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에 읽는데 이야기가 쓸쓸했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침묵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별어곡(別於谷).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의 간이역이 이 애잔하고 고독한 소설의 배경이다. 아주 작은 기차역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시점까지 내가 '낭만'이라고 믿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혼자 훌쩍 기차를 타고 날이 저물어 가길래 아무데서나 내렸는데 그곳이 하필 하루에 기차가 두세 대 정도 들어오는 작은 역이었던 거다. 산골 작은 마을에서는 즐길 거리가 전무하기 때문에 나는 마을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다 오늘밤 여기 묵어야 하나 막차를 타고 떠나야 하나를 고민하며 간이역 한 모퉁이 의자에 앉아있다. 여전히 목적지는 없고, 역시 혼자다. 그 때 나처럼 그 마을에 우연히 오게 된 낯선 이가 말을 건네온다. "혼자세요?" 그리고 내가 대답한다. "혼자가 편할 것 같았거든요. 여기에 오려고 한 건 아닌데 우연히 오게 됐어요." 그러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우연같은 인연이.
작가는 잊혀지는 것들을 되살리려 애썼다. 나름의 상처를 가진 주인공들을 한데 모이게 하면서 그들로부터 현대에선 찾기 드문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유도했다. 20대 청년 동수에게는 그리운 아버지가, 신태묵 아저씨에게는 빚을 진 양딸이, 순례 할머니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땅이, 빵집 여자에게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탈영군인의 아들이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평생 그 숙제를 풀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살아있는 한 반드시 끝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듯 자세히 하지만 무심하게 그려내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삶이란 어떤 것이냐고. 이런 삶이 오히려 삶이라고. 동수는 나비를 본다. 동수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그의 시선이 곧 우리 시선이기도 해서 지극히 개인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개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나비는 무엇을 상징하는 거였을까. 상처가 짊어짐이라면 짊어진 아픔을 내려놓고 사뿐히 날아가고 싶었던 주인공들의 소원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팠으니까 보상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삶에는 통하지 않는다. 다소 상대적이기는 하나 모두가 나름의 아픔을 하나씩은 품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타고난 것도, 그런 일이 생긴 것도, 그래야 했던 것도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의외로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니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태어난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극으로 얼룩진 상처가 빛이 되길 바라지만 순례 할머니나 신태묵 아저씨에게 어떻게 그렇게 되실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
영화 [편지]에 등장했던 작은 간이역은 KTX의 거대 역사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대형 할인마트보다 가끔은 동네 작은 점빵(?)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처럼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 곳이 왠지 귀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도 활성역이 되어 있을지 궁금한 그 역만큼이나 작은 역이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의 별어곡은 정선행 산골역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지만 사람들의 역사와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그런 곳이 폐해져 간혹 그곳을 찾던 사람들은 물론 일터로 일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쫓겨났다. 하지만 오롯이 홀로 남아 추억을 지키는 그 별어곡의 사연을 "이별하는 골짜기"는 풀어내고 있다. 역은 본디 머무는 사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보니 발걸음마다 줄줄이 흘려지는 사연들이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아 역에 저금하듯 차곡차곡 쌓여갔다. 제초제를 먹은 아들 때문에 울고불고 하던 누군가의 모친의 이야기나 병들고 귀찮아져 역에 버려진 애완견들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은 물론 티켓을 파는 빨강머리 레지에서부터 제자식을 제 손으로 묻은 아비와 산기슭의 외딴집에 이사온 외지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사연이 몰려드는 곳이 역인 것이다. 스캔들과 가정사가 수다로 풀어지는 곳이 미용실이라면 역은 남녀노소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털어놓는 역사드라마 같은 역할을 오랜세월 톡톡히 해냈다. 그 중 외지에서 이사온 두 여인의 사연은 나는 짐승이다.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고 닭이다 라는 과격한 문구와 함께 시작되는데, 의붓 아비에 의해 480원에 팔리고, 아이를 임신한 채 죽어갈수 밖에 없었던 정신대 여인들이 해방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듯 찾아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산기슭 외딴집에 이사온 두 여인의 정체는 몸과 마음 모두 멍이 든 채로 살아온 정신대 할머니들이었고 그들은 생의 마지막 의탁을 이곳에 맡기러왔다. 반면 늙은 역무원 신태묵은 8살 피난 길에 가족을 잃어 외롭게 살아오다 자신의 과실로 남편을 잃은 여인과 그 딸을 거두며 살았다. 결국 그 사실이 밝혀져 아내는 자살하고 딸에겐 의절당한 채 살고 있어 이래저래 외로운 노인으로 늙어가는 곳, 별어곡이다. 늙은 역무원이 있다면 젊은 역무원도 있을 터. 스물 일곱의 막내 역무원 정동수는 역 맞은 편 제과점에 홀로 사는 여인 때문에 그 아비의 과거까지 밝혀지며 별어곡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역에 두고 떠남으로써 이야기와도 이별하는 역으로 남는다. 역이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담긴 지구 한 조각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사연이 많이 담겼을 법한 사라진 작은 역들이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구구절절 사람냄새가 진하게 배여있는 이야기만큼 그리워지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별하는 골짜기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묻어놓은 이야기들의 무덤 같이 느껴지는 곳이라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이다. 정말 있을까. 이 작은 역?
|
|
이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읽고 나면 대체로 앓았던 것 같다. 오래 전부터, 대학 때부터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읽었을 때부터,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붉은 방>을 읽었을 때도, 심지어는 학교 수업에서조차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아프고 아팠고, 그래서 읽기 싫었고, 외면하고 싶었고 모르는 척 살아가고 싶었고 앞으로는 이 작가의 글을 안 읽어야지 하는데도 새 작품이 보이면 읽을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이 맞아들여야 하는 아픈 글. 이렇게 아프고 나야 정녕 아프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예방주사 같은 글.
처음에는 낭만적이었다. 약간 쓸쓸하고 우울하고 처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절망을 넘어서는 분노를 일으키리라는 생각은 못했다.(한 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은 지 오래 되었다는 증거이겠지.)
그러다가, 읽어나가다가, 인물들이 불쌍하다가, 그들의 처절하다가, 못 견디게 화가 날 것만 같은 지경에 이르자, 내 삶도 아닌데, 남의 삶인데, 허구라는데, 오래 전 이야기라는데, 저기 먼 땅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는데, 내가 왜 이러나 여기에 이르자, 그만 내가 또 작가의 글에 빠져들고 말았구나 싶었다.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제목에 살짝 마음을 놓았던 탓이다. 간이역이라는 분위기와 애달픈 이름에 작가를 잊었던 탓이다.
사람들은 이런 글도 아름답고 할까?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삶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못하겠다. 전혀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슬펐고, 불쌍했고, 기막혔고, 내 삶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내가 이기적일 수 있어서 고마웠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삶에 일생을 휘둘다가 마감한 이 땅의 가여운 영혼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생각해 보려고 한다. |
|
만남의 끝은 언제나 이별이다. 영원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많은 이별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이별 앞에 초연하기란 쉽지 않다. [이별하는 골짜기], 제목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 책에 시선이 갔다.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하지만 구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읽고는 싶은데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10월의 끝자락, 책을 구입하고도 한참을 망설이다 책을 읽었다. 누구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10월이 가기 전에 꼭 읽어야할 것 같았다. 내겐 밀어둔 숙제 같은 책이었다. ‘이별하는 골짜기’는 별어곡(別於谷)이란 산골 간이역의 이름을 풀어쓴 것이다. 별어곡은 지금은 매일 1회씩 운행하는 아우라지-제천, 아우라지-청량리 무궁화호 열차가 1분간 정차하는 무인역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기차역의 이름을 ‘이별하는 골짜기’라고 지은 것일까?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였지만 그것은 철도 공무원이었던 신태묵 씨의 운명을 바꿨다. 사랑하는 아내와 ‘내’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감추고 있던 욕망과 진실은 모습을 드러내고 분노한 아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내의 딸’에게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신태묵 씨에게 간이역을 지키는 일은 삶을 버티는 일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호랑나비 한 마리가 자신에게도 날아올 거라는 꿈을 꾸면서.
가방할멈 순례에게도 산수유가 아름답게 핀 마을에서 노랑나비처럼 예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순례가 아닌 마사코로 기억했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그녀는 더 이상 순례로 살 수 없었다. 어렵게 돌아온 고향에서 만난 현실은 가족의 죽음이었다. 그녀의 가방 안에 든 것은 목적지도 출발지도 없는 빈 승차권과 식구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매번 별어곡역 앞을 맴돌지만 정작 그녀는 어디에도 머물 수 없었고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기차역은 떠나기도 하지만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간이역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움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별어곡역의 막내 역무원이자 ‘별어곡 시인’ 정동수!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육신과 영혼에 균열이 그어진 그녀, 양순지는 우연히 별어곡역 앞에서 ‘음악이 있는 베이커리’를 차린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사장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자신이 별어곡에 우연히 오게 된 이유도. 그것은 어린 시절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탈영병 때문이었다. 그녀가 좀 이기적이었다면 사라진 기억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기엔 흰나비처럼, 하얀 눈처럼 너무 순수한 사람이었다. 정동수의 아버지가 그녀가 기억하는 그 사람일지라도.
얼마 전 집 근처의 대학에서 ‘엑스포’를 했다. 오랫동안 ‘축제’로 불렸던 그 행사는 그 대학에서 매년 같은 주에 열린다. 나는 ‘축제’라는 단어가 더 좋다. 엑스포의 마지막 날엔 불꽃을 쏜다. 운 좋게도 우리집 옥상에서 불꽃을 볼 수 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불꽃은 찰나의 화려한 불꽃을 피우고 사라졌다. 사진을 찍어놓고 기록을 남겨놓지 않으면 언젠간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책을 읽은 기억도, 애잔한 느낌도 사라질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신속함과 편리함 속에 사라져가는 간이역들과 나비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이 책을 읽은 느낌을,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이별하는 골짜기]는 빠르게 읽을 수 없는 소설이었다. 책을 읽는 도중 쓸쓸함에 자주 멈칫했다. 신태묵 씨과 기다리던 손주의 재롱을 보게 되는 것처럼 새로운 만남 또한 기다리게 했던 소설이었다. 2010년 10월이 간다. 나는 지금 10월과 이별하고 있다.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느리게 지금의 이 순간을 느끼려 한다. 11월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
|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어려운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한다. 심지어 익명으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빠르고 복잡한 삶 속에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신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으려 한다. 세상천지에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고즈넉한 표지의 [이별하는 골짜기]는 만난 사연은 특히 더 애달프다. 제목에서 짐작하듯 소설은 이별 이야기다. 모든 만남은 이별로 이어진다. 아무리 짧은 이별도 만남을 예고하는 이별이라 해도 아름다운 이별은 없는 법이다. 그러하니 영원한 이별은 얼마나 슬프겠는가.
소설은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의 <별어곡역>을 공간으로 주인공 4명의 이야기를 가을, 여름, 겨울, 봄순으로 들려주는 옴니버스 소설이다.역무원인 청년 동수와 퇴직을 눈앞에 둔 신씨, 매일 기차표를 끊는 할머니 순례, 빵집 주인인 젊은 여자의 이별 이야기.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작은 간이역 벌어곡 만이 알고 있는 그들의 사연은 무엇일까.
시인이 되고 싶은 역무원 동수에게 벌어곡역은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다.누구와도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으니 빨강머리의 철없는 다방 아가씨가 눈에 들어 올리 없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전화로 늘어놓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었다. 그게 빨강머리의 마지막이란 걸 동수는 알지 못했다. 깊은 밤 울리다 만 전화기, 그 너머로 누군가 울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얼마나 될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의미없는 수다를 떨고 싶다.
철도와 함께 살아온 신씨의 인생엔 기차가 전부였다. 꿈과 미래가 기차에 있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다. 자신의 실수로 어린 아내와 딸을 남긴 채 젊은 가장이 죽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승진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신씨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우연하게 모녀와 재회한 신씨는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다. 잔인한 운명이라 했던가.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내는 자살하고 딸은 자신을 증오하며 집을 떠난다. 모두가 떠난 신씨에게 남은 건 기차뿐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기다리던 신씨에게 딸의 소식이 전해진다. 이별은 만남으로 돌아온 것이다.
젊은 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참혹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할머니 순례의 이야기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린 소녀는 식구들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고 싶었다.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짓밟힌 몸과 영혼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순례. 가난했던 시절 삶은 그렇게 가혹했다. 가방을 끌어 앉고 역사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순례는 정신을 잃어야만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늙고 지친 순례의 기억은 언제나 노란 산수유꽃이 만발한 고향이다. 아픈 역사가 된 수많은 순례를 잊지 말라고 벌어곡은 노래한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은 빵집 주인은 젊은 여자다. 첫 눈에 벌어곡역에 반해 정착을 결심한다. 포병 장교였던 아버지의 사고로 집안은 무너진다. 무녀인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불구가 된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여자의 몫이다.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늙고 병든 어머니까지 책임져야 한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찾아온 그곳과 그녀는 다시 이별을 결심한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니, 너무 슬픔 지명이다. 벌어곡역은 그렇게 모두의 이별을 지켜 보았고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었다. 함부로 꺼내놓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묻어두어야만 하는 이야기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간이역에서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역이 되버린 그곳에 가면 그들이 있을 것 같다. 시 쓰는 청년 동수, 할아버지가 된 신씨, 산수유꽃을 닮은 소녀 순례,맛있는 빵을 굽는 여자가 말이다.
마치 묘비처럼, 그 무인역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빠름은 무조건 선이고, 느림은 악이 되는 시대. 일회용 감각, 일회용 이미지, 일회용 관계들만 넘쳐나는 이 세상은 더는 지난 시간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하지도, 기억하려 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저마다의 생애조차도 일회용이기를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혹 그렇다면, 이 소설은 과거의 시간에 포박된 사람들, 혹은 망각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겠다. p.314 작가의 말 중에서
늦가을에 만난 이별 이야기는 쓸쓸했다. 소설은 늦은 밤 방영되는 TV문학관을 보는 듯하다. 가만히 눈을 감으며 상상한다. 사람들의 발 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골 소읍 간이역. 그 안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의 이야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추억한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삶,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식이 끊긴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있을까. 어디선가 잘 살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