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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그가 이야기하던 아픔들이 그대로 시에 담겼다
삶은 시인의 호탕한 웃음소리처럼 막히지 않고 어디든 흘러 나아가야 하건만, 현실은…
상괭이는 지느러미가 없어져 더 이상 헤엄치지 못하고, 새는 방음벽에 막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택배 노동자는 다리가 풀려 더 이상 뛰지 못한다
끊임없이 소외되고 파괴당하는 자연, 동물, 노동자에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는 시인.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에서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공감의 극한을 보여준다 !!!
“어릴 적 말뚝에 묶인 백구는 1.0미터 남짓한 둥근 세상을 가졌었다 때론 필사적으로 원을 깨려 했으나 목에 감긴 쇠사슬은 단단했다.
로봇 개가 제 눈에 나를 담는다 내 눈도 너로 가득 차고 복제되는 하울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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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이 같고 촉감이 같고 체취마저 같은’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 중
누군가 나의 울음소리를 배웠다면 그건 그가 내 울음소리에 귀 기울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배움의 첫 단계는 모방이고 모방은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심을 기울여 주의 깊게 관찰하고 구체적 움직임을 통해 ‘알아차렸음’을 드러내는 필연적 행위.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이 공감이라면 모방은 서로를 연결하는 행위의 시작 아닐까. 이동우 시인의 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의 시들은 그런 적극적인 ‘공감’과 능동적인 ‘행위’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나 홀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라는 것. 시를 읽다보면 그 누군가가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계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시인은 잊히거나 외면당한 어떤 상황 또는 누군가를 알아보고 공감한 것을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고 나는 읽는 행위를 통해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시인이 보여주려 했던 것들과 연결되었다. 시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느낀 첫 번째 이유다.
‘나는 칠천년 전 반구대에서 태어났다 뼈 작살과 돌살촉을 견디며 굳은살처럼 퇴적된 물살과 흙살을 헤쳐왔다’ <상괭이> 일부
시집을 여러 번 낭독해서 읽었다. 소리 내 읽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강한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는데 알려고 들지 않던 것, 알면서 모른 척 했던 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게된다. 알아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고 가만히 들려줄 뿐인데 뼈아프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달의 이면 같은 생의 이면들을 구석구석 보고나서도 과연 모른척 할 수 있을까. 로봇, 바이러스, 멸종위기 동물들, 불타는 산과 숲, 바다 깊이 잠긴 어린 생명들, 투명인간,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들, 억울한 죽음들... 그들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타고 내 안에서 울리면 내가 곧 그들이 된다. 이때 느껴지는 일체감. 시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느낀 두 번째 이유다. 그래서 시집을 꼭 소리 내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집을 읽으며 ‘연결성’과 ‘일체감’을 느끼다가 책 소개에서 언급한 ‘투명한 연대의 목소리’의 의미에 대해 나름으로 생각해보았다. 알고자 노력 하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아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한 목소리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연대 아닐까 싶다.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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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공간을 유영하는 의미없는 소리이거나, 혹은 개체만 바뀌어 가며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어느순간 멈칫 하고 바라보고 관찰하고 공감하다 마침내 그것과 내가 소통하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우는 순간이다. "로봇 개가 제 눈에 나를 담는다. 내눈도 너로 가득차고 복제되는 하울링"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 아니다. 파괴적이고 무관심하고 바싹바싹 말라가는 현실, 불확실성이 상수(常數)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피로감과 허무만이 남을 듯 하지만,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작가의 질문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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