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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중국 소설을 읽는 맛이 남다른 것은 그 공간을 상상하며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국 사람들조차 중국 지방을 나처럼 다양하게 경험해 본 이가 많지 않다. 그리고 위화의 소설은 그 시공간을 누구보다 잘 기억나게 하는 탁월한 글솜씨가 있다. 위화의 소설적 공간은 그의 고향인 항저우가 중심이다. 그리고 이번 소설 ‘원청’도 황허 북쪽 산동성 한 마을과 창지앙 아래 항저우나 쑤저우 인근 한 마을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시진(溪鎭)이 실제 지명은 아니니 굳이 상상한다면 쿤산 옆에 수향(水鄕)인 진시전(錦溪鎭) 정도로 생각하면 맞을 것 같다. 소설 속 다른 인근 도시인 선뎬(沈店)도 저우주왕(周庄)이니 공간적으로도 맞는 느낌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쑤저우, 저우주왕이나 통리, 우전, 시탕, 샤오싱 등 수향이 주는 공간적 느낌을 되살렸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이 소설의 배경은 위화의 소설 가운데 가장 멀리 갔다. ‘살아간다는 것’과 ‘허삼관 매혈기’가 국공내전 시기부터 문혁까지를, ‘형제’가 개혁 개방이후를, ‘제7일’은 최근 부동산 개발 열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청말민국 시대다. 시기로 본다면 중국 역사에서 어느 시기보다 피가 난무하던 시기다. 태평천국의 난이 지난 후 피폐해진 지역은 의화단 운동(1900년 전후)으로 인해 혼돈에 들어가고 지역의 치안은 엉망이 된다. 수호지의 시대가 된 듯 토비(土匪)들이 날뛰고, 사람들은 정처를 찾지 못한다. 명분을 가지면 혁명군이지만, 이들 역시 토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은 이 시대를 살았던 린샹푸의 삶을 중심으로 구이민, 천융량, 샤오메이의 삶을 배치하면서 펼쳐진다. 린샹푸는 황허 북쪽의 농촌에서 살아가는 선량한 지식인이자 지주다.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400무의 전답이 있는 부자고, 가구를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하지만 여복은 없어서 스물네살까지 혼자로 지내는데, 어느날 아창과 샤오메이라는 젊은 남녀가 찾아오면서 그의 삶은 바뀐다. 오빠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창은 샤오메이를 린샹푸에게 맡기고 떠나는데, 젊은 남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즐거움도 잠시, 어느날 샤오메이는 자기집에 보물인 17개의 큰 금덩이 가운데 7개를 갖고 사라진다.
린샹푸는 절망에 빠져서 자책한다. 그런데 그녀를 조금 잊을 무렵 샤오메이가 출산을 앞둔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금덩이는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린샹푸의 아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심성이 착한 린샹푸는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고, 혼례까지 올리지만, 아이를 낳고 한달여가 더 지난 어느날 다시 샤오메이는 사라져 버린다. 린은 결국 재산을 정리해 종이 어음인 은표로 바꾸고, 형제 같이 지내던 톈씨 형제들에게 집을 맡긴 채, 젖먹이 딸을 안은 채, 샤오메이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아창이 말한 그들의 고향은 원청(文城)이다. 처음 듣는 지명이지만 글자 조합이 뻔해서 다분히 있는 도시로 생각했지만 원청은 바이두에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지명이었다. 린샹푸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남매가 쓰던 어투와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다는 지리적 특성이다.
황허 건너는 배에 태울 수 없어, 가족 같은 당나귀 마저 팔고, 린샹푸는 드디어 남매의 어투와 비슷한 시진에 도착한다. 거기에 돌풍까지 만난 린샹푸는 아이 우는 집을 찾아 딸에게 동냥젓을 먹이며 곡절 끝에 이곳에 정착한다. 다행히 어떤 사연인지 고향 인근에서 내려온 천융량과 목공소를 차리고, 가져온 은표를 바탕으로 이 근방에서 1000무의 땅을 가진 지주이자 목공소 사장이 된다. 그렇지만 린샹푸의 모든 촉각은 딸의 엄마인 샤오메이의 행방이다. 하지만 남매인지 부부인지 모를 두 사람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딸 린바이자는 서서히 엄마를 닮은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해 간다.
위화 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 소설 속 인물들은 각각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 좀 허당인 듯한 시진의 중심인물 구이민은 물론이고 바이자와 정혼하는 큰 아들 구퉁롄은 물론 천융량의 아내와 자식, 고향에 남기고 온 톈씨 집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토비가 된 스님도 그렇다. 이들을 둘러싼 가장 큰 이미지는 선함이다. 자신을 아껴준 사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고, 신뢰를 지켜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든 이가 그런 것이 아니다. 토비의 우두머리 장도끼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잔악하게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을 납치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한다. 이에 비해 선량한 사람들은 힘은 없지만 때로 뭉치면서 그들을 대항한다.
책의 후반에는 외전으로 아창과 샤오메이의 삶에 관해 쓴다. 역시 근대를 살아가는 부부로 전통적인 가족관계와 변화하는 도시의 흐름 속을 잠시 경험한 이 부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경성으로 향하던 길에 린샹푸와 얽히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얽힘에는 큰 사악함도 배신도 있지 않다. 어찌어찌하다보니 그렇게 얽혔고, 피치못한 관계들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중국 특강을 할 때, 중국을 알고 싶다면 중국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유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페이소스와 유머를 볼 수 있고, 중국 역사를 알 수 있고, 각 지역별 사람들의 습관과 문화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인의 천성을 읽는 데 소설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장 전형적인 작가가 위화라고 할 수 있고, 이 소설도 그런 매력을 충분히 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반가운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털끝 같은 오차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지요”(385페이지)라는 문구다. 소설의 원문은 모르지만 ‘毫裏有差 天地懸隔’이라는 송나라 시인이자 스님인 석변의 게(偈)인 이 말을 나는 우리가 중국을 잘못 이해하는 순간 적지 않은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하는데 쓴다. 이 소설에서는 장도끼와 천융량의 대화에서 사용했다. 아마도 성인과 야차의 차이도 작은 곳에서 시작했다는 은유를 담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때로는 가슴이 메이고, 쓸어 내리는 일이 많았다. 소설은 가슴 아프게 적지 않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다만 작가는 다음을 생각하면서 쓴 듯도 하다. 린샹푸의 딸 린바이자나 구이민의 아들, 딸들, 천융량의 아들, 딸들을 상하이나 셴뎬 등으로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들이 ‘살아간다는 것’의 부꾸이 되고, 허삼관이 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위화다움을 느끼는 행복한 독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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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작품은 가능한 찾아서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장편소설 [형제]를 통해서였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했던 문화대혁명의 시기와 인간을 온갖 욕망의 포로로 만들었던 개방 이후 시기를 살아온 형제간의 대비를 통해 현대 중국의 문제점을 파헤친, 그 작품을 읽으면서 위화라는 작가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그 후 [허삼관 매혈기]와 [제7일]을 읽은 것 같은데 블로그에 리뷰가 있는 것은 [제7일] 뿐이다. 아마 [형제]와 [허삼관 매혈기]는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에 읽어서 그렇지 싶다. 아무튼 위화의 작품들은 읽고 난 후 요란스럽고 거창하기보다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는 느낌을 갖고 있던터라, 이 책 [원청] 또한 자연스레 읽게 되었다.
책의 제목인 ‘원청’은 미지의 도시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인 린샹푸에게는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자신과 결혼했던 여인 샤오메이가 살았다던 도시, 원청. 어린 딸을 위해서라도 샤오메이를 찾으려면 그 도시로 가야만 했다. 소설은 그렇게 린샹푸가 돌도 안된 딸을 안고 원청이라는 미지의 도시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 초기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위화는 천재지변과 환란의 한 가운데서 평범한 인간인 린샹푸를 통해 당시 인간군상들의 이러저러한 삶의 모습을 그려낸다.
우박이 떨어지고, 회오리바람이 불고, 폭설이 내리는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금 삶을 살아간다. 남쪽으로 길을 떠나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는 때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딸아이를 보면서 다시금 길을 재촉한다. 시진이라는 도시에 이르러 그 도시가 원청이라 생각한 린샹푸는 언젠가 샤오메이가 돌아오리라 믿고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작정하며 뿌리를 내린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전란은 그치지 않고 토비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토비가 되어 또 다른 사람들을 납치하고 몸값을 요구한다. 군벌은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고 인근 마을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는다. 시대의 변혁 앞에서 보통 인간들은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위화는 린샹푸와 천융량의 관계를 통해, 그리고 시장 상인회 회장인 구이민의 삶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천재지변과 환란의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 모두의 삶 속에서 흐르는 큰 줄기는 바로 꿋꿋함과 선(善)함이다. 그렇다고 모든 삶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북양군의 탐욕, 장도끼로 대표되는 토비의 잔혹함, 린바이자와 정혼한 구이민의 큰아들 구퉁녠의 야비함, 아창의 비루함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 대비된다. 위화는 소설 말미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배치하여 샤오메이와 아창의 삶을 보여준다.
원청은 잃어버린 도시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도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찾을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위화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며,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찾고 추측하고 조각을 맞춘다’(6쪽)라고 말한다. 바로 린샹푸가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의 가슴속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원청. 나 또한 린샹푸를 따라 그곳을 찾아가면서 그의 발길이 멈칫할 때마다 가슴을 졸이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기도 했다. 100집의 젖을 얻어 먹이며 키워서 딸의 이름을 ‘린바이자’라 지었다는 말에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자신만의 원청을 간직하고 있을게다. 비록 알지 못하고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찾아 떠나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다. 역시 위화라는 생각이 들기에 손색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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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나는, 일제강점기나 1950년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뿐일까? 만약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 혹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하지만 그 시대에도 살기는 살았을 것이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을 수도 있고, 양반이나 하인으로도 살았을 것이다. 몇 번 환생했을지 모르고,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만을 생각한다면,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일까? 이렇게 생각하지만, 나의 전생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태어났다면 결국에는 살았을 인생이라는 굴레.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의 청나라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는 1900년대는 환장의 대 파티였을 것이다. 부자로 태어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사는 게 퍽퍽하고 힘든 시기.
주인공 린샹푸. 그가 딸을 안고 시진이라는 곳에서 딸의 젖동냥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수양버들 같은 겸손함과 들판 같은 과묵함을 지닌 남자. 그는 400무의 전답을 가진 부자이고 가구를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스물 네 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아청과 샤오메이라는 남매가 찾아온다. 아청은 샤오메이를 린샹푸에게 부탁하고는 떠난다. 그러다 린샹푸와 샤오메이는 정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깐. 샤오메이가 린샹푸의 보물을 몇 개 가지고 사라진다.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쯤, 린샹푸 앞에 임신한 샤오메이가 나타난다. 마음 착한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받아들인다. 샤오메이는 예쁜 딸을 낳았지만, 출산한지 한 달 즈음 다시 사라져버린다. 이에 린샹푸는 아청이 말했던 원청이라는 곳으로 샤오메이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원청은 없었고, 린샹푸는 아청이나 샤오메이가 말한 가장 비슷한 시진이라는 곳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남매인지 부부인지 모를 샤오메이를 기다리며 목공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하는데.. 구아민, 천융량의 삶과 함께 린샹푸의 삶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샤오메이와 아청의 이야기도 덧붙인다.
내가,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살았더라면, 나도 린샹푸나 샤오메이처럼 그렇게 치열하고 정신없이 살았을까? 어떤 신념이나 사상을 가지고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갔을까? 훗날.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그 당시를 어떻게 살았을까? 우린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생겨날까? 어느 시대를 살든 치열하지 않은 인생은 없는 것 같다. 린샹푸의 인생이나 샤오메이의 인생 그리고 천융량의 인생을 보면 무섭고 두렵고 겁난다. 어떻게 이런 격변의 시대를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뒷부분으로 갈수록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그게 비단 중국뿐이었을까? 우리나라도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었으니까. 인간이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던 게 사람 아니었을까? 그리고 샤오메이의 이야기.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청이 아니라 린샹푸를 선택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낳은 딸을 키우지 못하고 선택한 인생이라는 것이 행복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그렇게, 아픈 선택을 했다면 차라리 행복하고 잘 살기나 할 것이지.
아직 삶과 죽음에 대해 배워야 할 게 많은 나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배운다고 그대로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화의 소설을 읽으며 그들의 삶을 따라가 본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이었을지도. 그리고 다시 내 주변을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고, 사랑함을,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내 삶에 고맙다. 인생이 매일 평탄한 길일 수도, 고속도로일 수도 없다. 그러면 또 어떠한가. 매 일이 가시밭길도 아니니 이 또한, 감사한 일 아닐까? 우리나라 작가나 일본 작가 혹은 유럽 작가나 미국 작가의 책은 곧잘 읽게 되지만 중국 작가의 책은 위화 작가 것 외에는 읽지 않는다. 허삼관 폐혈기, 인생, 제7일 이후 8년 만에 나온 소설. 6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위화 작가의 다른 책이 또 나오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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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허스트가 포름알데히드에 상어를 집어 넣고 고정 시킨 후 작품에 붙인 제목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이었다. 죽어있는 상어를 마주하고 있는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서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한때는 나를 죽일 수도 있던 존재가 이제는 죽음의 상징이 되어 눈앞에 있는 장면은 흡사 우리가 희망을 마주하고 있을 때와도 비슷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그 앞에서 가장 용감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원한 갈망과 우리의 인생을 몽땅 집어 삼킬 수 있는 위험한 욕구는 결국, 희망과 죽음이 항상 그 언저리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원청을 읽는 내내 독자는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인간의 운명, 평생 원하는 것을 갈구하면서도 당장이라도 끝나버리를 수 있는 삶의 모양새가 떠올라서 서글퍼진다. 위화는 한 인터뷰에서 원청에 대한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원청이 의미하는 건 희망,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린 모두 ‘원청’을 품고 살죠. 그것은 ‘아름다운 것’을 향한 욕망이고, 하나를 찾으면 더 아름다운 것을 바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끝내 찾지 못하겠지만, 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아름다움을 계속 만날 수 있죠.” 결국, 모든 인생은 하나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닌 그 '과정'에 답이 있음을 위화는 말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 전체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주제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된다. 3분의 2까지는 린샹푸의 삶을 보여주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시간을 처음으로 돌려 샤오메이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골의 지주였던 린샹푸는 '원청'이라는 곳에서 온 아창과 샤오메이라는 남매를 잠시 집에 살게 해준다. 얼마 후 오빠 아창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동생을 맡기고 떠난다. 남겨진 샤오메이와 린샹푸는 날을 거듭하면서 애틋한 감정이 생겨나고 운우지정을 나누는 사이까지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린샹푸 재산의 반을 가지고 사라져 버린다. 린샹푸는 실의에 빠져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데, 또 얼마 후 샤오메이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돌아온다. 그는 너무 화가 났지만 그녀를 이해하고 이번에야말로 결코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혼례까지 올린다. 하지만 결국 또 아이를 낳고 그녀는 떠나고 린샹푸는 그들을 찾기 위해 두 남매가 살았다던 '원청'으로 젖먹이 아이를 안고 떠난다.
결국 돌아돌아 도착한 곳은 '시진'이라는 곳으로 남매의 빠르고 독특한 말투와 거의 비슷해서 린샹푸는 정착하기로 한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바로 시진이라는 곳에서의 삶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1900년 초반 중국의 격동기 상황과 닿아있다. 신해혁명을 관통하는 격변의 시기에 토비가 날뛰고 국공내전으로 어느쪽에 서야할 지도 모르는 진흙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외동딸 린바이자를 키우며 샤오메이를 그리워하는 린샹푸의 삶은 모든 중국인의 삶 그 자체였다. 그토록 힘든 삶을 견뎌내면서도 주인공 린샹푸는 결국 평생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샤오메이를 만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샤오메이의 편에서 그녀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 다음과 같은 아픈 말을 남긴다.
다음 생에도 당신 딸을 낳아주고 그때는 아들도 다섯을 낳아줄게요... 다음 생에 당신 여자가 될 자격이 없다면 소나 말이 되어, 당신이 농사를 지으면 밭을 갈고 당신이 마부가 되면 마차를 끌게요. (p. 573)
위화의 소설을 보려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는 이유가 주인공이 행복한 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해피엔딩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차라리 '허삼관 매혈기' 정도라고 본다.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제7일' 역시 내내 울면서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위화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그 고통의 시기를 지나온 주인공들이 하나 같이 그 운명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과 고난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은 이를 수긍하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와 같지 않을까. 스스로는 벗어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긴 시간을 지나고 나면 그 고통의 늪에서 겨우 조금 빗겨났던 정도일 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위화의 소설은 원청을 찾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러한 작가의 가치관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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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위화의 소설을 읽을 때 특히 관심을 두고 봐야하는 점이 있다. 극을 쓰는 원칙 중에 '체호프의 총'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제시한 이론으로 극중에서 등장하는 소재들은 반드시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예로 '1장에서 총을 소개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총을 쏴야 하며, 만약 쏘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을 한다. 특히 위화의 소설은 이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청이 입고 갔다는 '남색 장삼'은 30, 24, 44, 493페이지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일종의 암시를 주고있다. 109페이지 에서 어떤 아낙은 린샹푸에게 아기 옷과 모자, 신발을 주고 떠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저 친절한 사람처럼 묘사 되었지만, 556페이지에서 '얼라'라는 사투리와 함께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다. 특히 위화의 소설은 그 원칙에 충실하기 때문에 앞에서 나온 어떤 소재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때문에 그의 책을 읽다보면 쉬운 소설이면서도 단서가 될만한 것들에 포스트잇을 자주 붙이게 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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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는 많지만, 그중 위화 작가를 향한 마음은 특별하다. 부전공으로 중국학을 공부하면서 처음 읽었던 위화의 작품은 암기하듯 외웠던 중국의 근대 대격변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그중 『인생』이라는 작품을 너무나 좋아했다. 『인생』은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토지 개혁 과정에서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고, 마을 사람들은 집 안의 솥까지 빼앗긴 뒤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고 농장에서 노동을 하지만 홍수까지 겹쳐 최악의 기근이 찾아든다. 그때 현장 부인이 출산 중 출혈이 심해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아들 유칭이 차출되어 피를 수혈해 주게 되는데, 의사의 무지로 아이의 몸속 피를 모조리 빼 죽고 만다. 핏기 없이 창백하게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푸구이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소설가 장강명은 『원청』 추천평에 '나 혼자 ‘위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이 있다. 너무 재미있고 뒤가 궁금한데, 갑작스럽게 가슴이 미어져서 책장을 잠시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다짐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자.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잔인해지지 말자.'라고 썼다. 그중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라는 말이 마음에 새겨졌다.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원청』은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는 1900년대 초반 신해혁명기를 배경으로 쓰였는데, 마을의 부유한 도련님이었던 린상푸는 우연히 마을을 지나는 한 남녀를 집에 들이게 된다. 마을의 유일한 관리였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베를 짜며 부지런히 린상푸를 돌봐주시던 어머니도 그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병으로 여읜 후였다. 그들은 남매이며, 여동생은 샤오메이 오빠는 아창이라고 밝혔으며 그들은 원청이라는 아주 먼 남쪽 도시에서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린샹푸는 내심 샤오메이가 마음에 들었는데, 다음 날 여자는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오빠는 곧 돌아오겠다며 여동생을 부탁학하고 먼저 떠났다. 샤오메이는 린샹푸 곁에 머물며 건강을 되찾았고, 혼인을 맺었다. 그러나 데리러 오겠다는 오빠 아창이 돌아오지 않자 샤오메이는 근심에 절에 가서 공양을 드리겠다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샤오메이는 린샹푸가 지닌 금괴의 일부를 가지고 떠났다.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잊지 못한 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연마하던 중 샤오메이가 돌아왔다. 아이를 가져 배가 부른 샤오메이는 '왜 금괴를 가지고 떠났는지' 묻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용서를 구했다. 린샹푸는 더 묻지 않고 다시 샤오메이를 받아들였고, 그해 여름 딸을 얻었다.
린샹푸는 아이를 두고 또다시 떠난 샤오메이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샤오메이는 원청이라는 아주 먼 남쪽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양쯔강을 건넌 뒤에도 600여 리를 더 가야 하는 그곳은 강남 물의 고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원청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다. 지나온 마을 중 아창이 말한 원청과 가장 비슷한 곳은 시진이었다. 원청은 실재하지 않으며 아창과 샤오메이의 이름도 거짓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상푸는 시진으로 돌아가 샤오메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한다.
위화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대의 변혁 앞에 개인의 운명과 삶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시대 속에서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헤어나가는 평범한 인간을 세세하고 숭고하게 그려낸다. 사실 린샹푸의 삶을 보며 우리는 과거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어 신해혁명기를 겪은 한 인물이라고 여기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먼훗날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도 누군가는 코로나 전염병으로 탈세계화와 고립주의 시대 또는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경제 침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더 가치있는 것을 찾고, 더 옳은 것을 쫒으며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리 가혹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해낼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위화적인 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화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대의 변혁 앞에 개인의 운명과 삶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시대 속에서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헤어나가는 평범한 인간을 세세하고 숭고하게 그려낸다. 사실 린샹푸의 삶을 보며 우리는 과거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어 신해혁명기를 겪은 한 인물이라고 여기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먼훗날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도 누군가는 코로나 전염병으로 탈세계화가 본격화된 시기 또는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경제 침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주어진 삶에서 더 가치있는 것을 찾고, 더 옳은 것을 쫒으며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리 가혹한 운명에도 각자 이 삶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위화적인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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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화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 계기는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갈등은 허삼관의 첫째 아들인 일락이가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핏줄’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별 일 없이 잘 지내던 허삼관의 가족은 일락이가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풍파를 겪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당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누구의 피인가 하는 것에 따라 한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맡아야 할 책임과 누려야 할 권리도 바뀌며 작게는 한 가정이 흔들리고 크게는 주변 사회가 술렁인다. 그런데 의아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토록 중요한 피가 한편으로는 병원에서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핏줄의 고유성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피는 절대 사거나 팔아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피는 사는 이유는 수혈을 하기 위해서인데 내가 판 피가 다른 사람의 몸에 흘러 들어가면 피가 섞이는 게 아닌가. 일락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러니까 일락이의 피가 누구의 피인지를 두고 허삼관은 물론 하소용과 그 주변 일가가 떠들썩한 일에 비해 피는 너무나 쉽게 거래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섞인다. 만약 피가 가족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여러 번 피를 판 허삼관은 아마 수많은 가족을 만든 셈이나 다름없다. 피가 공동체의 경계를 정하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먹고 살기 위해 팔 수 있는 상품이라는 이 아이러니는 내가 위화라는 작가에게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할메드 호세이니가 쓴 <연을 쫓는 아이>에서 주인공이 쓴 소설은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칭찬받는다. 아이러니란 단순하게 말하면 부조화가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이러니의 뜻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삶에는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을 배반하는 일이 연거푸 발생할 때 우리의 삶은 붕괴한다. 삶은 살아가는 모든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납득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삶을 혐오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이러니란 삶을 혐오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술이다. 사람들이 책을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책을 보는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야기가 삶을 관통시키기 위해’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난생 처음 겪는 일과 마주칠 때 자기도 모르게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를 찾아본다. 자기 기억을 더듬어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유사한 케이스가 있었는지 물어본다. 네이버 지식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꼭 해답을 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와 유사한 케이스가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란 케이스의 보고나 다름없다. 특히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 좋은 소설은 비록 가상의 이야기지만 마치 그 속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 일어난 것과 같은 생동감을 준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이나 인터넷에 케이스를 찾는 이유는 이 난생 처음 겪는 황당한 사건에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확인함으로써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말하자면 케이스는 위로이자 공감이다. 만약 세상에 아무도 자기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없고 설령 비슷한 일을 겪었어도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느낀 사람이 없다면 아마 그 사람은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말게 될 것이다. 소설은 단순히 사례집과 다르게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그 감정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입체적이란 말은 단지 세부적으로 자세히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입구를 마련해 두고 있다는 뜻이다. 나쁜 소설은 입구가 별로 많지 않다. 백 명이 읽어도 열 개도 채 안 되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좋은 소설은 수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어서 백 명의 사람이 읽으면 백 개의 이야기가 출구로 나오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좋은 소설은 읽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즉 읽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이러니가 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말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는다. 황당한 일도 무서운 일도 웃긴 일도 서러운 일이 마구잡이로 나타난다. 이런 일이 도대체 내게 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운데 지금 내가 느끼는 마음을 공감해 주거나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어서 서럽다. 이럴 때 아이러니는 바로 그 일이 너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위화 작가의 <허삼관 매혈기>가 그렇다. 피라는 한 가지 대상이 혈연과 상품이라는 이중 잣대로 뻗어나갈 때 그 속에서 우왕자왕하는 허삼관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이러니 속에서 인생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나 단지 아이러니만이 <허삼관 매혈기>를 좋은 소설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이러니는 그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하소용의 영혼을 부르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간 일락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허삼관은 자신의 얼굴과 팔을 칼로 베어 피를 내면서 말한다. 다시 한 번 일락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칼로 베어버릴 거라고. 우리가 이 장면에서 감동받는 이유는 바로 아이러니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락이가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난 것은 성장하면서 얼굴이 허삼관이 아닌 하소용을 닮아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피가 가진 유전자의 작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관계에서 아들과 아버지를 정하는 기준은 피다. 피에 유전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자식은 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크면서 부모는 아이에게서 자신의 유년을 발견하고 거기서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단지 피뿐일까. 자주 깨서 칭얼거리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교대로 일어나야 했던 수많은 밤과 밖에서 숱한 고생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단지 아빠와 엄마라는 이유로 환하게 웃어주던 표정들. 잘못해서 뭐라하고 뭐라해서 쓰린 마음 달랜 시간.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의 환희. 커가면서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했던 그 굴곡진 세월들. 이것들도 가족의 일부이다. 가족은 피로도 그리고 시간으로도 만들어진다. 허삼관이 일락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들었던 첫 번째 감정은 아마도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누차 말하듯 아이를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까웠을 것이고 부인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눈 먼 장님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원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삼관이 칼로 자기 몸을 그으면서까지 일락이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들이 하소용의 영혼을 부르기 위해 일락이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일락이가 자기 아버지는 허삼관이지 하소용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족, 특히 부모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 일락이는 자기의 부모가 누군지를 선택했다. 그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라고 인정하지만 끝내 자기가 아버지임을 부인하는 하소용이 아니라 피를 팔아서 국수를 사주고 그간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준 허삼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허삼관이 일락이를 자기 아들로 인정했다는 것은 혈연과 상품이라는 아이러니 속에 있는 피가 자기 삶을 좌지우지 하도록 놔두지 않고 스스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했다는 뜻과 같다. 피(아이러니)는 이렇게 말한다. “저 녀석은 네 아들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중요한 피를 팔아서 저 녀석에게까지 먹인다는 건 말도 안 돼.” 허삼관은 이렇게 응수했다. “너는 되게 자기가 중요한 것처럼 말하지만 너는 그냥 남아돌면 팔 수 있는 물건일 뿐이야. 나는 내 가족을 내 의지로 선택할 거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허삼관 매혈기>의 아이러니를 대하는 삶의 태도이자 멋이다. 다만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나서도 위화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내가 원래 좀 그런 면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을 보면 가령 어떤 노래가 좋으면 그 가수의 다른 노래도 들어보는 반면 나는 어떤 노래가 좋으면 그냥 그 노래만 주구장창 듣지 다른 노래를 찾아보거나 하진 않는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허삼관 매혈기>는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고 이 책 덕분에 위화 작가가 좋아졌지만 그래도 다른 책을 읽어볼 생각은 안 했다. 나중에 <인생>도 읽긴 했지만 찾아서 읽은 것은 아니고 역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도 다른 작품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작가의 책을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원청>, 이 작품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납득하기 어려우면서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린샹푸의 시진행이었다. 나는 린샹푸란 인물이 도무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먼저 금을 들고 도망친 샤오메이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녀를 책망하지 않은 것이 황당했다. 샤오메이가 들고 도망친 금은 나중에 샤오메이가 아창과 했던 대화처럼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죽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실제로 샤오메이의 방랑은 겨우 엽전을 조금 훔쳤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엽전 때문에 남편과 헤어지고 시집에서 쫓겨날 정도인데 금을, 그것도 윗대부터 쌓아온 집안의 재산을 거의 절반 정도 허물어 뜨렸다면 그녀의 말처럼 죽음을 각오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책망하지 않고 용서했다. 샤오메이가 린샹푸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는 있다. 돈보다 아기가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처음 갖는 자기 핏줄이니까. 그런데 린샹푸는 샤오메이가 다시 떠날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혼례를 다시 치르고 한 달간 부엌에 둔 사주단자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린샹푸가 얼마나 안도했는지는 그가 샤오메이가 다시 떠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결국 샤오메이는 떠났다. 한 달 남짓한 아기를 버려두고.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정말 좋아했다는 건 앞에 사주단지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장면이 아니더라도 가문의 재산을 절반 가까이 훔치고 빈 손으로 돌아온 여자를 용서했다는 것만 봐도 그 애정에 얼마나 깊은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린샹푸는 두 번이나 도망친 여자를 체념하기는커녕 금을 처분하고 가산을 저당잡힌 뒤 그 돈으로 샤오메이를 찾으러 떠난다. 나는 중국 역사에 무지하지만 남존여비의 시대이고 특히 샤오메이가 직접 겪기도 한 민며느리 시대에 린샹푸 정도 되는 마을 유지가 다른 여자를 들이는 대신 굳이 자기를 두 번이나 버린 여자를 찾으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간단히 말해버릴 수는 있다. 샤오메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아니면 딸에게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린샹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도 성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딸은 자기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안의 재산을 훔치고 도망친데다 이제는 딸까지 버리고 간 여자가 정상적인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설령 샤오메이 본인에게 어떤 인간적인 결함이나 도덕적인 문제가 없다고 치더라도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연이 있다는 건 추측할 수 있고, 그 사연은 그녀로 하여금 또 다시 가정을 버리게 만들 거라는 가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린샹푸가 이걸 몰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분명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사랑했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린샹푸도 사람이다. 한 번은 가산을 훔치고 도망치고 한 번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버리고 도망친 여자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시진에 도착한 린샹푸가 발기부전이 되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내 생각에 린샹푸의 발기부전은 애정의 문제는 아니다. 만약 발기가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상징한다면 발기부전은 샤오메이의 도망으로 가정을 상실한 남자, 즉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이 실추되었다는 린샹푸의 무의식적 상처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린샹푸는 왜 샤오메이를 찾으러 간 것일까. 인간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자연재해에 가깝다. 난데없이 나타나 사랑의 즐거움과 이별의 상처를 주고 가산을 훔치고 아기를 내버려둔 채 사라진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재해, 아니 신의 농락처럼 보였을 것이다. 샤오메이는 말하자면 린샹푸에게 아이러니와 같다. 샤오메이가 나타나기 전에 린샹푸의 삶은 안정되어 있었다. 재산이 쌓이면서 가세가 번창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목공을 배우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늘어나는 것은 있어도 줄어드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샤오메이가 나타난 이후 린샹푸에게 삶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되어버렸다. 린샹푸는 생각했을 것이다. 샤오메이는 왜 자신의 정숙한 아내가 되지 못했을까.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정숙한 성격, 부지런하고 깔끔한 행동은 그야말로 자신에게 꼭 맞는 것이었다. 이제 아이를 낳기만 하면 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샤오메이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사라진 것이다. 사라지면서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많은 것을 가져갔다. 재산을 가져갔고 태어난 아이의 어머니를 가져갔으며 무엇보다도 린샹푸가 기대하고 희망했던 미래를 빼앗아갔다. 그러니까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삶을 훔쳐서 사라진 것이다.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찾아 나선 이유는 샤오메이로 인해 그의 삶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린샹푸는 시진으로 가는 여정에서 원청이라는 도시가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샤오메이와 아창이라는 이름도 거짓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설령 샤오메이를 만나도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왜 그랬는지를 알면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 수 있고 그러면 삶은 일부 훼손되었고 흉터가 생길지라도 다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린샹푸는 다시 살아가기 위해 샤오메이를 찾으러 나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삶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말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망실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샤오메이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녀가 벌인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재해와도 같다. 샤오메이를 찾기 위해 시진으로 향한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자연재해처럼 인생에서 벌어지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단지 수긍하거나 겁먹고 피하겠다는 뜻이 아닌 정면으로 대적하겠다는 뜻이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이 일락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선언하듯이 <원청>에서 린샹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샤오메이를 찾으러 떠남으로써 훼손된 삶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상황은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태엽 감는 새>가 떠올랐다.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사라지고 아내를 잊으라는 주변의 압력을 받는다. 그리고 아내가 사라진 것이 납치되었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나아가 그녀가 외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일반적이라면 아내를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테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녀를 만나서 데려오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게는 린샹푸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삶의 마구 헝클어트리는 힘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을수록 한 국가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들의 책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기계발서처럼 구체적인 방침을 주지는 않지만 반대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등장인물의 삶을 통해 비교적 명확히 알려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위화 작가나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책은 잘사는 방법이 아닌 삶의 목적에 대해 알려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나면 독자는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말한 ‘무엇’을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도 <인생>을 읽고도 나는 위화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청>을 읽고 나서 이 작가의 나머지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말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삶의 스산함과 눈물겨운 쓸쓸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샤오메이가 묻힌 땅 옆에 린샹푸의 관이 잠시 누웠을 때 그토록 함께 있고 싶었던 두 사람이 비로소 같은 자리에서 조우하는 그 찰나. 그것은 김훈 작가가 쓴 <현의 노래>에서 순장된 아내가 묻힌 무덤가를 베고 누운 한 악공의 모습과도 겹쳤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연민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원청>은 말한다. 삶의 앞면이 우리를 상처입히는 아이러니에 대한 저항이라면 삶의 뒷면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영원한 연민이라고. 그것은 꼭 죽음의 순간 웃음지었던 린샹푸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2024년 8월 5일부터 2024년 8월 11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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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하청’과 ‘원청’의 구조 속 숨겨진 진실과 불합리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권력과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어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어요.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 더 깊이 다가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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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읽자마자 원청 달렸습니다. 인생보다는 분량이 두배 느낌인데 술술 잘 읽혀 며칠만에 완독하였네요. 위화의 소설은 정말 읽고 나면 한 동안 책을 만지작 거리게 합니다. 린샹푸와 샤오메이 두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 계속 남아있게 되어 계속 책의 내용을 되짚어 보게 되네요. |
| 위화 작가의 책들이 갑자기 페이백 도서로 풀리고 무한 대여 이벤트를 하고 해서 이런저런 서점사에서 대여해서 읽어보자 결심한 것도 벌써 5회차...하지만 여전히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용이 흥미롭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 시절 한국이 어려웠던 만큼 다른 나라도 쉽지 않은 세월을 겪었다는 것을, 힘 없는 이들에게 혼란이란 얼마나 가혹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을 되풀이하는 게 생각보다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었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 도전이다! 했으나 역시...힘들긴 힘들군요. 세상은 가혹하고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도 결국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은 승리하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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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작가의 신작 <원청>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는데 이벤트로 나와서 바로 구매했습니다. 원청은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변하는 사회적 대격변기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이 얽히며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의 중국이 얼마나 급변했는지는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죠. 소설은 파란만장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한 사람, 혹은 한 집안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보잘 것 없은 존재인지 잘 보여줍니다. 긴 호흡의 묵직한 소설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