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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라는 작물로 가닥가닥 짜낸 이야기 풍경이다. 비단폭에 수놓은 산수화든 삼베에 그려진 정물화든 독자는 시인이 고생고생 마련한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면 된다.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 음미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를 좋아하면 할수록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란 화두에 몰입하게 된다. 가령 청마 유치환의 〈깃발〉을 읽는다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리 내어 시를 자주 읊어 보는 것도 좋고 깨끗한 수첩에 필사해도 좋다. 고등학교 수능 참고서만 다시 들추지 않는다면 모두 좋다. 느낌과 감상만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고 문학비평의 여러 이론을 적용해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비평은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누구나 건전한 비평가 역할을 나름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밀하고 체계적인 분석은 공부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여기 공부를 도울 스승 한 분이 계시다. 9년전 문학 공간의 기호론에 입각하여 체계적인 문학비평서를 펴낸 이어령 교수다. 책에는 그의 비평내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론과 실천을 모두 놓치지 않는 힘찬 포용력을 보이며 학술적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 「창작적인 글은 젊은 시절에, 연구논문은 말년에」라는 그만의 저술기준을 실행에 옮긴 첫타자로, 출판까지 십년이란 발효기와 숙성기가 있었다 한다. 분석대상은 청마 유치환의 시 총 599편. 덕분에 청마는 공간시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해법을 아는 자만이 문제를 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면, 이 책은 단순히 비평에 그치지 않고 활용여부에 따라 창작에 관한 글로도 볼 수 있고, 소설이나 영화 같은 다른 문화장르로의 전환도 가능하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딱딱한 논문체의 글이라 읽기 어렵다고 포기하지 마라. 이 책은 미적 인식의 기호학이자 시적 상상력의 논리학이다. 쉽게 체득하려는 도둑심보를 버려라. 공간의 기호학은 구조주의적 접근방식이고 명칭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시간보다는 공간을, 내용보다는 형식을, 청각보다는 후각을, 음률보다는 원근을, 리듬보다는 색채를, 대위법보다는 방위성을 강조하는 내재적 분석이다. 내재적 분석이란 텍스트 자체를 완전한 구조물로 보고 그것만의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고 추구하는 분석적 비평이다. 보통 작가의 생애나 역사적 시대상황을 참조하는 외재적 비평과는 완연히 구분된다. 한마디로 상대가 태권도를 하면 유도나 검도가 아닌 태권도로 응수한다는 말이다. 한편 분석과 형식에 치중한 좌뇌적 비평과 종합과 내용에 치중한 우뇌적 비평으로 구분해 볼 경우, 공간의 기호학은 기본적으로 텍스트 형식을 조밀조밀 뜯어보고 하나하나 연결해 나가는 좌뇌적 비평에 속한다. 모든 비평엔 연장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연장이 좋아야 결과도 좋은 법. 저자가 쓰는 연장은 기호와 공간이라는 두 축에서 나온다. 먼저 기호의 기본은 이항대립이다. 음과 양,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해와 달, 몸과 마음, 수직과 수평, 안과 밖, 위와 아래 등등. 공간은 동서남북과 상하좌우 같은 좌표와 방향성이 있기 마련. 그래서 시의 기호학적 분석에서도 상승/하강운동, 상/중/하의 수직공간과 바깥/경계/안의 수평공간, 아울러 장소의 이탈과 탈주 그리고 회귀 같은 이동이 기본틀이 된다. 청마의 시에 나타난 소재 중에서 수직적 운동과 관련된 기호로는 깃발, 하늘과 땅, 태양과 인간, 산과 나무 등이 있고, 수평적 운동과 관련된 기호로는 우편국, 역, 창문, 행길, 탈옥수 등이 나온다. 공간적 이동이 시간적 요소를 나타내고, 시에다 연속성을 부여한다. 또한 봄/여름/가을/겨울 같은 시간적 매개공간이 직접 제시되기도 한다. 공간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시 속에서 거주하는 것이다. 시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에 속하게 된다. 이 책은 다양한 기호로 무성한 숲을 이룬다. 랑그(언어)와 파롤(말), 기의와 기표, 지배소, 상동성, 이산성 같은 술어와 약어가 등장한다. 문학적 유희가 꼭 가벼워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무겁고 진지하고 장중해도 참된 배움의 즐거움이 그 안에 있으니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작성할 때의 그런 노고가 깃들인 작품이다. 두고두고 뼈까지 씹어먹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공간과 장소는 다르다는 점을 짚어본다. 공간은 물리적인 경물의 배치이며 그런 자리지만, 장소는 정감이 어린 기억의 배치이며 그런 아지트다. 공간의 기호학은 공간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장소의 기호학으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