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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러시아 문학을 읽지 않고서는 뭘 좀 읽었다~ 말하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푸시킨, 고리키, 파스테르나크, 고골리, 솔제니친, 투르게네프, 숄로호프, 벨린스키…… 젊은 그 한 때에 이런 문호의 글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라 말 할 수도 있으리라. 이들의 대단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문학적 깊이가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세상사 이런저런 풍파를 겪어 보니 그들 문학의 근저가 '인간의 본질', 즉 인간다움에 있다는 걸 새삼 인식하게 되더란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내 정도 되는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러시아는 참 이중적 이미지로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문화 예술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그 풍부하고 유려함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건만, 그놈의 이데올로기 시대
각설하고……. 이번에 읽은 책은 건국대
■ 드디어 권태가 도착했다. 모두들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했는데 그가 시간의 총애를 받기 때문이었다. 「지난해」169쪽.
똑딱, 똑딱! 추의 움직임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흘러간 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어디서 나타나,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이런 물음으로 시작하는 작품이 「시간」이다. 똑딱! 한 번에 삶이 조명되고, 똑딱! 한 번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똑딱! 똑딱!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고리키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그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을까?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열정'을 삶의 목적으로 꼽고 있다. 삶이 열정적이라면 그 삶에서 멋진 시간이 펼쳐질 것이라 하면서 '자신의 열망을 소유한 인간 만세!'라 했다. 팁으로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조언하네. 이것이 지상에서 가장 도도하면서도 아름다운 용기라 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인간 만세! 자신의 시간을 강렬한 도도함으로 가득 채워 아름다운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 똑딱! 여러분은 행복하다. 똑딱! 고통스런 슬픔이 여러분 마음을 가득 채운다. 삶의 매 순간을 무언가 새롭고 살아 있는 것으로 채우지 않는 한 그 고통은 평생 동안,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내내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고통은 유혹적이면서도 위험한 특권이다. 「시간」179쪽.
「이제르길 노파」를 읽다가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잠시 눈길을 멈춘다. 그리고 한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사람들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저울질하며 재기만 하면서 평생을 낭비한다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도둑질하고 시간을 헛되이 보낸 후에야 운명을 한탄하기 시작하지. 운명이란 뭘까? 각자가 자신의 운명이야! (218쪽)". 내 자신의 삶이 이러함을 자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의 흐름에 언제나 저울질만 하다가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음을 이제야 나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회한으로 변하여 바람처럼 잠시 온 몸을 훑는다. 전율이 일고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만다.
■ 신은 오랫동안 인간의 희생을 참아왔다. 이제 너무 역겨워진 신은 인간의 희생을 거부했다. 「종」78쪽.
결국 고리키의 주제는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하겠다. 돈의 노예가 되어 타인의 눈물과 노동을 착취하거나 살인을 하고도 무덤덤한 인간 군상에 대한 질타와 인간의 인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마부」,「환영」,「종」. 가난이란 단어 속에 스며든, 어둠기만 한 삶의 이면에 깃든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아쿨리나 할머니」와 「푸른 눈의 여인」.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로맨스」와 「아름다움」……. 이 모든 게 '어떻게 살아 왔는가?' 하는 자기반성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하는 자아성찰로 귀결된다. 1890년대의 작품에서 오늘날 삶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는 이것이 인문학의 진수요 힘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것은 젊은 독자들에게 별로 크게 어필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젊은 열기로 보면 그저 패배주의적 연약함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결국 러시아 문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어느 정도의 연륜이 필요하다고 보겠다.) 어쨌거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런 책 꼭 한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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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Alexei Maximovich Peshkov)'는 필명 ’막심 고리끼(Maxim Gorky)'로 자신을 천명했다. ‘극한의 고통’이란 뜻을 지닌 이름으로 생애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했던 것은 열한 살부터 생계를 위한 벌이에 나서야 했던 자기 삶의 실체, 그 고단함을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편집 『마부』에 수록된 열편의 작품들은 1895~1896년, 그의 나이 27~28세에 발표된 초기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은 놀랍다.
겪어야 했던 세상살이의 고됨, 그 삶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한 걸음 떨어져 오히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성찰했다는 점이다. 소설들은 작가의 이러한 시선들의 다채로운 변주이다. 아니 어린 노동자로서의 시련으로부터 그를 각성케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고통과 고난을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며, 자기 성찰을 토대로 한 내적 변화와 성장은 물론, 노동자를 바로 그곳에 존재하게 하는 외부의 힘, 그 본질을 반성적으로 사유하였다는 점이다.
이 초기 작품들은 1901년 부패한 차르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노동자 파업과 학생 데모를 적극적으로 지지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체포 감금된 이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로의 전환을 이루는 초석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낭만주의, 즉 폐쇄되고 고집스런 단일 진리라는 절대주의의 독단에 반기를 들어 올린 감상주의적 관점이라는 비판이 가해지고 있지만, 돈과 권력을 위해 인간을 착취의 소용물로 여기는 정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어찌 낭만적 감성이라고 폄훼 할 수 있겠는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탐욕의 가치가 정당화되고 지배하는 세계의 본질을 꿰뚫고 삶의 내적 규범을 사유하는 것은 핍박받고 외면당하는 당대 인민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토대이며, 새롭게 쇄신되는 세계로 나가기 위한 앎의 작업일 것이다.
열편의 단편은 바로 당대 인간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던 돈, 오만, 무지, 기만, 탐욕에 매몰된 인간의 삶을 쫓으며, 대체 인간에게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되돌아보고 곱씹게 한다. 소설들은 비교적 단순한 서사로 매우 강렬한 주제를 던진다. 「마부」의 주인공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빠듯한 월급쟁이 삶에 찌들어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자기 능력에 고통스러워한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탔던 마부가 들려준 돈 많은 혈혈단신의 여(女)상인 ‘카피톨리나 자메토바’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어도 싸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에요. ....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혼자서 말이죠. 급소만 한 번 때리면, 돈은 그 사람 것이 될 텐데요.(13쪽)”
그는 생각한다. 인간의 자기기만이란 얼마나 합리적인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이 우스꽝스런 문장은 곧바로 ‘법은 자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이는 곧 자신의 살해 결정은 ‘옳은 일’이 되어버린다. 파벨 자신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떤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알기에 실행 결단이 용이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메토바의 집을 찾아가 무심히 살해하고는 그녀가 숨겨둔 엄청난 돈을 쓸어 담아 온다. 그는 동정도 두려움도 혐오감도 느끼지 않으며 태연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났을 때 그는 자선가이자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유력한 시장 후보가 된다.
그는 자신의 내면, 양심을 둘러보지만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이 물음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내 안에 내적 규범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의 특성인 양심의 가책, 참회, 범죄자의 죄책감이 없는 자신에게 놀라는 것이다. 인간적 감정을 지니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선(善)의 영혼인 듯한 마부가 그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주변에서 단지 비열함과 저속함, 어둠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진정어린 마음이 아니라 항상 어떤 의도를 갖고 일하는”것은 아니냐고.
사실 파벨의 내적 규범 없는 삶이란 우리네의 삶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상 공허와 무관심의 편안함과 유익성 때문에 이렇게 산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돌연 파벨의 전복적인 선언으로 당황하게 한다. 시장 당선 파티석상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8년 전 노파의 살인범임을 밝히며, “내 안에 규범은 없고 나의 심장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곤 단호하게 사람들을 향해 당신 내면에 규범들을 정착시킬 것을, 무관심해지지 말 것을, 그것은 곧 인간 영혼의 죽음임을 당부하는 것이다. 정신적 도덕적 공허! 와~, 이 텅빈 공간을 채운 ‘돈=권력’이 소외시키고 있는 것들로 우리들의 시선을 돌려 자성케 한다.
단편 「환영」은 「마부」의 속편 같은 소설이다. 이는 죄의 냄새 물씬 풍기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포마 미로노비치’의 권력, 모든 이들이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의 이면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돈에 대한 탐욕과 타인에 대한 인식의 저열함을 대비하여 그 위선과 무지에 내재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삶을 비춘다.
「마부」와 「환영」에 이은 ‘돈 3부작’이라 할 「종(鐘)」은 그야말로 ‘돈은 바로 힘’이라는 믿음을 가진 ‘안티프 니키티치’라는 인물을 통해 삶이란 것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성찰토록 한다. “도시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면 마지막 피한방울 까지 능숙하게 짜내고,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할” 탐욕의 화신이다. 과연 이러한 인물이 자기 성찰 능력이 있을까
이 인물을 상징하는 산 위에 높게 솟아있는 성삼위일체 교회에 매달린 청동 종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균열, 즉 비뚤어진 믿음의 파열이 닥쳐온다고 믿음이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는 불굴의 투지, 꺾이지 않는 투쟁이라며 헛소리들을 진리처럼 떠들어대지만 인간의 자기 과신, 그 기만성은 죽음의 문턱에 도달하기까지 변화하는 것은 아마도 실현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의 도덕성과 가치에 대한 일견 계몽적이기까지 한 이 작품들은 그 지향성만큼이나 쓸쓸하게 다가오기만 한다.
어쩌면 이렇듯 인간 군상을 지배하고 있는 공허와 물욕, 그리고 자기기만성이라는 현실의 우울함을 희석시키려고 하려는 듯, 작가는 사랑과 희생을 주제로 「로맨스」와 「아름다움」, 그리고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 네 편의 소설을 쓰고 있다. 「로맨스」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고리끼를 떠 올리게 한다. 집보다 길거리가 마음이 편했던 소년 야쉬카는 인쇄기에 발이 끼어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다.
병실에는 죽음이 임박한 남자 환자가 옆에 누워 있고 그를 간병하는 여동생이 면회를 온다. 외톨이고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다정하게 그의 상태를 물어봐주는 아가씨는 낯선 세계, 새로운 감정을 선사해준다. 옆 침대의 남자가 시체로 치워지기까지 아홉 날 동안 느꼈던 그의 영혼을 흥분시키는 달콤한 행복, 그러나 이후 소년은 아가씨를 보지 못한다. 그에게 다시 찾아온 삶이란 쓰디쓴 치욕과 절망의 연속 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좋은 거였던” 회상할 사랑의 기억이다. 미소, 다정한 언어, 달콤한 영혼의 행복...
「아름다움」은 고리끼를 낭만주의 작가로 부르게 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아름다움, 즉 미(美)는 매혹적이고 숭고하며 경이롭고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보아서 기분 좋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또한 좋은 것이다.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는 철도 노동자인 화자는 지인과 산책을 통해 이층집 테라스에 나타난 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벽돌 담 아래 숨어 바라보게 된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이들의 행위는 그들 머리위에 재가 뿌려질 때 까지 반복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소유욕도 없다. 오직 「로맨스」의 소년 야쉬카가 느꼈던 영혼의 감미로움과 경외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케 해주는 하나의 요소, 아름다움 그것을 작가는 독자에게 선물한다.
댓가 없는 희생, 아니 이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는 유빙(流氷)에 빠져 죽은 수로 안내인의 아내인 푸른 눈의 여자, 삶의 극한에 내몰린 두 아이의 엄마인 여자, 고통과 모멸을 껴안고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길거리 매춘에 나서야 하는 여인의 참혹한 희생을 지켜보는 한 경찰관의 시선이 있으며, 이 세계에서 가장 극단에 내몰린 부랑자들을 거두지만 그들로부터 조롱을 받음에도 어머니같은 사랑을 베푸는 존재를 그리고 있다. 사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교훈적 이야기지만 고리끼는 그의 취약했던 어린 시절, 그 어떤 세상의 돌봄도 받아보지 못했던 결핍을 매우기 위해 썼는지도 모르겠다. 당대 러시아 사회를 휩쓸던 빈곤과 방치의 그 무관심과 결여에 대해서.
자신의 작품 모두를 횡단하는 도덕적 언어와 인간의 숙명적인 시간을 말하는 철학적 에세이 같은 두 편의 소설 「지난 해」와 「시간」은 각기 다른 삶의 형태를 담은 「이르제길 노파」가 들려주는 전설 속 인물들의 삶의 형태를 통해 집요하게 삶의 의미를 샅샅이 살피도록 이끈다. 「지난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쇄신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게으름과 무지를 비난한다. “낡아빠진 사람들에게 왜 새로운 해가 필요하지?”, 의인화된 ‘지난해’가 내키지 않은 머묾의 명령을 받고 변하지 않는 인간들, 권태에게 하는 말이다.
똑딱 똑딱! 시간 속에 부동의 지점은 없다. 인간들이 “임종의 고통 속에서 허덕일 때도 시간은 냉정히 차분하게 자신의 시간을 잴 것이다.” 생명을 줬다가 빼앗는 시간의 기계적인 창조활동 앞에 인간의 생이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살 가치가 있는 삶의 인식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의 물음이다. 「시간」은 삶의 공허와 권태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위업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 설렘과 열정을 촉구하는 삶의 예찬이자 사랑의 찬가일 것이다.
이 소설집의 각 작품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의 과제.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위대한 문호의 답변들일 것이다. 어쩌면 1세기 전의 러시아보다 오늘 우리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부두의 식당과 짐꾼, 온갖 잡역부의 생활로부터 자신만의 공부를 일궈낸 고리끼의 장편소설 『나의 대학』에는 대학교가 없다. 그의 대학은 삶의 실천에서 길어 낸 진정한 길거리에서의 배움이었다. 그의 작품과 인생 읽기는 내게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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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는 시각, 누구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고 싶어 한다. 어떤 이는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걸로, 어떤 이는 더 많이 벌고 저축하는 걸로, 어떤 이는 더 많은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걸로 말이다. 그러다 그 모든 게 허무해지고 벗어나고 싶은 때를 만난다. 짧거나 혹은 매우 긴 그 시각에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갈구하거나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왜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운명이란 거대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 사소한 일상까지 스며든다. 100년도 훨씬 전에 쓰인 막심 고리키의 단편집 『마부』를 읽으면서 나 역시 생각한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태어난 게 죄란 말처럼 정녕 태어났기에 삶이란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그 죄와 벌은 저마다의 심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삶이란 나를 살아가는 일이지, 타인의 그것을 살아가는 게 아니기에 말이다. 때문에 표제작 <마부>의 주인공 파벨에게 해마다 준비하는 크리스마스 행사가 갑자기 바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부>는 파벨의 꿈 이야기다. 그러니까 진짜가 아닌 거짓이다. 꿈속에서 파벨은 돈 많은 노파를 죽이고 그 돈으로 위세를 떨치고 시장에 당선된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런 삶을 영위하다 자신의 죄를 세상에 알린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파벨은 안도한다. 막심 고리키는 소설 속 마부의 목소리를 빌려 모든 파벨(나와 당신)에게 인간의 실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남아 있지 않죠. 서로에 대한 동정심도 없어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돕지 않습니다. 우리는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서로 싸우고, 물어뜯죠. 올바른 분배란 있을 수 없고 사랑도 존재하지 않아요. (…) 가식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더욱더 훌륭한 사람임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어요. 우리 내면에는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아요.” 25쪽
꿈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내 안에 내적 규범이 있는가, 없는가?’ 29쪽) 파벨처럼 삶을 돌아본다. 막심 고리키는 부와 권력을 지녔지만 정신적인 결핍을 채우지 못하는 <환영>의 포마와 <종>의 안티프를 통해 우리네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 보여준다. 돈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로 대우받지 못할 포마, 자신의 명예만 생각하느라 사람들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안티프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건 아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고 죄를 짓는 이도 있다. 남편이 죽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창녀가 되어야 하는 <푸른 눈의 여인>, 거리의 부랑자들을 먹이기 위해 구걸을 하는 <아쿨리나 할머니>는 아프고 안타깝다. 모두가 행복한 삶은 존재할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채워지지 않는 생의 한 부분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 막심 고리키는 <로맨스>와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열한 살에 만난 첫사랑을 쉰이 넘어서도 그리워하고, 고궁한 삶에 아름다운 여인의 등장만으로도 기쁨에 넘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 믿음, 진리, 희망 등에 대한 생각을 재치와 위트로 풀어낸 <지난해>, 단편 전체를 아포리즘으로 담아낸 <시간>,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 어떤 책임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 무조건 남을 위해 사는 삶을 통해 나는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이제르길 노파>까지 열 편의 소설을 통해 생각한다. 겨우 100년을 사는 삶, 제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만 하는가. 후회가 아닌 만족으로 순간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설 속 <이제르길 노파>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 답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저울질하며 재기만 하면서 평생을 낭비한다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도둑질하고 시간을 헛되이 보낸 후에야 운명을 한탄하기 시작하지. 운명이란 뭘까? 각자가 자신의 운명이야! ” 2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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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대학 초년생들에게 있어 필독서였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다가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인도로 점점 혁명에 눈 뜨고 결국 혁명의 화신이 되는 펠라게야 밀로브나의 삶이 마치 화인처럼 그 가슴에 새겨지곤 했죠. 아직도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을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 줄 압니다. 뭔가 의지의 힘줄을 돋구게 만들었던 그녀의 말들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마부'는 그 고리키의 소설입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입니다. 그의 나이 39살에 쓴 '어머니'는 25살에 작가로 데뷔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이었죠. 그 14년이라는 세월의 간격 동안 고리키는 단편과 중편 그리고 희곡을 썼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단편집 '마부'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고리키의초기 모습을 흠뻑 맛볼 수 있다는 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그가 서른이 되기 전에 발표한 것들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막심 고리키가 첫 작가적 여정을 시작할 때 과연 어떠했는지, 달리 말하면 '어머니'라는 걸작은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이지 그 실상이자 흔적을 바로 이 단편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죠. ![]() 모두 10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단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무엇보다 '의식화'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혁명으로 나아갔듯이 바로 악마란 그러한 공감이 결여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조금은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마부'부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크리스마스 날 문득,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의미있게 남길 수 있는 지를 한 환영의 존재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한 부유한 가장이 등장하는 '환영'에다 자신이 헌납한 종이 깨어짐으로 인해 드디어 그동안 저질렀던 죄악이 어떤 형태로든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을 깨닫는 자본가를 그린 '종'과도 같이 하나같이 뚜렷이 부각되는 주제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인지라 무려 130년 이상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4번째 이야기인 '로맨스'와 그 뒤로 죽 이어지는 '아름다움','푸른 눈의 여인' 그리고 '아쿨리나 할머니' 입니다. 불우한 소년시절 우연히 만난 한 여인 때문에 평생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내를 그린 '로맨스'와 역시나 산책길에서 우연히 보게된 아름다운 이국적 여인에 대한 매혹을 그린 '아름다움'은 '혁명' 자체를 은유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혁명도 그렇게 첫사랑처럼 매혹으로 시작되니까요. 그러다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되고 말죠. '아름다움'은 그 시작의 순간을, '로맨스'는 그런 과정을 그린 듯 합니다. 사내는 결국 그 첫 만남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그 미련 때문에 자기 인생마저 망치고 마는데 그렇다고 고리키가 삶에 다가온 그 전면적 변화의 순간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내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니까요.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좋은 거였네... 얼마 안 되지, 그래... 이렇게 술로 세월을 보낸다네. 그런데 그녀에 대해 회상하면... 기분이 좋아져. 난 이렇게 회상하는 걸 좋아한다네. 그녀가 없었더라도... 살았겠지만....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겠지! 빌어먹을... 어떻게든 살다 죽었겠지. 어찌 되건 상관없어. 그런데 그녀가 있어서 회상할 거리가 있다네..."(P. 102) 이걸 읽고 문득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났습니다. 혹 기억나실까요? 왜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후지이 이츠키를 같이 조난당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 추위 속에서 잠들면 죽기 때문에 동료들이 잠들지 못하도록 끝까지 노래를 불렀던 후지이 이츠키를 회상하는 장면. 전 그게 묘하게 감동적이더군요. 결국 인생이란 그렇게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가지거나 남긴다는 게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심 고리키도 그런 면에서 혁명이라는 걸, 혹은 변화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더군요. 설사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번 전부를 걸어보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있다고 말이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진짜 이야기로 남아 내내 기억속에서 갓 잡은 활어처럼 퍼덕이며 삶에 의미를 충전시켜 줄 것이라고. 이 마음을 저는 다음의 이야기인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이 단편집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타인의 외형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한 경찰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너무나 세파에 찌들었기에 타인의 진심은 보지못하는 청맹과니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전혀 잘못 보고 있었음을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삶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보고 싶은 쪽으로만 보고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산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그 경찰관처럼 우리도 서푼어치의 지식과 경험으로 삶 전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요. 바로 그런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박해 오는 것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아쿨리나 할머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 단편과 '푸른 눈의 여인'이 어머니의 원형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모성의 강함과 위대함'을 잘 보여주는 단편들이기도 하니까요. 아쿨리나 할머니는 참 감동적이면서도 아픈 단편입니다. 그녀는 '늙은 악마'로 통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손자, 손녀로 통하는 장성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작고 축축한 지하 방에 모여 삽니다. 그 여덟 명은 일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쿨리나 할머니의 동냥질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들 역시 아쿨리나 할머니만큼이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왔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자들만이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옵니다 그런 그들을 아쿨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먹이려고 매일 동냥질을 합니다. 헌신. 하지만 그런 헌신을 사람들은 할머니를 '늙은 악마'라 부르듯이 경멸할 뿐이죠. 당연합니다. 구제될 길이 전혀 없는 사회 패배자인데다가 인간성도 나빠서 분명 밑뚫린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할 헌신임을 잘 아는 까닭이죠. 사람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할머니는 계속 먹이려고 동냥질을 합니다. 대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걸 해 줄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조차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자신이 아파 누워도 병원에 데려가는 걸 귀찮아하고 묘자리를 위해 모아 둔 돈 역시 자기들 배채우는 데 써버리는 인간들이지만 할머니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그 돈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죠. 생각해보면 이만큼 바보 같은 삶도 없습니다. 타산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뭔가 희생을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대가가 부머랭처럼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쿨리나 할머니에겐 오직 그 '헌신' 자체, 그렇게 그 '과정'만이 중요했습니다.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요? 바로 할머니입니다. 이 단편엔 할머니의 시신을 묘지로 운반하는 후일담이 있는데 바로 거기서 밝혀집니다. 할머니의 삶이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 말이죠. 후지이 이츠키랑 비슷합니다. 마지막 단편에 나오는 이르제길 노파의 단코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그 단코 역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불태우지만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채 죽습니다. 남은 건 그 기억, 이야기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들은 자의 가슴에 낙인처럼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새겨진 이야기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횃불이 되어줍니다. 모두가 욕망에 눈멀어 이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온갖 어지러운 타산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져 그저 삶이 어두운 정글 같기만 하고 나홀로 거기에 외따로 버려져 있다고 느껴질 때, 단단히 중심을 잡고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횃불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남기고, 결국은 사람을 남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진짜 의미라고 고리키는 이 단편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한 이것은 그대로 앞서 나왔던 '환영'과 '종'의 최종 해답이기도 하며 삶이 결국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는 건 마지막 단편인 '이르제길 노파'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독 고리키가 이토록 삶의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어린 나무와도 같았던 시절, 잇다른 비극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나이 네살 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리키를 외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재혼해버렸습니다. 엄마가, 가족의 따스한 보호가 가장 필요할 시기에 그는 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11살 때는 외할아버지가 파산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엔 재혼한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이제 그는 고아에다 가난뱅이였습니다. 사회 밑바닥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들을 만나고 마르크시즘에도 눈을 떴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는 권총 자살까지 감행합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남은 건 만성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 뿐입니다. 고리키의 문학은 그런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없이 겪어온 비극과 고통 그리고 불안. 거기서 끊임없이 되물었던 삶의 의미가 결국 문학이란 형태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물도 가장 밑바닥의 것이 가장 달듯이, 바로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가 길어낸 해답인지라 더욱 공감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과 그 속에서의 성찰이 빚어낸 단편들이 모여있기에 저는 감히 어느 단편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저처럼, '어머니'의 여운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분명 이 단편집도 흡족하게 읽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이 단편집을 통해 고리키를 처음 만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하여, '마부'나 '환영' 그리고 '종'의 주인공들처럼 도대체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계셨다면, 그와 똑같이 많은 고민을 한 이 고리키의 단편집이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르제길 노파가 말하듯, 삶에 마구 천둥 번개가 몰아칠 때, 미리 나타나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스텝의 푸른 불꽃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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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뼈 빠지게 일해도 빠듯한 월급으로 자녀 양육과 가족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어느 날 이런 니콜라예비치에게 불현듯 악마의 유혹이 찾아온다. 쳇바퀴 같은 굴레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대박의 유혹이었다. 그것은 부유한 여상인인 자메토바를 살해하고 그녀의 재산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주인공 니콜라예비치는 이 일을 실행에 옮기고 부를 얻게 되지만, 인간 본연의 마음과 감정을 상실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니콜라예비치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그런 마음과 감정이 없어서 그 일을 실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몰랐기에 그런 마음과 감정이 있음을 몰랐던 것뿐이다. 니콜라예비치는 나이 많고 부유한 여상인 자메토바를 살해한 후에 자기 내면에 규범이 있는지를 반문한다. 이미 살해를 저지른 후여서 규범이 있는지의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니콜라예비치는 자기 마음에 계획한 일을 아무런 감정 없이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그 과정에 (존재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규범이 개입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니콜라예비치를 부추겼던 마부의 말대로, 니콜라예비치는 진정 어린 마음이 아닌 모종의 의도를 갖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긴 셈이다(p. 31). 의도 내지 목적이 인간 본연의 감정을 압도하고 무효화하는 경험을 한 니콜라예비치는 결국 그 사건을 기반으로 축적한 부와 명예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다. 어쨌거나 의도 내지 목적이 승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니콜라예비치는 이런 경험을 통해 내면에 존재하는 본원적 공허를 절감한다. 니콜라예비치는 스스로가 어떤 의도 내지 목적을 갖고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자신은 그런 의도나 목적의 주체가 아닌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수단으로 전락한 대가로 누리게 된 부와 명예가 니콜라예비치에게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담보했지만, 그런 인정과 존경도 결국 니콜라예비치 자신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그를 치장하고 있는 부와 명예를 향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니콜라예비치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렇게 그의 삶은 하루하루 흘러갔다. 그는 내적으로 삶에 대해 더욱더 무관심해졌으며, 단지 일정 기준과 습관, 책임감에 따라 행동하며 살았다. 정신적으로 죽어 있는 그는 죽어 있는 일들을 했다. 그것에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이 없는 그는 자신의 삶에 영혼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 공허감은 더욱더 커지고 발달하여 고통스러울 정도가 되었다(p. 34). 니콜라예비치가 자기 내면의 공허 때문에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징조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은 니콜라예비치에게 진정 어린 마음과 감정이 없이 어떤 의도나 목적에 끌려가는 노예 같은 삶의 속박을 끊어버릴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기 심장이 메말라버린 사실을 느끼지 못했던(p. 35) 니콜라예비치는 자신의 부와 명예에 환호하고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모멸감을 주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p. 36)를 느낀다. 부정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정이 살아난 모습을 보인다. 감정이 살아나 심장에 혈액과 수분이 공급된 니콜라예비치는 자신의 본모습, 곧 노 여상인을 살해하고 재산을 탈취해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살인자이자 범죄자임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부와 명예라는 불꽃 주위로 나방처럼 몰려든 가련한 사람들의 무지에 일침을 가한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은 니콜라예비치의 꿈속 이야기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꿈은 일상생활 속에 억눌려 있는 우리의 원초아(Id)가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서는 결코 현실화할 수 없는 일탈을 통해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p. 35)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나 니콜라예비치의 잠재의식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꿈속에서는 니콜라예비치의 그런 원초아가 어쨌거나 자기 의도 내지 목적을 성취하기는 한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니콜라예비치의 원초아가 그렇게 자기 의도나 목적을 성취한 후에도 계속해서 내면적 규범에 대해 반복해서 질문하고, 내면적 공허감으로 고통을 느끼는 지경까지 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꿈이라는 공간 속에서도 니콜라예비치의 원초아는 초자아(Superego)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심부에 자리한 본원적인 갈등과 부조화는 우리의 실생활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과 무의식 속에서도 근본적인 특징이 된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는 갈등과 공허와 부조화 속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갈등과 공허와 부조화를 찾아가는, 불만족과 불완전의 존재가 아닐까? 자신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면서도 자기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다른 감정들(p. 36)의 발로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일갈하며, 그들에게 심장을 지키고 규범을 정착시킬 것을 주문함으로써, 니콜라예비치도 자신이 느끼는 무한한 본원적 갈등과 공허와 부조화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어떤 희망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니콜라예비치는 결국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니콜라예비치는 그 꿈이 멋지고 환상적이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꿈이 이상하지만 꿈에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니콜라예비치는 꿈에서 깨어나서도 우리가 삶에 너무 무관심해서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중얼거린다(p. 40). 니콜라예비치는 그 꿈이 끔찍하고 무섭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 꿈이 지닌 의미를, 그 꿈이 전달하려는 교훈을 붙잡는 니콜라예비치를 발견한다. 삶은 힘들더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범한 금언이 떠오른다. 『마부』의 주인공 니콜라예비치는 여러분과 나의 모습이다. 이루기 힘든(혹은 비정상적인) 대박을 꿈꾸며, 벗어날 수 없는 일상생활의 굴레 속에서 하루하루를 존재하는 현대 사회의 익명인들...... 채울 수 없는 내면적인 공허 속에 갈등과 부조화를 끊임없이 경험하는 모순덩어리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규범과 가치를 부단하게 찾는 이상주의자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일상에 순응하여 우리 사회로 하여금 순조롭게 운행되도록 하는 현실론자들...... 우리도 니콜라예비치처럼 무심코 지나친,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 새롭게 관심을 돌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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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마부] 차분한 느낌의 표지가 나를 사로잡는다. 막심 고리키라는 이름에 지레 겁을 먹고 흠칫 떨며, 책을 한쪽에 밀어놓으려 할 때, 이 고상한 그라데이션의 표지가 내 마음을 다독거렸다. “겁낼 것 없다...” 러시아 고전문학의 대표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막심 고리키. 예전에 고리키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완전 노란색의 표지에 반해서 읽었다가, 낭패를 본... 1968년이면 도대체 몇 년 전인가...그렇게 오래 전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그의 초기작들만을 모아 놓은 이번 단편집.
모두 10편의 단편 중에서 <이제르길 노파>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러게...어쩐지... 제목이 낯설더라니^^무슨, 러시아 고전을 아주 많이 접해본 사람인 것 마냥 허세를 떤다, 떨어 본다.
볼세비키 혁명이든 뭐든, 아주 사회주의의 딱딱한 이념과 혁명에의 투쟁에 영혼을 쏟아붓는 것 같은 러시아 작가들은 당최 내 범주에 들어와서는 가슴 속에 자그마한 불씨조차 틔우지 못한 채 씁쓸한 기억만을 남기고 사그라들고 만다. 그래서 아주 유명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의 작품, 체홉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영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고전이래봤자, 고등학생 때 “부담감”에 짓눌려 겨우 이야기의 얼개만 파악하려 읽어 내려갔던 기억 뿐. 내가 뭔가를 이해하고 감동받았다는 느낌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책 [마부]를 접했을 때도 무시무시한 거역반응이 일어나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둠 속에서 떠오른 말발굽 편자가 [마부]라는 제목과 어우러져 지그시 나를 응시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책장에서 책을 빼들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표제작인 [마부]가 제일 처음에 실려 있었다. 이제 나도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까, 읽고 나서 머릿속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나를 다독여가면서 읽어야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분주해지는 모습에 괜히 역정을 내던 파벨은 옆으로 돌아누워 베개를 바로잡고 십자가처럼 양팔을 교차시키고 눈을 감았다. 얼마 전 마차 안에서 마부와 나눴던 대화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마부의 머릿속 부추김에 넘어간 파벨은 여상인을 아무도 몰래 죽이기에 이른다.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했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파벨. 오래된 고전에서 만나게 된 이런 유형의 살인자는 무지 낯설었다. (요즘은 살인을 소재로 한 것들이 넘쳐나서인지 무지한 장광설이 대세인 듯 한데...) 최소한의 두려움이나 죄책감도 없이...아무 것도 느끼지 않았다. 로 끝인가. 고리키는 너무 메마른 사람이 아닌가. 살인에 대한 이렇다할 감흥 없이 이렇게 건조한 문장으로 끝내버리다니...
이후 파벨은 그녀의 재산을 차지한 다음, 그 돈을 잘 굴려서 부자가 되고 시장에 당선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모여 당선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중간에 갑자기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려는 충동을 못이겨 큰소리로 외치는 파벨. 살인사건이 묻힌 지 팔 년이나 지나서 뜬금없이 이어진 고백에 사람들은 술렁거렸고, 범죄자를 쳐다보는 악의와 증오심에 가득찬 눈초리로 파벨을 쳐다볼 때 예의 마부가 나타났다.
“살인했다고요? 괜찮습니다! (...)나리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제 가서 고통을 받으세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요. 나리보다 훌륭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잠시 후 붉은 대지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파벨. 한여름밤의 꿈이련가,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련가...
돈을 가졌고 풍요롭고 명예로운 삶을 누리지만 정신적, 도덕적으로 공허한 파벨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마부였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함을 괴로워하다가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는 마부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파벨. 지극히 감정을 아낀 짧고 간명한 구조의 이야기지만 마부와 파벨의 선명한 대립 구도 안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연상시키는 우화인 듯도 싶다.
비교적 초기 낭만주의 성향의 작품들이라서인지, 내가 두려워하던 사회주의의 그림자는 희미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초점을 맞춘 단편들은 사랑<로맨스>과 아름다움<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푸른 눈의 여인>, <아쿨리나 할머니> 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위선, 겸손, 이성, 사랑, 진리, 믿음 등을 의인화해서 표현한 단편 <지난해>도 촌철살인의 묘미가 있다.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개념들에 대해 고리키가 어떤 정의를 내렸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의젓하지만 기력이 쇠한 인물 이성이 천천히 들어왔다. 그의 그윽하면서 꿰뚫어 보는 듯한 눈에는 도도함이 엿보였지만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사랑은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예전의 열정적인 말도 사라진 지 오래였고 욕망은 추해졌으며 뜨거운 피는 식어버렸다.
믿음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깨지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이었다.
희망이 섬광처럼 잠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진리가 나타났다. 학대받고 겁먹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아프고 슬퍼보였다.
가차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권태와 공허함에 빠진 인간의 정신 세계를 보여 주면서 황페해진 이 삶을 어찌할 거냐고, 열정을 심으라고 성토하고 있는 듯하다.
'극단의 고통'이라는 뜻을 가진 고리키의 필명대로 열한 살 때부터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지난한 삶을 살았지만, 고리키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열정을 안겨 주려고 노력한 작가이다. 비록 탐욕스러운 인간, 공허한 인간, 도덕적 잣대를 잃은 인간, 희생하며 사는 인간 등 여러 인간 군상들을 소설의 소재로 다루며 다소 어두워 보이는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인간의 밑바닥을 대신 경험해 본 바, 인생은 고뇌하는 가운데 살아내어야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로만 고리키의 작품을 이해하려 했던 나의 좁은 식견에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깊이 있는 인간에 대한 성찰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었던 단편집 [마부]. 표지때문에라도 읽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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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끼 하면 <어머니>를 어렵게 읽었다는 기억 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다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역시나 망설이기를 오래.이벤트를 통해 <마부>라는 단편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반가웠다.다시 <어머니>를 읽어 보기 위한 과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해서.응모는 떨어졌지만 궁금했다.단편의 맛은 어떨지.그리고 <은둔자>란 제목의 단편집을 읽게 되면서 다시 <마부>로 생각이 옮겨졌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은둔자>를 읽은 후 <마부>를 읽은 것은 잘못된 선택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그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은둔자>에 실린 단편과 <마부>에 실린 단편들을 자꾸만 비교하게 되고 말았던 것. <마부>에 실린 단편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평범했다.단편을 좋아하는 이유는 짧은 글 속에 강렬한 반전을 느낄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 여기는지라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음식맛으로 표현하자면 싱거워도 너무 싱거웠다는 느낌을 지을수가 없다.그럼에도 약간의 매력이라 생각했던 점은 소설집의 타이틀이기도 했던 '마부'와 '환영'을 통해 뻔한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인 것처럼 보였음에도 '비틀어보기'의 시선을 넌지시 던져준 것을 꼽을수 있겠다.전형적인 개과천선의 느낌처럼 보이지만,그 이전에 당신들은 당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들
'내 안에 내적 규범이 있는가,없는가?' /29
"나리는 규범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언제나 어떤 규범이 나을까 생각만 하다 결국 하나의 규범도 마음속에 심지 못했죠.삶도 나리를 억압하면서 나리의 모든 것을 억눌렀고요.그래서 결국 나리는 주변에 있는 죽음까지 무관심하게 바라보다가 너무나 태연하게 살인을 저질렀고 왜 죽였는가를 침착하게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나리는 자신의 주변에서 단지 비열함과 저속함 어둠만을 보죠.신조차도 나리 속에 어떤 불빛도 밝힐 수 없어요.:/31
"내 안에 규범은 없고 나의 심장은 죽었소! 파괴되고 있는 여러분의 심장을 지키시오,그리고 규범을 정착시키시오.무관심해지지 마시오.무관심은 인간의 영혼은 죽음과 같은 것이오!"/37
조금은 뻔한 결말이었다면 마부를 통해 정신 번쩍 차리게 되는 나리의 모습이었겠지만.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내 안에 내적 규범'을 지녀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을 게다.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수없이 이와 닮은 모습들을 보게 된다는 것.'노란봉투편지' 같은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할테고.무튼 소재는 달라도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내 안에 내적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흔들어주기였을 거라 생각한다. 싱겁고,조금은 평범하게 느껴진 이유를 하나 더 찾아보자면 문학적인 묘사의 유려함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날것'그대로의 느낌이랄까. 해서'마부' 보다는 '아름다움'에 대한 단편을 가장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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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언제 읽어봐도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상황속에서의 대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짧은 문장속에서 시간의 변화가 그렇게 많지 않고 주위의 배경과 상황을 모두 그 속에 담아야하기 때문에 함축된 언어와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행되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대화들이 오가고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에 언제나 천천히 읽어나가야한다. 단편집속에는 하나의 이야기만 진행되는것이 아니라 마부에는 10편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기에 하나의 단편을 읽고 나면 다음 편에서는 또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상황에 몰두해야 한다. 장편소설과 비교해서는 시간과 인물과 상황의 전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풍부하게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기에 짧은 소설을 길게 천천히읽어야 함을 나는 느꼈다. 막심 고리키의 마부에 담긴 단편들은 그의 일생과 관련이 많은것 같다. 필명이 극단의 고통이라고 한다. 어릴적 부터 어려운 가정 생활로 인해 많은 고통속에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고 성장해서는 이러한 고통을 배경으로 박애주의자가 된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러시아의 대 문호 중의 한사람이라는 글을 어디서 본것 같은데 이 소설을 통해서는 그 칭호와는 조금 벗어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단편중 마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모티브가 되었다고한다. 이름을 떨친 유명한 소설가들의 작품도 마음도 드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작품들도 있을것이다. 독자는 이러한 작품들을 대하면서 공통의 센서스 보다는 개인의 감정에 의해 작품을 판단해야한다. 따라서 모든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나에게는 그저 그런 작품이 될 수 도 있고 독자의 편에서 독자의 마음과 작품을 읽는 분위기와 감정에 따라서도 큰 차이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개인에 따른 취향의 차이에 의해 개인이 판단하는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부에서의 주인공은 바로 마부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주인공과 마부의 대화속에서 주인공은 마부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속제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역활을 하고 있다. 살인으로 큰 돈을 만지게 되고 이 돈으로 충분한 삶을 누리면서 시장에 까기 이르게되는 과정속에서 남들이 모는 살인의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돈 보다는 인간의 마음의 자유를 더 갈망했고 이를 마부에 의해 누리게 된다. 종이라는 작품에서도 마부와 비슷한 상황과 전개를 나타낸다. 한편 막심 고리키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고 빈민층의 생활과 상황을 통해 극단에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한것 같다. 아쿨리나 할머니 에서는 길가에서 구걸하여 얻은 돈으로 10명의 젊은 사람들을 자식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생활을 돕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는 할머니의 생각과 손자로 표현되는 젊은 이들의 극적인 생각의 차이를 나타내어 큰 대조를 이룬 상황에서의 극단적인 생각의 차이를 묘사하고 있다. "똑딱 똑닥"으로 시작하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깨닫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궁하지 않고 제한된 시간속에 살면서 우리의 시간의 활용에 대한 좋은 마음가짐을 알려주어 참으로 좋았다. 러시아의 소설가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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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라고 하면 막연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연상시키는 도식화한 승리담 - 내지 궁상맞은 가난과 착취 학대의 참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죄 없는 민중들은, 무능하고 탐욕스럽기까지 한 지배구조의 서슬 퍼런 압제 하에 정말로
참혹한 일상을 살았죠. 지배 계급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보살펴 주기는커녕,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수탈과 폭력을
일삼았으니까요.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그것도 대단히 판에 박인 방식으로, 격한 어조와 살벌한 비주얼의 "인생극장"을 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은 그의 장편 <어머니>도 아주 건성으로 보았기에,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은 그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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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은 도움이 많이 된다. 특히 단편은 빨리 읽히는 감도 있지만 간결한 문장 사이에서 툭 튀어나오는 질문에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인물들은 추상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모든 인물들은 생생하게 목소리를 낸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문학을 완독하고 싶다.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최근에 막심 고리끼의 글을 읽었다. 초기작(1895~1896)에 해당되는 작품이었는데, 『마부』에 수록된 열 편의 단편 중 「이제르길 노파」를 제외한 아홉편의 단편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내가 막심 고리끼를 만난 것은 「스물여섯과 하나」가 처음이었다. 달콤한 희망을 제 손으로 버린 스물 여섯의 사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다성적이면서도 인물 모두가 생생히 살아 있었던 그 작품은 여지껏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매력적인 작품을 써낸 작가가 쓴 초기작품은 어떨까. 작가정신에서 펴낸 막심 고리끼의 초기 단편집『마부』를 소개한다.
스케치적 단편작품 단편집을 소개할 때면 매번 조심스럽다. 모든 단편을 다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부』에 실린 열 편의 단편을 묶어서 설명하자면 '공허한 인간 군상의 삶을 스케치 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묶어서 생각해 볼 작품들이 있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도, 성격도 다르지만 삶의 형태는 유사하다. 고리끼는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물마다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질문의 본질은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다.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듯한 작품들이 있다. 책장을 쉽게 넘기면서도 그 인물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새기게 된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나.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사람들 「마부」, 「환영」, 「종」에서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면(「마부」), 형편없이 사는 아들을 탓하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려는 노인도 있고(「환영」),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불사하는 사람도 있다(「종」).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인물들은 각각의 단편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죄를 뉘우치거나 욕망을 드러낸다. 각 인물들은 환영과도 같은 인물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마부가 등장하는가 하면,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남들에게 복수하는 것인지 알려주는 인간-영혼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허상인가 욕망인가.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마부」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주제로 돈과 권력, 참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사한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을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로맨스」와 「아름다움」에서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 드러난다. 허무하고 공허한 삶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희망과도 같은 존재를 만나 인물들은 갈망하고 꿈꾼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꾸준히 찾아오는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소년(「로맨스」)의 이야기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훔쳐보는 남자들(「아름다움」)의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누군가를 향한 기대와 상상은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된다. 로맹 가리가 『자기앞의 생』에서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던 것처럼 막심 고리끼 역시 '사랑할 대상 없이 사람은 살 수 있는지' 묻는다.
희생하는 사람들 그의 작품에서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는 가난 속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제 몸을 아낌없이 내던지는 여인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강인하면서도 고결한 그녀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짧은 기간에 고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이유로 몸 파는 일에 뛰어드는 엄마의 이야기(「푸른 눈의 여인」)와 자신이 거둬들인 부랑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걸하는 노인의 이야기(「아쿨리나 할머니」)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삶에는 부조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조리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때론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의 삶이 아름답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의 삶은 더욱.
권태와 허무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마부』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 「지난해」와 「시간」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을 의인화시켜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지난해」는 특히 매력적이다. 학대 받고 겁먹은 진리와 지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독창성, 아름답게 치장했지만 열정은 식어버리고 욕망은 추해진 사랑, 이성과의 싸움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믿음, 믿음과의 다툼으로 망가진 이성, 시간의 총애를 받는 권태 등 다양한 존재들이 지난해의 죽음과 새로운 해의 탄생을 지켜보기 위해 찾아온다. 고리끼는 '이름과 형태는 알려져 있으나, 그 본질 및 사람을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지 못하는 존재들의 입을 빌려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진리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몇몇은 호기심에 살고 있지만, 모두들 왜 사는지 모르고" 있다고. 낡아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해가 필요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부』를 통해 당신이 답변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막심 고리끼는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단편을 통해 한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느냐고. 정해진 답은 없다. 그저 우리의 삶만 있을 뿐이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