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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유웨이의 변법유신의 사상적 근거는 역전의 변역관, 금문경학의 탁고개제(託古改制)와 장삼세 학설, 예운의 대동사상, 육구연과 왕양명의 심학과 불학, 명청 진보사상가들의 경세치용 학설과 민주사상 등이 있고, 여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진화론 사상과 서구의 정경제도에 관한 견문 지식도 덧붙일 수 있겠다. 탁고개제(託古改制)란 말그대로 '옛 것에 의거하여 제도를 바꾸다'는 뜻인데, 캉유웨이의『공자개제고』가 공자를 옛것에 기탁해 제도를 개혁하려 한 급진개혁가로 서술하여 탁고개제의 의미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텍스트다. 물론 캉유웨이보다 먼저 탁고개제사상을 전개한 이가 있다. 가령 공양 금문학의 대가 궁쯔전과 웨이위안이 그러하다. 그러나 공자의 탁고개제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은 모두 캉유웨이의 공로다. 캉유웨이는 『무술주고』에서 공교를 국교로 추존하고 교부와 교회를 세워 공자에서 연대를 시작하고 마을제사를 폐지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캉유웨이는 유교의 성역화를 위한 이론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먼저『신학위경고』를 지었다. '신학'이란 신나라 왕망의 학문을 말하고, '위경'이란 『주례』『일례』『좌전』『시경』의 『모시전』을 말한다. 여기서 캉유웨이는 위경은 모두 유흠이 왕망을 위해 만든 위작으로, 이로써 공자의 대의미언이 인멸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캉유웨이는 순자와 동중서를 유교의 수호자로 높이 평가한다. 순자는 제자백가의 단점을 드러내고 폐단을 지적한 공이 크고, 동중서는 유교를 국교화한 공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캉유웨이는 『시』·『서』·『예』·『악』·『역』·『춘추』가 모두 공자가 제도를 개혁하면서 저술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캉유웨이가 이를 증빙하는 근거로 삼는 핵심 증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증자가 경전의 차이점을 가려 뽑아서 물었다. " 『효경』 은 경전의 문장입니까? 내용이 뒤섞여서 [경전과]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내가 『효경』을 지은 것은 소왕으로서 관작이나 봉록으로 상을 주거나 형벌로 주살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현명한 왕자의 도[에 가탁하여] 말한 것이다." 증자가 자리에서 약간 벗어났다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공자가 말했다. "앉거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 [ 『효경』은] 순종하고 겸손함으로써 재앙을 피하니, 선왕에게 권도를 주어 가탁했다."( 『효경위·구명결』)
그런데 캉유웨이에게 있어서 공자의 위상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었다. 리쩌허우는 공자의 이미지를 근거로 캉유웨이의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을 구분한 바 있는데, 전기 캉유웨이가 공자를 부르주아 계급의 민권평등을 주장하던 개혁자로 본다면, 후기 캉유웨이에서는 공자가 민권평등에 반대하고 삼강오륜을 긍정하는 봉건주의적 꼰대로 퇴행하고 만다고 지적했다. 무술변법의 실패와 1905년 신해혁명이 캉유웨이의 탁고개제 사상을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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