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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머물고있으면서 남편이 추석에 잠깐 내게로 오는 사이 사서 가져오라고 부탁해서 받은 책이다. 배수아씨의 글이 읽기 편안치 않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은 그 정점에 서 있는 책이다. "이 여자는 뭐 그리 아는 체를 많이하노?" 기내에서 읽으려다 포기했다는 남편.
꿈에 관한 이야기이고 모호하다고 편집자인가가 글을 붙여놨지만 이건 상상이상이다. 물론 간간이 반짝이는 단어나 문장이 있기는 하나 그걸 캐내기 위해 길고 지루한 인내심과의 싸움을 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문장, 내용, 구성, 전개 어느 것 하나 일목요연하거나 정리 된 것이 없다. 싯점도 그렇고 정말 모든 게 뒤엉키고 섞이고 뒤죽박죽이다. 독자로하여금 이러한 인내와 모호함 속에서의 혼돈을 의도했다면 작가는 성공한 글쓰기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시장성은 정말 없어보인다.
작가는 모름지기 무언가를 독자에게 남기거나 보여주거나 깨닫게 해야하고 읽는 즐거움에 빠질 수 있게 해야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얼마간이라도 말이다. 지극히 가볍고 일회적인 글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래서 배수아씨 글을 가끔 읽었던 사람이고.
"정말 이건 아니다" 이렇게 되뇌이게 되는 책이다. 6장 남았다. 어떻게든 손에 들었던 책은 끝을 보는 편이라 끝은 날것이지만 2개월 가까이 한권의 책으로 아파보긴 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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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을 쓴 평론가
‘꿈속에서 흘리는 너의 눈물은 하나의 엄청나게 커다란 보랏빛 방울로, 네 얼굴과 몸을 관통하여 하늘 전체로 퍼져 나간다. 거대한 보랏빛 백조가 네 눈동자로 들어가, 제국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보랏빛 날개로 너를 집어 삼킨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천지는 지평선 가득 오직 보랏빛 황혼이며, 너는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면서 허공 높은 곳에서 너울 거리고, 그러는 한편 그 어떤 무대에서도 볼 수 없었을 만큼 깊은 감정이 깃들인 태도로 편지를 낭독하는데, 물론 나는 여전히 들을 수 없고, 그사이 황혼과 눈물의 몸인 숭고한 보랏빛 백조는 서서히 너를 잡아먹고 있다.’ -184p
이건 꿈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꿈이고 그런 꿈을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1장부터 3장까지가 수니의 행동이라면 4장은 수니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또는 배수아가 왜 이런 책을 쓸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가득하다. 덕분에 어느 정도 수니 또는 작가의 내면을 이해했지만 소설로서의 ‘북쪽거실’에는 실망했다. 소설이 소설로서 끝을 내기 위해서는 단절로 끝을 냈어야 했다. 벙어리 여배우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망명자가 아닌 영웅으로 태어나게 되리라 희망하는 수니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랑 받고 싶은 열망이다. 어떤 형태로 글을 쓰던지 모든 작가들은 사랑 받고 싶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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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북쪽 거실에서 왔다. -배수아의 ‘북쪽 거실’을 읽고. 불친절한 소설이다. 아니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어려운, 이야기의 선이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 심기가 산란해지는 것을 애써 감추며 한 장 한 장을 참을성 있게 넘겨보지만 배수아, 그녀가 뱉어내는 화려한 문장과 쉼없고 끝없는 이야기들 속에 나를 놓아버리게 된다. 그녀의 이야기가 조금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실은 그래서 더욱 좋아했지만) 이야기가 파괴된 이야기 속에서 방황을 끝낼 방법이 없다. 친절하지 않은 소설, 불친절한 작가. 뒷간에 가고 싶지만 차마 후다닥 뛰어갈 수 없어 발뒤꿈치로 지그시 엉덩이를 누르고 허리 아래로 힘을 주며 고집스레 앞을 응시하는 사람처럼, 도전적으로 책을 읽었다. 비현실적인 시공간 속에 그녀가 수니와 희태를 내세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이 책을 계속 읽게 될 것 같다. 마지막 엔딩을 보고 책장을 덮었지만 다 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녀의 관형어는 한번 스쳐지나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수니는 수용소에 스스로 갇힌 사람 중에 하나다. 그곳에서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소리의 매력을 살려 수용소 라디오 진행을 한다. 그녀의 오디오북은 목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런 수니를 끊임없이 쫓고 있는 그, 희태. 그런 희태의 이름을 딴 주인공을 가지고 희곡을 쓰는 린. 피투성이 사산아같다는 느낌으로 제 목소리를 겁내하면서도 멀리 이국땅에 스스럼없이 몸을 던졌다가 희태를 만나게 된 순이. 희태를 중심으로 한 수니 외의 많은 여자들이 나오지만 결국 그 모든 여자들은 수니의 다른 목소리들이 아닌지. 즉 이야기의 주인공을 감별하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그리는 것 조차 모호하다. 누가 실제 주인공인지, 그래서 북쪽 거실에서 온 여자가 수니인 것인지, 순이인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가 하룻밤을 보냈던 다른 남자는 결국 희태인 것인지 전혀 다른 제 삼의 남자인지, 아님 때때로 언급되던 수니의 전남편인 것인지. 제 삼의 남자가 전남편가 동일인물인 것인지. 인물과 인물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 그 곳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인지 묻고 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한다면 그것을 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며, 어떻게 가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공간적 구성도 마찬가지이다. 수니가 5년을 넘게 있었다는 이야기 속의 수용소라는 공간은 ‘수용소’라는 단어가 주는 상식처럼 누군가를 강제로 수용하여 묶어두는 곳이 아니다. 예치금을 넣고 당당히 스스로 들어가는 곳이며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나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수행해낼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 오히려 수용소 밖에서는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자신의 지위 때문에 망설이고 눈치 보던 것들이 수용소 안에서 모두 벗겨지는 느낌이랄까. 수용소의 안과 밖, 그것은 인물과 인물의 경계처럼 모호하고 부질없다. 언제든 예치금을 해약하고 나올 수 있으며 현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수용소 공간은 장을 넘어 계속해서 언급된다. 인물이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공간이 수용소 안인지, 수용소 밖인지 알 수 없다. 아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나도 작가처럼 불친절한 독자가 되고 말았다. 어떤 인물이 어떻게 해서 매력적이었으며,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으며 나도 이러저러하게 살아야겠다. 그게 독후감의 정석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야기가 정석이 아니다 보니 감상도 그렇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불친절한 소설에 대한 친절한 독후감이 되고 싶었는데 아직은 이야기를 덜 읽었나보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해독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읽고 그렇게 듣는 것으로 너무나 충분하겠죠.” 에서처럼 어쩌면 우리 또한 이 책을 해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책 속에서 쏟아내고 있는 유려한 필체와 말의 환영 속에 그냥 마음을 내맡겨 수니가 혹은 희태가 나아가고 있는 햇살 가득한 어느 지점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나는 나 아닌 것의 중심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내부이며, 나는 떨어지는 폭포이고, 거꾸로 놓인 머리이다. 눈을 감고, 느껴지는 낙하의 감각에만 집중하자 머리가 내 몸과 심장 아래로, 탁자를 지나 의자 밑으로 떨어진다.” 와 같이 말하고 있듯이 인물과 인물의 얽힘과 공간의 이동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과정이며 그것을 풀어내 정돈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작가는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큰 가방을 끌고 북쪽 거실에서 온 여자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사라져버린 유령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우리의 기억 저편에 왜곡되어 있는 혹은 수용되어 있는 추억과 우리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다. 북쪽 거실, 그 곳은 뇌의 안쪽 벽에 흐르는 무의식의 안전장치를 푼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