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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앞에서, 교육 앞에서 자신만만한 이가 어디 있으랴. 외출타기를 하듯 끊임없이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같기도 하다. (6쪽)
그런데 아닌 것 같다. 교육 앞에서, 삶 앞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나뿐'인 것만 같다. 모두들 저렇게 당당한 얼굴로 자신있게 나아가는데, 나만 혼자 날마다 흔들리고 매 순간마다 흔들리는 것 같다. 삶 앞에서, 아이의 교육 앞에서는 더더욱...
아이가 대안교육을 시작한 지 이제 일 년이 되었다.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중고등 과정의 대안학교에 진학했다(진학했다 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초등 6년 과정 중, 저학년 3년 동안은 학교 생활에 남들보다 뛰어나게, 혹은 남들만큼 적응시켜보려고 동분서주 했고, 그 후 3년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호시탐탐 대안학교를 넘보게 되었다. 주위에 대안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가 없어 나름 각개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모르니까 일단 규모가 적은 곳은 기피하게 되었다. 이왕이면 대안학교도 이름이 알려진, 나름 탄탄해 뵈는 학교였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탄탄한 대안학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마음에 드는 학교는 편입이 쉽지 않았다. 해서 초등기간에 훌쩍 정규 교육을 포기하는 대담함은 감행하지 못했다.
그렇게 정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 집 가까이의 대안학교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름 큰 모험이었다. 물론 입학하는 순간까지도, 아니 어쩌면 지난 일 년간 내내 제도권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를 고민했다(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므로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어느 중학교 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대안교육을 선택하기 까지 격월간 <민들레>의 힘이 컸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만 알던 무식한 엄마로서는 누군가 바람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대안학교에 대해 알리는 것조차 꺼렸을 것이다. <민들레>를 통해 알게 된 작은 대안학교들은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런 학교들이었다. 내 아이의 자유로운 영혼을 있는 그대로 숨쉬게 해줄 바로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지난 일 년간 무수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나태한 모습에 그랬고, 생각보다 작아도 너무 작은 학교 규모 때문에도 그랬고, 운영위원이니 대표니 학교를 이웃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선생님들의 온갖 시중들기를 마다하지 않던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모습에 기가 질렸던 나는 대안학교는 더더군다나 부모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어서도 그랬다.
그런가하면, 입학 전 캠프나 사전 합숙을 통해 대안학교를 체험하고 두말없이 대안학교를 선택했던 아이도 역시 학기 중간 중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고사를 잘 보았냐고 묻는 초등학교 친구의 말에 그랬고, 수학이나 영어의 수준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면서도 그랬고, 공강이 있을 때 자기가 이렇게 여유있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럽다고 했다(겨우 열 네살이 된 아이 입에서 자신이 여유있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내가 그동안 아이를 많이 닥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선뜻 일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우리 모자는 흔들리면서 첫 대안교육 일 년을 보냈다.
흔들렸으면서도, 흔들리면서도 대안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역시 해보니까 알겠다는 거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무익함을, 그 횡포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음은 대단한 행운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혹은 아이에게 일조하라는 그런 거창한 포부는 없다. 단지 오늘을 즐기는 아이가 내일도 역시 즐겁게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학력은 부족할 지 모르지만 세상을 살아내는 실력만큼은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더 느린 템포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만큼 신중한 아이인 것이다. 한 때는 그것이 세상살이에 큰 해가 되지싶어 아이를 닥달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아이가 달팽이보다 더 천천히 걷는다 해도 그 아이의 걸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정해진 규율대로만 움직이며, 보이는 고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야 그나마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아이가 제 머리로 생각하고, 가끔 자주 옆길도 흘깃거리며 부딪히고 깨지고 아파해야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이 책은 격월간 <민들레>의 발행인 현병호 선생님이 지난 10여 년 동안 <민들레>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처음 대안교육을 고민할 때 <민들레>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지난 1년 간의 대안학교 생활을 생각해 보며 2013년 한 해를 정리해 보자는 의미에서 연말을 이 책과 함께 보냈다. 흔들리는 마음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잡을 수 있었고, 역시 우리의 선택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안학교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대안교육을 선택할 때 바로 이점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기도 하다. 좋은 학교, 좋은 교사에게 양질의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아이가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것이다. 그것이 대안교육 역시 또다른 형태의 교육과잉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현병호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대안교육이 만능은 아닌 것처럼, 이 책 또한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와 교육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이유를 아는 이라면, 그가 부모이든 교사이든 혹은 그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대안교육과는 무관하게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책이니까 말이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교육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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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름의 '외줄타기'
'이야~~!! 제목 한번 잘 지었네.' '흔들리는 부모들을 위한 교육학'.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책의 부제다. 보는 순간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대한민국에서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크게는 바뀌는 교육 정책에도 오락가락하고 작게는 학교 선생님의 말에 노심초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곧 서열을 결정하는 냉혹한 경쟁이기에, 부모는 무릎을 꺾어놓는 현실 앞에 좌절하기도 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나약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내 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아직 덜 자란 아이'가 성숙하는 과정이다. 아이들은 매일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바라보고 싶지 않은,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가 이제껏 만난 스승 중에 가장 두렵고도 큰 스승일지도 모른다.
현병호의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오늘날 아이들이 처한 현실과 우리 교육의 현 주소에 대해 되짚어보는 책이다. 특히 대안교육잡지 <민들레>의 발행인이기도 한 저자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대안학교의 문제점을 들춰내며 올바른 대안교육 실현을 위한 과제를 모색한다.
진짜 교육, 진짜 배움
요즘은 정상적으로 잘 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사회가 워낙 비정상적이다보니 생겨난 씁쓸한 말이다. 교육이 소비상품으로 전락해버린 학교 현실은 '배움의 실종'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린다. 일본의 교육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학교에서 자본주의 등가교환의 논리에 익숙한 아이들의 '배움으로부터의 도피'가 커서는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로 연결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렇게 된데에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교육당국과 교사, 부모가 모두 공범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배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지 않는다면 학교 교육 정상화는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삶과 연결시켜 이해함으로써 '주체'를 세우는 과정이다. 때문에 배우기 전과 배우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공부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을 거세해버리는 학교에서 실제 삶과 동떨어진 교육은 '성찰의 힘'을 잃어버렸다.
저자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식이나 기술에서 뛰어난 능력, 관계를 잘 맺을 줄 아는 능력,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며 "'전인(全人)'이란 이런 능력을 고루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고 또 주위와 자기 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전인교육'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 대안교육"(31쪽)이라고 말한다.
'대안학교'만이 전부는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대안교육'이라는 말도 사라져야 한다. 기존의 교육시스템이 워낙 문제가 많아 다른 길을 찾다보니 교육이라는 이름 앞에 '대안'을 붙인 것이 아닌가. 대안 교육이라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교육이 '정상화' 된다면 학교는 진정한 배움의 터전이 될 것이다. 최근에는 공교육 안에서 대안교육 실현을 위한 공립 대안학교 설립이나, 혁신학교 확대와 같은 긍정적인 시도도 늘어나는 추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늘날 '대안학교'의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재정부담으로 인해 정작 대안교육이 필요한 소외계층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점은 여전히 대안학교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할 배움과 성숙의 과정이 오히려 '대안학교'라는 또 다른 '획일성' 때문에 삶과 유리될 수 있는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대안'이라는 말이 진입 장벽이자 그들만의 울타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대안이 아니다.
저자는 "성숙에는 역동적인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삶이란 것이 본디 죽음과 함께 하는 역설적인 과정이듯이 갈등과 긴장은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라며 "학교는 세상과 갈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삶의 다양성이 거세된 안온한 온실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 곳, 다른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어야 한다"(171쪽)고 강조한다.
내가 사는 영광군 묘량면에는 폐교 직전까지 몰렸다가 기사회생한 '작은 학교'가 있다. 농촌 시골마을에 학교마저 사라진다면 결국 마을공동체마저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인식이 모여 주민들은 '학교 살리기'에 나섰다. 다행히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보태져 학교는 살아났고,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마을이 곧 학교'라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폐교를 막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학교 운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는 마을에 문호를 개방하고 마을은 학교와 자원을 공유하며 '공동체'라는 울타리에서 마을과 학교가 함께 함으로써 아이들 교육 환경도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 '대안학교'의 간판을 달지는 않았지만 교육철학과 교육내용, 학교 운영방식에 이르기까지 대안교육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삶이 곧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가치에 기반해 보면, '삶의 질'이 곧 '교육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학교가 이웃,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아이들의 교육 환경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바로 세우기'는 학교 현장 안에만 맡겨져야 할 과제가 아니다. 기존 시스템이 싫다해서 무턱대고 대안학교만 찾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지금 아이들의 삶의 터전이 얼마나 좋은 교육 환경이 되고 있는가에서부터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길은 바로 여기, 우리 발 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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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1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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