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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지향했으나 현실은 아니었다. 개개인의 평온을 지켜줄 만큼 국가는 강성하지 못했고, 모두가 그런 현실에 염증이 난 상태였다. 때마침 사람들은 세상이 넓다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시장 개척에 눈이 먼 사람들은 거침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떠났다. 본국에서는 크게 내세울 게 없었던 사람들은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굴었다. 모든 질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들은 왕이라도 된 듯 군림했다. 소설 ‘제국’의 주인공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는 젊었다. 그에게서는 권력욕구보다 도피욕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는 저자가 그에게 기이함을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엥겔하르트는 흙으로 만든 푸딩을 즐겼다. 그는 오로지 과일만을 먹는 채식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모두의 비웃음을 샀다. 극단적인 그의 태도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대륙에서 그를 중심으로 반목이 일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중인 독일을 뒤로 한 채 그가 향한 곳은 태평양의 한 독일보호령이었다. 말이 독일보호령이었지 그 곳은 무법지대와도 같았다.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그 곳에 정착했고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과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엥겔하르트 역시 독일인이었기에 독특한 취향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성공할 수 있을 거 같아 보였다. 그가 새로운 장소에서 어떠한 삶을 사느냐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일이었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자유분방한 태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의복을 걸치지 않았으며 오로지 코코야자만을 먹는다. 원주민들에게는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연못은 잔잔함을 유지하는 듯했고, 엥겔하르트는 새로운 세계의 일원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시절 대개의 백인들이 그러했듯 그에게서 우리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읽어낼 수 있다. 원주민에게 행했던 약속은 어느 순간부터 허황된 것이 되고야 말았다. 타인의 노동에 의존했던 그는 물론 전적으로 돈 때문은 아니었으나 손을 놓아버린 원주민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그의 폭력성을 암시하는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엥겔하르트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폭력성은 그의 신념을 건드려야만 분명해진다. 그가 설파한 코코야자주의는 의외로(?) 유럽 젊은이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반항심 짙은 젊은이들은 오로지 신질서를 좇아 엥겔하르트의 생활반경 안에 들어오고야 만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바로 엥겔하르트 내면의 폭력성 때문이다. 그는 아우에켄스의 성적인 취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상대가 자신에게 아무런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감을 두고자 안간힘을 쓴다. 또한 엥겔하르트의 언어에서 우리는 반유대주의의 향을 맡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어떠한 이성적인 설명도 행하지 않는다. 엥겔하르트를 상대로 한 몫 챙긴 고빈다라얀과 엥겔하르트 중 어느 누가 더 선한가를 따지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엥겔하르트의 이상을 좇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은 곧 엥겔하르트를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한다. 저자는 나병과 함께 영원에 가까운 고립을 엥겔하르트에게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내면에 깃든 부조리함을 씻어낼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엥겔하르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며, 대신 그와 모종의 연관성을 지녔던 이들의 비참한 최후를 제시할 따름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불행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말로였다. 인간이 상정한 이상향은 그렇게 쉬이 무너질 성격의 신기루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엥겔하르트는? 이에 대한 답은 엥겔하르트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라고 하여 다른 이들과 달리 핑크빛 미래를 맞이했을 리는 없다. 수많은 이들이 애걸복걸, 서로에게 매달려 생활하는 오늘날이다. 과거와 같은 동떨어진 파라다이스는 기대해서도 안 되고, 또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제국’을 읽고 나니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이라도 틈이 주어지면 내 안에 존재하는 실체 모를 괴물이 성장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괴물은 어느 순간 제 숙주의 숨통까지도 끊어놓음으로써 승리, 곧 파멸을 선언하고야 말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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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크라흐트의 <망자들>을 재미있게 읽고 10월 되자마자 예스24에서 이렇게 저렇게 쿠폰 적용해서 크라흐트의 책 두 권을 샀다. 집에 이렇게 매달 적게는 3권에서 많게는 10권까지도 들어오는데 막상 읽는 건 도서관에서 대출해온 것들이니 100권이 뭐야, 200권은 쌓여있는 것 같다..일단 책상에서 밀려나면 언제 다시 집어들지 기약이 없고 호기심, 다른 크라흐트 작품을 다음달에 살지말지 결정하기 위해 어제 배송 받자마자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망자들>에서 느낀 작가의 세련된 감각? 글쓰기 스타일?이 여기에서도 느껴진다. 실존한 인물을 두고 쓴 논픽션 소설. 독일의 특이한 인간 -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과일만 섭취하는, 야자만 먹을 것을 주장하는 엥겔하르트는 태평양의 카바콘 섬에서 자신의 신념?을 몸소 실행한다. 책에서는 엥겔하르트가 독일을 떠나 섬에 정착하고 살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나와있는데 장면 장면이 꼭 '영화'같다. 영화 필름이 타다다다 거꾸로 돌아가면서 전환되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인사들(히틀러, 헤세, 베지마이트 발명가, 아인슈타인 등등, 카프카와 토마스 만은 등장했다는데 못 알아보았음)이 카메오처럼 지나간다. 유명인사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사실들도 암시하는 선상에서 지나가는 것들이 많아 똑똑한 사람들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알아차리는 재미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짬이 안 되어서 사라예보 사건처럼 대놓고 알려주는 거 아닌 이상 모르겠더라. 헤르베르트쇠헤의 할 총독이 모기에 물려 흑수병에 걸리는 보잘 것 없는 장면도 바그너의 발퀴레가 울려퍼지며 얼마나 재미있게 그려지던지. 아니, 보잘 것 없는 장면 같은 건 없다. 시답지 않게 허투루 지나가버리니 보잘 것 없어지는거지 이렇게 묘사의 대상이 되면 하나하나 독자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한편 유럽 문명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나체주의자, 채식주의자로 살며 해방과 자유를 찾으며 사는 태양숭배교를 창시한 엥겔하르트. 처음에는 섬의 원주민을 교육?시키며 열심히 산다. 자신의 신자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과연 신자들이 엥겔하르트의 책 <근심 없는 미래>와 엥겔하르트가 섬에서 외부로 보낸 편지 기사 등을 통해 하나둘 찾아든다. 신자들은 창시자 엥겔하르트와 섬에서 잘 지내며 지상 낙원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크라흐트는 스위스 작가이다. 이 책 읽으면서 독일 사람들이 읽으면 본인들 약점?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죄 들추어내서 쪽팔리고 신경질 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엥겔하르트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독일 제국을 비판하면서 자유를 찾아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지만 막상 본인 스스로가 '제국'이 되어버린다. 나치처럼 관용은 없으며 자신의 기준, 아니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바로 내치는 독재자. 소설 후반부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씹어먹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순혈, 아리아족, 위대한 독일 제국을 천명하던 독일은 유대인을 말살시킨다. 그 과정에서 독일은 깨끗해지던가? 아니, 2차 세계대전 종전 즈음에는 자기자신을 잡아먹는 에리식톤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 아니 신의 열매인 야자만을 고집하던 엥겔하르트도 마찬가지이다. 다리에는 영양 불균형으로 딱지가 잔뜩 앉은 채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며 앙상하게 야위어버린 엥겔하르트. 섬의 원주민마저 엥겔하르트를 버리고 곁에는 그가 세뇌한 마켈리 한 명 뿐이다. 제국주의, 독일 나치를 비판하는 책과 영화를 무수하게 보았지만 이 책 그 중 발군이다. 무척 독창적이다. 소설의 끝이 소설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로보로스의 구조까지도 엥겔하르트와 하켄크로이츠의 관계, 독일 본국과 식민지, 혹은 엄지 손가락을 빠는 엥겔하르트 - 를 연상시킨다. 크라흐트 참 인상적인 작가. 마음 놓고 다음 달에 남은 한 권까지 사야겠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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