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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이름만으로도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어서 그녀의 책을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친구에게 추천을 받았을 때는 엄마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었다.해설에 있던 저자의 의도를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 그런 죽음이 있기나 한걸까? 이 제목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해야할 것같다. 혼자 살고 있던 엄마가 집에서 넘어져 대퇴골이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몬. 그건 회복가능한 것이라 맘을 놓았는데 검사결과 암이 발견되었다. 수술은 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엄마에게는 복막염 수술을 했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해두었는데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시몬은 엄마와 어릴 때부터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엄마가'난 네가 무서워'라고 말할 정도로. 소원한 관계였던 엄마의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시몬은 기억 속에 있는 엄마의 모습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엄마의 삶을 바라보면서 화해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시몬과 같은 마음이 되어 엄마를 떠올렸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집안에서는 쇼파와 화장실만을 오가시고, 치매가 시작되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잊어버리셔서 실수를 하신다. 밖에 나갈 때는 휠체어를 가지고 나가야한다. 큰 병은 없지만 생활 범위가 너무 좁고, 단조로운 생활밖에 되지 않아서 보고 있으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엄마를 케어하면서 노년의 삶,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소설은 보부아르의 자전적인 소설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엄마에게서는 삶을,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으로는 죽음을, 그리고 엄마와 딸이 화해의 과정을 보면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다. 소설 초반에 내가 평소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문장을 만났다.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 -p19 죽음 이후는 어차피 모를테니 두렵지 않지만, 그 과정이 힘들지 않았으면하는 생각을 한다. 병이 육체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어 힘들었다.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저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하는걸까? 그 고통을 보고 있는 딸들은 안락사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다. 하지만, 모르핀을 맞고 오랜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오늘 하루를 살지 못했구나. 며칠을 버리게 된 셈이잖니.'라고 말했다. 엄마에게 매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엄마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를 대신해서 나는 체념하지 않고 있었다. -p119 앞서 완전히 늙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책장 하나 하나를 알뜰히 넘겨야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 시몬은 엄마 곁에서 엄마의 삶에 대해서 되짚어봤다.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엄마등, 동생과 자신과의 관계등. 각 생의 단계에서 맞닥뜨린 엄마의 모습들은 많은 부분 부정적이었다. 내게는 권리가 있다. 우리를 짜증나게 했던 이 말은 사실 엄마에게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엄마의 욕망이 그 자체로는 인정받지 못해 왔다는 걸 보여 주는 말인 셈이었다. 53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과연 내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심코 하는 말이 나약함, 열등감, 아니면 반대로 자신감, 용기등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테니까. 시몬에게 부정적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시몬을 향한 사랑의 따스함도 있었음을, 삶에 대한 열정도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 환자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오랫동안 속에 담아 둔 후회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된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르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 너무나 닮은 탓에 끊어진 대화를 다시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엄마와 대화를 다시 나누게 된 것이다. 엄마가 몇가지 단순한 말과 행동 속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완전히 식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엄마를 향한 내 오랜 애정이 되살아났다. -p109 죽음의 형태는 여러가지겠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길 바라게 되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서먹서먹하게 관계를 이어오던 모녀가 함께 했던 30여일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 보부아르는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을 이루었을 것같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생각났다. 문학에서 죽음을 많이 다루긴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작품이었다. 이 소설에서 그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생을, 죽음을 이렇게 맞닥뜨리고 반추해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다시 읽게 될 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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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에 대해서라면 좀 복잡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심 한나 아렌트랑 보부아르를 내 안에서 경쟁시켜놓고서는 단번에 한나 아렌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제2의 성》이란 엄청난 책을 써낸 것도 보부아르고, 지금도 나는 내가 읽은 그 책으로부터 많은 인용문을 가져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지 않은 한나 아렌트 쪽을 너무나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왜이렇게 좋은걸까. 반면에, 왜 이 위대한 보부아르에 대해서라면 한나 아렌트만큼 좋아하지 않는걸까?
그런데 어젯밤 자기 전에 이 책을 마저 읽으면서 보부아르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 책을 통해 보부아르의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에 대한 생각과 어머니에 대한 생각, 그 어머니를 이름으로 호명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되살려놓은 것까지, 그 사유가 깊어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래도 날 안좋아할 수 있니?"
별 수없이,아 나는 좋아해, 좋아합니다, 다 읽을게요 보부아르 님. 했다. 한나 아렌트 책을 한 권씩 모으자고 생각했지만 보부아르에 대해서는 아직 그 마음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별 다섯을 주고 책장을 덮으면서 다 읽자, 보부아르 다 읽자, 하게된 거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해서 사두고서도 여태 미뤄뒀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것은 상상만 해도 벌써 슬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여동생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언니 시간이 지나면 엄마도 돌아가실텐데 그 때 어떡하지, 라고 동생이 물을라 치면, 야, 상상만 해도 벌써 다리가 후달리고 눈물이 나와, 했던 터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려고 사두었으면서도 읽지 말까, 종내는 울어버리지 않을까 했던 거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받게될 감정의 격함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있을까, 했던 것.
이 책속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엄마와 딸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그 삶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뒤에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이 책의 의미는 그부분에 더 있는것 같은데, 사실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암으로 육체적 고통에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수술로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더 옳은 일이었을까. 그것이 어머니에게 과연 더 나은 일이었을까. 어머니는 저렇게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돌아가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런 후회를 하며 의사들에게 이 생명 연장이 의미가 있냐 따져물어도 의사들은 이것이 본인들의 할 일이라고 답하는 거다. 이런 고통속에 어머니의 삶을 연장하는 것은 괴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며 오늘 하루를 또 벌었다고 즐거워하는, 이토록이나 삶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노라면, 어쩌면 이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거다. 아프면서도 하루라도 더 살아있는 것, 어쩌면 그게 더 나은 것일까. 게다가 엄마를 잃지 않은 나로서의 기쁨도 있다. 고통속에, 그 고통이 주는 두려움속에 살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닌가 싶으면서도 막상 살아있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나에게도 기쁜 것. 이런 일을 대체 어떻게, 누가, 무엇이 옳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엄마가 이 상황에 놓인다면 무엇을 원할까. 만약 이렇게나 통증이 심해서 비명을 질러야 한다면 그러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생명을 연장하지 않는 쪽을 택해야 하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이 하루라도 더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닌가. 당사자를 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안락사인가 수술로 인한 생명연장인가. 나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내 이야기가 된다. 당사자로서의 나, 이렇게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게 노년의 나라면. 나에게 닥칠 미래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다시 생각하게 되는거다. 나는 무엇을 원할까. 너무 아프니 나를 이대로 죽도록 놓아달라 할까, 죽음으로써 나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길 바랄까, 아니면 삶을 하루라도 더 연장시켜달라고, 나는 이렇게 하루를 또 하루를 살아가고 싶다고 울부짖을까. 어쩌면 나는 그 고통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삶을 사랑한다. 나는 삶을 더 연장하고 싶다. 할 수 있는 최대로 연장해 어떻게든 부여잡고 싶다.
가끔은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일상이 답답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가끔은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내가 혼자이길 원하기도 한다. 몇 년후에는 따로 사는 것을 계획하고 있지만 지금은 함께 살고 있으면서 거기에서 오는 좋은점과 나쁜점들을 두루 겪고 있다. 보부아르의 책을 읽고 결국 보부아르 어머님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지금 엄마 옆에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그토록 신앙이 깊었던 보부아르의 어머님이 죽음 앞에서 오히려 종교를 찾지 않은 것은 놀랍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어도 죽음 앞에서 더러 종교인이 된다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여러차례 들은바, 이해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오히려 신앙과 멀어진다니. 거기에 대한 보부아르의 생각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글로 써내는 보부아르가 진짜 자지러지게 좋았다.
나는 신앙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에게 종교는 삶의 버팀목이자 핵심이었다. 엄마의 검은색 서랍에서 찾아낸 문서를 통해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엄마가 기도를 기계적으로 하는 단조로운 행위라고 생각했다면, 낱말 맞추기보다 묵주신공이 더 피곤한 일이라고 느끼진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기도를 회피했던 건 오히려 그녀가 기도를 집중력과 성찰을 요하는 일종의 수련, 즉 영혼을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신에게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저를 치유해 주소서. 하지만 당신이 뜻하신 바라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실해야 하는 기도의 순간에 엄마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권리를 자신에게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엄마는 침묵을 택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인자하시니"라고말하면서.
나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답했다. 당신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종교는 나나 어머니 모두에게 죽고 나서 거둘 성공에 대한 희망이 될 수 없었다. 천국에서든 지상에서든 영원불멸하길 꿈꾸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p.133-134
다 읽고는 내 생각보다 슬픔이 크진 않았는데 두려움이 크게 찾아왔다. 자기 전에 읽었는데 다 읽고 불을 끄고 눈을 감아서도 두려웠다. 죽음이 나에게 닥칠 미래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두려웠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내 손으로 내 가슴을 쓸어내려준다. 다 괜찮다, 다 괜찮다, 괜찮아. 평안해질 것이다. 그래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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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장례식에 다녀왔다. 돌아가신 분은 103세. 이 나이까지 사신 분을 처음 봤고, 최근에 장례식에 다녀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상황에 장례식은 조촐했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기존에 경험했던 장례식의 분위기와 너무 달랐던 거였다. 죽은 이를 보내는 자식들의 나이가 보통 70~80세.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이 정도 나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지지 않았던가. 실제로 죽은 이의 가장 큰 자식은 오래전에 먼저 하늘로 갔다고 한다. 103세의 부모를 보내는 70~80대 자식들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래 사셨다면서 슬픔을 거두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를 보내는 일이라도, 같이 늙고 죽어가는 나이의 자식이라도, 부모의 죽음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감정은 사라지고, 오직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슬픈 건, 슬픈 거다.
“돌아가셨어.” 우리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시신의 모습을 한 존재가 엄마 대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신의 손과 이마는 차가웠다. 그건 여전히 엄마였지만, 앞으로 엄마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둘렀단 가제 천이 턱을 받치고 있었다. (124페이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글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겪을 일이고,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금,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쨌든 슬픔이고, 그래서 슬퍼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글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이 마냥 슬픔으로 채워진 게 아니라, 그 기회로 한 여자의 생을 더듬고 육체의 죽음을 바라보며,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를 본다. 죽어가는 엄마의 옆에 머물면서 모녀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이제야 엄마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1963년의 어느 날, 시몬은 로마의 한 호텔에서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 겨우 전화기까지 간 어머니는 친구에게 전화하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다. 넘어져서 다쳤으니 병원 생활은 누워있는 것이 전부다. 곧 시몬과 여동생이 왔고, 자매는 교대로 엄마의 곁을 지킨다. 넘어져서 다친 것을 치료하려고 간 병원에서 어머니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엄마가 욕실에서 넘어지지 않았다면 암에 걸린 것도 몰랐을 테니, 오히려 넘어진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병 앞에서도 다행인 건 없으리라. 이제 수술이라는 중요한 선택이 남았다. 수술하면 한 달 정도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고 하고. 근데 나는 여기서 참 궁금하더라. 수술하고 한 달을 더 사는 것과 수술하지 않고 곧 죽는다는 시간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곧’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정말 고민이 되더라는. 그래서 다시 이 상황에 나를 대입하면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나는 이 상황에서, 엄마의 죽음과 수술을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자매는 어머니에게 복막염 수술이라고 말하고 암 수술에 동의한다. 아, 여기서 또 궁금해지네. 엄마는 정말 자기가 복막염 수술을 했다고 믿었을까?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병을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른 척한 건 아닐까? 어쨌든 시몬의 어머니는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듯 보이다가 통증이 심해지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듯하면서도 결국 나아지지 않는 쪽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어느 날은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문병에 담소를 나누다가도 귀찮아하고, 아주 오래전 기억을 꺼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으레 그렇듯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거리를 좁힌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이 이제 조금씩 보이는 일을 여기서도 듣는다. 아, 인간은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왜 항상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이 이렇게도 많은 거냐고. 아, 쫌. 그냥 그때 그 순간에 바로 알게 해주면 안 되나? 매번 뒤늦게 알아채는 것들 때문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괴롭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106페이지)
원래 이 작가가 이렇게 글을 쓰는가 싶을 정도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을 차분하게 적은 느낌에 놀랍기도 했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완독한 게 없기에 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비교 대상이 없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애매한 분위기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읽기에는 충분했다. 더불어 내가 경험할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엄마는 어제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오셔서 1차보다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아, 이러다가 뉴스에서나 보던 심각한 부작용 사례를 내가 눈앞에서 보는 건 아닐까 걱정하다가, 마침 읽고 있던 이 책을 생각하니 또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고. 원래 병원행이 잦았던 엄마였지만, 최근 반년 사이에 병원 생활은 사람을 너무 지치게 했기에 다시 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담기 시작했던 많은 것이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 문장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마 자신의 경험이 가장 정확한 죽음의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거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앞에서 시들시들 누워계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문장의 여러 곳을 곱씹었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시간에야 비로소 화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게 또 다른 슬픔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거북했던 딸의 시선은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온전히 받아들인다. 외면했던 장면들을 되살리고 그 외면의 일부였던 어머니를 소환하며 화해한다. 그걸 화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어쩌면 작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또 다른 시선으로 딸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그동안 한 번도 딸을 외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다 알게 되지는 못할 테니까.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8페이지)
어머니의 늙은 육체를 보는 것도 어색하고 어렵기 그지없었다. 늙어가는 게 어디 육체의 한 군데뿐이겠냐마는, 언제 봐도 적응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작가의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그대로 전해진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엄마랑 목욕탕에 가는데, 예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일 때마다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등을 밀어드리는데, 갈수록 늘어지는 근육에 타올을 낀 내 손이 다른 방향으로 밀릴 때마다, 혹시나 살이 아프지 않을까 물어보면서 조심스럽게 등을 미는 일을 계속하는 게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 작가가 적어낸 그 과정을 보는 것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엄마의 몸은 어느 순간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을 아니까 말이다. 그 어떤 말을 해도 경험을 능가하는 감정과 표현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빨리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완벽하게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그 공감에 바탕에 되는 건 슬픔일 테니.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이 시간 동안 죽음이 우리 곁의 일상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민낯을 드러낸다.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어머니를 곁에서 지킨 가족들이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도 알았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누구라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지만, 외부에서 기인한 것들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의 장례식 예행연습을 하는 거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도 가족을, 어머니를 보내는 일에 많은 사유가 담겨 있었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페이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아직 엄마가 내 옆에 있을 때 시간을 좀 더 같이 보내야지 하는 한 가지 바람만이 남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도, 앞집 아저씨 뒷말을 하는 의미 없는 수다라도, 아픈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라도. 작가의 말처럼,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의 엄마 역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노인들이 어서 죽어야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자기는 죽기 싫다고, 이제야 좀 숨 쉴만한데 왜 죽냐고, 자식들하고 손주들하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나는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어서 정말 고맙다. 다행이다. 아마 엄마가 내 앞에서 입버릇처럼 어서 죽어야지 한다면 막 화를 냈겠지. 듣기 싫다고.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화내는 것밖에는 없어서.
작가가 써 내려간 죽음의 정의 같은 문장들은 언젠가 내가 겪을 순간을 준비하는 것만 같다. 병원 생활이 더 잦아지는 엄마를 보는 일은 괴롭고, 그때마다 혹시 모를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사람도 없다. 그러니 103세 노인의 죽음이 호상이라며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은 틀렸다. 죽음은 죽음이고, 어떤 죽음도 평범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 나이는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닥친 사고일 뿐이라는 작가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저, 우리에게 다가온 일상의 불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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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엄마를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라고 말했을 때, 그건 내가 했던 다른 수많은 말처럼 빈말에 불과했다.
* 단정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리뷰같고-
*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글을 쓰고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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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간호를 직접 해본 건 아니지만 병간호를 하는 사람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읽는 내내 어딘가 찔리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람과 보부아르의 상태가 너무 닮아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속마음을 자세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이 책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
| 살고 있을 때는 잊기 가장 쉬운 게 죽음 아닐까. 시몬 드 보부아르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엄마의 죽음을 앞둔 자전적 소설. 첫 장부터 너무나 슬펐다. 너무나 공감되었다. 이렇게 사실적일 수가 있을까. 두고두고 읽으면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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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워낙 유명한 작가라서 익히 알고있었지만, 출간 작품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책을 다음으로 제 2의 성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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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도 엄마와 거리감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너무 사랑하는 엄마를 상실한 슬픔을 쓴 책이었다면 나와 거리감을 느꼈을 것 같다. 거리감이 있었으나 엄마의 죽음을 앞두고 간병하면서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이 아주 편안한 죽음이란 작가의 입장에서 편안한 죽음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갑작스럽고 충격이란 의미의 표현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죽음이란 존재의 형태가 변하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 자체는 당사자에게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엄마의 존재가 돌아가시고 나면 자잘한 갈등과 잘못들은 다 사라지고 그냥 엄마만 남는다고 한다. 나를 낳고 길러주고 사랑해준 엄마라는 기억만 남는다고. 그래서 엄마는 돌아가시고 나면 신화로 존재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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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에 대한 글이다. 생각보다 짧지만 읽고 나서 매우 착잡해진다.. 주인공은 아픈 엄마를 갑자기 보내고 싶지 않아서 수술 후 약 한달동안 엄마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젊은 시절 내내 나에게 고통을 준 엄마가 미웠던 주인공 엄마와 딸들의 관계는 기묘하다.. 한국은 가족중심문화가 심해서 더 그런면이 부각되지만 외국도 크게 다르지 않나보다...엄마들은 아들보다 딸들에게 더 기대하고 자신을 반영한다. 성인이 되어도 완전한 정신적인 독립이 불가능한 걸까 하지만 주인공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된다. 엄마의 나약함과 강함 그 모든 걸 사랑할 수 있게 된 주인공 90이 넘으면 호상이라고 하지만 60이 넘은 아줌마에게도 엄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나 또한 가족의 죽음을 겪어봤지만 갑작스러움 죽음 앞에 다들 의문만이 남는다.. 게다가 엄마의 죽음은 생각만해도 견딜 수 없는데.. 어떻게 대비하고 견뎌야 하는지.. 여러가지 생각이 든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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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는 이 표지를 무심하게 넘겼는데, 책을 다 읽고는 이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부모 자식간의 서사는 충분히 많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그렇듯 어머니와 딸 사이도 갈등과 대립, 애증과 사랑이 범벅이 된 관계이기 쉽다. 대개 아들들이 어머니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모성애'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면, 같은 여성으로서 딸들이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좀더 복잡미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시몬과 어머니의 관계 역시 그렇다.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상류층 집에서 자랐고, 충분히 교육을 받은 후 지성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 사료된다. 닮고 싶은 아버지(혹은 남성의 세계)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이분법 속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병든 어머니와 어머니를 간호하게 된 딸의 스토리라고 하면, 갈등을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다소 진부하고 신파적인 스토리를 생각하기 마련일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보부아르의 저작답게, 그런 식의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이 책은 죽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자, 보부아르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여성의 자전적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보부아르의 입장에서 어머니는 여성성, 즉 열등하고 무능력한 여성성을 대변하는 부정적인 존재였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교양과 지식,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어머니뿐 아니라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적인 세계와 화해하게 된다. 어머니가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 역시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내적으로 갈등하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보부아르가 어머니에게 건넨 사과는, 자신의 안에 내재했던 여성 혐오에 대한 자기 반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보부아르의 인식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쪽)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피투성(thrownness , 被投性)'이라는 개념이 있다.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개념인데,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피투성이란 인간은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자각하게 되는데, 특히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즉 자신이 언젠가는 죽게 되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되면서 피투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보부아르의 사유와 하이데거의 '피투성'과 '기투' 개념까지 모두 감안한다면, 죽음을 어떻게 대면하고, 역으로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다시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보부아르가 어머니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들과 화해하고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은 보부아르가 사진 속 아이나 어머니를 극복하고자 했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사진 속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나이가 아니면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부모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또 그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사유나 이해가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보자면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매우 역설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책의 제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 죽음이 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죽음이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