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에서 비극이란 작품의 내용과 흐름이 슬픔과 고통을 동반하여, 등장인물의 파멸이나 죽음으로 귀결되는 양식을 일컫는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희곡들이 그 원류에 해당하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예술사에 영향을 끼친 양식이라고 하겠다. 예컨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같은 방식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일상에서의 비극이라는 표현과는 결을 달리하여 사용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극’이라는 주제로 일관한 테리 이글턴의 이 책은 ‘실생활의 참사는 알 것 그대로의 고난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고 단언하면서, ‘그런 고난이 예술에 의해 형태가 잡히고 거리가 두어져 어떤 더 깊은 의미가 풀려 나올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본격적으로 비극 이야기를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먼저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논의를 이끌고 있는데, 그리스의 고전 비극들이 ‘추상적 형식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실체’라는 전제를 통해서 근대 이후 비극이 불가능한 까닭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 거론된 주요 작품들의 내용과 서양문학사에서의 위상을 모르고서 읽는다면, 글들이 다소 난해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비극의 하나로 거론된 <리어왕>에서 드러나듯이 ‘근친상간과 산술’을 비극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로 꼽을 수 있으며, 이어지는 ‘비극적 이행’이라는 항목 역시 다양한 작품들을 거론하면서 그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 ‘유익한 허위’와 ‘위로할 수 없는 자’라는 요인을 거론하면서, 비극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인용된 텍스트의 생소함과 저자 특유의 추상적이고 딱딱한 문체 역시 한몫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와 벤야민을 비롯하여 서양 문화사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소환되고 있기에,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는 점도 내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번역자에 의하면 이 책은 ‘밝은 미래를 약속하며 출발했던 근대가 빚어 놓은 이 참담한 현실, 이 비극적 상황을 인간이 이해하고 수용하고 넘어서려는 다양한 정신적 노력을 비극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번역자가 설명한 내용조차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저 이 책을 끈기있게 완독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나중에 서양문학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후에 다시 읽는다면, 지금보다 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이자 문학 평론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극>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문학과 정치, 철학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관점에서 비극을 다루고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다룬다고 하기에 궁금하여 읽어보았으나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다. 나의 얕고 좁은 견해 때문에 이 책을 읽었지만 맞게 읽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비극은 보편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일상적인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죽음, 광산의 참사, 인간 정신의 점진적 붕괴를 슬퍼하는 것은 어떤 특정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슬픔과 절망은 공통어를 이룬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매우 구체적 사건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비극은 보편적이지만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시작되었고 미적 감상이었다. 그래서일까? 비극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고전 작품들이 있고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듯하다.
"비극은 죽었는가?" 이 질문 때문에 이 책이 궁금하였고 신청을 하게 되었다. 테리 이글턴은 이 질문을 시작으로 여러 철학자의 시각을 빌려 다양한 관점에서 비극을 이야기한다. 여러 책을 언급하기도 하고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언급해서 무지한 나에게는 어려웠다. 테리 이글턴은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한다. 현대 비극은 비극적이지 못하지만 근대성은 비극을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비극의 성격을 바꾸어 존속시킨다고 한다. 그의 방대한 지식을 따라가지못해 오랜만에 책을 읽는 동안 고생을 했던 것 같다. 테리 이글턴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이 어려웠어도 다음에 다시 도전을 해봐야 할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으나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
비극의 구체적 의미는 슬픔, 불행, 비참함을 소재로 한 극의 갈래이다. 비극적인 정신은 숭고함이 드러날 수 있으며 비극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인공의 화려한 특별함에 고귀함을 더한다. 이러한 요소가 모여 그 형체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부딪히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비극적 예술은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은 침묵의 이면에서 울컥하고 밀려 나와 저마다의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냐에 따라 비극의 형태는 또 다르게 느껴진다. 저마다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보편적인 시선에 따른 기준은 다소 어려운 개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의 관점으로 봤을 때, 현재의 비극은 죽었다고 되지만 실패와 좌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비극을 지속하고 있다. 기존의 특권을 벗겨낸다면 실제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비극의 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은 여러형태의 비극을 마주할 때 더욱 명확해진다. 풍부하게 풀어놓은 인간의 힘은 비극과 역경에 관한 일들을 마주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가 비극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홀로코스트는 비극이 아니라고 한다. 참혹할 만큼 무참하여 의미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작품에서의 등장인물들이 고전주의적 고대의 운명 앞에서 얼마나 냉혹한 요구에 맞닥뜨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비극은 조금 다른 형태로 다가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여전히 비극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비극이 되기도 한다. 고통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이 사회에서 비극이 없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이라는 사실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진정한 절망은 우리가 더는 말할 수 없을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책의 철학 속에서 나름의 질문과 그에 대한 질문으로 나를 투영하게 된다. 이 묵직함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래 나를 맴돌 것 같다.
p 22 비극에서 사람은 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죽지 않는다. 진정한 절망은 우리가 더는 말을 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
|
예술의 형식으로서의 비극의 정의, 비극의 위상, 비극의 조건들이 실생활에서 우리가 ‘비극적’이라고 느끼는 참사와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배웠다. 비극은 예술의 형식 가운데 귀족의 위상을 지니고 있어 평등보다는 엘리트주의적이고, 과학적이기보다 영적이며,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속성을 추앙한다. 자기극복이 아닌 운명적 파멸에서 숭고함을 찾는다. 현대 소설이나 드리마는 비극적 참상을 토대로 희망이라는 결론에 이르지만, 비극은 고귀한 지위나 성품을 가진 인물의 운명적 파국을 추구한다. 안나카레니나에게 죽었다가 깨어나도 부부상담을 통한 회복이란 불가하다고. 근대가 내놓은 해결지향적인 관념, 인본주의적 이상은 고전적 비극의 관점에서 비극을 비극적으로 만드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비극은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 현대의 비극을 담아내기에 비극의 한계가 있기에 고전 속에서 우리의 인간적 존엄을 되짚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읽는 내내 단어 하나에 담긴 추상적 개념을 쫓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문장 자체에서 엘리트주의적 불친절함이 넘쳐 흐르지만, 이 또한 비극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치인가 싶었다. 책 전체가 고딕 볼드체로 되어있어서 상당히 강경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문학 이론 같은 형이상학적 논의를 전수하는 장인이 필요하긴 한것 같아. 어떤 것은 지나치게 평이해지면 안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심미주의자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도서제공: 을유문화사 |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우리는 진실로 죽지 않기 위해 예술을 소유하고 있다. ? (p. 142, 니체 인용) . 이 책이 도착하고 나서 기대하는 바와 함께 처음 올린 사진은 커버를 씌운 상태였는데, 보면 볼수록 『비극』에는 제목도 없는 검은 패브릭 양장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벗긴 표지로 사진을 찍어보았다. 나는 비극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모르고 있었다. 비극에 대한 책을 읽고 난 뒤로는 더 모르는 것이 되어버렸다. 테리 이글턴은 비극이 "예술 형식 가운데 귀족"이며, 그렇기에 오늘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을 "민주화하려는 시도"로『비극』을 집필했다. 먼저 비극을 대하는 사상가들의 태도를 언급하고, 공통된 특징(어두운 서브텍스트)으로부터 밝혀낼 수 있는 사실을 통해 '비극적'이라는 말을 정의한다. 니체와 벤야민, 손택, 스타이너와 입센, 체호프, 셰익스피어 등 내가 아는 이름이 등장해서 반가운 마음도 잠시, 이글턴이 제시하는 그들의 저서는 낯설다. 왜 내가 읽어본 책만 쏙쏙 피하는지 속상하다. 물론 많이 안 읽어보긴 했지만. 그래서 글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행학습이 필요할 것 같은 책! (다시 도전하고 말거야) 믿고 있었던 정영목 번역가의 번역도 내가 느끼기엔 조금 거친 듯했다. 책 내용 일부 인용 및 단상.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은 비극을 무해한 환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잘못하면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감정(연민과 공포)을 엄격하게 통제된 양만 먹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비극은 간단히 말해 정치적 동종요법의 한 형태다. (p. 15) : 이 내용을 『오이디푸스 왕』에 적용하면, 관객들은 행복했던 인간이 불행하게 끝나는 모습을 보면서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때 연민과 공포는 적절해야 하며 '정화의 역할'을 한다. 종막에서 코러스는 exodus의 형태로 당부의 말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기 전에는 인간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일컫지 말라." 이처럼 비극은 관객의 감정을 정화하는 공적 치료의 형태나, 권력의 위험성을 당부하는 형태로 정치적 열할을 했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의 연구에 따르면 비극의 정치성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비극은 귀족적일 수도 있고, 반정치일 수도 있다. 완벽한 절망일 수도 있고, 한줄기 희망을 내포할 수도 있다. 그리스 비극이라는, 비극의 초창기 형식이 소실되고 파괴되었으므로, '비극'이라는 말 자체를 둘러싼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혼돈이며 자의적으로 부과한 형식만이 거기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 세계는 그렇고 그런 환각일지도 모르지만 예술(특히 비극)은 구원적 환각이다ㅡ자유롭고 활기차게 살아가게 해 주는 치유의 허구다. (...) 그래서 니체는 (...) 오직 미적 현상으로만 실존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142) ?우리를 주관성이라는 감옥에서 구해 주는 것은 미적인 것이다. 이 최고로 공평무사한 조건에서는 모든 욕망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우리는 사물의 핵심을 들여다보게 된다. (p. 219) |
|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하나의 분야처럼 일컬었던 ‘비극’장르는, 겉으로는 익숙하고 설명하기 쉬운 듯 하지만, 막상 그 작품을 이해하거나 그 안에서 발생한 일종의 ‘비극’에 대해 정의하라치면 그 경계조차 제대로 그을 수 없는 분야였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오이디푸스왕>의 비극과도 같은 비극이라는 범위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품들은 단지 주인공이 죽어서, 혹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 들어간 주인공이 이에 맞서다 결국 죽게 되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걸 테리 이글턴의 잘 정리된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테리 이글턴은 고대 철학자에서부터 현대의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문헌으로, 존재하는 ‘비극’이라는 무형의 형체를 각 분야와 시선 별로 해체하고 또 결합한다.
첫번째 챕터의 제목처럼 ‘과연 비극은 죽은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하다가도 ‘그렇지 않다’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한다.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참사와 우리가 ‘비극적’이라고 생활에서 일컫는 일들은 단지 날 것 그대로의 고난의 문제이므로 비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근대에서의 인간 개별의 삶은 갈등에 의해서만 의미를 띄게 된다는 유진오닐의 말처럼 현세의 우리는 늘 비극을 갈망하기에 비극은 존재한다. 참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부터 <세일즈맨의 죽음>까지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가지 작품들은 학창시절 다 읽었던 친근한 작품임에도, 그 안에서의 ‘비극’으로서의 성립 조건, 혹은 등장인물들이 ‘비극적’이게 되기 위해 거쳐왔던 갖가지 과정들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테리 이글턴이 제시한 헤겔의 변증법이나, 프로이트의 심리분석, 혹은 현대에 등장한 여러 정치, 사회적 이론들의 측면에서 바라본 ‘비극’에 대한 접근은 꽤나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작품을 그냥 이야기로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닌, 작품 속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심리, 혹은 행동에 대한 분석들이 조금은 어려웠지만 꽤나 설득력 있고 재미있는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보았던 모든 ‘비극’ 작품 속의 인물들의 ‘비극적 행태’와 ‘비극적 결과’를 통해, 현존하는 세상의 부조리나 불만에 대한 대리만족이나, 현세에 대한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여태껏 가져왔던 ‘비극’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종전의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테리 이글턴이 소개한 여러가지 접근법을 곰곰히 따져보고 대입해 보며 어떤 방법론이 좀 더 잘 어울리는 것일까에 대해 조금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
테리 이글턴, 『비극』(을유문화사)(2023) <비극적인 삶과 거짓말의 존중> * 비극의 죽음 조지 스타이너는 『비극의 죽음』에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정한 비극적인 정신은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함께 소멸했다고 본다. 이글턴은 스타이너와 같이 비극의 죽음을 선언한 이들에게 단순히 비극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비극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스타이너의 비극은 엘리트주의적이고, 영적이고,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고, 보편적이고, 운명의 문제다. 하지만 이글턴은 이런 정의가 “꽁꽁 싸인 채 고통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와 부조리를 비극으로 보는 듯하다. * 부조리의 극복 -------------- 리처드 매케이브가 근친상간에 내포된 “정체성의 상실 또는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말하듯이 “전통적인 친족 어휘의 혼란은 바벨로의 퇴행, 이해할 수 있는 가치들의 혼란을 수반한다.” 롤랑 바르트는 근친상간을 “어휘의 놀라움”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근대의 고전적인 절제된 표현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는 서로 적대자일 뿐 아니라 거울 이미지기도 하다._p.60 -------------- 그렇다면 그 부조리란 무엇일까?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아들이자 남편, 어머니이자 아내)과 산술(세 갈림길에서 라이오스를 살해한 이는 몇 명인가)의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에 둘이 들어가 있는 문제”다. 또 “인간 행동의 원천은 다양하고 모호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디까지이며, 우리의 고통은 어떻게 파생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비극은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멀게 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다.” *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비극과 관객 -------------- 예술은 기반 없는 인간 실존의 본질이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자신이 놓인 세계―자기 발 밑에 굳은 땅이 있다고 가정하는 세계―보다 더, 또 동시에 덜 현실적이다._p.156 -------------- 비극은 결국 허구의 이야기일 텐데,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진실한 것은 아니다. “연극은”,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이 책의 인용문은 꼭 이렇게 끊긴다), “환각 제곱”으로서 “허위의식”의 “본질에 관해 사유할 수 있다.” “환상은 현실의 대안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생각하는 틀 자체다.” 나는 앞서 언급된 『오이디푸스』의 스핑크스를 마주한 오이디푸스를 떠올렸다. 스핑크스는 인간의 머리를 했지만 여러 동물을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이다. 인간을 닮았지만 괴물인 스핑크스를 마주한 오이디푸스가, 인간의 삶을 닮았지만 허구인 비극을 보는 관객의 모습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비극의 수수께끼에서 현실의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것일까? * 비극의 존중 -------------- 두 경우 모두 고난과 영웅적 저항을 통해서만 어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들의 물러서지 않는 현존을 느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것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서도 그렇듯이, 속박이나 필연은 자유의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_p.192 -------------- 테리 이글턴은 비극을 통해 인간이 부조리에 뛰어드는 것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카뮈와 여러 작가가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부조리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는데, 그는 기존의 논의가 비극의 범위와 다양성을 축소해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글턴이 그렇게 비극의 죽음을 부정하고 비극에 관한 논의를 재정립한 이유가 결국 고통받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통이 위로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비극은 고통받는 인간을 존중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비극이 굉장히 현실적인 (아폴론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느꼈다. 부조리에 맞선 체념을 인정하고도 존중하는 문학. 비극이 읽고 싶다고, 늦게나마 생각했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비극> 이 책은 비평서이기 때문에 언급된 작품들을 다 알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하물며 어떤 한 시대도 아닌, 고대에서부터 근대까지에 이르는 비극의 예술적,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 흐름의 모든 것을 훑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확고하다. 나는 <비극>이 현대에 가지는 의미와 그것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에 방점을 찍고 읽어 보았다.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철학자는 단연 니체이다. 그 다음은 헤겔, 자크 라캉, 소포클레스, 쇼펜하우어, 칸트, 플라톤 등이고 작품은 <오이디푸스>, 작가로는 셰익스피어와 입센이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저자는 왜 이토록 많은 지식들을 나열했을까?
이글턴은 비극은 “위대한 예술과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정치적 쟁점들이 긴밀하게 맞물린 곳”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가 역사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비극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시도이며 그것은 결국 이 책이 독자들뿐아니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현실의 비극과 예술적 형태의 비극을 구분한다.
하지만 현대의 삶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겪으면서 영웅적 서사의 비극적 운명이 아닌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며 딜레마들로 가득하다. 자유주의 사회는 “자기를 완성할 권리”가 절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 전통적인 윤리를 거부할 수 없다.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윤리가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할 때, 사회의 선이 나의 선과 충돌할 때,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대치될 때. 우리의 비극은 영웅의 운명에 비해 하찮게 여겨지는 이중비극의 고뇌를 야기한다. 때문에 현대의 우리에게는 비극의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비극적 주인공의 자격은 무엇인가?
그리고 비극의 역할은 “실존의 잔혹이나 부조리에 관한 이런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관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글턴은 “세계는 그렇고 그런 환각일지도 모르지만 예술 (특히 비극)은 구원적 환각”이라고 이야기한다. 니체 또한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진리 때문에 소멸할지도 모른다. 비극은 카타르시스라기보다는 영적 치료제다.”라고 주장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근대 비극 예술의 한계와 그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결국 현대의 일상의 비극을 현대 예술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 고전에 다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은 왜 비극은 죽었다고 이야기하는지 그의 첫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충분하다.
이글턴이 설명한 것처럼, 비극 예술은, 바로 지금 그 죽음을 맞았고, 비극의 근친상간적 특성에 따라 그것이 진실이자 환각이며, 눈이 멀게 됨에 따라 현실을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의 이행에 따라 비극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반대로 재탄생을 기대할 수 있다. 즉 비극은 비극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자기 이해‘를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극 예술은 비극적 삶 속의 위로할 수 없는 자들을 구원적 환각을 통해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비극은 죽었는가?” 이글턴은 말한다.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고. 비극은 근대에서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변형된 모습으로, 새로 연장된 생명으로 살아있다고. 우리는 이제 영웅(귀족)이 아닌 보통의 사람(평민)에게서, 예술 형식의 하나가 아닌 생활방식의 하나로서,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 비극을 조우한다. 참담한 현실에 고통 받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는 인간이 바로 비극의 주인공이다. 예술적 의미로 굳이 치환되지 못해도, 동정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지 못해도, 비극은 내가 살아가는 이 곳에서 어느 누구나 겪고 있기에 공공의 감수성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 아래에서 흘리는 눈물도 높은 데서 흘리는 눈물만큼 비극적이다. 비극은 바로 이곳에 살아있다.
을유문화사에서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
|
『비극』 -위대한 평론가의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문학과 정치, 철학과 연극 등을 총망라한 비극 탐구 테리 이글턴 / #을유문화사 . . ??비극은 보편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일상적인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죽음, 광산의 참사, 인간 정신의 점진적 붕괴를 슬퍼하는 것은 어떤 특정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슬픔과 절망은 공통어를 이룬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매우 구체적 사건이다. p13 . .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이자 문학 평론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극 탐구.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비극이 아닌 예술이 갖는 비극의 의미를 파고든다. 철학자와 비평가, 문학작품들이 말하는 비극은 그동안 1차원적 접근으로 가능했던 비극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고통과 절망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면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많은 작품과 인물들이 인용되는데 역시나 반은 알고 반은 모르겠어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이 설명되는 가운데 한가지 분명한 건 모두 비극과 연결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건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주인공 요소를 두루두루 갖춘 영웅이나 특정인물로 대표되었다면 근대에 들어서는 개인이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근대성은 비극을 망치기는커녕 생명을 새로 연장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p43 이 문장은 책에서 첫번째로 등장했던 질문, '비극은 죽었는가'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해준 듯했다. 시대에 따라 비극의 면모는 다를지언정 죽지않고 어떻게든 연장될 뿐이라고. 이를 뒷받침 하듯이 "희극과 비극 양쪽 모두 오랜 원천은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 가운데 누구든 욕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 비극은 예술에 의해 구체적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개인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것도 같다. 타자에 의해서든 간에, 자기가 주체가 되든 간에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작품속 비평으로 편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철학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난해하고 모호한 와중에 묵직한 질문도 깊이 박힌다. 아마도 비극은 개인의 일상에서도 넓게는 인간사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여태 나는 남의 일로만 치부했으니까 더더욱;). 따져보면 그건 곧 나를 투영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받았던 경험으로 알게된 새로운 사실인 거 같다. 이게 또 묘~하게 위로가 된단 말이지. 옮긴이의 말중에서 그땐 몰랐고 지금은 무슨 말인 줄 알아듣는 문장을 옮겨본다. . . ??그러나 『비극』은 여든에 다가선 노비평가가 평생 숙고해온 비극의 틀에 기대 자신이 살고 경험한 이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감당하고 견디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게 매우 추상적이고 딱딱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그 자신의 상처가 아무는 법이 없는, 타인의 상처에 같이 아파하는 내밀한 속내가 은근히 드러난다. 아마도 그런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것이 굳어 글의 결정체를 이루면서 이런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음미하다 보면, 문득 이게 혹시 '위로할 수 없는 자'를 위로하려고 쓴 책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p7 .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 . #비극_테리이글턴 #비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