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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버트 단턴은 1939년 미국 뉴욕 출생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64년 1년간 「뉴욕 타임스」 기자로 근무한 뒤, 1965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1968년부터 프린스턴 대학에서 유럽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책의 사가(史家)’로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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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봄, 파리시 치안 총감에게 “검은 분s의 괴물”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의 지은이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공공연히 회자되는 시로 왕을 비난하는 것은 역모였고 왕권모독이었다. 용의자들이 체포될 때마다 작성된 조서들은 정치적 논평(풍자 시)이 의사소통망을 따라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얼핏 보기에는 전파 경로가 단선적이고 배경이 동질적인 것 같다. 시는 학생, 서기, 성직자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을 따라 움직였고 그들은 대부분 친구 사이였으며 모두 젊었다. 그러나 수사가 확대되면서 그림이 좀 더 복잡해졌다. 시의 이동 경로는 다른 다섯 편의 시가 움직인 경로와 교차했다. 각 시는 선동적이었고 그 나름의 전파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시는 쪽지에 필사되어 건네졌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베겨 쓰고 암기하고 낭독했다. 그리고 지하 출판물로 인쇄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들에 맞춰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바스티유에 붙잡혀 온 최초의 용의자 집단에 더해 일곱 명이 추가로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연루되어 있었던 다섯 명은 도주했다. 결국 경찰은 시를 유포한 14인으로 바스티유를 채웠다. 체포된 14인 모두 파리 시민들과 지역 사회에서 중간 계층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명망있고 학식 있는 집안의 자제들로 대부분 전문직 계급에 속했다. 어디를 살피든 경찰은 궁정에 관한 사악한 시를 노래하거나 읊조리는 이들과 마주쳤다. 성직에 있는 젊은 지식인 사이에 반항적인 태도가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대학이나 법조계와 같이 정통을 고수하며 부르주아 젊은이들의 교육과 직업적 수련을 완성하던 곳에서 그런 경향이 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 시민들은 언제나 무례한 노래를 부르고 음탕한 시구를 암송했으며, 지난 몇 개월을 거치는 동안 도시 곳곳에서 조롱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많은 수의 얀센주의자에 더해 투옥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14인 사건과 무관하지만 마찬가지로 정부를 험담하고 비방한 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들은 구두의 전파 과정을 통해 시의 원문이 그 근본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 진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시는 노래로 불리는 신문 같은 것이 되어 세간의 사건에 대한 논평을 가득 담고 잇었고 폭넓은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재미있고 외우기 쉬운 것이 되었다. 더욱이 듣는 사람이나 노래 부르는 사람이나 자신의 취향에 맞게 시를 변형할 수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인구가 절반도 안 되는 사회에서 노래는 어느 정도 신문의 기능을 했고 세간의 사건에 대해 당시 나돌던 평을 전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노래가 발휘하는 힘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맹률이 아주 높은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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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분노의 괴물’로 시작되는 시가 발견되었다. 괴물은 루이 15세이다. 이는 얼마 전 해임되어 유배 간 모르파 백작쪽 사람이 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시민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시 필사본의 주인은 프랑수아 보니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역추적에 들어갔다. 다른 불온한 시들의 전달들도 드러났다. 신부 르 메르시에는 한 세미나에서 기숙학생 테레가 암송하는 시를 받아 적으며 끝에 논평을 붙였다. 그런데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라 특정 행에서 각운이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신무 기아르에게 전달되었고 기아르는 알레르에게 장갑과 자신이 지는 시를 보내면서 이 시도 같이 보낸다. 이런 식으로 14명을 찾아내 바스티류로 보냈다. 하지만 시인은 결국 찾지 못했다. 시의 흔적은 희미해지고 수사는 무한히 지속되는 일련의 체포들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시를 필사하면서도 사람들을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시를 수정하고 다를 시와 결합하기도 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비롯된 개념으로부터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 억지겠지만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 연상된다. 바르트에게 텍스트는 직물이다. 여러 견해들이 얼기고 설켜 이루어진다. 텍스트의 생성은 독자들로부터 이루어지고 한 텍스트에서 다를 텍스트로 지속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 결코 완성이란 게 없다. 지금의 인터넷 게시물들이 생각난다.
또 낭송이나 노래로 장르나 변형되어 널리널리 퍼지기도 했다. 소문이나 농담, 재담, 경구들과도 엮여 더 이상 구별해낼 수 없었다. 수사를 지휘했던 다르장송 백작은 “최대한 높이 가라”고 경찰들을 채근하며 이 사건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삼으려 했는지 모르지만 수사는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 체포된 14인들은 모두 중간계층의 전문직들이었다. 이는 특히 공부와 수련에 찌든 젊은 지식인들이 흔히 하던 위험한 놀이 중 하나였다. 정치적 음모는 없었다. 이념적 성향도 흐릿했다. 문학적 허세에 빠진 이들은 여럿 있었다. 그들은 고전 수사학을 따르며 송시를 지었다. 낭독을 생각해 고상한 어조와 세련된 운율을 갖추었다. 궁정인 들에게 이는 저속한 시이다. 그럼에도 몇몇 시는 정말 궁정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어야지만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나 전쟁 상황, 정치사안 등 모든 것들이 대중의 재판정에 올려졌다.
대중들은 노래했다. 잘 알려진 멜로디에 새로운 시구를 붙여 부른다. 어디에 붙이냐 하는 것도 비틀기에 하나다. 거리의 노래꾼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쪽에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끼리 모여 돌아가며 잘 알려진 곡에 맞춰 시를 짓는다. 카페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필가들과 함께한다. 그들은 술병을 돌리고 서로 재치 있는 시를 지으려고 경쟁했다. 그들은 급기야 오페라 코미크를 장악했다. 그들이 지은 수백 곡의 노래들이 프랑스 곳곳에서 울렸다.
이런 게 들뢰즈가 말한 ‘리좀’이 아닐까 싶다. 경계도 없이 뿌리처럼 ‘그리고, 그리고’하며 뻗어가고 있다. 그러니 머리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다. 배후를 쫓으려고 해도 쫓을 수 없다. 에두아르 왕자 지지자도 계몽주의자도 이단으로 규정된 얀센주의자도 다 같이 노래한다. 귀족은 궁정에서 궤변논자들은 살롱에서 노동자들은 선술집에서 노래한다.
당시에도 계몽 사상가들이 이를 규정해보고자 했지만 철학적 개념에 사회적 현상은 미끄러졌다. 거리의 여론과 철학적 이상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은 철학자들이 담론으로 구축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런 시도에 조금에 조금도 관심 없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이었다. 이를 바스티유 습격과 인과관계에서 보는 것도 이 사건 자체로의 많은 이야기들을 놓치게 한다. 14인 가운데 그 누구도 혁명적 사고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파리는 이러한 의사소통 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떠들썩한 소리를 루이 15세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은 계몽 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거리에서 끌어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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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한 의대생이 체포되면서 14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p.7)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황제를 비방하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한 의대생이 체포되었다. 지금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막강한 권력을 집중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황제를 향해 조롱 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한 의대생을 체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와 관련된 14명을 추가로 체포하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같은 사건으로 이어졌다. “대신들이 백성들을 약탈하고 왕국이 지옥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루이는 자신의 쾌락에만 빠져 있다.” 매춘부 사생아가 궁정에서 출세하네. 사랑에서나 술에서나 루이는 손쉬운 영광을 바라네. 아! 저기 그가 있어, 아! 여기 그가 있네 근심걱정 하나 없는 그 사람. (p.78) 온갖 방법으로 제 몫을 챙기기 위해 있는 대로 백성을 약탈하는 대신들이 판을 치던 세상이었던 가 보다. 왕궁에 갇혀 여전히 그의 선조 태양왕이 누렸던 호화와 사치에 눈이 먼 황제는 시국을 제대로 돌아볼 눈이 없었다. 왕국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여전히 근심걱정 하나 없이 자신의 쾌락에만 몰두하는 황제. 어쩌면 수십 년 후 프랑스를 뒤흔든 대혁명의 전초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패러디, 풍자는 기본적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행위다. 1:1로 붙을 수 없는 힘의 역학관계에서 맞대어 치받을 수 없으니 뒤에서 소심하게 놀리는 것이다. 최소한 그 힘의 역학관계를 인지하고 있는 강자라면 허허허 하고 웃어넘기면 될 일이다. 그런데 18세기 프랑스에서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그것은 통용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이석기씨와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에 대한 혐의가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란음모’라는 죄명만으로도 무시무시하다. 국가를 전복하고 체제를 무너뜨릴 의지를 담은 것이 ‘내란음모’ 아닌가! 그런데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가카새끼짬뽕> 이라고 게시물을 올린 판사가 사직을 하게 되었고 올 초 변호사 개업조차 잠정보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역 육군대위가 이명박씨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사문화된 <상관모욕죄>가 적용되어 전역을 하는 일도 있었다. 블루하우스에서 끌어내어 단두대로 끌고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저 뒤에서 비꼬고 조롱하고 풍자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끌어 내렸다. 최소한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강자들은 약자들의 소심한 하소연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꼼꼼함을 선보이시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루이15세 황제를 비난한 시를 낭송하고 전하고 쓴 사람들의 죄가 어떤 것이고 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에 있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프랑스에서 어떻게 그 시가 폭발적으로 전해졌는지에 주목 한다. “시는 쪽지에 필사되어 건네졌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베껴 쓰고 암기하고 낭독했다. 그리고 지하 출판물로 인쇄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들에 맞춰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p.17)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너무나 많다. SNS의 대중화는 여론의 형성과 전파를 가히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터넷의 각종 게시판과 개인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 등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전파하고 선전·선동(그러나 아무 말이나 막 해서는 곤란하다. 언론자유지수가 뭐 세계 50몇 위라나……. 자기검열이 중요하다. 아무 말 막 하다가 고소·고발을 당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250년 전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황제를 비방하는 시가 전해졌을까? 저자는 시가 전해진 형태에 주목한다. 필사되어 건네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베껴 쓰고 암기하고 낭독했으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를 개사해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전해진 형태보다 당시의 분위기에 주목한다. 지금도 인터넷 청원이나 서명운동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주로 정치적인 주제가 많다. 아무리 떠들고 SNS 상에서 청원과 서명을 요구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치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자 그에 대한 청원이 불일 듯 일어났고 이미 10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더 많은 대중의 기저에 관심이 되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문제는 이미 1년 이상 지지부진 하고 있고, 이미 철 지나고 별 관심 없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클릭 몇 번 하는 것으로 서명에 동참할 수 있지만 행동으로 이끌어 내지 못하는데 김연아 선수의 경기에는 모두가 관심을 기울인다. 재미있다. 물론, 김연아 선수의 경기와 결과에 대해서 연일 TV에서 말을 쏟아내는 것도 금세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내는데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다. 클릭 몇 번으로 국보급 보물인 김연아 선수의 억울함(본인은 억울한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을 풀 수 있다면 기꺼이 동참한다. 250년 전 프랑스에서도 참다 참다 못한 사람들의 공분이 시와 노래와 각종 인쇄물과 샹송에 실려 구체화 되고 대중화 되었다. 시기와 방법과 형태가 삼위일체를 이룬 것이다. “시의 작법은 아주 단순해 누구라도 시를 지어 노래하고 옛 멜로디에 새로운 시를 입혀 유행시킬 수 있었다.” (p.79) 그리고 쉬웠다는 것이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를 개사해 재미있는 노래를 친구들과 불렀던 경험이 있다. 아마 여자아이들의 이름을 넣어 놀리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 같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 옆에서 깐족대며 노래를 부르다 등짝을 후려 맞으면서도 낄낄 대고는 했었다. 250년 전 프랑스에서도 고귀한 문학가가 도저히 뜻을 알 수 없고 따라 낭송할 수도 없는 시를 지어 일반 백성들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고, 부르고 전했다.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만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도 흐른다는 점을 강조한” (p.229)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반 백성들과 시민들에게 계몽을 선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시혜성 교조주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것에는 귀를 기울일 시간도 없는 시민들은 먹고 사는 일이 더 시급했다.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여전히 문맹이고 여전히 밑바닥에서 처절한 일상을 소화하지만 낄낄 대며 황제를 조롱하고 그것을 전파하고 나만의 시와 노래로 재해석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1798년 프랑스혁명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를 비방하는 시를 짓고 낭송한 사람들이 체포되는 일을 눈앞에서 지켜봤지만 삽시간에 퍼진 여론형성의 경험은 황제를 단두대로 끌어내리는 결과에까지 이르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과 세력, 조직도 이것에 주목했으면 한다. 현학적이고 이론적이고 고매한 글은 결코 대중의 귀를 열 수 없다. 더 이상 대중은 가르치고 계몽하고 선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에 힘쓰지 말고 밑 빠진 독부터 허리 숙여 살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이상 아무리 지지를 요구하고 관심을 요구한다 해도 헛일 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