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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분에게 다섯개의 키워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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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살다>를 읽고<읽다 살다> '우리 시대 평신도 5인의 분투하는 성경 읽기'라는 부제가 유독 눈이 가는 책이다. 그간 성경에 대하여 목회자나 전문가분들의 책들은 읽어왔지만 '평신도'라는 라벨(?)을 붙인 성경 읽기에 관한 책은 읽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유투브에서 언제나 손 쉽게 찾아들을 수 있는 설교 말씀들, 그 말씀을 들음으로도 신앙의 유익을 얻었던 때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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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살다>를 읽고

<읽다 살다> '우리 시대 평신도 5인의 분투하는 성경 읽기'라는 부제가 유독 눈이 가는 책이다. 그간 성경에 대하여 목회자나 전문가분들의 책들은 읽어왔지만 '평신도'라는 라벨(?)을 붙인 성경 읽기에 관한 책은 읽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유투브에서 언제나 손 쉽게 찾아들을 수 있는 설교 말씀들, 그 말씀을 들음으로도 신앙의 유익을 얻었던 때가 있었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늘상 설교를 틀어놓기도 했다. 듣는 데 익숙해졌고, 흘려 듣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유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싫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나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태어나서 기억이 있는 시간 동안은 교회에 다녔고, 성경이 항상 나의 근거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는데 게을렀고, 미흡했다.

권일한,,

2020년, 권일한 선생님이 모집하는 성경 읽기 모임에 참여했다. 근 1년 정도를 참여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읽고 질문하게 하셨다. 또는 질문을 하셨다. 나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이었다. 그 질문들이 오래 머물곤 했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맛을 조금 배웠다고나 할까. 성경은 우리에게 넘치는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독자가 상상하고 추론해야 할 공간이 많이 있다는 걸, 권선생님과의 읽기를 통해 조금씩 맛을 보았다.

탁월한 질문자이시다. 그런데 그 삶 또한 존경스러움 자체이시다. 고요한 바다 같지만 물 아래 수많은 이야기와 삶의 모습들을 포용하고 계신 듯한 느낌, 나는 이 분을 보고 내가 끝까지 교사가 되길 포기했던 걸 후회했다. 나도 교사가 되어 그런 자리의 삶을 한 번 살아볼 걸 .

"하나님 앞에서 진짜 나로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44P)

권일한 선생님의 성경 읽기의 키워드를 한 마디로 뽑아보자면 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세상과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만들어주신 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준이라는 말씀, 그 기준을 끊임없이 성경에서 밝히며 살아가셨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남기업,,

나는 토지정의라는 것을 대천덕 신부님의 책 <하나님의 나라>에서 처음 읽었다. 그 때 헨리 조지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 희년이 무엇인지 그나마 단어라도 들어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이런 워딩이나 사상에 대하여 일자무식이었다. 지금도 모르기는 매일반이나, 낯설지는 않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만으로도 친밀감이 느껴졌다. 이분의 "역사적 주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워딩이 인상적이었다. 신앙이 좋으면 좋을수록 결정론적 역사관을 가진 것 같은 태도에 이해되지 않으셨다는 말씀에 나 또한 동의한다. 역사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예레미야 34장의 묵상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역사관을 품고 끊임없이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참여하고 활동하신다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송인수,,

나는 한동안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문구를 나의 카카오톡 대문글로 설정해 두었다. 그것은 송인수 선생님의 <만남>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부터였다. <만남>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여전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교사 시절, 자신은 제자들과 지내는 것이 행복했는데, 제자들은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이 상황이 모순이라 느꼈졌다고 말씀하신 대목이다. 제자들이 행복하지 않은데 교사가 행복하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것인가라는 질문, 이 땅의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의 자리임을 인정하고 편하고 안전한 길을 저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신 순간마다 말씀이 빛이었다는 간증을 읽을 때는 여전히 눈물이 나왔다. 나는 선생님의 고백을 읽거나 들으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다. 주책스럽게.

"다른 사람의 고통이 느껴지면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요. 타인의 삶에 개입하면서 일상이 흔들리고, 문제들이 자기 힘으로 감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내게 주어진 과제와 내 능력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고통을 감당하는 자리에 예수의 제자로 차출되어 왔단 말이에요. 차출되었다고 하지만 자원입대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내 한계를 부수고 하나님의 역사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나는 안전한데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후자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데 내가 위태합니다. 우리는 늘 그 선택 앞에 살아가기 마련입니다"(93P)

그 선택 앞에서 지침과 빛으로 성경을 붙잡고 살아가셨던 얘기가 인터뷰 내내 흘러가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 "생존"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붙들고 사신다는 말씀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 자체임을 알겠다.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평신도 교회들의 공부모임"을 삼년 째 참여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 얻은 유익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가 나로 하여금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콜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주체적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주체적인 성경 읽기다. 반드시 목회자나 성직자의 선포되는 메세지가 아니라도 평신도들의 주체적이고도 다양한 해석 사이에서 하나되게 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이것이 케리그마가 될 수 있다는 것. 사실 나의 경험으로도 그저 일방통행하며 들었던 성경 말씀보다고 내가 의문을 가지고 찬찬히 그 말씀이 그러한가 살폈을 때, 깨달았던 말씀들이 훨씬 내 마음과 신체 속에 아로 새겨져 있다. 평생 잊지 못할 말씀으로.

정병오,,

매일 페북에 말씀의 묵상들을 올리시는 분, 한동안 그분의 묵상글을 즐겨 읽었다. 큰녀석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 정병오 선생님이 계신 오딧세이 학교를 진학하고 싶었는데, 우리 가족은 서울 시민이 아니고 경기도민이라 아쉬웠던 적이 있다. 지금이라면(지금은 서울 시민이니까) 바로 지원했을텐데 말이다. 그러면 선생님을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 인터뷰이 모든 분들이 그렇지만, 부르심의 자리를 알고 그곳에서 세상의 기준과 우열을 탈피하여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참으로 자유자다운 모습이다. 평생을 평교사로 살아가심, 기윤실에서의 섬김, 모두가 부르심에 응답한 삶이고 순종이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심입니다. 내가 나의 부르심을 따라 현장에서 충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 현장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타인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127P)

이 분의 저서 <기독시민으로 산다>를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복음이 이 시대의 악과 싸우는 데서 진정으로 그 대안적인 능력(인간의 근본적인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것,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의를 향해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개인적인 죄와 악의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화된 다양한 기득권과 악한 권세의 본질도 꿰뚫을 줄 알아야 한다."(<기독시민으로 산다>,108P)

이 책은 내가 신앙인으로는 살았지만 기독 "시민"으로는 살 지 않은 것 같은 반성으로 읽게 된 책이다. 내게 영향을 미친 책이라는 뜻이다.

정한욱,,

나의 주체적인 성경 읽기가 권일한 선생님과 더불어 시작되어 평신도 교회들의 공부모임을 거쳐, "성경 묻고 답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가 가져다 준 유익이다. 중국에 있으면서도 도리어 풍성한 성경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zoom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만남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분의 독서력에 놀래고 말았다. 개인 블로그의 이름이 "서음인의 집"이라는 것을 보면, 이분의 독서가 얼마나 폭넓고 깊은지 짐작할 만하다. 책을 음란할 정도로 사랑한다는 뜻이라니.

서음인의 독서와 공유되는 책이 있어서 어깨 뽕이 올라간다. 박혜란 목사님의 <목사의 딸>.

"저자는 한국 보수 기독교의 존경 받는 스승인 박윤선 목사의 기독교를 남존여비와 충효사상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 복음 메시지를 혼합한 '유교적 칼빈주의'라고 규정하면서 잉것이 한국 보수 기독교의 민낯이라고 지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한국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성경주의'가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이라는 사회 문화적 맥락에 주어진 성경을 자신들의 독특한 하부 문화에 잘 맞는 부분만을 골라내는 일종의 선택적 문자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75p)

<목사의 딸>은 한 목회자 가정의 참담한 인생 비참기라고나 할까, 그것은 정한욱 인터뷰이가 지적한대로 성경을 쓰여진 사회문화적 맥락과 관계없이 읽어낸 '선택적 문자주의'가 가져다준 필연적 결과임이 분명하다. 나 또한 고대 근동이라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읽기가 익숙했다. 나의 신앙이 한편 외골수였다는 걸 깨달아가는 중이다.
"복음은 진리지만 그 복음이 구현된 역사적 기독교의 특수한 형태들까지 시공을 초월한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175p)

지금은 나 또한 이런 생각을 한다. 교리란 것, '사랑'을 초월한 교리를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진리를 수호하면서 문자주의적인 성경 읽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워딩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정신을 찾아가는 것. 이에 대해 정한욱 선생님은 김근주 교수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를 빌어,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주장이자 해석 원리는 '사랑의 법'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니 "환대"의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그리하여 저의 마지막 결론은 성서 해석의 궁극적 과제가 영구 불변한 정통 교리를 찾는 것이라기 보다, 지금 여기서 가장 올바른 방법 실천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 이 실천 주제가 '환대'라고 말씀한다. "환대"의 화두는 내게도 매우 중요한다. 나는 어찌하든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환대의 삶을 꿈꾼다. 이런 삶을 꿈 꾸는 것에 대하여 격려를 받는 듯했다.

이 다섯 분의 성경을 읽으며 고군분투하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첫째로는 부끄러움을 어찌할 수가 없다. 꺾어진 반백의 나이에는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그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애쓰며 살았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더 천착하며 궁구하며 살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반백의 나이에 다시 한번 도전을 받는다.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말씀이 그러한가 신사적으로 묵상하며 연구하며 실천하며 살아보자는 다짐을 해본다.

나로 살아가기 위해, 역사의 진보를 위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만하게 살기 위해, 환대하기 위해서 말이다.
z******h 2023.02.0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