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이민진 저 / 인플루엔셜 출판 파친코는 1910년 일제강점기 때부터 1989년 근현대까지 5세대가 등장하는 장편소설이다. 워낙 인기가 많은 책이라 TV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생긴다면 드라마도 보고 싶은 정말 재밌는 내용의 이야기다. 책은 두 권으로 나누어진 것과 합본으로 된 것이 있었는데 나뉜 걸로 사면 가격이 조금 더 비싸지만 예쁜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나는 나뉜 걸로 샀다. 파친코 책 표지의 그림을 보면서 파친코 기계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파친코 기계를 찾아봤다. 지금의 파친코 기계와는 다르지만 당시의 파친코 기계를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에 확신이들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하다. 파친코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조선인과 해방 후 그들의 재일교포로서의 삶. 그리고 근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겪는 존재의 정체성에 관하여 선자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그녀와 연관된 위아래 세대들 및 주변 인물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 파친코를 읽으며 내가 생각한 핵심 키워드는 '디아스포라', '정체성', '도박'이다. [파친코 키워드 1.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확장하여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의미의 '디아스포라'는 당시의 시대 배경상 일본뿐만이 아니라 만주, 연해주, 미국, 하와이, 멕시코 등 여러 나라로 이주하게 된 코리아 디아스포라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친코 키워드 2. #정체성] 급변하는 시대에 그마저도 타지에서 살면서 겪는 등장인물들의 주변 환경은 그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며 그 인생을 삶으로 이끌기도 하고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여자, 어머니, 조선인, 교포로서의 삶에서 오로지 어머니 그 한 가지만의 정체를 선택한 절절한 모정의 선자의 삶과 낳아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여 조선인도 일본인도 교포도 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부정하고 숨기며 사는 노아의 삶을 들여다보며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파친코 키워드 3. #도박]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박의 불확실성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과 닮은 구석이 있다. 심지어 잃느냐 얻느냐를 놓고 승부를 다투는 것도 그러하다. 하지만 도박에는 쉽게 얻고 싶다는 요행과 조금도 잃기 싫다는 속임수가 공존한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선자에게 남편이 되어주고, 그 아이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주겠다는 이삭의 등장은 선자의 인생에서 터진 잭팟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키운 아들 노아의 죽음은 전 재산을 올인한 판돈을 몽땅 잃는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선자는 요행을 바라지 않는, 되려 굉장히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인물이며 속임수와는 거리가 먼 정직하고 순박한 인물이다. 도박의 본질인 요행과 속임수는 올바른 인생이라면 삶에서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단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도박이라는 표현이 파친코를 읽기 전에는 별 의미 없이 흘려듣던 표현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인생은 도박이라는 표현은 사용해서는 안 될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파친코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시간과 장소가 언제 어디가 됐든 상관없이 애끓는 모정으로 헌신하는 오로지 어머니로서의 삶을 사는 선자의 인생도 인상 깊지만, 나는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여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불편한 사건 혹은 과거에 대하여 당사자에게는 물론 자신들끼리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 알고도 모른 척, 알아도 모른척하는 이삭과 요셉, 경희의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배울 바를 느꼈다. 등장인물의 서사와 감정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담백하고 건조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필치가 돋보이는 파친코는 시대의 흐름을 속도감 있게 밀고 나가며 독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역사가 어우러진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
모자수는 인생이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믿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p.80 |
더 편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 앞세대의 노력으로 더 나은 선택의 길이 열린 후대들.
선자의 아버지는 언청이다. 이것은 유전이며 원래 좋은 혼처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노력해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 여건을 갖췄다. 그래서 그는 그런대로 괜찮은 혼처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대의 보통 아버지들하고 다르게 자식한테 손찌검 한 번 하지 않고 아내와 딸을 존중해주는 아버지였다. 일제강점기 보통 집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선택의 길이라는게 거의 없었을 거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먹고 살려고 애를 쓰는 삶이 있을 뿐이었을거다. 그러나 선자는 자기를 존중해주는 부모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있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가질 수 있었을 것 같다. 비록 그게 한수란 유부남한테 속아서 성관계를 갖게 된거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은 선자가 선택한 일이었고, 어쩌면 그것이 생존하기도 버거운 선자의 삶에서 스스로 결정한 유일한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선자는 극도로 한수의 도움을 거부한건지도 모른다. 아들 노아를 자기 힘으로 키우려고 한 것은 선자의 인생에서 지키고자 했던 자기의 정체성이었던 것 같다. 그걸 자식욕심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냉정히 보면 그렇다. 노아에게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노아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게 이성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뺏기고 싶지 않았을 거다. 환경에 휘둘리며 살아야만 하는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자기의 자부심이 노아였을 테니 말이다.
이 집안은 대를 내려갈수록 자식에게 조금씩 더 선택의 기회가 있는 삶을 주려고 앞세대가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1 한수의 도움을 받는 것. 선자가 한수의 도움을 거부하는 이유라면 첫째, 이삭에 대한 미안함. 둘째, 유부남인 것을 속였던 것에 대한 반감. 셋째,자식에 대한 애정 집착.의무감. 등이 큰 만큼,, 노아를 뺏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서.. 가장 이성적이라면 노아에게 한수가 친부라는 것을 말하고, 노아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게 맞다고 봄. 양육을 책임졌던 모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권리는 없음.
2. 경희와 창수.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경희의 본질이 부정되는 거라는 점에 동의함. 그렇다고 요셉이 죽기만을 창수가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도 할 짓이 못됨. 따라서 창수는 요셉과 경희를 떠나서 자기 인생을 사는게 맞고, 만일 요셉이 죽는다면 그때 과부가 된 경희한테 구애해 볼 수 있을 것 같음.
3.한수가 아버지라는 것을 안 노아.
자기가 지키려고 했던 자기의 정체성이 환경에 의해 부정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노아는 아마도 느끼지 않았을까 싶음. 자기 삶이 부정당함. 아키코와 헤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됨. 가족과 인연을 끊고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파친코 실장으로 산 인생이 노아에게 의미가 있었을까. 파친코 실장이지만, 거의 건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산 노아. 점심 후 갖는 삼십분 남짓한 독서시간이 자기가 꿈꾸었던 자기 삶의 시간이었을 같기도 함. 어머니의 방문 후 자살. 그렇게 부정하려고 했던 자기의 출신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됐겠지. 45살에 또다시 새 인생을 살 수도 없는거고. 책의 뒷부분에서 솔로몬은 자기 삼촌인 노아에 대해 일본인이 못돼서 자살한 사람이라고 폄하하던데, 나는 일본인이 되고 안되고가 노아한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노력과 의지로 만들려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부정당해져 버리는게 견딜 수가 없는거라고 봄. 특히 노아같이 어찌보면 매우 고지식한 사람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윤리적인 문제하고 직결되기 때문에 늪이 될 수도 있지.
4 선자 선자가 한수의제안을 받아들여 한수의 첩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경희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창수를 따라가지 않은 게 나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수는 아마 북에서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니까. 하지만 선자의 경우라면 편하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음. 그러나 결과적으로도 좋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됨. 한수는 극도로 이기적인 인간임. 자기 마음에 안드는 짓을 했다고 대뜸 어린 접대부를 폭행해 인생을 부숴버리는 짓을 했듯이, 만일 선자가 첩질이나 하는 그저그런 여자짓을 했다면 선자도 폭행으로 몸이 망가져버렸을지도 모르고, 아들 이삭도 한수에게 뺐겼을 가능성이 높았겠지. 선자가 자기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한수가 끝까지 존중하게 된거지. 선자의 삶에서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노아의 죽음에 대해 선자가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던 것임. 물론 괴로워하기야 했겠지만, 자기의 방문 후 노아가 죽었으면, 후회와 죄책감으로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음.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게, 선자의 노아에 대한 사랑이 노아를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는 점임. 기본적으로 선자는 노아에게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역할 놀이. 자식 소유욕 등 이기적인 사랑을 한거임. 자기의 부족한 것을 아들통해 채우려고 한거임. 아들로선 숨막히지. 노아같이 고지식한 인간에게는 특히나.
5.모자수 가장 현실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을 인물. 자기 출신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고, 세상에 분노하며 자신을 함몰시키지도 않으며, 가장 현실적으로 선을 지키며 자기 삶을 잘 꾸려간 인물임. 이삭과 선자의 아이였기 때문일까. 한수와 선자의 아이가 노아가 아니라, 모자수였다면 이런 질문은 의미없겠지. 인간이 성인이 된 후의 가치관을 갖고 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6. 솔로몬.
양진.--선자.--노아와 모자수---솔로몬
4대의 마지막 주인공 솔로몬. 경제적으로는 매우 유복한 가정환경..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상 한계. 미국유학으로 신분의 한계를 벗어난 삶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 역시 출신에서는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파친코를 물려받는 삶을 선택.
뿌리에서 자랐지만, 그 뿌리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그 뿌리에 잡히는....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좀 그런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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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처럼 2권에서는 등장인물 중 모자수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이후 그의 아들 솔로몬의 이야기도 꽤 차지하지만, 중간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일까. 형 노아의 이야기에 비해 확실히 많이 등장했던 것 같다. 두 달전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작가가 일부러 두 형제의 삶을 비교하려 의도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기는 했다. 물론 노아와 모자수 둘 사이의 형제애는 끈끈했지만 말이다.
파친코를 2번째 읽으면서 느낀 2권의 차이는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 외에 1권이 등장인물의 배경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면, 2권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각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되었던 부분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왜 결국엔 '파친코'인가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가족이지만 생각도 성격도 다른 등장인물의 특성 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며 그들이 특히 노아 조차도 '파친코'를 삶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인 이유를 나는 두 달 전 읽었을 때의 생각과 달라지지는 않았다. 패망한 일본이 그들을 내 쫓을 수도 반길수도 없는 시대에 그들이 잘나가도록 돕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지만, 그들이 경멸하는 '파친코'라는 사업을 허락해 줌으로서 그들을 비난하고 자신들은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핑계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모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그들에게 유일한 숨구멍이 아니었을까. 싸움을 하지도, 위법을 저지르지도 않지만 따가운 시선에도 늘 정정당당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한 말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라는 말로 소설의 포문을 연 이유가 아닐까.
이 번 역시 그리고 1권에서 같은 부분의 내용이 읽기 힘들거나 이해가 안 되었던 것처럼 2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읽기 힘들었던 부분은 여자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을 표현해 주는 부분이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이제 생의 마감을 맞이해야 될 나이가 된 그들의 진짜 솔직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대게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솔직한 마음들과는 정반대의 가치관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두 번째 읽는 이 번 역시 참 읽기 어려웠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 번판 2권의 끝에는 작가의 감사의 말 외에 이전 책에서처럼 해설이나 번역가의 말은 실리지 않았다. 원래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전판에서 도움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어떤 해설이 실렸을까 궁금해 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같은 내용을 여러번 읽는 일이 드문 내겐 이번 소설을 읽는 시간이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등장인물에 대해 또 어떤 부분을 새로이 느끼게 될까하는 기대는 읽으면서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덕분에 몰랐던 단어도 많이 알게 되었고, 번역에 따라 느껴지는 내용의 흐름이 어떤지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젠 진짜로 드라마 시즌2에서는 이 책의 나머지 내용이 어떻게 표현을 할까 궁금해하며 기다려본다. 종교적인 부분에 대한 표현도 그렇고, 실제로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사는 이들의 이 책이나 드라마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호불호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특히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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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천 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 디지털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책에 몰입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는 놀라운 흡입력을 가졌다. 주변에 어떤 소음이 있든, 책의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시작하든 나는 불과 십초 내에 책의 현장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총 3대의 가족이 등장하고 시간과 장소가 여러 번 전환되는 대서사인 만큼, 파친코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지면의 한계와 나의 내공 부족으로 겨우 몇 가지의 이야기만 할 수 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먼저, 소설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얘기해보고 싶다. 작가가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몇십 년이 걸렸다고 했다. 처음 잡았던 방향을 완전히 틀었고, 더 사실에 다가가기 위해 그곳에 살며 수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래서 였을까, 소설 속 묘사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 시대, 그 장소에 가본 적 없던 내가 책만 펴면 단 몇 십 초 내로 그곳에 있었다. 묘사 하나 하나가 생생함을 넘어서 정성스러웠다. 어떤 것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았다. 색깔, 냄새, 형상,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총동원됐고 그 순간의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까지 표현되었다. 또, 아무렇지 않은듯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이 좋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했고, 흥분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목소리 때문에 나는 작중 인물들의 죽음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고, 더 슬펐다. 그리고 이 담담한 목소리의 이면에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더욱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려 한다. 한마디로 이민자 혹은 이방인의 삶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의지와 관계없이 타국에서 생을 이어간다. 저마다의 생존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 혹은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들에게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 1세대로 일본에 정착한 선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한다. 가난했고 행색이 추레했으며,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부산 사투리의 말씨는 그녀가 일본 땅에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존재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직접 본 이가 아니라면 그런 이들이 살고 있다는 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둘 째 아들인 모자수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형 노아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더러운 야쿠자 조선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는 운명을 바꿀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자살하지만 모자수는 바꾸려했다. (이 둘 모두 방향이 어찌 되었든 유일한 선택지가 파친코였다는 사실은 슬픔이자 아이러니다.)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으로 부유해졌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다른 삶을 열어주려 했다. 서양인, 일본 상류층과 서구화된 교육을 받게 하고 외국 생활을 하게 한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을까,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솔로몬은 이 땅에 살기 위해 지문을 등록해야 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곳의 사람들과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보이는 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서운 법이다. 솔로몬 가족의 힘을 빌어 원하던 부동산을 손에 넣었던 일본인 가즈는 그에게 억울한 오명을 씌운 채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린다. 결국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했고,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던 솔로몬의 마지막 종착지도 파친코가 되었다.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놈 취급을 하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방인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기 위한 허락을 구해야 하는 삶. 우리는 선자와 그녀의 3대의 가족들이 살아낸 삶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이민자가 되어버린 이들의 아픔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조승연 작가와의 짧은 인터뷰 영상을 보고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사는 나에게 타국의 동포들이 인종을, 출신을 이유로 차별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낯선 사실이었다. 이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 각자의 정체성은 누가 정하는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핏줄을 받았다고 해서 미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이방인들의 아픔은 타인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하는, 우리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시각에서 비롯된다. 영상 속 이민진 작가가 언급했던 'Global Citizenship'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차별이 없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의 끝에 '파친코'의 의미에 대해 떠올려 본다. 파친코는 다른 번듯한 직업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재일 교포들에게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한편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완전한 일본인이 되려고 했지만 자살을 택한 노아에게도, 재력으로 운명을 바꾸어보려 했던 모자수에게도, 큰아버지/아버지와 달리 부유하고 서구화된 환경에서 자란 솔로몬에게도 마지막 종착지는 늘 파친코였다. 또, 파친코는 일본인들이 재일 동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기계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게임 업장.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불법이 자행될 것만 같은 의심어린 시선. 그들이 견뎌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친코는 인생이라고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다이얼을 돌려 조정할 수는 있지만 변수들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하지만 내가 행운의 주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자꾸만 걸게 하는. 불확실성과 희망의 집합체말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나지만, 나는 이민진 작가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인을 애정 가득 담은 시선으로 본다. 책 속 주인공 한 명 한 명에 대한 정성스러운 묘사도, 그녀가 자이니치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이유도, 모든 것이 그녀의 애정을 대변한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도 나는 놀라웠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자신을 이루는 한국이라는 요소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결국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어우러지는 세상을 추구하는 멋진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격동의 세월을 살아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
이민진의 <파친코 1> 을 읽고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역사에 외면당한 재일조선인 가족의 대서사극-
2017년 최고의 책을 한 권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일 것이다. 이미 이 책은 '파친코'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재고가 다 소진되어 개정판이 나올 때까지 예약판매까지 걸어놓으며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미 도서관에서는 예약초과가 걸려있어서 예약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이 책의 인기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대단했는데 이 책은 2017년 출간되자 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전 세계 33개국에 번역 수출되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애플 TV에서는 드라마까지 제작되었다.
왜 이 책 『파친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사랑을 받은 것일까. 이 책은 재미교포 1.5세대인 이민진 작가가 30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 소설이며, 이 책은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 2017년에 <Pachinko>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영어로 출간된 원서를 번역을 통해 <파친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독자들은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30년의 집필 기간과 출판사의 번역의 시간을 거쳐 새 옷을 입고 비로소 오랜 시간 후에 나는 작품 속 인물인 '선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선자의 삶을 통해 나는 격동의 세월 을 강인한 생명력으로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모습들을 그릴 수 있었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 시대, 땅과 집, 그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일본땅으로 가서 살 수 밖에 없았던 재일조선인 가족이었던 선자를 통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쓴 이민진 작가 또한 재미교포 1. 5세대이기 때문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 속에 느끼는 애환과 고통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더군다나 1940년대에는 굶주림과 전쟁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기는 정말로 고통스럽고 힘겨웠을 것이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생존에 대한 강인함으로 버티고 연명한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어쩌면 그들의 강인한 의지와 생명력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 ‘한국인’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는 이들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부산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섬 영도에서 선자의 삶은 시작된다.하숙집을 운영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선자의 부모인 양진과 훈이는 하나뿐인 딸 선자를 사랑하며 애지중지 키운다. 특히 아버지인 훈이는 언청이에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딸인 선자에게는 자상하고 다정한 좋은 아버지였고, 훗날 선자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과 정으로 인해 힘든 시간들을 꿋꿋이 이겨나가게 된다. 또한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였듯이, 자식들을 위해 헌신과 사랑을 베풀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인 훈이는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양진과 선자만 남고 그녀들은 꿋꿋하게 하숙집을 운영해나간다. 그러나 16살이 된 선자는 운명의 남자가 될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일하는 생선 중개상인 고한수를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고한수가 일본에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고 그와 헤어지지만, 이미 선자의 뱃속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다. 고한수는 이처럼 처녀를 임신시킨 나쁜 놈이라고 인식되었지만, 나중에 선자가 어려움에 처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구세주같은 존재가 되니, 정말로 사람의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선자에게 고한수가 운명의 남자라면, 선자의 남편이 되어주는 백이삭은 고마운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선자가 사생아를 낳아 힘겹게 살아갈 것을 염려한 백이삭은 선자를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기고 청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선자는 이삭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 오사카로 향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오사카에서조차도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은 계속되었다. 더군다나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이기에 그 고통과 힘겨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선자는 꿋꿋하게 이삭의 형님인 요셉네 집에서 기거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며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처녀 때는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결혼 후에는 자식들을 위해 온갖 힘든 일을 해야 했다. 아마도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네 할머니 세대들의 삶이 아마도 그렇게 힘에 겨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할머님들은 자식들을 먹이고 키워야한다는 신념 아래,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온 것이리라.
그 모진 세월의 이야기가 어머니인 양진에서 선자로 이어지며 계속된다. 이 책은 4대에 걸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며 내가 읽은 『파친코 1』권에서는 주로 선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녀의 삶이 펼쳐진다. <파친코> 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인생 또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파친코와 같은 도박과 같을지 모른다. 또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생계 수단인 파친코 사업을 벌이며 타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연 그들의 사업이 잘 될지,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인생의 롤렛은 어디로 향할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1권에서는 주로 선자의 삶을 중심으로 해서 타향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의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권에서는 펼쳐질 성장한 재일조선인 3세대의 삶 그중에서도 특히 선자의 아들이자 한수의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의 성장과 삶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특히 노아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까. 노아와 모자수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까. 2권에서 작가가 들려줄 3세대인 선자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또한 시간이 된다면 드라마를 통해 영상화될 선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연기 또한 보고 싶다. 드라마를 본다면, 책 속 주인공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착각이 들 것 같다. 과연 2017년 올해의 최고의 책이라고 선정될 만큼 이야기의 서사가 주는 강인한 흡입력과 구성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정말 선자와 그들의 가족의 삶 속에 흠뻑 빠져 그녀와 함께 울고 웃은 것 같다. 이 책은 나에게도 잊지 못할 올해의 책으로 남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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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째 책 한 권을 들고 읽어내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한 편으로 일상을 살아내기 바쁘다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책을 읽어내는 동안 마음이 어수선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문양 속에 궁중의 여인이 장식할 만큼 예쁜 나비 장식과 참 다르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주인공과 내가 물아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일이 익숙지 않다. 내가 그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에 관한 '겹겹',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한국 현대사', '한국전쟁의 기원', ' 한국전쟁' 그리고 다양한 근현대사 역사서적, 여러 평전들, '안중근 도록' 이런 배경지식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상징할 중대한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인공 선자는 풍족하지 않지만 평범한 가족, 첫사랑, 혼인 그리고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시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외부의 요인이 삶에 많은 사건과 사고를 갖고 오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마주하며 당당하게 살아내가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오래전 유명했던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불암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바다는 물을 가려 받지 않는다'라는 말로 기억한다.
1900~1953년 사이를 살아낸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욕망과 욕망이 어우러져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과거 평온했던 일상을 희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역사는 중요하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과 사고로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일도 살아내야 하고, 살아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내야 역사적인 어떤 결과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누군 일제에 붙어먹고, 누군 헐벗고 굶주리며 나라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낸 것이다. 그 살아내는 방법으로 시대를 쫓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서 희망을 품은 사람들도 있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해 희망을 만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그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 이념의 시대는 과거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논쟁과 실험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던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더 나아가 더 올바르고 좋아질 방법에 조금씩 삶을 녹여가는 일이다. 이런 일이 시대가 변해도 큰 탈이 없는 일이 아닐까?
이삭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며 가족에게 헌신하고, 요셉도 가족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고, 선자도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묵묵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경희도 남편의 뜻을 맞추고 또 가족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시대를 살아낸다. 태어난 환경에서 일본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노아의 생각에 침을 뱉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살아온 사람을 상상해 보면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시대에 한 일에 대한 책임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2권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겠다. 결말도 이렇게 잔잔할까? 텔레비전을 안 보고 사는 내게도 오늘은 참 시끄러운 하루다. 무엇이 올바른지 생각하면 쉬운 일이나 시끄럽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또 열심히 살아내야 하고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책 제목이 왜 하필이면 파친코일까? 구슬을 넣고 슬로머신처럼 도박을 하는 게임이 왜 제목일까? 누구나 이런 기계에 돈을 넣으면 '한 번만 걸려라'라는 생각을 한다. 역사에서 이런 일은 시대를 상징하거나 전화하는 큰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기까지 기계는 쉼 없이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의미 없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 의미 없는 것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잭팟과 같은 일도 없다. 그렇게 돌아가다 보면 내가 바라던 것과 다른 일도 마주하는 것이 삶이라 야속한 마음도 있지만 어쩌겠나. 또 살아내고 살아내야만 한다. 그래도 소중한 가족이 있으니. 한수가 끊임없이 선자의 주변에 머물며 힘을 쏟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파친코 #이민정 #신승미 #소설 #khori |
(스포주의) 1권은 영도에서의 훈이와 양진의 결혼과 훈이가 죽고 양진이 딸 선자와 하숙집을 꾸려가며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선자가 소녀가 되었을때 한수를 만나게 되고 한수의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한수는 유부남으로 딸이 셋이나 있는 남자였다. 인연이 될 모양이었는지 하숙집에 묵게된 폐렴에 걸린 이삭을 정성껏 보살펴주게 된다. 이삭은 선자의 임신을 알고서도 운명처럼 그녀를 아내로 맞게 된다. 목사인 이삭은 결혼하자마자 선자와 오사카로 가게 되고 그 곳에 있는 이삭의 형 요셉과 경희와 함께 살게 된다. 그곳에서 노아와 모자수가 태어나고 전쟁에 휩싸인 상황에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 와중에 이삭도 죽게되고.. 오사카에 있던 한수에게서도 도움을 받게 된다. 한수는 선자 모르게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인에게 차별과 무시가 심할텐데도 노아는 아랑곳 않고 공부도 하고 착실하게 크고 있다. 어려운 상황을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고 속도감있게 담백하게 쓰여진 글이라 좋았다. |
애플 TV에서 파친코를 봤습니다. 그리고 책을 찾았는데… 이미 품절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책이 집에 도착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있어 반환일자를 맞추느라 파친코는 아침 자투리 시간에 조금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1편 읽기를 끝냈습니다. 주인공 선자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의 고단한 삶을 힘들게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낸 소설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결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식민지의 비참함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읽었고, 작가의 정돈된 서술이 아픔을 가중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감정적이지 않은 글인데 마음은 무거워 슬픔이 돌덩이 같습니다.
선자의 남편 이삭이 죽음 일보 직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감옥에서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 당국이 이삭을 풀어준 것이지요. 같이 수감되었던 늙은 목사와 교회 잡일을 보던 후는 이삭이 출감 전날 죽었습니다. 선자가 이삭의 몸을 확인한 내용입니다. “신발을 벗기고 구멍 난 양말을 벗겼다. 살갗이 갈라지고 벗겨진 발바닥이 마른 피딱지로 뒤덮여 있었다. 왼발 새끼발가락이 검게 변해 있었다.” (286쪽) “양쪽 어깨와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몸통에 우툴두툴한 흉터들이 대각선으로 돋아서 마름모꼴 모양이 마구잡이로 생겨있었다. 이삭이 기침을 할 때마다 목이 붉어졌다.” (293쪽) “대야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향이 강한 비누로 씻겼는데도 이삭의 몸에서 시큼한 악취가 풍겼다. 서캐가 머리카락과 수염에 붙어 있었다.” (294쪽)
조국이 없어 함부로 고문당해도 되는 타국인, 열등한 민족이라고 함부로 걷어차도 보호받을 수 없는 이방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감금당하고, 고문당하는 이삭을 구해줄 나라는 없었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이 뼈에 사무칩니다.
일제 강점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나라가 있습니다. 정권에 따라 차별을 받기도 하고, 대접을 조금 받기도 합니다. 잊힌 듯하면 독재 정권이 기어나와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제 강점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최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에서 이겼음에도 일본은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의 피해자들은 가해 기업으로부터(전범기업) 이미 피해배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 피해자들은 일본의 배상을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정부가 어제 이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안을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해자인 일본은 빠진, 사과는 없는, 돈으로만 해결하자는 안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외교를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이라고 언론들은 덧칠하고 마사지를 하지만, 정부에게 우리 국민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방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토착왜구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국이 광복되고 벌써 7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고통이 사라져도 한참 전이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픔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이지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아픔은 애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고 다른 생을 살기 위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애도는 금지되고 거부되고 있습니다. 애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를 프로이트는 멜랑꼴리라고 부른다고 하지요.
애도 받지 못하는 국민, 애도하지 못하는 정부, 우리는 정녕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이 되고 독립이 되었는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우리의 현실이 허약하기만 합니다. |
주말 저녁 아이들과 외식을 했다. 속이 좋지 않다는 마나님을 뒤로하고 양꼬치도 먹고, 꿔봐로우도 먹었다. 달봉이가 나온 김에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다녀왔다. 달봉이랑 별봉이는 자신들은 MZ세대라 코인 노래방에 갈 건데 가봤냐고 물어본다. "30년 전쯤 노래방 나왔을 땐 전부 코인 노래방이었어. 이런 걸 레트로나 뉴트로라고 하는 거다"라고 말해줬다.
1권을 보는데 보름이 걸렸는데, 2권을 마무리하는데 하루면 충분했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아니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하려고 했을까? 한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식들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사랑의 결실로 열어 본 상자는 희망만 남아있는 판도라의 상자와는 다르다. 희로애락이 있고, 당연히 희망도 있고 가장 많은 것은 사랑이란 포장지에 곱게 쌓인 인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여러 번 든다.
선자는 일본에서 자식들에게 헌신하며 살아냈다. 하지만 하나의 자식은 정체성을 갈등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 곱게 자란 화초처럼 거센 찬바람에 고개를 떨구고, 또 다른 하나는 잡초처럼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고 보이지만 모진 풍파를 겪고 또 살아내고 있다. 어디서나 귀한 약초처럼 크기 바라는 손자는 또 그 굴레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또 살아낼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한국인 작가라면 당연히 왜놈이란 비판이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일본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일본과 왜라는 이중적 이미지가 나에게도 남아 있다. 과거의 뛰어난 결과를 존중했지만, 이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계들이 많아지고, 시대의 변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 일본, 경제적 상황을 보면 전망이 그리 밝지도 않다. 이것이 기쁘기만 한 일도 아니다. 단지 자국에 원자폭탄을 던진나라, 망한 나라를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성장시켜 준 나라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비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은 그 비굴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변국에 비슷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 같다. 100년 전 생각을 갖고 사는 나라. 그러나 우리는 또 오늘의 상황을 직시하며 또 살아낼 것이다.
파친코, 빠징꼬 무엇이 맞는지 관심 없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생존수단이란 것을 이해하고 또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세상 누구도 성인군자를 입에 올리고 요구하기 쉽지만 스스로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나쁜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어디에서도 언제나 옳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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