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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그의 이름만큼 우리 국민에게 익숙한 이름은 민족의 영웅이나 위인으로 불리우는 그의 아들인 세종대왕 이도, 충무공 이순신, 다산 정약용 등 일부 위인을 제외하면 거의 독보적으로 명성을 자랑한다. 오히려 아들 세종대왕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태종 이방원은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어서 더 유명할 수 있다. 그만큼 이방원은 왕이 되기 전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과 집권 이후까지가 사람들이 알고 싶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의 칼날앞에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이 쓰러졌다. 그가 이들을 죽였기에 이들 또한 더 유명해졌다. 한명은 고려 최후의 충신으로, 한 명은 조선을 연 최고의 개혁사상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방원의 정체성을 파악한 견해가 탁견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변방 무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즐긴 ‘무인’이면서 고려 우왕 때인 16세에 진사과에 7등으로 합격한 유자儒者이기도 했다(37쪽).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오류다. 16세에 진사과에 합격해서 17세인 1383년 문과에 병과 7등(전체 10등)으로 합격한 유자라고 해야 옳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면 태종 치세 후반기를 다시 보게 된다. 힘으로 얻은 왕좌는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정변을 연출할 수 있다. 태종으로서는 유교적 국가 정체성의 유지에 노력하면서 한비자적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구조에 처했다(111쪽). 이는 유교적 인정仁政과 과감한 정치적 숙청이 병존한 태종 치세를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하고 있다.
태종 이방원은 1367년 공민왕 집권기 당시까지는 변방을 지키던 무장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다. 위로 큰 형인 이방우가 1352년생으로 이방원보다 15살이나 많았고, 둘째형인 정종 방과, 익안대군 방의, 나중에 왕권을 놓고 다툰 넷째형 회안대군 방간에 이은 아들이었다. 아버지 이성계는 여진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을 막으면서 조정으로 진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방원은 그런 집안에서 1382년 진사과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입학하고 다음 해 문과에 합격해서 아버지 이성계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388년 아버지 이성계는 명나라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오자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군의 우군도통사로 나섰다가 좌군도통사였던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다. 당시 이들 아들들은 조정의 볼모형태로 잡혀 있으나, 모두 탈출해서 아버지 휘하의 혁명에 참여한다. 이방원은 당시 개경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가족들을 건사해낸다. 이방원은 스승인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 등으로부터 유학사상과 왕도정치를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군사적 감각을 배운 양면을 다 갖춘 리더의 길을 가게 된다.
하지만 이방원에게도 시련의 시간은 있었다. 계모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참여한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막내 방석이 세자로 집권하고 전처 아들이었던 방원의 6형제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진다. 사병도 정리 당하면서 시련의 시간을 보내며 중국의 유명 고전인 법가사상의 한비자를 탐독한다.
태종인 장인인 민제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권근 등의 도움으로 유교적 기반을 가진채 정치적 지원도 얻는다. 제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인 방과를 정종으로 2대 왕에 앉히고 다시 넷째형인 회안대군 방과와 함께 개경시가지에서 전투를 치뤄 승리하고 이후 조선의 3대왕에 등극한다. 태종은 유교적 정치 운영의 지도적 기반하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외척의 득세와 그로 인한 왕들의 부담을 잘 알았던 태종은 철저한 주변정리에 들어간다. 가장 처음으로 개국공신이며, 사돈으로 권세를 누리던 척신 이거이 부자를 제거했고, 자신과 함꼐 공동으로 왕권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원경왕후 민씨의 네형제를 모두 제거한다. 이른바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휼 형제 모두를 제거한다. 태종은 정도전을 싫어했지만 그의 노선까지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의 이상 중에 몇 가지는 받아서 실행한다.
태종은 신문고 설치에서 보듯이 왕이기에 자신의 나라 백성을 사랑한 군주였다. 물론 전근대적인 틀에서의 왕으로서 말이다. 청계천을 정비하고, 노비증분법을 통해 노비문제를 해결하면서 육조직제계를 통해 강력한 왕권 정체를 구축한다.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 세종을 왕위에 앉히고 상왕으로 병권을 유지하면서 이종무 등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한다. 아들인 세종의 시대를 위해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마져 제거하면서까지 그는 강력한 왕권과 왕정에 의한 시스템적 국가적 통치를 꿈꾼 군주였다.
그동안 역사학자의 저술에서 벗어나 태종은 정치적인 접근이 분명 필요한 왕이다. 술치와 양권, 네체시타와 비르투, '성근 프로젝트' 같은 학술적 정치용어가 정치군주 태종의 치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태종~성종으로 이어지는 군주 평전 시리즈의 첫 책으로 나는 나머지 두권인 태종의 손자인 세조와 그의 손자인 성종까지 이어지는 책을 다 구입했다. 조선 전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군주평전 시리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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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이유 조선의 7대 임금이요. 할아버지 태종처럼 정난을 일으켜 조카를 따르던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다. 세조는 세종이 아직 왕이 되기전인 1417년 충녕대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왕조국가에서 둘째는 애매한 위치다. 사실 자신의 목숨 보전하기도 힘든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8형제(적자 기준)를 둔 대표적인 집안 몇 군데는 늘 형제의 난이 일어났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다. 그의 맏아들 진안대군은 왕조가 개창되고 얼마 있지 않아 사망한다. 제2자였던 이방과는 아버지를 닮은 무인이었으나, 왕조개창의 공은 동생인 정안대군(후에 태종)에게 더 있었다. 전실 소생인 셋째인 익안대군은 태종을 지지했고, 넷째인 회안대군은 태종과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다섯째, 여섯째는 모두 형의 편에 선 왕자였고, 일곱째와 막내는 태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둘째는 세종대왕이다. 그의 맏아들 문종(향)은 적장자로 세종 말년의 치세에 기여했으나, 39세의 나이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붕어한다. 둘째 세조, 셋째 안평, 넷째 수양의 편에선 임영대군, 다섯째 광평은 요절했다. 여섯째 금성은 단종복위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일곱째 평원대군도 요절해서 세종말년의 숭불을 촉진시킨다. 막내는 영응대군으로 세종이 총애하여 승하할 때 영응대군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이들은 형제끼리 다투고, 한 형을 지지하거나 또는 요절하는 등 아버지에세 슬픔을 안긴다.
셋째는 현대가다. 현대가 정주영 회장의 첫째 아들은 교통사고로 현대가 아직 오늘날의 규모가 되기 전 작고했다. 둘째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으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다섯째 동생인 정몽헌회장과 대립했다. 셋째는 현대백화점 회장, 넷째는 정신질환으로 자살했다. 여섯째는 정치인 정몽준, 일곱째는 현대해상 정몽윤, 여덜째는 정몽일 등 팔형제가 아버지의 대권을 두고 대립한 이력이 있다.
세조 이유는 무에 뛰어났고, 공법 제정이나 한글 창제에도 관여했을 만큼 나랏일에도 능했다. 하지만 세종대왕 승하 후 형인 문종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권세를 탐해서 죽을뻔한 위기에 있을 수도 있었다. 셋째인 안평과 대립했다. 왕좌에 오른 이유는 단호하면서도 유능했다. 진관체제 확립, 국가 운영의 만세성법인 <경국대전>과 <동국통감>의 편찬, 검약을 기치로 국가 세출의 표준화를 도모한 「횡간」 제정 등 왕조의 기반과 토대를 굳건히 했고 왕권을 강화했다. 훈신들과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정치적인 면에서 홍윤성의 만행 등을 눈감아주고, 신하들과 술자리를 많이 했다.
군주평전 세번쨰로 태종, 세종에 이어 세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마지막은 성종이다.
다만, 명군의 이야기는 조금 부족하고, 폭군 또는 편가르는 정치 이야기가 조금 더 비중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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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세조, 중종, 광해군, 인조, 효종, 영조, 정조. 지존으로 등극은 했지만 그 과정이 비정상적이었거나, 우여곡절 끝에 등극해 재위하는 내내 정통성 시비에 휘둘렸던 국왕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재위하는 동안 자기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지냈다. 영조와 정조를 읽은 지는 시간이 좀 지났고, 최근에 광해군을 읽으면서 인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번에 세조를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리뷰를 쓰기 위해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읽어온 조선 역사서에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의도적이었는지,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중에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연이은 탄핵으로 소용돌이치는 정치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직 역사학 교수가 쓴 이 책은 그동안 읽어온 여느 역사서와는 달리 저자의 의도나 저자가 강조하려는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기승전결이나 갈등 구조는 보이지 않고, 그저 세조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시간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밋밋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에두르고 있다. 저자의 구도에 끌려 책을 읽는 게 아니다 보니 내가 읽을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역사 교과서를 읽는 게 아니니 건너뛸 건 건너뛰고 집중해 읽을 목표를 정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앞서 말했듯 “그동안의 조선 역사 읽기가 정통성 콤플렉스를 가진 왕이 그걸 극복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쳤으며, 그 정책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방점이 찍혀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에 오른 사건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최근에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영화로 등극한 일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는 해도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최근에 영화 하나가 역사 왜곡이냐 해석의 영역이냐는 문제를 두고 소란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세조가 스스로 지존의 자리에 등극한 배경을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문종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의정부는 왕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채 나랏일을 처리했다. 의정부는 세자(단종)를 볼모로 궁성을 장악했다. 세자는 즉위 당일 의정부에 모든 걸 맡긴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사실 의정부에서 일을 의논해 결정하게 체제를 바꾼 건 세종이었다. 6조 체계를 재상 중심의 의정부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이후 의정부는 세종 대 후반, 문종 대를 거쳐 단종 대에 이르러 권력의 정점을 차지했다. 그중 좌의정 김종서의 위세가 가장 셌다.” 이에 대해 수양은 다음과 같이 자기가 권력 전면에 나선 것을 정당화하였다. “황보인,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한편이 되어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 등과 함께 모반을 공모하고 거사할 날까까지 정하였다. 주상 곁에 그들 일당이 있어 아뢸 겨를이 없으므로 김종서 부자를 베어 없애고 나머지를 토벌하고자 한다.” 이렇게 정당화한 보람도 없이 세조 집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반란과 역모가 연달아 일어난다. 그러자 세조는 즉위 초반부터 지방 사회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전력한다. 즉위 초반의 이런 노력은 노산군의 죽음 이후 세조 자신이 직접 지방을 살피려는 적극적인 행보를 모색하는 것으로 바뀐다. 세조는 여섯 차례 걸쳐 황해도(황주, 해주), 평안도(평양), 강원도, 충청도(온양)를 짧게는 26일 길게는 45일간 순행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끈 광해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곳을 가장 오랫동안 돌아본 게 아닐까 한다. 문득 세조의 순행이 여섯 차례에 걸쳐 이백 일이 넘게 이어졌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졌다. 순행에 나선 게 정통성 시비를 극복하기 위한 거라면 자리를 그렇게 비우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저자는 세조는 순행하는 동안 도성의 일을 승지에게 맡겼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그 정도 자리가 잡혔다면 왜 굳이 순행에 나서야 했을까? 왕비와 세자까지 따르고, 동원한 군사만 내금위 200인, 별시위와 갑사 200인, 파적위 100인까지 500인에 이르렀으니 줄잡아 순행 인원은 천 명을 헤아리지 않았을까. 순행 떠나기 전에 관찰사에게 순행에 필요한 쌀과 물품을 준비하라고 시켰다지만, 그것 모두 백성의 부담이었을 것이니 순행 자체가 백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 아닌가. 물론 희생만 따른 건 아니었다. 세조는 순행과정에 문과와 무과를 실시했는데, 저자는 왕이 몸소 나와 치른 이 시험이 친왕 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장으로 기능했다고 서술한다. 지역민에게 입신의 기회를 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질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순행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기회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건데,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선뜻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저자는 순행의 목적을 “순행과정에서 왕으로서의 세를 과시했고, 순행 후 해당 지역 백성에게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서 세조 자신이 신비한 존재이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도록 세뇌시켰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왕위 찬탈이라는 정권 창출의 태생적 약점이 두려웠던 세조는 국정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소수의 핵심 측근과만 권력을 공유했다. 계유정난에서 공을 세운 정난공신과 세조 즉위에 힘을 보탠 좌익공신에 거듭 책봉된 몇몇 측근만 진정한 세조의 사람이었다. 뭔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닐 수 없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과 인조에게서도 그런 모습이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세조는 중종이나 인조와는 달리 재위하는 동안 이루어 놓은 게 적지 않다. 경국대전이나 동국통감은 모두 세조의 손자였던 성종의 업적으로 분류되지만, 경국대전 초안을 완성한 것도 세조요,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해 시대순에 따라 사실을 서술하는 편년체를 채택해 동국통감을 편찬하도록 명령한 것도 세조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세출의 체계를 세웠다는 게 더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이것이 경국대전이나 동국통감의 기초를 놓은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7대에 걸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게 3대 파이살 국왕인데, 그가 국가 재정체계를 세워 비로소 사우디아라비아가 국가의 형태를 갖췄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가 세출 체계를 세운 왕 세조, 그동안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조선의 국가 재정 중 세입은 있었지만 세출은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이를 세조 대에 식례를 정하면서 비로소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세조는 특히 세출 재정을 표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조의 재정 정책에 이바지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이가 조석문이다. 호조판서로서 회계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설치했던 탁지사로 임명되었다. 세조는 경제 장관으로서 그의 역량을 높이 샀다. 조석문은 호조판서로 7~8년 재직했는데, 국가 경비를 검약하는 걸 자신의 주된 임무로 삼았다. 세조는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호조의 계차는 다시 살펴보지 않을 정도로 신임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세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잔인하다 할 만큼 냉정하다. “세조의 본질은 피의 군주였다. 이 원죄를 넘어서기 위해 세조는 진력했다. 세조가 이룬 성과는 그에게서 진동하는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한 정치적 함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평가와 함께 재위 말년에 있었던 ‘탐주’라는 사례 하나가 마치 지금의 정치 상황을 우화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는 재위 12년에 사관을 광화문 밖으로 보내 능히 아뢸 수 없었던 민간의 이야기를 듣도록 했다. 그리고 사관의 보고를 받고 친히 조처했다.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을 백성이 관리의 불법을 고소할 수 있게 했다. 선의와 달리 무고가 빈번해지자 이에 회의를 느낀 세조는 2년 만에 ‘탐주’를 포기했다. (1466년 6월~1468년 6월) 민간의 원통함을 직접 듣고 풀어주려 했던 선의의 제도가 부작용으로 폐지된 것이다.” 세조는 재위 14년이었던 1468년 9월, 향년 5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7월에 있었던 선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차례를 어기고 외람되이 왕이 되어 백성들의 원구가 되었다”며 자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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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군주평전이다. 성종은 조선 건국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왕위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성종은 1392년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1398년까지 왕위에 있었고, 이후 정종이 2년 남짓 왕을 하다가 태종 이방원에게 양위한다. 1418년까지 다스린 태종이 다시 아들 세종에게 양위를 하게 된다. 1418~1450년까지 세종의 치세가 시작된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39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붕어하면서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라 그의 숙부인 세조(수양대군)에게 보위를 빼앗기게 된다. 세조는 13년 남짓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다. 그의 맏아들 도원군은 20세에 요절한다. (후에 성종이 즉위하면서 덕종에 추존) 둘째 아들 예종이 즉위하지만 예종은 1년 남짓 왕위에 올라 있다 죽게된다. 세조의 두 아들은 결국 20대 젊은 나이에 모두 죽게 되는 것이다. 도원군에게는 월산대군, 잘산군 이렇게 2명의 아들이 있었고, 예종에게는 제안대군이 있었다.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 윤씨는 도원군의 차남인 성종을 왕위에 올린다. 성종은 사실 왕위 계승 순위에서 비교적 멀리 있었으나, 억세게 운이 좋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흔히 성종을 조선의 태평을 즐긴 왕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훈구와 사림의 태동 속에서 그 어떤 왕보다 정치력이 요구되는 왕이었다. 성종은 왕위계승 순위에서 멀리 있어 미쳐 제왕학을 익히지도 못한 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경국대전』 반포로 국정 운영의 틀을 제도화하고, 수많은 전적을 간행했으며, ‘효치’와 ‘교화’를 통치 이념으로 조선 전기의 성세를 이룩하는 치적을 쌓았다. 그 바탕은 그 자신의 호학과 왕으로 중요한 언론의 활성화와 활용이었다.
성종은 훈구 세력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할머니 정희왕후가 바로 훈구파의 중심이었고, 훈구파의 힘으로 옹립된 성종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성종대에 고려말 신진사대부들 중 한 일파인 은거한 사림이 대거 조정으로 진출한다. 김종직 등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조선의 정치 주도권을 놓고 훈구파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 성종은 그의 탁월한 정치력으로 조선의 평화를 유지한 것이었다.
성종의 구체적 시책도 볼 만하지만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면서도 기득권과 신진세력 간의 사생결단을 피하고 정치적 통합을 유지한 ‘교화의 정치’를 오늘날 본받을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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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과연 폭군이었는가 아니면 명순이었는가 라는 무던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세조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위해 구입을 하였다. 흔히 쿠데타를 통하여 정권을 착취한 왕이 자신의 취약한 왕권을 어떻게 쟁취하였는가라는 관점에서 대부분의 세조 관련책이 이야기를 전개하는반면 그가 이룬 업적 특히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세조가 이룩한 업적에 관하여 조금은 균형감을 갖춘 역사논평서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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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잇는 태종, 호불호가 참으로 많이 갈리는 태종 이방원, 조선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왕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혓던 폭군의 이미지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조선 세번째왕, 그를 조금더 공부하고 싶어서 그만큼 흥미가 있는 인물이라서 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을 통하여 이전의 모랐던 태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잇겠지만 한 사건을 두고 다른 각도에서 보는 역사가의 안목을 기대해 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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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수행평가때문에 급히 구매하여 읽어보라 했건만 너무 어려워했어요. 제목이 멋있어서 이 책으로 정했다는데 내용은 어휘력 딸리는 우리 고등학생이 읽기 어렵네요. 읽다가 계속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는데 제가 봐도 일반 독자를 위해 풀어쓴 쉬운 책은 절대 아니에요. 전문가들끼리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대로 실린 건가 싶었어요. 아들보다야 한자어를 많이 아는 저는 읽어보니 역사도 좋아하고 해서 그럭저럭 읽었고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재밌을 것도 같아요. 배경지식도 좀 있는 사람에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