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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소설을 읽었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일련의 사태로 수상을 거부한 황정은 작가의 단편, 「양의 미래」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절판되어 검색만 될 뿐 구입은 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뜨겁다. 특히나 대상 수상작이었던 「양의 미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뜨겁다. 내가 지금껏 황정은의 작품을 읽으며 무엇을 느꼈었나. 언제나 담백함을 먼저 느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데 가독성이 있어 읽는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게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초기 황정은은 어떤지 몰라도 지금의 황정은은 그런 느낌이다.
작품을 읽을 때 한 가지 질문에만 집중했다. 제목에서 말하는 '양'은 대체 어떤 '양'일까? 아마 다양한 의미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명확하지 않은 그 의미들이 빚어내는 의미가 바로 '양'이 가진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단순히 물건의 분량이나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라고 생각했었다. 서점에서 일하는 '내'가 월말정산과 함께 재고정리를 할 때, 마트의 캐셔로 일하며 엄청난 양의 물건과 엄청냔 양의 사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길 때, 화단에서 밥을 먹고 자란 고양이들이 새끼를 배면 다시 화단으로 돌아와 대를 바꿔가며 어딘가로 갔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까지. 이 소설 속에는 사실 다양한 '양(수량과 부피)'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의미라고는 여겨지지 않는게 그것들에게 미래가 존재할까, 하는 질문에 딱히 할 대답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아랫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양'을 붙이는 것. 그러니까, 진주양, 같은 것.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작품 내에서 진주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살아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수많은 질문들은 진주양의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도 그럴듯 하지만 또 다른 '양'을 생각해본다. 행동이나 모양새, 의도를 나타내는 의존명사로써의 '양'을 말이다.
진주의 실종 이후 '나'는 어떤 모습을 취했나. 어떤 행동을 취했나. 어떤 생각을 했나. 작품 속의 '내'가 어떤 모양이나 행동을 취했는지 우리는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극적인 자세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그 소극적인 자세를 욕 할 권리가 있나, 없나.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사건에 대해 취하는 행동양태는 「양의 미래」의 화자인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면 그 자리를 떠나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작품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서 크게 다가오지 않던 사람들의 영원한 떠남은 현실에서는 '무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않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무책임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자신이 떠안기 힘든 문제면 그 자리를 피하면 단지 그뿐이고, 내게 득이 되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뿐이고, 부담스럽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되돌아가지 않으면 그뿐 아닌가. 「양의 미래」에서 '나'와 '호재'와 '재오'와 서점을 찾은 다른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그랬듯이.
이 단편소설을 가로지르는 주된 사건이라고 한다면 '진주라는 여자아이가 서점 부근에서 실종되었던 것'이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가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이 너무 과하지 않게 드러나 있어서 훨씬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나'가 감추고 있었던 그 고요한 분노는 마지막으로 향할 수록 점점 드러나지만 어느 한 순간에 크게 터지지는 않는다. 그 역시 자연스럽게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훨씬 흥미롭다. 괜찮지 않을까, 이 작품. 습작을 하기에.
터널이 있는 것과 터널이 없는 것. 요즘도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어느 쪽을 더 두렵게 여겼는지를 생각해보고는 한다. 나무 벽의 구멍을 통해 검은 공동을 확인하는 것과 진물 같은 곰팡이로 덮인 또 다른 벽을 확인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일일까. 나는 그걸 알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냥 망치를 쥔 채로 벽 앞에 서 있다가 내 도시락이 놓인 박스 곁으로 돌아갔다. 망치는 바닥에 내려놓고 도시락을 무릎에 올린 뒤 천천히 그걸 먹었다.
아줌마 어쩌라고요.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 지 알아?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나는 나와 보지도 못해요. 종일 햇빛도 받지 못하고 지하에서, 네? 그런데 아줌마는 왜 여기서 이래요. 재수 없게 왜 하필 여기에서요. 내게 뭘 했느냐고 묻지 마세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 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나는 삼 년 전에 그 집을 나왔다. 짐을 꾸릴 때 아버지의 책 몇 권을 가방에 넣었따. 최근에 그 가운데 한 권인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읽었따. 비참한 가난에 대한 글이었다. 내가 아는 가난보다도 더 가난한 가난. 나는 최근 자연사와 병사와 사고사에 관해 두서없이 생각 할 때가 많은데 조지 오웰의 에세이에서 읽은 것처럼, 가난하고 돌보아줄 인연 없는 늙은 자로서 병들어 죽어가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있을까, 생각한다. 오웰은 이런 죽음을 두고 여태껏 인류가 발명한 어느 무기도 그런 형태의 자연사만큼 사람을 강력하게 비참하게 만든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늙어 죽는 것을 소망한 것이 아니고 길 가다 우연하게, 느닷업싱 죽고 싶다고 써두었다. 나는 그의 문장 곁에 그렇다, 라고 적은 뒤 연필 끝으로 종이를 꾹꾹 누르고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어. 나는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고 그 문장들은 내가 적은 바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난 뒤에도, 어쩌면 백 년이 지난 뒤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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