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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싸리비 자국 선연한 그 절집 마당을 기억하지 그때 내 나이 열세 살 드리운 배롱나무 꽃그늘에 기대앉아 노스님이 짚어주시는 천수경 한글본을 따라 외웠지 그 깊은 뜻이야 어린 속셈이 알아차릴 리 없었겠지만 나는 절 마당에 낭랑히 울려퍼지다 배롱나무 붉은 꽃숭어리에 흠뻑 맺혔다 울긋불긋 되돌아오는 내 목소리가 마냥 좋았지 여름 한낮 짓궂은 공양주 보살 아주머니가 들려주시던 박사고깔 불보살님 티끌 이야기는 멀리 계신 엄마 생각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지 배롱나무 꽃그늘에 기대앉으면 꽃피고 꽃 지는 소리가 더 잘 들렸지 구름 가는 소리 더 잘 들렸지
海印. 열세 살이면 동무들과 골목에서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노래하며 팔랑팔랑 나비처럼 고무줄이라도 넘나들어야 할 나이인데 천수경 한글본이라니. 어린 네게 불경을 외게 하는 노스님의 뜻이야 알 수 없지만 열세 살 네게는 버거웠을 터. 그래도 배롱나무 붉은 꽃숭어리에 흠뻑 맺혔다 울긋불긋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좋았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海印. 가장 듣고 싶은 소리가 엄마 목소리라는 걸 왜 노스님이 몰랐으리. 모르지 않았지만 노스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천수경을 외게 하는 거였겠지. 박사고깔 불보살님 티끌 이야기로 엄마 생각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 짓궂은 공양주 보살 아주머니도 그게 최선이었을 거야. 어린 너를 절에 맡길 수밖에 없는 엄마의 찢긴 마음도 마찬가지이지. 그 최선들이 배롱나무 꽃그늘에 기대앉아 꽃피고 꽃 지는 소리며 구름 가는 소리를 네가 잘 듣게 해주었을 거야.
海印. 열세 살 이전에 이미 혼자인 듯한, 엄마는 일하러 가고 아빠도 일하러 가서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세상천지 혼자인 듯한 느낌을 여러 번 받았겠지. 감수성 예민한 해인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와락 무서움이 밀려드는 순간이 왜 없었을까. 그래도 그때를 잘 건너온 해인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몰라. 엄마 아빠도 그때 최선이었으리라 믿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없는 경우 많았지만 오랫동안 더 함께하고 싶은 초보 엄마 아빠의 최선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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