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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은 없습니다
인디고 서원에서 엮은 "주제와 변주"라는 책에서 보면 성석제 님과 학생이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학생 한 명이 "내 인생의 마지막4.5초"라는 단편 소설이 우리 삶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하고 묻자 성석제 님은 한 마디로 잘라 대답합니다. 간단히 말해 이 소설이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은 없습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저는 아무런 교훈도 주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소설을 두고 이 글은 주제가 어떻고 소재는 뭐고 작자의 의도는 뭐고 교훈은 이렇고, 하는 식으로 가르치잖아요? 제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뭔가 얘기하고 싶은 교훈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뭐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어요. ~ 중략~ 굳이 교훈을 얘기하자면, '내가 쓰는 소설에서 밥맛 없는 교훈 따위는 없애자'라는 게 교훈입니다. - 성석제 편, 369p- 각종 시험을 거치면서 우리는 국어 지문을 대하며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데 너무도 익숙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소설 속에서도 "이 소설의 교훈은 뭐지?"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대한 작가님의 대답은 참 멋있습니다. "밥맛 없는 교훈 따위는 없애버린" 소설에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성석제 님의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읽다보면 "빵빵"터지는 대목이 많습니다. 때로는 아래목에 앉아 곰방대 빨며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 해주던 할아버지의 능청스런 모습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구렁이 담 넘어 가 듯, 성석제 님의 소설은 슬금슬금 여기저기 넘어다니며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자못 심각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결국 "빵"터지기 위한 전초전일때가 많습니다. 앞서 질문한 학생처럼 저도 성석제 님의 소설에 나름대로 교훈을 찾아보려 했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빗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이 책에서 성석제 님의 말을 들어보니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홀림"은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홀림"은 단편 소설의 모임입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소설들은 모두 '인간'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런 부제가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드러낼 경우에는 제목에 표시했고, 기다리는 인간, 슬픔을 느끼는 인간, 죽는 인간, 즐거운 인간, 우주와 직통으로 대화하는 인간 등은 숨어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어딘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 세속의 다양함을 숭상한다"고 적었는데 그 생각은 여전하다. -268- 성석제 님은 "홀림"에서 인간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합니다. 그 "인간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조금은 일반 사람들의 생활상하고는 다른 모습들입니다. 그 모습들을 작가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썼다고, "주제와 변주"에 나온 대담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꽃 피우는 시간-노름하는 인간" 에 나오는 인간은 노름꾼입니다. 도박사라고도 할까요? 잠깐 K시에 간 "나"라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도박사 피스톨 송"의 강연회에 가서 듣는 이야기와 그 이후의 잔상 정도의 이야기 입니다. 피스톨 송이라는 작명 솜씨도 재미있지만 그 사람의 강연회의 내용을 풀어가는 그 솜씨도 맛깔스럽네요. 그리고 강연회 뒤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보통 그 호텔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행사를 한다는 반전은 능청스럽게 우리의 뒤통수를 툭 치고 가는 기분이 듭니다. "해방- 술마시는 인간"도 부제가 붙어있는데 해방이라는 제목이 부제의 술 마시는 인간에서 "해방"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네요. "소설 쓰는 인간"은 이미 영화화 된 바 있습니다. 이성재(풍식), 박솔미(연화) 주연의 "바람의 전설"이란 영화인데 소설과 영화의 느낌이 약간 다릅니다. 영화는 아무래도 눈으로 보는 것이기에 소설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이고 소설은 익살스럽기는 하지만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활자인 소설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영화는 그 차이가 많이 나겠지요. 여기에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연화(박솔미)라는 여형사를 등장시켜 좀 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름 영화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렇게 흥행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이성재, 박솔미 주연의 "바람의 전설"은 성석제 님의 소설, "소설 쓰는 인간"을 영화화 했습니다.->]
"내인생의 4.5초"도 그렇고 "소설 쓰는 인간"도 그렇고 성석제 작가님의 소설에는 각주가 종종 등장합니다. 제법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각주에는 관련 용어나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도 어쩌면 능청스럽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보르헤스 소설에서 보는 각주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이런 모양새는 다른 소설에서도 등장하기에 꼭 두 사람을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 한데요, 어쨌든 소설 속의 각주가 주는 느낌은 소설을 자못 진지하게 만들어주면서도 진지한 사람이 썰렁한 이야기를 하면 더 웃기 듯이, 그 속에 또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홀림"에서는, "그 뒤로 아이는 '소설 쓰는 인간'으로 분류되었고 아이는 그에 대한 복수 내지는 보답으로, 어디보자, 소설 속에 제 쌍둥이 가운데 하나, 둘,셋,넷,다섯,여섯,일곱까지 출격시켰다."(홀림, 146p) 고 하는 대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이 성석제 작가 자신의 일종의 자화상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이 책 "홀림"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보통 성석제 작가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항상 "억제"가 등장합니다. 석제라는 이름과 비슷한 억제는 약간은 어리버리한 스타일로 소설 속 주인공 주변에서 맴도는 역할을 하는데 "홀림"에서 "나"의 모습처럼, 성석제 작가 본인의 모습이 소설 속에 투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듯 성석제 님의 소설에는 영화 속에 까메오처럼 자신의 소설 속에 본인을 살짝 등장시키는 듯한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작가의 말처럼, "홀림"이란 단편소설 모음집 속의 각 소설들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드러낼 경우에는 제목에 표시했고(꽃 피우는 시간-노름하는 인간, 해방-술마시는 인간),기다리는 인간(협죽도 그늘 아래), 죽는 인간(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즐거운 인간(소설쓰는 인간), 우주와 직통으로 대화하는 인간(이무기)으로 나누어 생각볼 수 있습니다.
교훈은 없다. 그저 재미있다
저는 성석제 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한 때는 이 소설의 교훈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앞서 언급한 작가님의 말처럼 별다른 교훈은 없는 듯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떠나 성석제 작가님의 소설은 재미가 있기에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굳이 밥맛없는 교훈"따위를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시 구절의 하나처럼 그냥 "웃지요"하면 됩니다. |
| 사람들은 묻는다. 왜 책을 읽으시나요? 우물쭈물 대답이 잘 안나오기도 하고 청산유수 줄줄이 독서예찬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나는 누군가 물어오면 할 말이 없는 쪽일 게다. 왜 읽냐니...참..글쎄..왜 읽을까요?라고 말할 밖에. 그렇게 독서에 이유가 없긴 해도 읽는데 독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있다. 재미. 실용서든 소설이든 만화든 재미가 있어야 읽을 맛이 나는 건 당연한 이치. 예스24에서 별표를 주는데 작품의 완성도, 오락성, 교훈성, 감동, 재미 등등을 기준으로 하라고 옆에 써 있는데 앞에 것들은 필요없는 단어들이다. 얼렁뚱땅 만든 책이 재미있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여 나는 오로지 재미있는가 없는가로 책을 구분한다. 재미없는 일을 억지도 하기도 해야하는 세상살이에서 재미없는 책을 읽는 것처럼 고약한 일은 없을테니. 책이 재미있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녹슬어가는 머리 윙윙 돌리게 해주거나 순간 책 속에 홀딱 빠져들기만 하면 오케이.[홀림]은 작가의 팬이 주위에 꽤 있는데도 그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았다. 베르베르의 [나무]와 동시에 읽었는데(참 나쁜 버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가 노는 마루에서는 [홀림]을, 이불위에서 아이를 재울 때는 에코의 강의록(소설의 숲으로 여섯발자국이던가..쩝)을, 조용한 화장실에서는 [나무]를 하는 식으로) 단편이라는 점이 비슷해서인지 비교가 더 된다. 승패를 가르자면 [나무]의 패배다.(이런 식으로 책을 비교하는 것 역시 좋지 않은 습관이긴 하지만...) 참 재미있게 글을 쓴다 싶은데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서 섣부르게 작가를 평하기는 어려울 듯 하지만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이후로 이렇게 맛깔나는 글을 본 게 처음인 듯 하다.(굉장히 최근에 읽었다고 해야하나...[임꺽정]을 읽은 이후로는 한국소설은 거의 판타지만 읽은 편이어서...) 앞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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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간의 연휴를 불과 며칠 앞두고 갑자기 이제부터 한국 소설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심을 하고 며칠간 고민하다가 연휴이던 금요일 팔 책과 버릴 책을 빼내어 책장에 공간을 확보하고 토요일 팔 책들을 배낭에 잔뜩 넣은채 신촌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처음엔 저자엔 상관없이 그냥 제목만 보고 몇권의 책을 골라오려 했다. 한국 소설을 읽겠다는 건 무명 작가들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국내에 1년간 발간되는 신작이 4만종쯤 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한해에 10만권 이상 팔리는 국내 작가의 책이 채 열권도 되지 않고, 많이 팔리는 책 절대 다수가 유명 작가의 작품을 유명 출판사에서 말 그대로 빵빵한 마케팅을 통해 팔아내는 상황이라고 한다. 결코 유명 작가의 작품을 무시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지만 발간되자 마자 순식간에 수십개의 댓글이 달리고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진입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편에 있는 수만종의 작품들은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채 아마도 철저히 무시당하다가 쓸쓸히 사라져갈 것이다. 그중에서 좋은 책 몇권 없을리가 없으니 나라도 한두권쯤 발굴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신나는 취미가 될 수도 있을 듯 싶었다.
중고서점 첫 탐방은 생각보다 녹녹치 않았다. 제목만 보고 골라잡기로 결심을 하고 갔지만 낯선 제목과 낯선 이름들 속에서 혼란만 커져갔다. 한시간쯤이나 눈에 익을 때까지 국내 서적코너를 헤매었지만 글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에도 전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거다 하고 한권집어들어 펼쳤더니 은퇴한지 10년쯤 지난 아이돌 팬클럽의 책도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첫 탐방은 큰 전쟁을 위한 정찰이라고 생각하자. 난 여지껏 성석제도 한권 못본 주제가 아닌가? 그렇게 달래며 성석제의 책 두권을 집어들고 돌아왔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너무 만나고 밤이지만 꾹 참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보물을 찾고 있다. 뭔가 재밌는 일을 시작한 것 같아 리뷰는 안쓰고 쓸데없는 얘기만 주절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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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이성애건 건전한 우정이건 광활한 인류애이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의 몸에서 분리되어나오는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한 조각, 내쉬는 아주 작은 한숨, 마지막 세포 하나까지 좋아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온전히>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찰나의 콩깍지가 아니라면 착각에 불과한 것 ..이라고 본다. 사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자식의 모든 것을 완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좋아한다기보다는 단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없이 완벽하게 좋아한다기보다는, 아마도 그 사람들의 부분들이 마음에 드는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그 부분들의 모음이, 일종의 그 퍼센테이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높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의 퍼센테이지가 다른 사람에 비해 높을수록, 좋아하는 조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 사람을 더욱 더 <좋아한다>는 게 되는 게 아닐까 .. 하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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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는 이 시대 최고의 입담꾼이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나태한 일상에 허를 찌르는 웃음을 던진다.그 웃음은 그야말로 통쾌하고 유쾌한 웃음이다. 웃음뿐인가. 그 웃음뒤에는 세상을 향해 직빵으로 날리는 날렵한 풍자와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숨어있다.
그의 책을 조금이라도 들추어 본다면, 그가 쓴 글들을 읽고 한번이라도 통쾌한 웃음을 웃어본 자라면, 그 웃음뒤에 숨은 세상의 쓴 맛을 느껴본 자라면, 분명 그를 이 시대 최고의 입담꾼이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홀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 구석구석의 기발한 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낸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름하는 인간'의 모습을 꽃 피우는 시간이라 여기며 노름질에 최선을 다하는 이가 등장하는가 하면, '해방' 이라는 이름아래 술 마시는 인간의 모습을 유쾌하면서도 씁쓸하게 담아내기도 한다.
성석제, 그가 담아내는 이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바로 인간으로 빼곡히 들어찬 세상, 그 속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노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소설을 쓰고, 혹은 무언가에 홀려 있는것. 이 모두가 우리네 삶의 모습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그 '무언가'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삶의 진실과 직결되는 것이며 우리를 살게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 세상이 우리네 삶이 무언가로 단단히 막혀 있음은 분명하다. 그걸 한번 뚫어보기 위해, 깨보기 위해 성석제는 웃긴인간을 등장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상상을 초월하는 짓거리를 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있지만 사람은 없다. 사람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어도 진정, 사람은 없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세상. 이 삭막하고 재미 없고 쓸쓸한 세상에 성석제가 보여주는 인물상과 그들의 삶은 유쾌하다 못해 진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한참을 그의 글을 읽으며 웃다보면 뒷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가 가진 무기는 바로 '글'로서 형상화되는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통찰이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노름하는 인간인가. 술 마시는 인간인가. 아니면 무언가에 홀려 있는 인간인가. 나는 그 무엇에든 홀릴 준비가 되어있다.
어떤가, 그가 던지고 있는 날렵한 풍자와 예리한 시각이. 그의 입담은 너무 예리해서 무섭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 '제대로 놀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 같다. 그래야 적어도 거짓없이 웃을 수 있테니. [인상깊은구절] "진정한 노름꾼은 남이 놀때 같이 놀고 남이 칼을 갈면 같이 갈아준다. 세상에 리듬을 맞춘다. 이게 노는 것이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노름에도 도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드라마가 있다. 그게 현실적인 정치나 비즈니스의 그것보다 나을 수 있다. 요즘 정치가들, 사업가들, 마피아들 너무 놀줄 모른다. 숨을 들이쉴 줄만 알고 뱉을 줄을 모른다. 먹을 줄만 알고 쌀 줄은 모른다. 그래서 차곡차곡 모으면 많이 딸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죽는다. 숨이 막히고 뚱뚱해져서 추하게 죽는다." -홀림:꽃피우는 시간, 노름하는 인간 中에서. |
| 7월엔가 어느 일간지에서, 피서지에서 읽으면 좋을책 10선에서 이책을 보게되었다. (출판사와 신문사간의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출, 퇴근시간에 지하철에서 간간히 일주일 정도 읽었나보다. 골치아픈 요즈음의 내 정신생활에 있어서, 이정도면 확실히 잘 읽히는 소설이다. 단편집이라고는 하나, 각소설들은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우리곁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러나 결코 사회의 중심이지 않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예를들면, 노름꾼 술꾼 제비족 전쟁희생자 바보 인생실패자 각각의 이야기들은 슬픈톤이되 그속에 웃음이 있고, 밝은 톤이며 슬픔이 있다. 시적인 감성이 있고 내면의 고백이 있으면 짙은 사회고발도 있다. 지하철에서 히죽히죽 거리고 있는 내자신이 한심하다가도 주인공의 애잔한 현실에는 가슴아프기도 하다.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 단편은 꽃피우는 시간 : 노름꾼 이야기로서 피스톨송의 노름학 강의 내용이 책의 대부분인데, 작가가 많은 공부(?)를 하셨겠구나 싶고 소설쓰는 인간: 미워할수 없는 제비족의 이야기 협죽도 그늘아래 : 코잔등이 시큰해지는 대하소설같은 단편 붐빔과 텅빔 : 독설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개인주의적 인간에 대한 비판 이무기: 정감어린 배경속에서 헤매이고 있다보면, 작가가 설치한 지뢰장치에 걸려들고 만다. 말미의 다른작가분의 서평에서 "작가의 이전소설에 비해 이소설집의 날렵함 통쾌함은 많이 줄어들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줄어든것이 이정도라니, 작가의 소설 찾아서 모두 읽어봐야 할것 같다. 그 날렵합과 통쾌함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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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꾼들이 등장을 우선으로 꼽을 수 있다. 제비, 알콜 독자, 도박사... 그대로 꾼이라는 호칭이 가장 적절한 사람들이다. 그저 착하기만 하고 순수하고 낭만적인 보통 서민의 모습을 나타낸 것 보다는 우스꽝스럽고, 허풍이 센 마치 고전의 민화에서나 등장할 만한 캐릭터이지만 책을 읽다보면 가장 우리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을 성석제 씨가 끄집어 낸 것 이다. 비단 꾼이라는 호칭을 얻어 실제로 우리 현대인의 허울을 덮어 쓴 것 같다. 언뜻 읽기엔 그 낯설음에 다소 특별하게 인식되련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익는 동안 마음 한구석의 통쾌함을 느끼지고 어느 듯 책을 읽는 내내 홀림을 당하게 된다.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인간을 염두로 쓴 글이고, 인간의 모습을 가장 맛깔스럽게 표현한 글인것 같다. 단순 한번 거하게 읽고 참 특이한 소설이구나, 라며 그 감탄에 끝나지 않을 여운을 성석제 씨는 독자에게 안겨주는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물론 나는 품격있는 중독자지. 잠에서 깨면 내가 중독자라는 걸 들키는 게 싫었어. 어, 물론 잠에서 깨면 곧 마셔야지. 그게 중독자의 본분 아니냐구. 일단 세수를 하고 면도를 깨끗이 하지. 슈퍼 주인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이냐, 그 사람들, 동네에 알코올 중독자가 누군지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슈퍼에 가면 엉뚱한 걸 잔뜩 사지. 화장지. 라면. 식용유. 과일. 야채.이쑤시개. 건전지까지. 그리고 맨 아래에 살짝 사 홉들이 소주 두병을 끼워주는 거야. 그러면 슈퍼 주인이 내가 중독자인 걸 모르는 척 해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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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화제의 작가 성석제의 소설을 읽는다. 그가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에 대해서 나는 하나의 인터뷰 기사만을 읽었을 뿐이어서 작가 성석제에 대해 오해를 품지 않으려고 애썼다. 걸죽하게 '노름하는 인간'에 대해서 (진정 그렇다고 믿는다는 듯이 - 그게 문제될 건 전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묘한 애정을 갖고 설을 풀던 작가 성석제에 대해서. '십 년인가, 십오 년 전에 나는 어딘가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길, 세속의 다양함을 숭상한다"고 적었는데, 그 생각은 여전하다'라고 말하는 사람. 작가 성석제에 대해서 나는 오해하지 않는다.
일테면, 이 '협죽도 그늘 아래'는 시인으로 치면 조용히 내놓는 절창과도 같은 작품으로 느껴진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라는 두운을 점점 변조시키면서 그가 읊어대는 한 여자의 삶이란 '자신의 일생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경지의 문장을 낳고 만다. 일테면, '동란문학'이라는 것, 남자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수십년을 고독과 침묵 속에서 소리없이 살아냈던 우리의 어머니들의 모습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니지만 이 단편 속의 여자는 번번히 칠순의 할머니라고 말하고 있는 데도 이상하게도 여전히 꽃같은 청상 처녀로 남아 앉아 있다. 칠순이 되도록 실종된 남편을 동구밖에서 기다리는 한 여자의 삶을 '자신의 일생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라고 서술할 수 있는 경지는 그냥 줏어들은 이야기를 작법대로 직조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나는 이 문장에 결정적으로 감동을 받았고, 성석제를 사랑하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이야깃거리를 제비가 물어다준다'는 식으로 눙치는 이 장난기 많은 작가는 그 깊이를 자꾸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왜? 깊이에 대한 애정과 깊이에 대한 반란의 심정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장난기 어린 이야기꾼의 모습이 그의 겉모습이지만, 이런 절창이 있기때문에 그것만은 아니라고 난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작풍은 깊은 곳에 있는 삶에 대한 심산한 통찰을 그저 부담스럽게 읽히지 않게 풀어내는 일종의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문체가 소문대로 재기발랄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페이소스가 있는 유머, 유머라 할지라도 꽤 점잖게 능청을 떨며 하는 스타일이다. 사실 이런 작가가 인간적으로는 꽤 부담스러울 수 있다. 허허실실한 듯 보이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한마디씩 하는 사람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샘솟는 것이 많아 늘 기대되는 그런 작가이므로,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를 만나서 형 아우처럼 지내게 될 리는 만무하므로.
이 단편을 읽으니 옛 'TV문학관'에서 가슴이 무너질 때마다 버릇처럼 흰 거품을 내며 오래도록 양치질을 하던 여자가 생각나고, 또 경북 경산에 아직도 살고 계시는 내 친구의 외할머니 생각도 난다. 우리 외할머니도. [인상깊은구절] ...그러나 가시리에서 여자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누가 감히 여자의 집에서 도둑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도둑질한다고 해서 도둑질할 수도 없는 것을 가져가서 무엇에 쓰겠는가. 협죽도도 안다. 협죽도에게 물어보라. 수국에게 물으라. 남의 삶을 도둑질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걸 어디다 쓰겠는가고. 여자는 자신의 일생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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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성석제 작가님의 단편소설집 "홀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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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석제를 타고난 이야기꾼 재담꾼이라고들 많이 말하고 있다. 아직 그의 긴 이야기를 읽지 못했지만 처음 접한 그의 소설집에서 약간의 맛보기를 했다고나 할까....
8편의 단편들이 모여있다 세계 최고의 피스톨 송 선생의 강연을 통해서 노름하는 인간들은 꽃을 피우고 한 알콜 중독자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서 술먹는 인간들은 해방을 느끼고 우연한 기회에 댄스의 세계로 입문한 사람을 통해서 한번 시작한 일은 계속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소설쓰는 인간을 통해... 이 모두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면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차피 한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노름하는, 술먹는, 소설을 쓰는 인간들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라고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외 한 아이가 한 아이를 만나 다르지만 어찌보면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는 그 아이와 함께 자신을 회상하며 마치 무엇에 홀린듯이 주르륵 그 사람을 따라가게 되는 <홀림> 출세와 부를 위해 쉼없이 앞서나가는 형과 마치 그 뒤를 쫒아가는 듯한 동생의 인생을 대비한 <붐빔과 텅빔>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는, 얼굴만 알는 남편을 기다리는 한 여인의 이야기 <협죽도 그늘아래>...
그의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명확한 어떤 선을 그리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뭉틍그려져 그들이 조화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다
" 인생은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 되며,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 된다" 이말과 함께 성석제의 소설에서는 느끼는자만의 비극성, 생각하는 자만의 희극성이 뒤섞여 있다는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