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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지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옛 제도에 근거하여 공자의 제도를 공격하는 자가 많았다. 공자가 제정한 삼년상과 친영은 특히 빈번하게 문제시되었다. 특히 묵가와 노자 두 학파가 유교에 대한 공격이 가장 극심하였다. 미생무, 초나라 광인 접여, 장저와 걸익, 하조장인(지팡이를 짚고 삼태기를 멘 노인) 등이 노자 학파에 해당한다면, 안자 등은 묵가 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묵가는 유가의 예악과 성대한 장례식, 삼년상, 천명을 따르는 것을 공격했다.
안자(晏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학자들은 말은 화려하지만 실속은 적고, 음악을 번잡하게 꾸미면서 백성들을 소홀하게 대한다. 상례를 오랫동안 진행하여 산 사람을 해치고, 장례를 거창하게 하여 생업을 손상시키며, 예법은 번거로워서 실행하기 어렵고, 도는 현실과 맞지 않아서 따르기 어렵다. 과거의 것을 칭송하고 현재를 비난하며, 직접 본 것을 천하게 여기고 전해들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러한 사람은 본래 굽어 있는데, 자기 스스로를 곧은 준칙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안이(顏異)가 축출되어 죽고, 적산(狄山)이 흉노족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이다. (『염철론』 「논비」)(216쪽)
캉유웨이는 유가를 공격하는 자들 가운데 상앙과 한비자 만큼 무도한 자는 없다고 지적한다. 가령 상앙은 『상군서』「근령」편에서 여섯 가지 기생충을 거론했는데, 『예』와『악』, 『시』와『서』, 수양과 선함, 효도와공경, 성실과 신의, 정절과 청렴, 어짊과 의리 등을 말했다. 이처럼 법가는 『시』·『서』·『예』·『악』은 물론 어짊·청렴·선함·수양도 싫어하는 괘변을 늘어놓는다. 상앙은 무엇보다도 농업과 전쟁에 의지해야만 국가를 흥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호전적 국가주의자였다. 상앙은 유가의 덕목인 효도와 공경, 성실과 신의를 공격했고, 한비자는 공자가 존숭한 요임금과 순임금, 탕왕과 무왕의 효제와 충순을 공격했다. "『시』·『서』·『예』·『악』과 선함, 수양, 어짊, 청렴, 언변, 지혜 등의 10가지를 국가가 가지고 있으면, 윗사람은 백성들에게 방어하거나 공격하도록 할 수가 없다. 국가가 이 10가지를 가지고 다스리면, 적이 쳐들어오면 반드시 영토를 빼앗기고, 쳐들어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가난해 질 것이다.(『상군서』 「농전」)"(138쪽) "언변과 지혜는 혼란을 돕는 것이고, 『예』와『악』은 방탕함을 불러들이는 것이며, 자애와 어짊은 잘못을 저지르는 근원이고, 임협과 명예는 간사함이 머무르는 곳이다."(『상군서』 「설민」(141쪽) 상앙은 부국강병의 방략으로 '농전'을 강조하는데, 농전이란 평소에 농사를 지으며 부국에 매진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병사로 활약하며 강병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국가주의자 상앙에게 유묵사상은 그야말로'국해(國害)'였다. 유묵의 비현실적인 공허한 지식만 추구하는 나라는 망할 날이 멀지 않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상앙이 무엇보다도 부국강병의 현실주의와 중농경상의 실용주의 노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공자와 묵자를 당대의 현학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공자와 묵자 이후에 유가는 8개의 학파로 나누어졌고, 묵가는 3개의 학파로 분리되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유가와 묵가는 서로 대등하게 대항했는데 묵자의 도는 사람을 고생시키는 것이기에 결국 공자에게 패하게 되었다. 공자는 부자관계에 근거하여 의리를 세웠기 때문에 삼년상을 제정했고, 사람들에게 돈독함과 후덕함을 가르쳤다. 따라서 오랜 기간의 상례가 가르침을 전하는 첫 번째 의리였다. 묵자는 차등 없는 사랑을 주장했기 때문에 부자 관계를 가볍게 여겼고, 삶을 중시하고 재용을 귀중하게 여겼다. 따라서 상례 기간을 단축했다. 한나라의 정치 엘리트들은 유학이 현실 물정에 어둡고 고루하고 편협하며 융통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유학자들을 '구유'(拘儒)라고 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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