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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하고 나서 달라진 것은, 지난 날을 이야기 할 때의 기준이 ‘집’이 되었다는 점이다.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엄마, 나 고등학교 때 그거 기억나?” 와 같이 나이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던 것이)
“우리 미남집 살 때 있잖아.” “우리가 수영집 살 때 거기서 둘째가 태어났잖아”
결혼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몇 번의 이사를 동반하게 되는데, 예컨대 동반자의 이직이라든가,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는 예정에 없던 이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지난 날의 기준은 년도(year)와 본인의 나이보다 그 때 살았던 집이 쉽게 기준점이 된다.
<글로 지은 집>은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되었다. 강인숙 작가님은 최근 타계한 이어령 선생님의 반려자로, 이어령 선생님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았다. 작가님은 문학평론가로 활동했고, 국문학자로서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영인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영인문학관의 영은 이어령선생에게서, 인은 강인숙작가님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와서 지은 것이 겠구나 짐작해 본다.
강인숙 작가님의 신작 <글로 지은 집>의 제목은 두 가지 의미로 내게 읽혔다.
70년 세월의 동반자와 함께 한 인생 여정의 이야기를 글로써 적어내어 한 권의 책이 되어 그들이 살았던 물리적인 집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글로 지은 집이 되었고,
또 실제로 그들은 양가의 도움없이 빈 손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부부 두 사람이 직업적으로(두분 다 신임 교사였다), 그리고 작가로서 써 낸 글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좀 더 나은 생활환경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그런의미에서 이 부부가 마지막에 지은 집은 실제로 글로 지은 집이 된 셈이다.
나는 때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의 전반적인 것을 바꾼 결혼의 종착지에는 무엇이 있을까하는 좀 뜬금없는 생각. 어쩌면 이 책은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신혼부부는 단칸방에서, 더 이상 밖에서 데이트 한다고 돌아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이가 생기며 셋방살이가 힘들어져 (주인집 어른이 이제 갓 혼자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대청마루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는 지나가면서 “개 발 같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이사를 결심했다. 그 심정을 너무 공감한다.) 사람들은 운이 막힌다며 택하지 않는 골목 끝에 위치한 막다른 길에 속하는 집을 얻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부부가 집 주인 이었기에 그들은 그 작은 집만큼의 자유를 얻게 된다. 나는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오기 전까지는 전세살이를 했었다. 주인집의 눈치도 보았고, 라이프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른 이웃과의 공동체 생활도 겪었다. 이전에 살던 집보다 방이 하나 작은 집을 얻어서 보금자리를 잡았지만, 나는 그 어떤 자유보다도 큰 자유를 느끼며 5년을 여기서 살고 있다.
사 년 동안에 네 번이나 셋방을 바꾸면서, 같은 공간에서 남과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복잡한 것인가를 실감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 것이 무조건 고마웠다. 작으나마 침실이 생긴 것도 좋았으며, 골목이 조용해서 아이가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것도 감사했다. 그 네모난 작은 테두리가 그때 우리 자유의 폭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p140
지금은 도로명 주소가 흔하게 편히 쓰이고 있지만, 그 시절 성북동, 청파동1가, 청파동3가, 한강로2가 100번지와 같은 동네를 부르는 지칭은 사뭇 정겹게 느껴진다. 나는 그 시절의 서울 모습을 거의 모르지만, 이야기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는 글에서 보여주는 풍경을 그대로 상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셋방에서 첫 내 집을 얻었을 때의 행복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나 역시 이 작은 집에서 느끼는 평온함을 다시금 떠올리곤 했다.
뜨는 해 밖에 볼 수 없는 어두운 집에서 우리는 5.16을 겪었고, 화폐개혁도 겪었지만, 첫 집은 첫아이 같아서 좋았던 일들만 생각난다. 한강로 2가 100번지. 번지수도 간결하고 이쁜 그 집을 우리는 본적지로 삼았다. 분가해서 따로 호적을 만든 것이다. 그 집에서 1961년 사월부터 만 이년 간을 살았다. 우리의 이십 대의 마지막 세월들이다.
p155
낮 동안 일을 하면서 생채기를 많이 입었다. 마음에 그대로 날아와 박힌 화살같은 말들이 계속해 떠올라서 집에 돌아와서도 울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하는 독후활동까지 이 모든 과정의 효용이란, 온전히 여기에 집중하여 마음에 어떠한 근심과 잡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래서 저녁시간에는 옛 서울동네의 정취를 떠올리며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 마침내 이번 주 책 읽기를 마치게 되었다.
때로는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내 인생도 이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당도한 곳에서는 이를 글로써 남겨 지은 집이었음 좋겠다. 오늘은 이 책에 고맙다. 글로 지은 집에서 나도 현실의 시련을 잊고, 작은 집, 큰 집, 양옥 집, 적산가옥 등 다양한 집에서 작가와 함께 살았다. 아직도 젊은 치기에 흔들리는 내게 와 닿은 마지막 문장을 갈무리하며 글을 마친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수 없듯이, 사람은 누구도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살 수는 없다. 제왕에게는 혼자 있을 자유가 없고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식이 없거나 건강이 나쁠 수도 있으며, 젊고 건강한 남녀들이 후라스코의 <제8요일>처럼 사랑을 나눌 방이 없어 힘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조용히 산다. 평창이라는 동네 이름이 소리도 의미도 아름답지 않고, 앞으로도 전철이 들어올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곳은 여전히 시설 외 지역이지만, 앞에도 뒤에도 산이 있다. 그래서 김남조 선생처럼 “아름다워서 고마워요”라고 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향해 말한다.
p368
*Yes24리뷰어클럽 자격으로 쓴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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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지은 집 강인숙 열림원/2023.1.13. sanbaram
<글로 지은 집>은 이어령의 부인인 저자가 결혼하여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시절부터 8차례 이사를 해가면서 생활하며 ‘영인문학관’을 짓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수필집이다. 머리말에서 “한 여자가 새로운 가족과 만나 동화되는 과정의 이야기이고, 한 신부가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나만의 방’이 있는 집에 다다르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p.15)”고 한 문장으로 정리하였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나 해방을 맞게 되고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부모를 따라 월남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우로 만난 이어령 선생과 결혼하여 생활하며 겪은 일들을 자서전적으로 표현한 수필집이다. 책의 제목이 <글로 지은 집>인 것을 “지금의 영인문학관 건물은 정말로 이어령 선생 한 사람이 ‘글로 지은 집’이다. 이십 년간의 그의 문학에 대한 대가가 거기 모두 들어가 있다.(p.14)”고 한다. 저자는 1945년 11월에 월남하여 경기여자 중,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대에서 석,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1958년 대학동기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 퇴임하여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우리는 둘 다 계를 들어 빠른 번호를 받아가지고 변두리에 방 하나를 얻어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p.34)”고 1958년 10월에 결혼을 하기 위해 겪었던 일을 털어놓고 있다. 돈이 없어 힘들어하던 시기에 월급으로 목돈을 마련하게 된 보편적인 것이 계를 들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계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하루가 멀다하게 매스콤을 통해 접했던 기억이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다. 아울러 그 시기에 생활비가 좀 커졌던 달에 외상 음식값으로 다툰 일도 소개한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만한 자장면값도 부담이 되던 그 시절의 가난이, 회혼을 넘긴 자리에서 보니 사랑스럽다고 한다. 그때 저자는 가난 같은 것은 거뜬히 견뎌낼 자신이 있어서, 겁도 없이 빈손으로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집에만 오면 누워 지내던 나는 침대에 누워서 그 낮은 창문으로 아래층에 있는 정원을 즐겼던 것이다.(p.77)” 셋방살이를 면하고 이층집을 사들여 살게 되면서 여유를 즐기는 장면을 표현한 글이다. 그러면서 이어령 선생의 지인들이 찾아오던 일이며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을 이사할 때마다 누가 많이 찾아왔는지, 그때의 사회는 어떤 사회였는지를 간간히 기술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저자가 직장을 다니며 맞벌이로 세 아이를 낳아 기르던 일을 회상하면서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몸이 튼튼하지도 돈이 많지도 않아 고생스러웠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는 수필이라 읽는 사람들이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글들이다.
장판방을 제대로 살리려면 시간과 수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한지를 여러 겹 겹쳐서 만든 두꺼운 종이에 풀을 먹인 장판지가 속까지 완전히 마른 다음에 오래오래 콩됨을 해서 남은 습기까지 걷어내며 길을 들여야 호박색의 아름다운 장판이 생겨난다.(p.179)” 콩됨질은 숨을 쉬는 칠이어서 습기를 싫어하는 장판에는 필수적인 공법이다. 습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곰팡이가 피게 되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잊혀진 전통 장판방 만들던 일을 소개하고 있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추억을 소환하게 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장남에 대한 가족들의 과중한 기대감을 “과중한 가족 복지 제도 때문에 한국에서는 기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것 같다. 가족 부양의 과중한 올가미 때문에 박애주의가 성립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p.74)”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은 핵가족화되어 너도나도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예전에는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서 살던 시절이었기에 가족공동체의 결속이 대단했다. 그만큼 그 가족을 이끄는 사람의 부담은 컷는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가족들이 직장을 찾아 떠나가서 대가족이 쉽게 해체되었다. 급기야 소가족을 지나 핵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일인 가구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며 변하는 시대를 실감나게 하는 글이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깊은 산속 같은 기적적인 동네 평창동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 늙어서 나다니기가 어려워지니까 되도록 이곳에 머물면서 낮에는 원고의 먼지를 털고 밤에는 글을 쓰며, 나날이 줄어드는 여생을 누리고 있다.(p.387)” 신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평창동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우니 어느 철에 가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글을 맺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맞벌이 직장여성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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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책으로 지은 집'으로 오독을 했었다. 오독을 하던 제대로 읽든 제목은 뭔가 상징성이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정말 책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을까? 얼핏 페트병이나 아이스크림바(일명 하드)를 먹고 나오는 나무 막대기를 모아 집을 지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책의 재질은 나무가 아닌가. 집 짓는데 나무가 사용되기도 하니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다.
이 책은 1958년 이어령 교수와 저자가 결혼해 살아온 과정을 집의 연대기로 풀어간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발간 때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다. 발행 시점이 이어령 교수의 타계 1주기에 맞혀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이어령 교수는 자신을 위해서는 글을 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어느 때가 되면 평전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때까지는 이어령 교수에 대해서는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집 이야기다.
나는 왜 집 이야기를 좋아할까. 그것은 나의 향수를 가장 많이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향수를 자극하는 다른 것들도 많을 텐데 하필 집이라니. 더구나 난 이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집에 관해서는 (저자만큼은 아니어도) 꽤 쓸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집을 부동산의 가치로만 보는 것 같은데 집도 오래 살면 영혼이 깃드는 법이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보이는데, (교수도 누구도 아닌)남편 이어령 교수와 직업인, 아내, 어머니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저자와 집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들 부부가 함께 어울렸던 당대 문인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등장한다.
남녀가 결혼하면 아이 낳고, 살림 늘리고, 좀 더 넒은 평수로 이사하길 바라는 건 70년 전이나 후나 똑같은 것 같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도 부부의 연을 맺은 이상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서재를 꾸밀 수 있는 집을 갖게 되길 바랐다. 어쩌면 그것을 위해 그처럼 많은 이사를 하고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이들에게 서재가 그처럼 중요했을까. 저자는 책에서 몇 번씩, 남편은 평론을 쓰려면 늘 책을 펼쳐놓고 써야하기 때문에 서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썼다. 그러자 평론가들을 조금 이해가 된다. 요즘엔 서재나 연구실을 갖지 않은 평론가가 있을까. 하지만 이들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50년대 후반 60년대는 여간 부자가 아니면 서재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어느 시인에게 왜 시인이 되었느냐고 묻자,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평론가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런데 이 책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빠져든다. 나 역시 저자가 살았던 세대 안에 교집합처럼 살았으니까.
그렇게 저자는 고진감래 끝에 드디어 2층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남편과 자신을 위한 각각의 서재를 만들어 좋아라 했단다. 그러나 그도 잠시. 2층 집이 그렇게 추운 줄은 몰랐다는 쓴다. 그때는 새마을 운동 때문이었을까. 2층을 올리는 집도 많았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가장 쓸모없는 집이 2층 집이라고 했다. 아직 가스나 기름을 쓸 수 없고 대부분 연탄을 썼는데 그 연탄이 2층까지 덥히진 못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피아노 선생님댁이 2층 집이었는데, 추운 날 피아노를 치러 갔더니 선생님이 입고 온 오버코트를 벗지 못하게 했다. 입에선 허연 김이 나왔고, 피아노 치는 손이 굳어질까 봐 선생님은 조그만 전기 곤로를 켜고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손을 쬐게 하곤 했다. 그래서 대개 2층 집은 겨울 한 철은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불편하고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런 집을 저자는 7년인가를 살았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정말 입에서 김이 나올 것만 같다.
그렇게 이 책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내 눈이 저자가 시구문 근처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멈춘다. 와, 시구문! 우리 집도 시구문 근처에서 살았다. 지금은 철거된 지 오래지만 조선시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저자의 삶의 배경과 내가 자꾸 오버랩되니 무슨 퍼즐을 맞추듯 이 책이 자꾸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의 세 분의 자제 중 한 분이 나와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연배인 걸로 알고 있다. 실제로 두 분은 나의 큰아버지, 큰어머니 벌쯤 된다. 아, 이거 너무 오버하나? 우리나라 사람들 누구와 조금만 비슷해도 뭔가의 동질성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던가. 이해하시라.ㅠ
그러다 결정적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저자는 윤남경 씨가 학교 선배고 친하게 지냈다고 짧게 밝히고 있다. 이럴 수가.
윤남경 씨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분은 소설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80년 대 초중반 K 본부에서 했던 '사랑방 중계'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원종배라는 아나운서와 YMCA 총무를 역임했던 전택부 선생이 MC를 맡고, 가끔 이분이 게스트로 나오기도 했다. 제목 그대로 내 이웃의 이야기를 사랑방에 온 느낌으로 오손도손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였는데 나름 인기가 있었다.
이분의 백부가 윤보선 대통령이다. 그러니 어떤 집 자제인지 알겠지.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그 프로에 나온 윤남경 씨만 보면 왕고모, 왕고모 했다. 촌수에 그리 밝지 않은 나는 사촌 이상만 넘어가면 누가 누군지 잘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이분을 둘러싼 복잡한 촌수를 정리했다.
정확히는 이분의 어머니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나의 친할아버지의 누이시다. 그러니까 이분과 나의 아버지와는 고종사촌 지간이 되고, 따라서 아버지가 왕고모라고 했던 건 이분의 어머니가 나에겐 왕고모님이 되신다는 말이었다. 처음엔 이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 집은 그렇게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런 뼈대 있는 가문과는 단 1도 연관되어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년 시절 명절 때면 할아버지가 고모가 사는 집으로 심부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명절 선물을 드리고 오라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봐 남매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출가외인이고, 워낙 세도가다 보니 처가에서 무슨 말이라도 잘못 흘러 들어갈까 봐 조심이 지나친 거겠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렇게 내외를 하는데 아버지라고 그 심부름이 쉬웠겠는가.
그래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도 한동안 왕래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이 책을 엄마한테 소개하면서 저자와 윤남경 소설가의 관계를 말씀드렸더니 엄마도 이분에 대한 기억 한 자락을 털어놓는다. 엄마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돼서 자매가 놀러 왔는데 얼마나 자로 잰 듯 바른지, 나의 큰 고모 즉 아버지의 누나가 머리를 잘못 빗어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걸 그냥 안 지나치고 콕 집어 지적하더란다. 나는 역시 양반은 다르구나 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털어놓냐면, 사실 그때 내친김에 윤남경 소설가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시절 기자도 하고(대단하지 않은가? 하물며 여자가.) 소설도 꾸준히 써서 그 편수가 꽤 여러 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하면 동명이인의 책은 있지만 이분의 책은 단 한 권도 찾을 수가 없다. 심지어 절판된 것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이분의 출신학교 도서관에 가면 찾을 수 있으려나.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성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 좀 이 분의 책을 발굴해 줬으면 좋겠다.
누구는 6명만 건너면 (누구는 4명이라고도 하고) 우린 어떤 식으로든 아는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저자와 나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먼 친척이 아는 사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이 책이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면서 본의 아니게 사심 가득한 리뷰가 되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이 책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모일 사람이 어느 학교 운동장 한가득은 되지 않을까.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책은 이렇게 저자와 독자가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고, 공감하고 더불어 사고의 폭이 함께 넓어지는 책은 아닐까.
요즘 저자는 어떻게 지낼까 감히 상상해 본다. 워낙에 이어령 교수가 드리운 그늘이 크다 보니 오늘도 홀로 영인문학관을 지키고 있을 저자의 고독이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모쪼록 건강하고 평안하셨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을 내주셔서 깊이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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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지은집 #강인숙지음 #열림원 강인숙 이어령부부의 주택연대기. 옛날 풍경이 이랬었지하며 그려지기도 했다. 이어령선생 못지않게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 시대의 지성인이며, 시인이자 수필에 희곡까지 써낸 작가이다. 대학 동기동창인 이어령선생과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퇴임후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영인문학관은 1969년에 설립하였고 이후 40년동안 수집한 이어령선생의 작품인 원고,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되었으며 문인이나 화가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와의 만남도 우리나라에 내로라하는 작가들과의 만남도 눈에 띄었다.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은 이어령선생이 참말로 글로지은집이다. 두 부부에게 상징적이기도 한 이 문학관은 얼마나 애정이 서려있고 군데군데 강인숙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갔는지 꼭 가보고 싶다. 한 여인이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며 자신만의 서재와 집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두 부부는 작가이며 문학평론가이다. 그래서 제목이 글로지은집인지 이해가 되었다. 신혼초부터 이어령선생은 문인으로써 인정받는 시기였고 저자도 꾸준히 집필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남부럽지 않게 경제적 여유가 생겼음에도 쪼들리는 생활을 하며 6인의 시댁가족의 생활을 도우며 살아갔다. 책의 단락단락 넘어갈때에 써있는 글귀가 인상깊다. 각자의 서재가 꼭 필요한 이유로는 "그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수적이었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각자 자기 몫의 아픔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세월이 계속되었다. 책을 읽을때에도 온전히 읽어야 사유를 하여 사고하여 생각할 수 있다. 주택연대기이기도 하지만 문학관을 설립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피땀눈물이 서려있는 주택편력기이기도 하다. 가족이야기에 뭉클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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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부부로 90 평생을 함께 하면서 살아 온 이야기가 평범한 듯 하면서도 한 가족의 역사를 넘어선다. 그 시대를 함께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저자 강인숙 님은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선생님과 서울대 동기동창이었으며 아내, 세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성북동 신혼 시절부터 지금의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다다르기 까지 그 여정으로 기록하였다.
한 가정의 탄생과 90 평생까지의 삶을 기록하였다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지는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실제 책 뚜껑을 열게 되면 첫 페이지부터 너무 재미가 나서 계속 그 다음 편을 찾게 되면서 읽게 된다. 6.25 전쟁을 겪어낸 어머니 세대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을 했던 삶, 그 당시에는 저자가 어려서 모든 것을 어른들에게 의지해 왔었지만 첫 아이의 어머니가 된 후 겪게 된 4.19 와 5.16 의 총소리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떻게 피난을 가야 하나 고민하게 했던, 역사 속 주인공이었기도 했다. 고등학교 교사 일을 하면서도 대학원에 다녔었고 밤새 어린애를 안고 달래면서 논문을 써야 했던 워킹 맘의 원조, 그 고생이야 말로 글로 다 써 낼 수가 없었을 것이나 이사를 다니면서 집을 넓혀가고 그 집을 찾아왔던 방문객과 친구들, 은인들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유명한 시인, 문인들, 학교 제자들과의 교류, 그들과의 에피소드, 사는 동네에서마다 찾아 온 방문객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그 때의 생활과 삶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소개에서는 학교에서 친분을 쌓게 된 사람들과 서로 힘들었던 그 시절에도 의지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 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으로 읽었다. 지금은 연배들이 많아지면서 먼저 떠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서로 맨 끝에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내용에서는 약간 울컥하기도 했다. 서로 친하게 지내오던 사람들이 먼저 떠나고 홀로 남는 생활이 얼마나 힘들지 간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어령씨는 내게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은 그런 남편이었다." 이 글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고 공경하였던지를, 온마음으로 사랑하였고 그리고 행복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힘든 시대, 근대화가 막 시작되던 그 시대의 새댁으로 워킹 맘으로 아이들과 남편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 왔던 선생님이자 평론가의 서재 만들어 가기, 남편과 아내 모두의 서재를 위해 한 집에 서재 두 개 만들기와 아이들을 위한 방 늘려가기 과정이 이렇게 감동까지 주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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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으로 시작해 원하는 집을 찾기까지 십육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동갑내기 부부의 주택 편련의 연대기를 그리고 있는 책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들어가 살 장소, 바로 집일 것이다. 이 부부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는 거주의 목적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글을 쓰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각각의 서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어령, 강인숙, 두 사람 모두 대학교수였고 글 쓰는 사람이었기에 그들 부부의 집에는 두 개의 서재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강의 준비나 평론, 논문 등은 책을 많이 펼쳐 놓고 써야 하는 글이어서 다른 곳에서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혼 후 한 동안은 단칸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구석에서 밤을 새워 글을 쓰면, 나머지 가족은 불빛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들이 서재가 두 개인 집에 장착하기까지 그들은 집 때문에 항상 쪼들리는 살림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책에는 1958년 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에서 시작해 1974년 마침내 평창동 집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과 영인문학관을 설립해서 운영 중인 현재가 모두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공간을 거치며 살아 왔던 부부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 들어 있다. 청파동, 한강로, 신당동, 성북동, 그리고 평창동에 이르는 시간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들 부부가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마침내 원하는 크기의 집을 짓는 데 성공한 것은, 1974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도 집도 하나도 없는 텅 빈 산 중턱에 외딴집을 지었다. 아이가 셋이었고, 부부 각자를 위한 서재를 위해 방이 아주 많은 큰 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가 십육 년 동안 살아온 여덟 곳의 집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도배지 한 장만 새로 붙인 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하고, 머리맡에 높은 어항이 얼어붙어 있을 정도로 방이 냉골이었던 날도 있었고, 학교 선생으로 일하며 받는 보너스가 이만 오천 원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4.19와 5.16을 동네 한복판에서 목도했던 순간들과 박경리 선생, 김지하 시인 등 문인들과 교류하던 시간과 대가족이 북적이며 살아온 풍경들도 페이지 가득 펼쳐진다.
이들 부부가 마흔한 살부터 일흔넷이 되는 2007년까지 삼십삼 년의 세월을 산 곳은 평창동 집이다. 세 아이의 결혼식도, 여덟 손자의 돌잔치도 그 집에서 치렀고, 열여섯 명의 대가족이 되어 북적거리며 삶의 전성기를 보낸 곳이다. 그러다가 부부 둘만 남는 세월이 온다.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다 보니 신혼초처럼 그 넓은 집에서 둘이만 살게 된 것이다. 부부는 슬프고 외로운 마음을 공부하고 글 쓰는 일로 메꾸어 갔다고 한다. 하지만 집이 너무 커서 유지하는 일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결국 살던 집을 허물고 문학관을 만들 준비를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영인문학관이다. 2001년 개관한 영인문학관은 해마다 2~3회의 기획전을 열고 있으며, 이어령 선생이 13년간 '문학사상'을 하면서 수집한 원고, 초상화, 편지 외에 문인, 화가의 부채, 서화, 애장품, 문방사우 등을 소장품으로 가지고 있다. 근대문학의 성숙기인 70~80년대 작가들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영인문학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글 쓰는 부부가 수십 년에 걸쳐 집을 마련하고, 그것이 결국 근대문학의 자료를 소장한 문학관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담백하면서도, 어딘가 뭉클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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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한 분들이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 글 속에서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시대상을 읽을 수 있고,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온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했을 텐데, 이 책은 몇 가지 특별함을 더한다. 저자가 작년 초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의 배우자라는 사실, 그래서 그분에 관한 에피소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이어진다. 결혼 이후 살게 된 집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라는 구성도 흥미롭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님인 저자를 잘 몰랐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또 다른 특별함을 발견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여성이 결혼, 자녀 출산과 양육, 가정과 직장 일 가운데 어떻게 고군분투하면서 지속적으로 글을 써나갈 수 있었는지, 이 책에서 그 과정을 엿보았다고 할까.
이 책의 저자 강인숙 선생님이 머리말을 쓴 날짜는 2022년 12월, 책의 부제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에 나와 있듯이 연세 구십 때다. 해를 넘긴 현재는 거기서 한 살이 더해진다. 책 말미에 실린 집필 목록을 보니, 저자는 1976년부터 2020년까지 스무 권이 넘는 논문집과 평론집, 에세이를 펴냈다. 이어령 선생님의 에세이를 볼 때도 느꼈지만, 강인숙 선생님의 이 책을 보면서도 동일하게 느꼈다. 오래전 일들을 참 세세하게 기억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셨구나.
저자 부부가 바랐던 집은 글을 쓰기 위한 공간이었다. 원하는 집을 얻기까지 십육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세월은 "보다 나은 집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의 역정"(12쪽)이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부부는 함께 문학관을 짓겠다는 꿈을 키웠고 그 결과 현재 영인문학관이 만들어진다. 이 책에서, 저자가 그 건물을 "이어령 선생 한 사람이 '글로 지은 집'이다."(14쪽)라고 일컫는 배경도 확인할 수 있다.
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부터 현재 거주하는 평창동 집까지, 이 책은 저자가 결혼 후 살게 된 여덟 집들을 소개한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저자 부부를 비롯한 자녀, 가족의 변화, 당시 만나거나 왕래한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 속에는 김승옥 작가 등 여러 문인들의 에피소드도 포함한다. 저자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시아버지, 곧 이어령 선생님의 아버지 사연을 풀어낸다.
빈손으로 결혼했던 저자 부부는 사 년째인 1961년 봄에 집을 샀다. 저자가 남편에게 원하던 서재를 만들어준 때는 1974년이었고, 남편이 대장암에 걸린 2015년 이후 두 사람은 각자 아래층, 위층에서 책을 써나갔다. 책 속에서 노년기의 저자 부부를 보면서, 부부라고 해도 결국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때에 이르면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 부부가 각자 강의하고 글을 쓰는 일, 부모, 자식, 그 외의 역할들을 성실히 해나가는 동안, 가족들과 지인들 중 생과 이별한 이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녀들이나 손주들은 각자의 삶을 살거나 그중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있다. 저자의 문장은 감상적이기보다 관조적이어서, 담담한 듯한 서술의 행간에서 오히려 인간 본연의 숙명적 슬픔이 내재된 느낌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만의 남편 사랑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한강로 2가 100번지로 이사할 때의 에피소드다. 저자는 이사를 많이 다녀서 이사하는 데 베테랑이란다. 그런데 저자가 만삭인 당시, 남편이 집 보러 다니고 계약하는 등 이사를 주도했다고 하는데 짐 옮기는 데는 "션찮을" 수밖에 없었다고. 결혼 후 서재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저자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시간이 아까워서 그럴 수 없었다. 못 박고 이삿짐 나르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있지만, 창조하는 일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그를 일상사에서 멀리해주자는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사랑법이었다."(163쪽)
이어령 선생님이 가장, 자식의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줄기차게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생님 내면의 힘도 있겠지만 아내 사랑의 비중도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저자 자신도 글을 쓰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을 더욱 잘 헤아렸겠구나 싶기도 하다.
같은 전공, 가르치는 직업, 글 쓰는 일 등 그렇게 배우자와 공통 분모가 많다고 해도, 부부 사이에 서로 공유되지 못하는 영역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남편보다 어머니에게 정신적 의존을 많이 했다는 대목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남편에게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터이다. 온전히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 사랑의 마음이었으리라.
이 책은 독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겠다. 먼저 저자 부부의 내 집 마련 분투기인데, 여기서 집이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서재가 있는 공간이다. 다음으로 부부가 결혼 후 노년이 되기까지의 과정, 인생의 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그 부부가 이어령 선생님과 강인숙 선생님이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한 문장씩 읽어나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결혼 후에도 어떻게 여성이 아내, 엄마 역할과 더불어 자기 이름 혹은 글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에세이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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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전 김정운교수의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이 책에서 故 이어령 교수의 서재 책상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족상(足床)이라고 하며 웃어넘기지만 Word프로그램을 쓰기위한 컴퓨터 3대 까지 쓸 정도로 서재의 책상에 애착을 가지는 모습을 보였죠 그 누군가가 "서재는 내가 살아온 나의 역사의 표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도 서재를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의 한명입니다.
이번에 읽은 <글로 지은집 _ 강인숙 作>은 펜으로 먹고사는것을 해결하는 부부의 서재를 만들기 위한 부동산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구순을 넘은 60년 넘는 시간을 대학교수로써, 작가로써, 이어령교수의 부인으로써 살아온 강인숙 작가 자신의 자서전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집은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누군가에게 집은 따뜻한 가족의 보금자리로 인식하지만 강인숙 작가는 집은 두 교수의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한 "펜을 잡는 공간"인 서재를 가지기 위한 다양한 에피소드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집사기가 이삼 년이나 당겨져서 많이 힘이 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자유는 비싼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집이란 자유이자 생존의 근원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26세에 문학계의 혜성으로 등장하며 지금은 <지성의 거인>으로 존경을 받는 이어령 교수와 강인숙 작가이지만 신혼 부부의 첫 공간은 월세방이었다는 그 시작부터가 많이 낮설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전쟁의 포화가 잦아들때쯤 성북동 단칸방에서 시작한 두 부부의 이야기는 18년이 지나서야 종로구 평창동에 자리를 잡을때까지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강인숙작가의 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 책은 강인숙 작가의 자서전같은 내용이기에 부동산에 대한 수익등의 이야기가 아닌 그 시대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와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사회가 고도화 되가며 어느새 개인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책을 읽는내내 "우리의 삭막한 현대사회에서 느끼지 못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계에 대해 읽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책은 연도별/그리고 사는곳으로 1958.9월부터 평창동에 정착한 1974.12 이후 까지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야기가 좋았지만 특히 평창동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깊었습니다. 저도 고교/대학에서의 시간을 평창동에서 지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한 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책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리고 신문, 우유배달, 동파, 보안, 난방이 전혀 안되는 1974년의 내용을 보면서 몇몇 부분은 정말 공감이 되기도 하고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정말 모험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5%가 산으로 이루어진 동네에 서재가 있는 이쁜 집을 보면서 저도 서재를 아끼는 사람으로써 자산가치로써의 부동산이 아닌 자신의 삶의 도구로써의 집을 구하는 모습은 정말 멋지고도 아름답습니다. 5 책이 한편으로 보면 집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역사처럼 보이고 한편으로는 타인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온 행복한 인생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책을 읽고 보니 제목을 참 잘 지은것 같습니다 <글로 지은집>=글로 돈을 벌기도 하였지만 작가로써 평생 글을 썼기 때문에 비로소 가질 수 있었던 집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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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지은 집 (강인숙 지음 / 열림원)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
강인숙 작가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꼭 주택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주택을 살았을 때 있었던 사건을 모아놓은 글로 시작했다. 강인숙 작가가 이어령 선생과 결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가족에서부터 이어령선생이 젊은 시절 가르쳤던 학생들, 많은 문인들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강인숙작가가 세심하게 느끼고 기록하였을지 상상해 보았다. 여기서 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들을 적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크게 느꼈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을 주택의 변화에 따라 그려 놓았다. 아무래도 엄마의 입장에서는 직장 맘으로서 회사까지의 거리도 중요하고 자녀를 친정이든 어른들에게 맡겨야 할 때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주변 지인들일 것이다. 그렇게 엄마들은 맡길 자녀에 대한 생각을 우선으로 하여 집을 선택한다. 남편 이어령선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지만 이어령 선생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중 이어령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했다. 그 분은 양반가의 욕심 없는 세상살이 할 줄 모르는 서생 같은 느낌이 드는 할아버지였다. 요즘 나의 아버지가 그렇게 살고 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갔을 시대에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직장과 살림살이를 책임지느라 날카롭게 살았을 삶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는 아버지를 나로 빗대어 많이 생각해 본다.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겨우 마음의 평안을 얻는 나는 진취적인 사람보다는 안정적인 사람인데 그런 삶을 살 수 없었던 아버지 시대의 불안정을 그는 어떻게 이겨냈던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누구보다 행복한 노후를 보내시는 것 같다. 화초를 키우고 그 화분에서 자란 나무를 잘라 뿌리를 내고 자녀들에게 잘 키워보라며 건내주신다. 나는 어렸을 적 화초를 좋아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40대가 되고 나니 내 마음속에 이렇게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나 싶다. 부모를 생각하게 하는 저자의 글은 옛 시대를 자세하게 그려내어 나까지도 진흙 밭의 불편함이 느껴졌다. 4.19 혁명을 한 개인이 그려낸 페이지가 있었다. 자신도 그 대형에 서서 같이하고 싶었지만 아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식인으로 여성으로 직장 맘으로서의 그녀를 보면서 시대의 고단함이 저절로 느껴졌다. 저자는 처음으로 이어령 선생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주던 1974년이라는 글귀가 가장 가슴을 간질였다. 나도 처음으로 자가가 생겨서 이사한 21년도를 잊지 못한다. 그 해에는 우리가 결혼하여 11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그 집에 들어가기 전 전체 인테리어를 해야 할 정도로 낡은 집이었지만 행복했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자녀들의 요구에 따라 첫아이는 넓고 해가 잘 드는 방으로 만들어주었다. 둘째는 장난감이 많아 수납이 많고 자기가 만든 작품을 진열 할 수 있는 큰 진열대도 따로 만들어서 주었다. 남편은 자기가 모아 온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 해 두고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유리장이 달린 벽붙이 장을 따로 만들었다. 그렇게 남편이 원하는 취미장도 짜고, 여자인 나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 자기만의 스타일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스타일러도 두었다. 그리고 허리가 아프니 안마기에 큰 티비까지. 남편의 취미와 집에서의 안락함을 위해 방 하나는 남편의 방으로 지정해 두고 티비에 기타 엔터테인먼트를 할 수 있도록 꾸몄다. 그 장소는 다른 가족들까지 재미를 느끼는 방이 되었고 이름을 멀티룸으로 지었다. 이렇게 남편에게 그가 즐길 수 있는 방을 준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 방은 우리 가족의 행복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도 이렇게 집을 사랑하고 자녀들이 무럭무럭 커가는 중요한 장소라를 것을 다시금 느끼는 시간이었다. 해당 책을 읽고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돌아 보고 가장 기본적인 주거에 대한 생각을 한번씩 더 일깨워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어령선생의 글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읽고 나서도 읽은 후에도 나를 일깨우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딸을 먼저 보낸 아비의 심정으로 낸 책들을 보면서 같이 울었고 이겨냈다. 빗면에서 바라보는 이어령선생은 따뜻한 여성의 사랑 안에서 이토록 마음껏 발휘 될 수 있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원룸에서 투룸 아파트 그리고 자가를 갖게 되기 까지 나에게도 주택 연대기가 있다. 처음에는 부모의 도움 없이 원룸에서 두 어른이 작은 침대에 끼어 자면서 신혼을 시작했다. 아이가 생기고 임신으로 인해 배가 불러오면서 더 이상 원룸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되었고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거실과 방으로 쓸 수 있는 큰 공간이 있는 투 룸으로 이사를 갔다. 그렇게 그곳에서 첫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냈지만 역시나 둘째가 나올 때가 되니 더 이상 투룸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33평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주택의 불안함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12여년을 지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을 바라보게 되었고 더 쾌적한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그 꿈을 이루었고 과정과 결과를 아름답게 가져 갈 수 있었다. 집 없는 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남편과 나 그리고 자녀들의 소통이 있었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해당도서는 협찬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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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 책은 읽었지만 강인숙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이들 부부의 삶이 개인의 역사이자 우리나라의 역사다. 16년 동안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1974년 평창동 집에 정착한 이야기. 부부의 서재, 세 아이의 방을 위해 큰 집이 필요했다는 글 쓰는 부부를 위한 집. 평생을 글과 함께 따뜻하고 올곧게 살아온 우리 시대 지성의 부부의 삶을 엿보며 나의 미래를 상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