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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작가라는 호기심과 슬픔을 어떻게 공부해야하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으로 읽게 된 책. 근데 너무 어렵고 재미가 없다. 작가의 높은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는 독자의 우둔함을 느낀 독서였다. 난 역시 아직 멀었다. 포기할까 하다가 몇편의 단편들만 골라 읽었다. 그렇게라도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작가의 높은 사유를 따라가고 싶은 독자의 존경심이라고 해두자.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녀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영영 떠났다. 사내는 지금 사과나무를 보며 울고 있지만, 뭘 알기는 하고 우는가? 요 하나가 방을 다 채울 만큼 작은 그의 방이 문제였다는 것을, 사랑하는 여자를 침대에 눞히지도 못하는 그 가난이 문제였다는 것을. 그런줄도 모르는 이의 간절함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잔인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소라 <슬픔속에 그댈 지줘야만 해> 진심을 다해 노래하겠다는 말도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진심이 아니면 부를 수 없다는 말은 좀 달리 들린다. 전자는 의지의 영역, 후자는 기질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고통스러운 진심으로 부를 수 있어 택한 노래를 그는 조용히 불러나갔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진통제를 먹듯 씹어 삼키고 있었다. 특히 3분 30초 무렵에 '그대만을 사랑하는 걸'이라는 가사를 노래할때 그는 마치 신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대목에서 나는 고통받는 예술가를 바라볼 때 느끼게 되는 가학적인 감동에 휩싸여야 했다. 이소라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불편한 적이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노래부르는 모습에 그 고통이 나에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일까? 이소라를 모르던 50대의 울 엄마는 쥐어짜는 그녀의 노래가 귀신소리같다고 했었다. 삶이 힘들어서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느꼈을 전율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엄마의 감상평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소라에게도 우리 엄마에게도 아름다운 고통이였기를 바란다.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태극기 부대를 바라보며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집단과 그 집단의 의견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80이 20(중의 일부)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의견으로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하게 애매하게 독서로 여행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내게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보다는 읽지 못한 책에 대한 갈급이 언제나 더 세다. 그래요? 나는 읽지 못한 책보다는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급이 더 센데...우리 조금씩 나눠 가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