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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몰아치는 3월의 첫날입니다. 창문을 때리고 가는 바람은 봄이 오는 길을 내주느라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오지 마, 오지 마. 볕은 틈틈이 덜 마른 빨래를 말려 주느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시작을 준비하는 첫날. 첫이라는 말이 붙은 단어들을 불러봅니다. 시작만 하고 놓아둔 일을 하나씩 꺼내어 바람과 햇볕에 말려 다시 시작이라고 힘을 내 봅니다.
끝물 과일 사러 -김소연 끝물은 반은 버려야 돼. 끝물은 썩었어, 싱싱하지 않아. 우리도 끝물이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제철이 아니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아. 아침에 일어나 멍이 든 사과를 깎았습니다. 흠집이 난 사과를 싸게 팔길래 주문했어요. 야채실에 들어찬 아픈 사과들. 흠집을 도려내고 성한 부분들만 먹었습니다. 상처의 끝은 달고 맛있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게 반, 먹지 못하는 부분이 반. 뉴스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곤 합니다. 권력은 달고 맛있을지 몰라도 그 끝은 썩고 모독과 부패의 냄새를 풍기지요. 새봄이 오는 그날 성하지 않은 그 부분들이 도려내어지길 바랍니다.
행복하여 -김소연허전하여 경망스러워진 청춘을 일회용 용기에 남은 짜장면처럼 대문 바깥에 내다놓고 돌아서니, 행복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행복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골목길에선 껌을 뱉듯 나를 뱉고 돌아서다가,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에서 도르르르 떨어져 구르는 토큰 같은 옛사람도 만났다 오늘은 행복하여 밥이 먹고 싶어진다 인간은 정말 밥 만으로 살수 있다는 게 하도 감격스러워 밥그릇을 모시고 콸콸 눈물을 쏟는다 행복하여 눈물이 난다는 이 청춘의 비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요. 대문 바깥에 놓인 일회용 용기에 버리고 온 나의 젊음과 청춘의 찌꺼기를 외면합니다. 수거해가는 아저씨의 오토바이가 씽씽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바람과 비를 뚫고 지나간 나의 어제는 오늘의 햇빛으로 말끔해집니다.
누구나 그렇다는 -김소연- 이불 가게를 지날 때 묻는다 새 이불을 덮듯 너를 찾으면 안 되냐 새 이불을 덮어 상쾌하듯 너를 덮으면 안 되냐 건널목에 서 있을 때 나는 묻는다 파란 불. 내 마음에 켜진 새파란 불빛과 길 건너의 오히려 낯익은 세계를 너는 반가워하느냐 수면을 취하는 동안만 나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밝은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이 길을 걷는다 은행의 통장 정리기 앞에 서서 타르르르······, 명쾌히 찍혀 나온 입금을 확인할 때 명쾌하지 못한 내가 아니라 누구나 그렇다는 이 청춘이 싫어졌다 인출기에서 빠져나온 통장. 왼쪽으로만 숫자가 찍혀있을 때의 그 실망감. 숫자는 자꾸 줄어들고 숫자는 자꾸 작아지는 것으로 나의 오늘을 증명하려고 듭니다. 누구나 그렇다는데 누구나 아프다는데 나만 가족이 없고 나만 혼자인 것 같은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요. 안 한 다와 못한다 사이를 건너가는 건널목에서 우리는 마주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시작과 끝은 없다는 게 이 세상의 문법입니다. 어떤 날은 시집을 거꾸로 읽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일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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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디단 꿈 1 학살의 일부 4 가 좋았다
* 나는 애타게, 간절히, 소원을 빌어본다. 너의 공간이 내 상상과 아주 다르게 건조하기를, 아니, 나를 초대하겠다는 너의 그 집요한 욕심이 아예 증발되기를, 세상 어디에도 나는 초대받지 않기를, 세상 어디에도 내 이름이 남지 않게 되기를, 세상 만사가, 만물이, 삶이든, 삶 아닌 것이든, 고통이며 욕망이며 사랑이며, 갖은 사무치는 것들로부터 너무 가깝지 않아서, 가볍게 지나쳐가기를, 나의 인생이. 그리고 너의 인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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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지금은 달콤한 사랑에 빠져 있어 그 고독을 잊으며 자신을 학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번쯤은 세상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나와 있는 듯한 외로움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그 외로움과 상처들을 잊는 것은 학살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거나 외면하게 되는지... 약한자가 강자의 억압을 이기는 것 보다 강자가 약한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상처를 기억하는 것, 낮은 곳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그 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마음, 삶에 대한 처음의 마음을 지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은 짧은 생을 살다간 시인의 동생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시들은 죽음과 버려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시 안에서 그녀는 늘 굶주리고(나도 아프고 싶어/내가 내 고기로 배 채우면서 과식하고 싶어) 소외당하고(내가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쉽게 잊는 것은/학살의 일부이다...) 버림받는다(피곤하다 털어놓고 싶었어/성냥으로 초에 불붙이던 당신이/ 힘들어, 먼저 말해버렸지)
'학살의 일부'라는 시에서나 '손'이라는 시는 이러한 그녀의 시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고독과 아픔의 이유를 잊어버리는 것, 누군가와의 기억들을 현재의 일상속에서 잊어버리고 누리는 평화는 가짜인 것이고 그것은 학살의 대부분일 것이다. 김소연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려는 노력, 낮은 곳을 딛고 서는 노력으로 시를 써나간다. '벽지를 들고 곰팡이가 일어서는 지칠 줄 모르는 그'힘으로...
또 그녀의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가 더이상 '노래(낭독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보여지는 것)'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실험적인 시들이 실려있다.(십자가의 형태로 나열된 글자들,뱀의 형태로 나열된 글자들...등) 이미 이러한 시각적인 실험들은 황지우로 인해 많이 행해졌겠지만 그녀의 이러한 시도들도 그녀의 시와 잘 어울린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몇몇의 시에서 구체적인 정황들이 잘 드러나지 않고 시가 관념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학살의 일부1 내가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쉽게 잊는 것은 학살의 일부이다 얕은 기분으로 화분에 물 주며 나를 뜯어내듯 죽은 잎을 뜯어내는 것도 학살의 일부이다 이빨을 닦다, 하얀 치아를 보다, 치약 냄새를 맡았다 거울 속의 내가 울음을 터뜨렸는데......그 천박한 이유를 모르는 척 하는 것은 학살의 대부분이다 고무 지우개가 사각의 종이와 마찰을 일으킨다 마찰의 힘으로 한 페이지의 추억이 지워졌다 지워졌다고 믿는 것도 학살의 일부이다 창밖 앙상한 나무는 바람 불어주지 않으니 무대 세트처럼 가짜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은 평화를 누리는 나처럼 바람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도 학살의 일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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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대학의 구내 서점에서 이 시집을 사고, 그 대학의 노천 극장에 동생과 나란히 앉아 이 시집을 읽던 봄날, 이 시집은 그 봄날과 함께 기억난다. 그게 벌써 재작년인가. 날씨가 따뜻하면서도 싸늘했던 것 같다. 볕을 바라기는 좋은데, 방심하고 있다가는 문득 소름이 돋는.
이상하, 달것도 없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20대도 중반을 넘어 후반이 되면서부터 시집을 읽을 때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심장이 찔리는 것같은 아픔이나 충격도 곧잘 느꼈었건만, 그런 건 고사하고, 득달같이 달려들던 이미지들, 소리들, 이런 것들도 만나기가 힘들었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였다. 나한테는, 극에 달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동생과 좋은 오후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던 시집인 데다가, <손>이라는 시는 참 좋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좋은 시 하나만 만나도 그 시집은 좋은 거다, 뭐 그런 말. [인상깊은구절] 손 내 오른손에 만져지는 왼손 내 왼손이 느끼는 오른손에는 애인의 손맛에 취해서 청춘을 망친 자들이 요약되어 있다 악기 숨구멍 마음을 감싼 이 부대자루를 조여맨 자국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의 증언대 '안다'라는 말의 산 증인 오래도록 밟아서 만든 길 본래의 천성을 어지럽힌 장본인 그럼에도 불구한 내 천성의 실마리 말보다 솔직해서 말보다 미더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한번도 받지 못한 이해라는 걸 받아보았으므로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을 누렸던 손 마음의 바람기 마음의 육갑 마음의 단도직입 마음의 주인나리 만지는 쓰는 전화를 걸고 그의 발을 씻어주고 주먹을 쥐는 형제를 염하는 때리는 훔치는 속이는 묶는 뜯고 찢는 은밀함의 극치이며 드러남의 극치인 마음의 가장 비천한 식객 마음의 천형 손이 먼저 저지른 죄들로 인류는 날마다 체한 채 지구를 돌린다 종생토록 죄값을 치러도 손이 있는 한 반성하지 않으며 (pp. 6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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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요. 심심하던 차에 좌석에 구비되어 있는 모닝캄 잡지를 펼쳐 들었죠. 사진과 관련하여 쓴 글을 읽게 되었어요. 글의 어투가 은근히(사실은 굉장히) 와닿았어요. 제 눈알은 잽싸게 글쓴이의 이름을 찾아 연신 굴려대고 있었다죠. 김소연이라. 집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역시나 그분이 쓴 시집이 있었어요. 동화집도 하나 있던가. 어쨌든 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대다가 시집을 직접 사본적이 없는 저로서는 그분의 시집을 구입하는데 있어 큰 의미였죠. 비행기 안에서 그녀의 글을 읽고 느꼈던 매력과 그 매력을 충분히 느끼고 싶어 찾아해맸던 기억을 이렇게 짤막하게 적어봅니다. [인상깊은구절] 밑줄이 그어진 시. (꽤 오래전에 구입한 시집인데 마음에 드는 시들의 제목에 밑줄을 그어 놓았었네요.) @끝물 과일 사러 @절들 보러 가야겠다 @병들어 행복합니까 @즐거운 정신병원 @화성인의 술집 @학살의 일부 밑줄쳐진 구절은요~^-^; (짤막하게 몇줄밖에 없네요.) @달디단 꿈2 -달디단 열대 열매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달려와 너는 차분히 내 앞에 머무를 것이다 @낡은 혓바닥 -몇 사람의 치아를 기억하는 낡은 혓바닥 이제는 하얗게 白雪이 내렸습니다 @학살의 일부 5 (내 생각들 어디를 잘라) -백 가지 항목의 욕망들에 먼지 앉혀 이국의 금색 활자 표지를 박아 책장에 꽃아놓고 싶었다, 장식품으로 무슨 말을 좀 하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또 할말이 있어야 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그는 자꾸만 묻지만 몇백 킬로미터 종횡무진 누비는 내 생각들 어디를 잘라 그에게 보일 수 있을까 언제나 쿵, 하며 치고 없어지는 짧은 토막의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같은 내 욕망들 중 어느 부분이 궁금하신가 |
| 세상의 변죽들에게 보내는 김소연 시인의 시는 아름답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詩語가 아릅답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변죽이나 침윤과 같은 단어들을 비롯해 시인은 좋은 문장을 잘 구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겠지만... 그 시어들을 통해 시인은 주변을 공략한다. 그러나 시인의 극단이 무엇인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김진수씨가 해설에서 밝혀놓은 것과 달리 이 시집은 냉소주의나 허탈감은 아니라 하더라도 심리주의적인 분위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詩作 능력과 달리 아쉬운 점이 많은 시집이다. 내가 시를 잘 몰라서 그렇게 읽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시적 기법이나 모델을 극화한다 할지라도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점에 있어서 시인은 '중심없는 바깥'에서 빼어난 이마쥬들을 보여주지만, 주변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시집을 많이 읽고 시를 쓰는 것 또한 좋아하지만, 김혜순 시인, 조정권 시인이나 김소연 시인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접근하기 힘든 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곽재구 시인처럼 쉽고 간명하게 쓰여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통신의 온라인 상에서 김소연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물론, 그 동호회에서 시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묻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아직도 궁금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시인의 이 시집에 대해 욕망, 이마쥬, 상상력에 대한 모자이크가 한편으로는 뛰어난 소질로 그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소질이 시인의 시를 잡아먹고 있는 것 같다는 식으로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아직 시인의 다음 작업을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런 상상력에 분명 나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때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궁금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시인의 다음 작업에서 나의 궁금증이 어떤 방향으로 해소될 것인지를 기대하며 시인의 건필을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