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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라는 말과 더불어 ‘이팝에 고깃국’이라는 표현은 과거 사람들의 현실과 소망을 대변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가을철 수확한 곡물이 다 떨어지고, 보리가 채 아물기 전인 봄철에 배고픈 시기를 넘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보릿고개’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에 반해 명절이나 생일에 흰 쌀밥에 고기를 넣어 끓인 국을 마음껏 먹어보고 싶은 욕망을 ‘이팝에 고깃국’이라는 표현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이팝’은 곧 흰쌀을 뜻하는 ‘입쌀’과 ‘밥’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표현으로, 봄철에 멀리서 보면 한 무리로 피어있는 꽃의 모양이 마치 쌀밥처럼 보인다고 해서 나므에도 이팝나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서 ‘고깃국’은 쇠고기를 넣어 끓인 국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의 주된 산업 기반은 농업이었고, 그에 따라 집집마다 기르는 소는 농사의 주된 수단이자 중요한 재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먹기 위하여 소를 잡을 수 없었으며, 특별한 경우에만 허가를 받아 소를 잡아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개는 제사 혹은 결혼이나 회갑 등의 잔치에 사용하기 위해 관의 허가를 받아서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일컬어 소를 함부로 잡는 것을 금하는 ‘우금(牛禁) 정책’이라고 했지만, 실상 조선시대에도 양반들은 쇠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양에서 소를 잡아서 팔 수 있었던 이들을 일컬어 ‘반인(泮人)’이라고 칭했는데,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존재와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국립대학으로 역할을 했던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 일컬었고, 성균관에 머물던 이들은 나라에서 공짜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였다. 하지만 국가에서 성균관에 제공하던 물품은 쌀에 한정되었고, 반찬과 기타 공부에 소용되던 물건들은 성균관의 하인들이 머물던 ‘반촌(泮村)’에서 공급했다고 한다. 고려 말 성리학을 들여왔던 안향이 성균관을 재정비하면서 자신의 사노비와 녹봉을 성균관에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태종을 비롯한 왕들도 성균관에 노비를 하사하였고, 이들은 당연히 성균관 근처에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되었으니 이들의 거주지를 ‘반촌(泮村)’이라고 불렀다. 곧 ‘반촌’과 ‘반인’들은 성균관의 운영을 위해서 봉사하는 노비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학생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촌에서 성균관의 모든 물품을 공급했던 것이다.
적게는 80명에서 많을 때는 수백 명이 성균관에서 기숙했던 바, 이들의 생활을 돌보기 위해 성균관의 노비인 ‘반인’들에게 소고기를 도축하고 판매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법으로는 공식적으로 소를 도축할 수 없었지만, 성균관의 운영을 위해서 특별히 반인에게 소를 도축하고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한다. 소를 잡기 위해서는 사전에 관청에 신고를 하고, 소정의 세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서 쇠고기를 구입하려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발길을 반촌으로 향했으며, 정육점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같이 소를 고리에 매달아 팔았기 때문에 이들의 가게를 ‘현방(懸房)’이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반인’은 쇠고기를 잡고 판매할 수 있는 이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동물을 도축하던 천인 신분의 '백정’과 하는 일은 같았지만, 사회적으로는 전혀 다른 존재들로 여겨졌다.
한양에서 사람들이 즐겨 찾던 쇠고기를 독점 공급하면서 반인들은 경제력을 획득하고, 나름대로 부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그 반면에 소의 도축과 판매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금하던 일이었기에, 그것을 틈타 반인들을 수탈하던 기관이 존재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검찰과 같은 역할을 하던 ‘사헌부’와 법을 집행하던 ‘형조’ 그리고 한양의 치안을 담당했던 ‘한성부’를 일컬어 저자는 법을 집행하던 세 개의 기관이란 의미로 ‘삼법사’라 지칭한다. 삼법사에 소속된 관원들이 반인들의 현방에서 수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 관원들의 녹봉(월급)을 국가가 지급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반인들은 소의 도축과 쇠고기 판매로 얻은 이익에서 성균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 이외에, 삼법사라 지칭되던 기관의 운영비까지 일부 부담했던 것이다.
이 책은 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성균관과 삼법사로 지칭되던 기관들의 반인에 대한 수탈 구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인들의 영업이 항상 안정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던 만큼, 때로는 가축들의 전염병인 ‘우역(牛疫)’으로 인해 반인들의 현방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반인들은 성균관의 운영을 위해 물품을 보급해야했고, 삼법사에서도 기존의 관례데로 끊임없이 수탈을 자행햇다고 한다. 그로 인해 과도한 수탈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하는 이가 생겨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에 소속된 궁방 등 다양한 기관에서 소를 도축하여 반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들도 발생했다고 한다. 반인들이 성균관의 존속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성균관을 거쳐갔거나 담당하는 소임을 맡은 관리들은 반인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7백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실록 등 관련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주석으로 제시하고, 성균관과 반인은 물론 주변의 정황과 조선 후기 경제 상황을 조망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조금은 지루하지만 유용한 성과물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반인들의 수탈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때로는 수탈 기관에 맞서 성균관 출신의 관리들을 움직여 적절한 대응을 하거나 가게를 닫고 저항하는 반인들의 상황을 소개하기도 한다. 나아가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반인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경제 주체의 하나로 성장하기도 했다. 일정한 지역에 몰려 살면서 결속력이 남달랐기에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신분적으로는 ‘노비’에 불과했던 반인들의 삶의 조건과 한양에서 쇠고기를 독점 판매하며 부를 축적하면서 과도한 수탈에 맞섰던 이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