자본주의의 연쇄고리의 끝, 아수라장이 지금의 서울이며 그 전복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던 나는 의미의 재생산으로 그 희망을 읽는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지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돈을 번다. 그 돈을 번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그것을 지출하고……. 이 연쇄고리의 맨 끝은 아수라장이다.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우리는 사고싶지 않았다’ 中) 구보라는 이름은 지속적으로 내게 걷는다는 뉘앙스를 건넨다. 먼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경성산책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저자에겐 구보씨 선택의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구보’라는 이름이 거의 달리는 걸음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산책자의 의미가 맞아떨어지진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동음의 발음이 나 또한 구보씨와 함께 피로한 발걸음을 떼게 했음을 인정한다. 구보씨와 저자는 멀리 있지 않다. 아마도 저자의 삶과 경험, 성격을 쏙 빼 닮아 있을 분신일 것을 예상해본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씨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해 발터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로 맺는 저자의 서울비평이 서울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든 역사와 문화가 상품이 되는 서울 한복판에서 ‘신성한 심장’(제프 쿤스, 2011, 신세계백화점 트리티니 가든)을 물신과 상품과 욕망이라는 소비 자본주의 삼위일체의 역사로 읽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소 공포스럽기까지 하지만 구경꾼이 아닌 산책자일 것을 굳게 마음먹고 나섰다가도 ‘욕망의 철제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다 보면 전시된 소비욕망에 사로잡혀버리는 우리 또한 자본주의 종교에 사로잡힌 맹신자에 다름 아니다. 마치 눈에 거울조각이 박힌 채 눈의 여왕을 따라나서는 카이가 된 것처럼 나는 아케이드의 일부이자 필수적인 메커니즘인 구경꾼이 되어버린다. 아케이드가 나이고, 내가 아케이드가 된다. 오늘 구보씨의 발이 닿지 않은 곳에도 신성한 심장들은 존재한다. 거의 모든 전철역은 노점에서 편의점까지를 갖춘 아케이드가 되었고 그 전철역들은 아케이드에서 아케이드를 잇는 가교가 되었다. 소도시의 지하상가에도, 곳곳에 들어선 대형 마트에서도 우리는 전시된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구보씨가 루이비통 매장에서 물소가죽 서류 가방을 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쇼윈도 앞에서 물신에 대한 경외감과 강렬한 욕망과 가질 수 없다는 우울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역시 구보씨와 마찬가지로 문명비판과 명품숭배의 시소 위에서 명품숭배론이 승리하는 경험을 한다. 그 승리에 그저 패배주의로 일관할 수도 있겠고, 여전히 회의주의는 우리 곁을 맴돌지만 우리는 저자처럼, 또는 구보씨처럼 산책자가 되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는 구보씨 이야기 밖에서, 그러니까 쇼윈도, 쇼윈도 앞의 구경꾼, 이를 바라보는 구보씨를 읽는 독자로 저자보다 한 발 더 물러나 거리두기를 하며 공간을 관조할 수 있는 산책자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 산책자의 자세를 그대로 가지고 일어나 내가 다니던 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역 계단 위에 올라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보면 과거와 현재, 저항과 소외와 물신이 공존하는 저자의 책 한권짜리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소통과 소통부재의 양면성을, 유리의 투명성과 동시에 차단의 기제로서의 측면을 읽어내는 산책자 말이다. 그 각성 또한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며 저자처럼 오늘의 산책에서 몇 가지 다른 선물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선물은 결코 상품도, 물신의 산물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성심 또한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다. 이야기 속에서 구보씨는 자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공간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아케이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자평한다. 이는 저자의 고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덕분에 구보씨의 초고에서 발달했을 저자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리얼하고 구체적인 현재의 서울을 구보씨와 함께 걷게 하고 각 공간의 사회문화사적 함의와 현재성으로 읽어낸 군더더기 없이 손질된 비평을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 속도 지상주의, 상품과 신체의 물신화, 식민잔해와 상품화라는 이 아케이드에 속해있는 우리보단 식당 골목에서 내어준 음식물 찌꺼기를 먹고 배부른 길고양이가 가장 적절한 거리두리를 하고 우리를 비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길고양이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늘 걷는 길이 산책로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도 저자가 말하는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구보씨가 벤야민에게 쓴 편지에서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라고 밝힌 부분으로 일축할 수 있다. “아주 복잡한 구역,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환해졌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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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다. 출근 준비를 하고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착한다. 오늘 오전 역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오늘 오전에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생각해 보면 일순간 멍해진다. 그 이전에는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되짚어 봐도 역시나 머리에 떠오르는 건 없다.
분주한 출근길 속 마음의 여유도 문제겠지만 특별히 주위를 챙겨서 보고자 하는 프레임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듯하다. 딱히 아름다운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보는 거리,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사람으로 가득 차서 한겨울에도 에어컨을 켜야 하는 지하철, 길가로 늘어선 빌라, 아파트, 빌딩, 대형마트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란 어렵다. 설령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한들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리게 될 것 같다. 철학에서 사유의 대상은 모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익숙하고 평범하게만 보이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도 사유가 가능할까. 이
책 속에서 나는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사유의 결과물을 만났다. 제목 속에
등장하는 단어 ‘아케이드’는 내게 생소했다. 아케이드란 열주(列柱 : 줄지어 늘어선 기둥)에 의해 지탱되는 아치 또는 반원형의 천장 등을 연속적으로 가설한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공간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콜로세움이 있고, 백화점이나 대형몰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조이다. 건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건축 디자인도 하나의 예술의 영역이고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것은 안다. 시대의
건축물들이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사회 환경 등이 고려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며, 넓게 보면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건축물을 바라보고 사유함은 도시의 모습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서 그 도시의 문화, 생활양식, 흥망성쇠의 역사를 엿보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모티프로 하여, 서울의 일상 속에서 도시 읽기를 시도한 흔적들이다. 철학과
건축, 평론의 만남이 자칫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의 형태를 띄고 시, 소설 등의 문학을 통해 외부를 바라본다. 영등포에서 노량진을 거쳐 한강을 건너 용산, 서울역, 숭례문, 경복궁, 서울
시청, 명동, 세운 상가,
홍대입구, 삼성, 강남까지의 미니여행기 속에는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발췌되어 사유의 보조도구로 쓰이고 있다. 해당 작품들은 하나의 스토리 안에 적절하게
배치되고 녹아 들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런 주제로도 시를 쓰고 단편 소설을 쓰는구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주제를 재발견하고 재해석한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문학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가보았을 이 동네들은 각각 다른 향을 뿜어낸다. 노량진의 고시촌에서 풍기는
열정, 좌절, 슬픔, 용산하면
떠오르는 강제철거와 관련된 아픔, 불에 탔던 국보 숭례문,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는 다양한 궁궐들, 젊음과 패션, 인디문화가
살아있는 홍대, 물질 기준의 성공의 잣대가 되어 버린 강남 등 저자의 시선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고
있는 일상에서 인간의 삶을 발견한다.
출퇴근
시의 지하철은 지옥철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혼잡하고 숨이 막힌다. 그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대부분의
경우 짜증이 치밀고 한숨이 나오는 게 먼저지만, 문득 생각에 잠기게 될 때가 있다. 그 와중에도 꾸벅꾸벅 조는 중년 남성을 보며 가장들의 애환을, 봇짐을
양손에 가득 들고 계신 노인들에게서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삶의 고달픔과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좁은
공간 사이로 손을 빼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이 생각난다. 소설
속 구보가 묘사했듯 마치 ‘밀레의 만종’속 기도하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은 작품 자체의 재미도 있었지만 내게
분주한 일상 속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저자가 했던 것처럼 프로젝트 급
규모의 답사와 사유를 할 순 없겠지만, 내가 움직이고 활동하는 공간들에서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움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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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인 한 편의 문화인류학 논문을 읽은 듯하다. 아니 논문이라기엔 뭣하다. 재기발랄한 실험적 문장에 웅숭깊은 얘기들을 담아내어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읽는 동안 내내 작가에겐 타향인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어쩜 이토록 절절하고 애틋한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빨려들게 만든 연유를 몇 가지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우선 그의 논리 전개에 빨려들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글을 왜 이런 방식으로, 또 이런 스타일의 문장으로 기술했는지를 장황하달 정도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그 방법론을 따라가다 보면 지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얻을 수 있고 정서적으로 그의 생각의 결에 자연스레 공감하고 만다. 그의 논리는 모든 단계를 여과식으로 밟으며 한 지점으로 수렴되도록 몰고 가기 때문에 읽는 이들의 자발적 동의를 불러일으킨다 할까? 자신이 왜 벤야민의 방법론을 차용했는지를 밝힌 다음 이를 구현할 페르소나로 소설가 구보 씨를 설정한 연유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왜 비평과 소설의 융합 형식으로 글을 구성했는지 자신의 서술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소설처럼 읽히는 재미있는 문화 비평, 소설이 된 평론인 서사 비평(epic-criticism)형식으로 이끌겠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순차적이고 치밀한 플로우 차트를 접하니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하여 그의 글은 한 편의 논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특히 이론적 배경을 명료하게 구성하여 논리의 신뢰도를 높인 논문 말이다. 또 논문인 동시에 테마가 있는 에세이라 해도 되겠다. 경쾌한 호흡의 실험적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가 벤야민의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발터 벤야민이 시도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파리를 걸으며 떠올린 사유 이미지를 2차 텍스트로 재현하고자 한 도시 전문 관상학자의 방법론이 서울을 잘 이해하는데 딱 안성맞춤이라고 여긴 것이다. 필자가 내세운 벤야민의 분신도 이채롭다. 내러티브를 이끄는 주인공으로 허구의 인물인 구보 씨를 설정하고 있다. 비평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풀어내기 위해 소설가 구보 씨를 패러디한 삼인칭 화자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구보 씨의 페르소나가 무척 마음에 끌렸다. 구보 씨는 어쩜 나의 분신이기도 한 듯했기에 말이다. 그래서 나도 기꺼이 구보 씨가 되어 아니 그의 동선을 따라 함께 걷기로 작정한다. 21세기 구보 씨는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입체적 인물이다. 그는 무기력한 지식인 룸펜이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딜레탕트이면서 자기 개성과 취향을 고수하는 댄디다.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소시민이면서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진보적 정치 이상을 품고 있지만 그 뜻을 실천하기에는 인성이 심약하고 기질이 우울하다. 지리멸렬한 삶에 덧없음을 느끼다가도 현실을 냉소하고, 소심하며 과대망상에 시달린다. 디지털 중독자이면서 디지털 반성자다. 문명 비평론자이면서 도회적 감수성을 향유하는 도시의 아이다.(14~15쪽) 다면적이고 유동적인 도시 복합체 서울을 이해하려면 이렇게 다면적인 인물이 적합할 것이다. 구보는 곳곳에서 벤야민 식 사유 이미지를 포착한다. 도서관으로 리모델링된 서울시청의 옛 청사 2층 자료실에서 구보는 상상한다. ‘서가와 서가 사이의 통로는 지식과 학문의 여신 아테나가 지나는 독서가를 유혹하는 아케이드다.(92쪽)’라거나 롯데백화점에서 ‘도서관이 지식의 소우주라면 백화점은 상품의 은하수였다.(106쪽)’며 사유 이미지를 끌어올리고 있다. 또 필자의 탁월한 문장력도 시선을 흡인한다. 읽다가 몇 번이나 무릎을 치곤했다. 이를테면 이른 대목에서다. 서울은 비정한 사실주의와 불온한 초현실주의가 길항하는 난해한 텍스트였다. 광활해서 방위를 가늠할 수 없이 막연했고 조밀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몽롱했다.(9쪽) 구보는 그제야 트리니티 가든, 즉 삼위일체 정원에 놓인 거대한 초콜릿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간파했다. 이곳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숭고한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성소가 아니었다. 물신과 상품(물신의 아들)과 욕망(물신과 상품의 영혼)이라는 ‘소비 자본주의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신성한 심장’이었다.(113쪽) 문장도 아름답지만 담고 있는 텍스트의 깊이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니 공감하면서 빨려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런 미덕들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그의 글에 매료되지 않겠는가? 하여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지적 목마름에 답하면서 감성의 결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소논문의 품격을 지닌 지성의 결집체이자 애틋한 감성을 뭉클뭉클 솟구치게 만드는 중수필(에세이)이기에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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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 구보를 등장시켜 서울 시를 배회하며 문학과 예술로 서울을 읽는다. 저자의 독서력과 상상력에 감탄했다. 발터 벤야민의 도시 아케이드 형식을 따라간다. 도시에서 구보는 존재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존재감없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를 배회하는 산책자는 자유로운 존재인 동시에 불필요한 이방인이기도 하다. 모든 걸 물질적 가치로 재단하는 그들에게 구보는 탁월한 의식으로 복수하려는 것일까. 구경꾼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산책자로 자신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는 구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의식한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아트리움에서 아케이드를 본다. 아케이드는 다시 신세계백화점, 메리어트호텔과 내부 통로로 연결되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른 자본과 합종연횡하고, 필요 없어지면 거두절미하는 것. 이 감탄고토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생리라고 한다. 쇼핑, 문화생활, 식사, 운동, 숙박, 비즈니스를 모두 한 자리에서 해결 할 수있다. 구보는 그 모습에서 구토를 느낀다. 소비 욕망의 신기루로 가득한 아케이드 속에서 위와 아래, 벽과 바닥, 안과 밖의 경계는 사리지고, 상대성의 환상이 구토를 유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쇠락해 가는 재래시장도 점차 아케이드의 형식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투명 플라스틱 지붕으로 변형된 아케이드를 선보인 것이다. 빛이 떨어지는 통로의 양편에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시장은 아직까지 우아함보다는 상인들의 현실적인 모습이 지배적이다. 손님을 부르고, 물건을 홍보하고, 떨이를 외친다. 강남대로의 유리도시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강철들로 이루어진 강철도시는 한번 들어오면 절대 밖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새로운 길과 상점들. 사람을 소비 짐승으로 길들이는 곳이다. 매장들은 강렬한 전등 빛을 내쏘며 유혹한다. 상품물신에 마취되어 구입하는 날을 꿈꾸게 된다.
아케이드는 교통수단의 위험뿐만 아니라 변덕스러운 비바람도 차단하여 궂은 날씨에도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거나 안락한 기분 속에서 진열된 상품을 구경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한다.(아케이드 프로젝트) 아케이드의 통로는 실내이면서 거리였다. 아케이드는 진열된 상품의 전시가치를 그대화하는 은은한 조명, 고급스럽게 마감된 대리석 바닥으로 현실 밖에 가상으로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꿈꾸게 한다. 물신의 덫은 인간을 굴복시켜 환상을 심는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라고 한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원더랜드라고 한다. 소유하고 가져야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같은 이상한 세계.
사람들의 편리함과 소비자로서의 기능을 위해 재단된 대도시 서울. 강철과 유리로 만든 세계. 고층 빌딩과 아파트. 대조되는 숨겨진 허름한 주택이 있는 곳. 열려있지만 닫혀있고, 환영하면서 차단하는 유리의 세계. 갑자기 사람이 개미같았다. 그래서 구토증이 올라오는 것일까. 기능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산책자 구보는 오늘도 배회한다. 도취와 피곤으로 재단된 미로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독특함, 평화를 유지하며 밥벌이를 위해 힘을 내는 구보도 마침내 일자리를 얻고 아케이드의 일원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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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상계를 대표하는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살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기 전까지 13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타이틀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열주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일컫는 아케이드는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사원의 회랑, 중세 교회의 측랑 등으로 활용되다가 19세기 산업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도심의 상가 모델로 도입되었다. (p.11)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세기의 수도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의 아케이드였다. 백화점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케이드는 패션, 미술, 음악, 광고, 사진 등 태동하는 예술을 한 장소에서 모두 관람할 수 있는 박람회장으로 기능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여기, 반세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벤야민을 서울로 초대한 책이 있다. 제목은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이 부활해서 2013년 서울의 거리를 하루 동안 산책한다면?' 이라는 다소 엉뚱하고 발랄한 가정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소설을 읽는 듯, 아니 주간지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쉽고 재미있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바로 지금 이 시간, 무대는 이곳 서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 죽은 발터 벤야민을 환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고등학교 때 현대문학 시간에 배운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딴 형태로 진행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구보 씨는 식민지 경성의 사대문 안쪽을 주로 걸었다면, '2013년의 구보' 씨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시작해 용산을 지나 서울역, 광화문, 서울광장, 명동, 홍대, 그리고 강남으로 넘어와 삼성역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오른다는 점. 기념물, 시장, 쇼핑몰, 백화점, 호텔, 관공서, 아파트, 광장, 분수, 가로등, 버스, 지하철, 택시 등 발길 닿는 곳, 눈에 들어오는 것, 타볼 것들도 훨씬 많다. 서울은 서울이로되 그 때의 서울이 아니로구나! "대형 의류 쇼핑몰이 압도하는 신촌 역사가 그렇고 매머드급 전자 상가와 극장이 먼저 시선을 장악해 버리는 용산역사가 그렇고 대형 쇼핑몰의 보조 기구처럼 전락해 버린 영등포역사가 그렇고, 청량리역 또한 자본의 거대한 쇼핑몰 사이에서 엉거주춤 들어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정윤수, <인공 낙원 - 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 (p.61) 서울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까지 살다가 경기도로 이사,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다가 2년 뒤 서울로 아예 이사를 온 나에게 서울은 태어나 자란 고향인 동시에 성인이 되어 찾은 타향 같은 공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지금 현재 서울에 살지만, 감성 충만한 학창시절을 이곳에서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없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서울 사람 다 되었구나', '서울 사람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책에 나오는 장소들 중에서 안 가 본 곳이 강북, 강남 통틀어 영등포 타임스퀘어 한 곳뿐이다. 명동도, 홍대도, 삼성역도 내가 자주 가는 곳이고, 심지어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도 나오고, 우리집 근처 지하철역도 나온다. 내 몸이 익숙하고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공간들을 텍스트로 보는 재미가 얼마나 신선하고 색다르던지. 만약 이 책의 무대가 부산이나 대전같은 다른 도시였다면 내 감정이 이렇지 않았으리라. 아쉬운 점은 서울에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드물다는 것이다. 시장과 백화점은 그렇다 쳐도,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거리, 도로, 공원, 관공서까지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각종 광고로 도배가 되어 있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먹고 입고 쓰고 타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 대기업, 돈, 돈, 돈이다. 자본과 무관하게 오롯이 서울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기껏해야 경복궁이나 광화문 같은 유적지 정도뿐이라니,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나는 어떤가. 자본으로 잠식된 이 서울이라는 공간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은 아닌가. 저자가 그렇게 묻는 듯 하여 마음이 섬뜩했다. 그동안 서울을 산책하며 걸었던 길은 어쩌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감추고 싶은 자아의 맨얼굴과 독대하기 위한 일종의 순례가 아니었을까? 아케이드는 내 '삶을 마주 보는 자리"(임선기, <아케이드>)가 아니었을까? (pp.3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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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류신은 책의 서장에서 '벤야민을 향한 오롯한 사랑을 체현하는' 산책자 구보씨를 소환하겠음을 밝히며 책 속의 구보는 '식민 경성의 거리를 주유한 최초의 플라뇌르'이며 1930년대 박태원에 의해 처음 창조된 버전에 가까운 캐랙터로 '문학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낙차를 경험하는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입체적 인물'이라 소개한다. 이해는 되지만 비일상적 어휘의 남발로 조금 거칠게 느껴지는 이 말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식대로 해석해보면 그러니까, '벤야민이 남긴 [아케이드 프로젝트] 골격에 서울이라는 장소를 대입하여 벤야민의 철학대로 사유하고 밴야민의 시선으로 서울을 탐색해 보겠다'는 쯤 된다. 저자인 류신 자신은 빠지고 벤야민의 페르소나를 가진 구보라는 산책자를 등장시켜 벤야민의 사유를 모방해 보겠다는 것이다.
구보는 화자의 역할을 맡는디. 소설처럼 쓰여진 도시문화예술비평 쯤으로 여기고 읽으면 되겠다. 소설의 형식을 모방하여 구보라는 살아있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비평적 내용에 감성과 주관과 생동감과 자유를 시도하는 것은 색다른 발상이다. 저자는 이를 로맨티시즘이라고 명명했다. 이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독자에게 주지시키는 방식은 조금 뜬금없다. 구보가 홍대 앞 탐앤탐스에서 만난 친구 K씨와의 대화에서 본인은 지금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설인 동시에 평론인 장르라고 하면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개요를 소개하고, 스스로의 책에 색다른 발상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식이다. 그러니까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류신이 출간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문학평론인 이 책이기도 하면서, 책의 내부에 등장시킨 구보가 진행중인 평론인 동시에 소설인 프로젝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글쓰기는 분명 낯설고 색다르다.
나는 자주 화자의 시점에서 길을 잃는다. '벤야민이 말했던 아케이드의 특성을 상기했다.',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가 감지됐다.' '벤야민은 썼다', 그리고 구보의 사유는 그 벤야민을 상기한, 벤야민이 말했던, 벤야민이 썼던 방식 그대로 서울로 장소를 옮겨와 재현된다. '오롯한 사랑'이 일종의 사유의 모방이라 할 수 있겠다. 벤야민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았기 때문이었는지 가끔 구보가 추구하는 언어는 뜬금없으리만큼 현학적이고 거칠게 느껴진다. 결국 구보가 산책하면서 등장시킨 수많은 도시 이미지의 텍스트들은 류신과 구보가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프로젝트 자료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아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p.101)
판타스마고리아, 요술 환등, 리비도 같은 단어가 내게 전달하는 독자와 필자와의 간극에 잠시 반문해본다. 무엇 때문에 저들의 세상 속으로 편입하려 안달하는 거지. 얼마 전에 읽은 진중권의 미학에세이에서 밝힌 김규항의 주장 중 일부인 "어느 나라에서건 평론은 주로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들끼리 읽는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평론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의 범위는 애매하지만)의 넓은 원. 그 원 안의 주체들은 넓은 층을 끌어들고자 고군분투하기도 하지만, 거기엔 분명 그들만 유?하는 jargon들이 주석없이 소비되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저자의 방대한 자료 수집과 지적인 탐구로, 서울이라는 장소를 시대가 지닌 문화 예술적 생산의 파편들과 아울러 탐색하고 비판하는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구보씨는 서울을 산책하며 포착된 이미지들을 문학의 텍스트들과 대면시킨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도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구보씨의 발길 닿는 곳, 구보씨의 시선이 머물고 사유가 시작되는 곳에 그림자처럼 동반한다. 문학 작품 내의 텍스트를 떠올려서 사유를 길어 올린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심지어 구보씨는 류신이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자료 조사를 거쳐 탈고하는 단계의 축소판인 문학적 몽타지를 조동범의 시집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에 대한 평론의 한 형태인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초안]으로 재현한다. 중첩된 구조 안쪽의 구보가 서술하고 매듭짓는 벤야민과 조동범의 문학세계에서의 연관성과 차별성은 류신이 구보를 등장시켜 해체하고 있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중첩된 구조는 또 다른 바깥 중첩인 구보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임과 연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구보가 자신의 화신인 구보2를 만들어 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끝내고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은 류신이 구보를 만들어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끝내는 과정과 등치 관계가 아닐까. 어쨌든 류신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되 마음껏 현실을 굴레에서 이탈하는 해방의 글쓰기'를 하고 싶은 속내를 구보를 통해 드러낸다. 구보는 유학 후 룸펜 생활을 하며 창작 활동을 하지만 류신은 구보가 외면하고자 했던 그 철저히 자본주의 속에 깊숙히 편입된, 교수라는 사회적 입지를 구축한 사람이다.어쨌든 조동범의 평론의 한 형태인 초안에서 공간의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의 구체성은 구보의 산책을 담은 서울 아케이트 프로젝트에서 생동감있게 재현된다.
구보는 ...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상이 아니라 이미지의 파편을 통해 진짜 서울의 풍경을 독해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p99)
작가 류신은 구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 서울 아케이트 프로젝트를 스스로 평론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과정 중의 사유 중 하나로 슬쩍 끼워넣은 똘똘하고 계산된 곳곳의 장치들이다. 나처럼 가끔씩 길을 잃고 헤매는 독자들에게는 유용하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책의 해석을 중간 중간에 권유당하는 느낌도 든다.
구보가 산책했던 서울은 벤야민이 비판했던 '상품 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이었던 아케이드의 생명력과 끈질긴 적응력'을 보여주는 '신자유주의의 물신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 욕망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은 '치욕의 역사가 진열된 고궁의 아케이드'였고, 서울광장은 '서울이라는 욕망의 분화구'였으며, 서울시청은 '21세기 통섭과 혼종의 시대를 서울의 '중심의 중심'에서 건축으로 현시'하였다. '자본주의를 신흥 종교'로 떠받들어지는 세상에서, 백화점은 구보에게 상품 물신이 존재의 공허를 일시적으로 위무해주는 자본주의의 예배당'이며, 그곳을 쇼핑하는 사람들은 '생의 불안과 두려움을 상품 구매와 소유로 보상받으려는 신도'들로 읽힌다. 오래 전 구보에게, '금지된 욕망이 밀거래되는 곳'이었던 세운상가는, '한국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신화가 좌절된 유토피아의 폐허'이다. 홍대 입구에서는 '상업자본의 진군'을, 지하철 노선도에서는 '자기 일상의 동선이 만들어 내는 고유한 별자리'를 상상했고, 지하도는 '뒤죽박죽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시종일관 한 곳으로 모아 담는 도시의 깔대기'를 떠올렸다.
자동판매기에서 캔음료를 꺼내 마시며, 지불능력이라는 전제조건이 만족된다면, '서울에서 욕망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즉각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하철은 '대도시에 새로이 출현한 무표정한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승객들의 표정에서 '어떠한 상황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는 무관심의 의지'를 본다. 현대 소비 사회의 상징물들을 예의 관찰하면서 무기력하고 볼모화된 현대인의 삶을 포착하던 그는 버거킹에서 점심을 해결하며, '현대인은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사물이 지닌 기호나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코엑스 수족관에 들러 수마트라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비루한 자화상'을 본다.
반디앤루니스에서 발견한 청소년 권장도서 변신을 보며 떠올린 카프카. 출근하면 성실했고 퇴근후엔 필사적이었던, 생활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일상의 답답함을 무시하지 않았던 카프카의 정수리에 정확히 8:2로 나뉘어진 가리마를,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밥벌이에 비해 네 배는 무겁다는 등식을 대입해 본다. 그렇다 결국 밥벌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이든 욕망이든 소비이든 밥벌이의 무거운 어깨는 제도를 떠나, 사회를 떠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근원적인 최소 자유를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한국종합무역센터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의 거점이며, 이 제국의 건물과 건물들은 다양한 아케이드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그래서 경계가 없다. 요컨대 아케이드는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의 혈관이라 결론내린다.
구보는 떠올린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나는 즉각적으로, 유토피아는 커녕, 근간 연일 이슈가 되어온 일련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하나의 구호 안에 뭉쳐지고 있는 현상들을 떠올렸다. 구보씨는 안녕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유학을 다녀왔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구보씨는 현 체제 내에서 안녕할까? 물론 안녕하지 않다. 아직은. 그렇지만 체제 속에 안녕하려는 의지는 구보의 마지막 탈고를 마치는 과정과 룸펜을 벗어나기로 작정한 일련의 일상들을 짧게 기술한 에필로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본의 물신이 대중에게 주입하는 현혹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 사유 이미지들을 포착하려고 애썼다는 창작의도를 다시 한 번 밝히며 끝을 맺는다.
청계천에서 구보는 자신의 우울이 자유의 다른 얼굴이 되길 소망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