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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인식하고 과거로 유지하며 사랑으로 느끼다 - 엄마와 집짓기 _ 스토리매니악
난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어릴 적부터 편안함을 대변해주는 공간으로 모든 아픔으로부터 날 지켜주는 공간으로 집은 내게 중요한 존재였다. 커서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남들은 자동차를 통해 욕구를 채우고 장신구로 행복을 얻는다고 하지만, 난 나만의 공간으로서의 지친 심신을 감싸주는 공간으로서의 집에 여전히 집착한다.
내가 '집'이라는 공간에 유독 관심이 많은 이유는 집과 현재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집은 현재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나,현재의 경제적 수준, 현재의 행복이 다 집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집이 곧 현재라는 등식에 조금은 수정을 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집은 '삶' 또한 포함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평범한 엄마와 인문학자이자 교육자인 저자가 함께 집을 짓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수준이 되는 사람이 자신의 엄마를 위해 또는 자신의 주거를 위해 집을 짓는 과정에 무슨 특별함이 있을까 싶었다. 엄마를 위해 집을 짓는 과정을 자신과 엄마라는 관계를 통해 재미있게 풀어낸 책 정도로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함을 넘어 선 그 무언가가 이 책에는 들어 있다.
저자는 엄마와 집이라는 공간을 지으며 '기억'이라는 삶의 연료를 찾아냈다. 저자는 새로 집 짓는 과정을 기억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집짓기를 통해 기억을 더듬고 재구성하고 이를 새롭게 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싶은 공간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끄집어 내고, 이를 잊고 있던 자신의 소망 혹은 희망들과 연결하면서 애써 억누르고 살았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탐험한다. 그 과정을 통해 집엔 튼튼한 뼈대가 세워지고 생기를 얻는다. 흐릿해진 삶의 불씨에 기억이라는 화력 강한 연료를 찾아내 그 불씨를 키워내는 것만 같은 과정이었다.
저자는 또한 집의 각 영역들을 과거와 사랑으로 연결 짓기도 한다. '새 것'이라는 것은 그 안에 '옛 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 때문에 새롭기는 하지만 뭔가 차갑고 허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공간에 과거를 끌어와 그 안을 채운다. 엄마와의 추억들, 엄마의 추억들, 자신의 추억들,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삶들을 온기 없는 '새 것'에 채워 따뜻한 '새 것'으로 탈바꿈 시킨다. 마치 집 밖에서 찬 바람 맞으며 뛰어 놀다, 집으로 들어와 엄마의 품에 안 겼을 때처럼, 따스한 온기가 집 곳곳에 스며드는 느낌을 받는다.
끝은 결국 사랑이다. 저자가 엄마와 집을 짓는 이유, 왜 엄마와의 집 짓기인가를 저자의 문장 마다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느낄 수 있다. 삶은 결국 기억으로 불을 지피고 과거를 통해 온기를 유지하며 사랑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엄마와 집을 지으며 보여주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삶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들이 바로 그 증명 아닐까 생각한다.
가슴 한 구석에서 성냥의 작은 불꽃을 피운 느낌이다. 저자가 엄마와 그랬듯, 나도 나의 부모님과 함께 그 작은 불꽃에 커다란 온기를 불어 넣고 싶어진다. 저자가 그 계기를 집 짓기로 만들었듯, 내게도 나만의 집 짓기라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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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도, 누추해도 자신의 존재를 기댈 수 있는 곳이 진정 집이다. (216페이지)
막연하게 엄마와 집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엄마는 땅 밟고 살아야 한다면서 마당 있는 집을 원하고(사람은 흙을 밟으며 살아야 건강하다고 했다.), 구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조 주방을 원하고(김장 때 불편하다고 바닥에 물을 버릴 수 있는 구조의 주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울타리 안에서 약간의 채소를 길러 먹을 수 있는 텃밭을 원한다. 마트에 가면 금방 사서 올 고추장 된장도 굳이 담가 먹어야 한다면서 장독 놓을 공간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좁은 마당 한 귀퉁이에 엄마가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작은 밭이 있고 장독대가 있다. 정말 손바닥만 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작은 공간이다. 시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추나 시금치, 파, 열무, 부추, 고추, 토마토 같은 것을 심는다. 어느 정도 자라 수확(?)할 때가 되면 딱 한 끼 식사할 수 있는 채소가 나온다. ^^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일 년 동안의 큰 농사지어서 엄청나게 수확한 사람의 표정을 보는 듯하다. 집 앞의 시장에 가면 아무 때나 사서 먹을 수 있는 것을 굳이 본인의 손으로 길러 먹는 맛을 열변한다. 나는 그런 말을 흘려듣고 말지만,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그냥 웃는다. 엄마와 나는 집에 대한 개념이나 바라는 양상이 정반대일 정도로 다르지만, 굳이 토 달지 않는다. 집이라는 것이 겉모양이나 구조, 쓰임새 등등 많은 것이 다 다르겠지만, 본인이 좋으면 그만이다. 그건 집과 사람, 그 두 가지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기억이 각자에게 다르게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를 한귀은의 『엄마와 집짓기』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고 있다.
『엄마와 집짓기』 제목에서 풍기는 내용 그대로다. 저자가 집을 짓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물론 거기에는 당연하게 엄마가 함께한다. 30여 년을 살아온 동네와 집을 뒤로하고 새로운 터전에 새집을 짓는다. 엄마와 아빠가 노후를 함께 할 집, 성장해서 따로 나가 사는 자녀들이 부모가 그리워 찾아올 집, 가족들에게 평안과 행복을 만들어줄 집. 그런 집을 짓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초공사부터 여러 가지를 직접 보고 선택하고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만들어진 물건 하나 사듯이 뚝딱 지어지는 게 아니어서, 건축주(저자와 어머니)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관리·감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처음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안타까움마저 안고 가야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정말이지 처음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 같은 초보의 입장에서 이미 경험한 시행착오를 그대로 들려주는 지침서 같기도 하다. 혹여나 집을 짓고자 하는 미래의 초보 건축주가 이 책을 본다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듯하다. 동시에, 이 책은 집짓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저자와 엄마가 집을 짓기로 마음먹으면서 시작된 어려운 과정을 담은 초보 건축주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집짓기 과정을 통해 시작된 시간 여행이자 저자와 엄마, 가족이 함께해온 시간만큼 함께 해온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집(집짓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쓰게 한다. 집이 인생(사람)과 같고 시간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집짓기를 통해서 엄마(나)의 마음을 알게 된다. 마흔이 넘은 딸과 예순이 넘은 엄마. 서로가 함께해온 40여 년의 시간 동안 터놓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이 집 짓는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과정을 지켜보면서 살며시 고개를 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욕망이면서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가 바라는,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런 집이면 좋겠다, 이런 공간이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얼마만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나는 지금,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싶은 내면의 물음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자꾸 채워 넣으려 하는 것보다 비워야 할 것들에 관해 얘기한다. 집짓기 과정의 시작인 설계에서부터 그 비움의 마음이 보인다. 이것저것 필요한 공간이라 생각해서 그려 넣고 설계한 집의 구조가 오히려 삭제되어 시작된다. 같은 크기의 면적에서 꼭 필요한 공간을 만드는 것, 자신이 기거할 그 장소에서 가장 바라는 것 우선으로 그려지고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게 기본일 텐데, 그동안 내가 바라본 삶을 떠올려 보면 가장 최소한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것, 사람들의 눈을 따라가는 것이 우선시 되어온 것들이 많았다. 저자 엄마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집과 사람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닥을 만드는 기초공사부터, 골조를 세우고 살을 입혀 기둥과 면을 만들고 숨을 트이게 할 창을 내고, 제법 집 모양을 갖추었을 때 이어지는 내부공사나 인테리어를 보고 있자면 사람도 집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스무 살의 사람 한 명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천천히 자라고 성장해가면서 만들어지는 스무 살, 서른 살의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이 집을 통해 보인다. 사람의 손길을 타고 온기를 받아 애정이 불어넣어 졌을 때, 집은 편안하고 아늑하고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한다.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인 건지, 집짓기의 험난한 과정을 함께 하면서 공통으로 경험하는 모습 때문인 건지 그 시간은 종종 과거를 불러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집을 지어야겠다.’,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 싶은 바람을 불러올 때 과거도 동시에 불려 오게 된다.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이 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 한때 소망하던 일은 지금 이루어야 하는 바람으로 남아있다. 그 시간에 이루지 못한 것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는 누군가와 함께 남겨진 경우가 많다. 저자와 엄마 사이, 그 굴곡진 시간이 차마 드러나지 못했던 때를 지금 이렇게 화해의 순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는 아픔이었고 눈물이었을 일들을 웃음으로 꺼내는 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오지 못했다면, 지금 엄마와 집짓기를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이렇게라도 꺼내어보는 것, 이렇게 한번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치유가 되는지 알 것도 같다. 집짓기는 저자와 엄마에게, 이 책을 읽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남겨진 숙제 같은, 그 화해와 치유의 계기가 된 것이다.
집짓기를 통해 사람과 삶을 알아간다는 것, 새롭다면 새로울 수 있는 시선이었다. 그 주체가 엄마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라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집이, 집이 아니라 삶이라는 이름으로 써질 수 있다는 것도 신비롭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집의 외양이 아니라 소박한 집 한 채가 한 사람과 같음을 알게 한다. 그 안에서 살아갈 누군가의 삶이 그대로 보이는 자서전 같은 공간이 집이라고, 앞으로 써 갈 일기 같은 공간이 집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상처투성이의 이해 못 할 시간에 대해 기억이 재구성될 수도 있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올 불안을 잠재울 수도 있는, 내 마음 쉬이 뉘일 수 있는 안심의 장소가, 바로 집이 되지 아닐까.
집에 관한, 집짓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집을 짓는 구체적인 과정이나 비용 같은 부분에 대해 세세한 내용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 집과 함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면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삶의 의미 있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잘 짓고, 평범하고 소박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시간을 꿈꾸는 이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들려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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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 짓기 이 책은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 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라는 글이 책 표지에 보인다. 제목 『엄마와 집짓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흔 넘은 딸이 저자인데, 한귀은 경상대학교 국어 교육과 교수로,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다양한 주제를 천착하고 책을 펴내고 있다. 저자와의 인연도 벌써 세 권째다. 『그녀의 시간』, 『모든 순간의 인문학』에 이어 세 번째 책을 접한다,
이 책의 내용은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 처음 인문학적 집짓기’라는 말 그대로 저자는 엄마와 함께, 엄마를 위해 집을 짓는다. 땅을 사고, 땅을 고르고, 설계를 하고, 시공업자를 선정하고, 드디어 그 땅 위에 집을 올린다. 저자는 집짓기의 모든 과정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집을 지으며 관계를 회복하고, 현재를 사랑하고, 미래를 꿈꾸게” 된다. 저자는 집짓기를 통해, 엄마의 삶을 돌아보는 한편, 집이란 무엇인가, 란 주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있다. 그게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어릴 적, 아버지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집을 짓는 모습을 목도한 나로서는 저자가 집짓기의 과정 과정마다 곁들이는 생각들이 부럽다. 물론 나는 그 때 어릴 때였으니, 그냥 새집을 짓는다는 것이 좋기만 했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만한 나이는 아니었으니 그런 생각은 할래야 할 수 없었지만,. 저자가 만들어가는 집의 구조를 보면서, 동시에 내 앞에서 매일매일 달라지던 어릴 적 집을 모습을 떠올려가며 어렴풋이나마 추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자가 나에게 그런 추억을 새겨보는 시간만 준 게 아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다.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 넣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게다가 좋은 용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주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형상들을 빚어냄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한층 격화 시킨다.” (106쪽)
에머슨의 말을 읽으면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사람은 에머슨의 말처럼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이거늘, 그런 이치에 거역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 소설로 대답을 해 놓고 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이란 책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다. 하이데거의 저서 및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었다. 『존재와 시간』을 1차 저작과 2차 저작으로 읽었는데도, 아직도 안개 속이다. 그런데 전에 『나는 이기적으로 읽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으며서, 그에 관한 귀한 정보를 얻었다. <독일의 철학가 마르틴 하이데거는 태어난 곳에서 멀지 않은 ‘검은 숲’(Black Forest) 의 작은 오두막에서 평생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존재와 시간』을 비롯한 그의 주요 저서들은 가족들과 함께 지낸 검은 숲의 작은 오두막에서 쓴 것들이다. 하이데거는 “산꼭대기에서 산꼭대기로 말하기”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는데, 이는 “세상과 동떨어져 고향의 언덕과 산봉우리 사이에 살면서 철학하는 어려움”을 뜻한다. 이처럼 난해하기로 유명한 문장들은 그가 산책하던 오두막 주변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산길에서 유래했다. ......하이데거의 글은 그가 살던 장소를 이해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나는 이기적으로 읽기로 했다』, 박노성, 76쪽)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할 수 있었다. <하이데거는 말년에 검은 숲으로 둘러싸인 언덕에 직접 작은 오두막을 지어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는 집의 가장 깊숙한 공간에 서재를 만들고, 작은 창문 너머로 우물이 보이는 곳에 책상을 두었다고 한다. 그의 차경(차경)은 우물을 둘러싼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집 주위와 강가를 산책하며 유년 시절을 추억하고 사색을 했다. ,,,,,,그는 자연의 관념이나 본질을 묻기 전에 자연의 실존, 자연의 물성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했다.>(314쪽) <하이데거의 책 『숲길』은 시적인 삶을 풀어놓은 현자의 책이다. 그가 말한 숲길이란 풀이 무성히 자라나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이다.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무꾼과 산지기에게 그 길은 끊긴 길이 아니다. 그들은 그 숲길을 걷는다. 진정한 삶도 바로 그 끊긴 듯한 숲길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317쪽) 이렇게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격언이 독서에도 적용되는 것이리라. 그러니, 저자는 땅위에서는 엄마를 위한 집을 짓고, 동시에 지면에서는 이 책으로 인문학적 집을 지으며, 독자인 나에게는 인문학의 경지로 한발 한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 책은 또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에서 읽고 – 분명 읽었지만 - 그냥 스쳐지나간 문장을 다시 음미하게 되는 것도 기쁜 일이다. 새로운 발견이 되는 셈이다. <“쉴 곳을 찾아 세상을 뒤지고 헤맸으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라는 에코의소설 『장미의 이름』 서문도 생각났다.>(145쪽)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분명 읽었는데, 그 대목이 생각나질 않는다. 해서 다시 한번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들어보았다. 찾기도 쉽다. 저자가 『장미의 이름』 '서문'이라 밝혀놓았으니. 장미의 이름은 2권으로 출판되었으니, 만약 저자가 서문이라고 밝혀놓지 않았더라면,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될뻔 했다. 그 말은 『장미의 이름』 상권 23쪽에 나오는 말로, 아켐피스의 발언이다. 저자는 인문학적으로 집을 짓고, 독자는 그 집에서 인문학적 성찰이 종으로, 횡으로 이루어지는 글 읽기가 되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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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시작하기 전 잡담 - 책에 적혀 있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뼛속까지 프로그래머인 나에게 인문학이 무엇인지 알도록.. 그리고 울컥하고 감정을 토해내게 만드는 그런 느낌을 받게 만드는 글을 쓰는 사람이 바로 한귀은 교수님이다. 사람의 감성을 이렇게까지 툭툭 건드려 터뜨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감정 자체를 숨기려고 노력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독약같으신 분이다.
혹시나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한귀은 교수님의 강연에 한번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굳이 이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사람하고 가보길 추천한다. 남자끼리는 좀 이상하니까 그 경우만은 제외하도록 하자.
책 설명 - 2014년을 맞은 지금 작년에 뇌리에 박힌 단어는 소통이라는 단어이다. 소통... 누군가와 교감하고 느끼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알게 되는 것.. 서로의 뜻을 같이 하는 것..
스스로 소통을 잘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생각을 듣고 많은 느낌을 받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리고 나는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고 최소한 남들보다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모두.. 착각이었다. 정말 모든 것은 착각뿐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착각하는 착각쟁이일 뿐이다.
이 책은 그 착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 과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
저자는 이것을 알아차리도록 빗대어 많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 엄마와의 대화.... 엄마의 행동.. 그리고 자신이 바라보고 느끼는 점 등..
진정한 소통은 제일 가까운 혈육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진데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알고 있나... 라는 씁쓸한 의문을 한입가득 베어물게 해준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변으로써 이해하는 저자의 관점이 너무도 절실하게 와닿는다.
책의 아름다운 모습 - ![]() 감성적인 느낌.. 따듯한 이런 표지가 책의 느낌을 잘 살려준다. ![]()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이해하는.. 저자가 너무도 부럽다. ![]() 시각과 이해.. 소통과 관점.. ![]() 한귀은 교수님의 책은 두고두고 한번씩 비올때 꺼내 읽으면 착착 달라붙는다. ![]() 집, 사람, 시간... 타인의 관점을 변화시키도록 이 세가지를 잘 버무려 놓았다. 맛깔나는 책. 이것이 저자의 매력이 아닐까..
서평 - 이 책을 읽기전 읽은 책이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 라는 책이다. 그 책의 내용은 나이 서른이 된 아들이 환갑이 된 어머니와 어머니의 환갑을 위한 세계여행을 하며 겪는 이야기를 묶어낸 책이다. 읽는 내내 나의 어머니께 정말 잘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중에...는 여행을 같이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였고 세계여행을 하려면 영어를 해야 하는데 영어공부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엄마와 집짓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딱 하나... 집에 자주 내려가고 어머니 손도 꼭 붙잡고 있고 안마도 자주 해드려야겠다.. 라는 것이다. 그냥.. 그냥... 옆에서 바라만 보아도 고마운 이름이다. 내가 정말 못났다고 느껴지도록 만들어준 이 책이 참 미워졌다.
못난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잘하지 못하는 자식이라면 끝없는 반성을 하며 읽게 되는 책이다. 어쩜 이리도 쿡쿡 찌르며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것일까...
구정을 맞이해 부모님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그리고 스스로 못난 자식이라는... 그런...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부모님이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며.. 몹쓸.. 자기몸 하나 추스리기에도 바빠 부모님께 전화도 자주 못하는 못난 자신을 자책하며 소주 한잔하면서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다.
서평을 마치며 - 얼마전에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신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자취하며 산지 오래 되었는데 아들이 사는 것을 보시러 오신 것이 두번째였다. 나이가 조금 더 먹으니 어머니에게 더 잘 해드리고 싶었다.
점심엔 식사 한번에 오만원 가까이 하는 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먹으며 거의 평생을 식당을 하신 어머니가 식사 가격을 아시게 되면 큰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계산서도 보이지 않도록 숨겼다. 어머니가 파시는 맛있는 순대국밥은 오천원이다. 나는 그 열배나 되는 식사를 대접하려 했으니 분명 혼나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어머니는 계산서를 보시고도 너무도 좋아하시며 서울에 와서 우리 아들에게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먹게 되어 고맙다라고 하셨다.
그냥.. 나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멍청한 이 아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라고 했던가? 어머니도... 아버지도... 좋은 식사, 좋은 자리를 좋아하신다. 돈 쓰지말라고 하시면서도 이것이면 된다고 하시면서도 좋아하신다. 좋아하신다....
책 읽는 내내 울컥울컥 하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가슴이 쓰리다. 이 멍청한 나는 소통을 외치며 떠들어댔던 어릿광대였을 뿐이다.
당신은 부모님을 하루에 몇번이나 생각하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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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대 중반인 어머니는 이따금씩 "늙으면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 라고 말씀하신다. 어머니라고 평생에 한 번 제 힘으로 집 짓고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없을 리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오랫동안 건축업계에서 일하고 계신 데다가 건축사 자격증까지 가지고 계시니 허무맹랑한 꿈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인 나는 "엄마가?" 라는 회의적인 대답만 하기 일쑤다. 두 살 때 서울로 이사와 거진 평생을 도시에서만 산 엄마가, 그것도 주택 대신 아파트 생활만 고집해온 엄마가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할 리 없다는 얄팍한 편견 때문에 말이다. 엄마는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집에 사신 적이 없다. 좋은 집은 언제나 먼 곳에 있었고, 그런 집을 꿈꿀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셨기에, 아예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사셨다. 어쩌면 온돌이 있고 이불이 있는 집만으로도 감사해하셨는지도 모른다. 인테리어라고는 어쩌다 길에 핀 들꽃을 꺾어다가 아무 병이나 컵에 꽂아두는 것이 전부였던 엄마. 그런 엄마의 집에 대한 꿈을 눈앞에 드러내는 일은 좀 슬픈 일이기도 했다. (p.50) 경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한귀은 교수의 <엄마와 집짓기>를 읽으면서 많이 반성했다. 저자 한귀은은 60여 년 동안 '자기만의 방'은커녕 번듯한 집 한 채 가져보지 못한 어머니를 위해 경남 진주에 집을 지었다. 건축 전문가도 아니고, 하물며 평소 집짓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번엔 달랐다. 집 지을 땅을 고르는 일부터 설계, 시공, 인테리어까지 모든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집짓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평범하다 못해 촌스럽다고 여겼던 어머니에게도 곱디 고운 취향이 있다는 것을, 싸우기만 하는 것 같았던 부모님 사이에 자식들은 모르는 속깊은 애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많은 것을 얻었다. 일단 부모님이 남은 생애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었고, 하나뿐인 아들이 맘놓고 드나들 수 있는 외갓집을 얻었다. 가난한 집의 큰딸로 태어나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음도 얻었다. 아픈 기억으로 점철된 과거의 집을 허물고 새로운 추억을 담을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돈도, 노력도 많이 드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만한 가치와 보람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인문학적 집짓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삶이 깃들어 있는 집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p.27) 엄마라고 왜 집 한 채 가져보고 싶은 소망이 없겠는가. 제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집을 꾸며보고 싶은 바람이 없겠는가. 엄마와 삼십 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막상 엄마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어떻게 집을 꾸미고 싶은지는 몰랐다. 그렇다는 것은 곧 엄마에 대해,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내가 무관심하고 무지했다는 것이 아닐까. 이다음에는 시골에 살고 싶다는 엄마의 말씀에 면박을 주는 대신 어떤 집에 살고 싶으시냐고 다정하게 여쭤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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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되는 순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렇다. 이전의 그것이 지닌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 직접 만든 집은 어떨까? 땅을 사고, 공간을 계획하고, 물건을 들이는 일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일까. 그 떨림은 집을 짓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기존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창작물처럼, 생명이 깃든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엄마와 집짓기』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엄마와 집짓기’ 라니, 나는 그저 속이 상하고 부럽다.
그렇다. 이 책은 엄마와 함께 집을 짓는 이야기다. 아니다. 집을 짓는 과정이 아니라 삶을 사는 이야기다. 엄마와 딸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을 사랑하는 법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비루하고 지친 삶을 안아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을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자신이 아닌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를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나만의 엄마가 떠올라서, 엄마라는 이름밖에 없었던 한 여자가 생각나서.
‘처음엔 엄마에게 창은 바깥으로 뚫린 통로의 의미였겠지만 이제는 점차 바깥이 들어오는 소통의 의미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차경(借景)이다. 엄마의 창은 바깥 세계의 풍경을 빌려주는 도구이다. 엄마는 창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제일 좋다 하신다. 나는 엄마의 밭이 제일 좋다. 엄마가 낸 창으로 보이는 엄마의 성실한 밭과 그 밭 위로 펼쳐지는 넓고 깊은 하늘이 나를 감격스럽게 만든다.’ 156쪽
엄마의 밭이라는 건 없었다. 그냥 밭이었다. 노동이 삶의 여유가 아닌 삶의 필수였던 나의 엄마에게 집은 어떤 존재였을까. 소박한 화장대는 고사하고 거울 하나 놓일 공간 대신 아버지의 양복이 곱게 걸렸던, 엄마의 방이 내 앞에 펼쳐진다. 엄마의 냄새가 있어서 좋았다. 저자는 엄마의 부재를 견디며 사는 모든 딸들에게 엄마를 불러온다. 집을 지으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사랑하는 엄마와 딸, 가족을 통해서 말이다.
‘집은 나의 것과 가족의 것이 섞여 있는 곳이다. 간혹 아이 옷 틈에 내 옷을 보거나, 내 양말서랍장에서 튀어나온 아들의 양말 한 짝을 보고 웃음 지을 때가 있다. 특히 아들이 아기였을 때 신었던 아주 작은 양말을 보면, 한순간에 시간은 내가 새댁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던 그때, 서랍장은 고요하게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202쪽
집을 짓는 과정은 여타의 책들과 비교해 색다른 점은 발견할 정도는 아니다. 저마다 집에 대한 생각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책에서는 엄마의 의견을 가장 존중한다. 엄마의 집이므로, 창을 많이 내고, 튼튼하고 따뜻하게 몇 겹의 자재를 두르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지어진다. 집을 짓고 사용할 물건들을 준비하며 엄마와 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엄마가 되고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되는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건 한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저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그림을 드리면서, 엄마의 물건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려받고 싶은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은 엄마가 그동안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57쪽
현재의 삶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고단했던 지난 삶을 추억하고 여미는 힘이 된다. 아무것도 없던 땅 위에 우뚝 선 집처럼 말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의 글이기 때문에 집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포옹해주는 유기체로 새롭게 보인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고 몰랐던 부분을 일깨워주고 각인시켜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다짐하게 만든다. 내가 ‘한귀은’ 이란 저자를 좋아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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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habitat 나이가 들면서 아파트처럼 누가 만들어준 집이 아니라 직접 집을 지어 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보면 기존 집을 리모델링하여 지붕이 정원이 되는 휴식의 공간이 탄생한다. 정형화된 생각에서 벗어나 집이라는 공간이 꿈을 꾸는 공간이 되니 이 얼마나 멋진 건축의 기술인가. 저자는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의 구별을 설명했다. “공간(space)이 한 개인에게 무의미한 곳이라면, 장소(space)는 한 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곳이다. 가령,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사건이나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 곳은 공간이 아니라 장소이다. 그래서 삶은 장소 만들기의 과정이다. 자기만의 안온한 장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이 장소는 여러 곳이 될 수 있으나 이 책에서는 집으로 한정해 둔 것 같다. “물리적인 주택(housing)과 달리 집(home)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개발하고 그 사람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는 장소이다.” 이 문장만큼 집(home)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있을까 싶다. 우린 가끔 편안한 장소를 발견하곤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같이 갔던 곳 혹은 가족들과 함께 여행했던 곳 이것도 아니면 그냥 혼자 편안함을 느꼈던 곳. 이런 곳을 장소애(topophila)를 느끼는 곳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장소애는 장소(topos)에 대한 사랑(phila)을 뜻하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의 감정이 소용돌이친 것이지 장소는 장소 그대로 있었던 곳이다. 우리의 감정으로 장소에 대한 사랑을 색칠한 것뿐이다. 가끔 이 색칠은 현재 나의 색과 겹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심적으로 불안정을 느낄 때 내가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꼈던 장소를 찾지 않나 싶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간혹 주인공이 없어진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지 유추해서 찾아낸다. 그 곳은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으로 색칠해 놓은 곳이다. 사랑스러움의 색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색도 있다. 하지만 그 곳은 그가 의미를 부여하고 색을 칠해 놓은 곳이다. 이러한 장소정체성을 가장 근본은 집(home)이다. 집은 우리가 생활하는 가장 근본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집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드믈다. 없으면 안되지만 없어졌을 때 소중함을 찾는 뭐 그런 느낌이랄까? 집은 물리적인 공간이다. 그럼 가정은 물리적인 공간일까? 정신적인 공간일까? 가정은 “한 가족이 생활하는 물리적인 공간”이라고 한다. 같은 단어인데 뉘앙스는 좀 다른 것 같다. 가정관리학과는 있는데 집관리학과는 없지 않은가. 가정은 물리적인 공간인 집에 가족 구성원의 생활(의식주)를 합쳐놓은 느낌이다.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이지만) 살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살기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편안함을 느끼고, 가족 구성원 모두를 위한 배려 깊은 집이 되어야 하겠지? 집을 만든다면 아파트 같은 수직적인 공간이 아닌 가족 모두를 위한 수평적인 삶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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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욕망을 처음 품은 건 ‘아이들은 흙을 밟고 살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였을 게다. 양평에서 지금까지도 살고 계신 선생님은 당시 어린아이 둘을 키우고 계셨고, 이러한 지론에 따라 양평에 터를 잡으셨다. 그 이후로 나는 내 집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흙을 밟으며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모색했다. 그리고 다행히 4년 전 마당이 있는 주택은 아니지만, 집을 나서면 정자와 풀밭이 있는 화성(봉담)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주위로는 논과 밭이 있고, 야트막한 산과 인접한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잘 내린 결정이었다. 비록 내 출퇴근 시간은 세 배나 늘어났지만,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자라고 있다. 집이란 공간은 단순히 주거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직장을 다니는 나야 밤늦은 시간이나 주말 정도 머무르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온종일 부대끼는 공간이다. 아이들은 봄이면 꽃과 식물이 자라는 풍경을 보고, 여름이면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그리고 가을이면 밤과 도토리를 줍고, 잠자리를 잡으며 하루를 보낸다. 눈 쌓인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시원하게 연을 날리는 겨울은 또 어떤가.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2층임에도 불구하고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맘껏 뛰어도 된다는 사실이다. 아파트에 살 때 늘 들었던 잔소리가 없어졌으니 아이들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적어도 내겐 절반의 성공이었다. 한귀은 교수의 <엄마와 집짓기>(한빛비즈)를 읽으며 내 경험을 먼저 떠올린 건 ‘인문학’의 의미가 개인의 삶과 행복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집짓기는 아닐지라도 공간과 주변 환경의 선택은 적어도 내게는 ‘인문학적’이었다. 저자는 인문학적 집짓기를 “내 삶을 의미 있게 하고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해주는 집을 짓는 것”으로 정의한다. 부모님이 여생을 보낼 집을 함께 지으며 안팎으로 각별한 의미들을 부여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가 아닌 부모님이 살 공간이었고, 그 공간들은 남은 생의 행복을 채워줄 수 있어야 했다.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시행착오는 만만치 않게 겪어야 했다. 설계 변경으로 훌쩍 초과한 예산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노모의 의지가 더 대단했다. 그동안 숨겨왔던 본능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침실과 거실, 주방, 욕실 등 공간의 틀에서부터 창과 문, 조명 등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꼼꼼히 만들어 나갔다. 또한, 동네와 마당, 밭에 이르는 외부 환경까지 빠트리지 않고 챙기며 행복한 노년의 삶을 준비했다. 새집에서 남편과는 각 방까지 쓸 생각을 하며 준비한 일이니 오죽했겠는가. 시공업자에게 맡겨버리면 될 일이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인문학적 집짓기는 바로 남은 행복을 담아두는 일이었다. 저자의 인문학적 집짓기는 비단 집을 짓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집짓기의 과정에는 주거의 의미, 개인의 행복, 육아 문제, 부부의 관계, 일에 대한 생각과 단상들이 끊임없이 넘나든다. 바로 가족이란 공동체가 함께 살아야 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온 도시가 아파트로 둘러싸인 우리의 주거환경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외부로는 이웃과 단절되고, 집 내부로는 방문으로 굳게 닫혀 소통이 부족한 현실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가족이 함께 집을 지었던 과거의 흔하던 풍경이 이제는 인문학적 집짓기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현실이 낯설고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삶의 행복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임이 분명하기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 물론 내가 지을 집도 상상하면서! “바슐라르가 말했다. 파리라는 대도시에는 집이 없다고. 집이 없다는 말은 개인의 진정한 삶이 없다는 의미이다. 가치, 꿈, 추억 같은 것이 도시에서는 자생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삶을 다시 만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예쁘고 좋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집짓기는 내 삶을 새롭게 창조해줄 집을 상상하고 그것을 현현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21쪽) by 꽃다지, 2014.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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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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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건축·인테리어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유럽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작은 공간이든 큰 공간이든 오밀조밀하게 '그곳에 사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충족시킨 집들을 보았다. 땅덩어리도 좁고 집을 만들어 살기보다는 만들어진 집, 이를테면 아파트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어지간히 부러워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꿈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 꿈은 현현된다. 이 에세이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영화 <건축학개론> 속의 멋진 집, 그리고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남자 주인공이 벽돌 한 장 한 장 올려 만든 집. <엄마와 집짓기>는 이런 꿈을, 영상이 아닌 이미지도 아닌, 실제로 실현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집짓기', 누구나 꿈꿀법한 이 일이 더욱이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부르기만 하면 애정이 샘솟는 '엄마', 미안할 걸 알면서도 굳이 투정 부리고 짜증을 부리게 되는 '엄마', 저자가 '모녀 사이의 특별한 우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엄마가 나, 그리고 형제들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왔음을 알기에, 정말로 편한 가정(집), 엄마에게 맞는 집을 선물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엄마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미 여러번 '감성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과 감동, 여운을 함께 주었던 저자는 엄마와 함께 '인문학적 집짓기'를 실행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의 스타일'에 꼭 맞게, 즐겁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60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엄마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하여 집을 짓는다. 방에 들어오는 빛, 창의 크기, 바닥재, 돌담과 주차장, 물길, 창고... 저자가 건축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신중하게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은 욕심이 가득 찬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라,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 채워진 따뜻한 삶의 공간이 된다.
<엄마와 집짓기>에는 엄마를 위한 집짓기와, 자식을 위한 집 만들기가 함께 있다. 집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를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도 같이 있다. 이제 마흔이 넘은 저자가 자식을 위해서 꾸며나가는 공간에 대한 것들이 후반부에 펼쳐지는 것이다. 딸로서의 삶, 엄마로서의 삶을 모두 겪고 있는 그 시점은 내가 언젠가 맞이할 때이기 때문에 묘하게 와 닿는다. 아마도 여자들이라면 책 속의 감성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인문학적 사색들이 담겨있는 이 책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과 깊은 생각들이 꾹꾹 담겨있어 더없이 소중한 느낌이다.
집짓기는 엄마의 서러웠던 과거가 흙부스러기처럼 조금씩 부서져 내려 평평한 바닥에 고요히 얹히는 일이기도 하고, 그 엄마의 딸인 내 과거가 함께 햇빛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두 과거의 반석 위에 미래를 짓는다. 집짓기는 늙으신 엄마와 늙어가는 딸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며, 어쩌면 후에, 그 후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와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한 딸의 기획이기도 하다. 엄마는 차츰 집을 당신의 존재 자체로 여기신다. 엄마는 이제 엄마 자신, 아니면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 집을 지으려 한다. (20p)
하이데거의 관점을 거칠게 요약하면 불안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 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불안이 생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불안의 감지와 자신의 무(無)에 대한 자각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지금의 나'는 '염려적 현존재'라고도 했다. 엄마의 불안도 궁극에는 시간에 닿아 있다. 새집 앞에서 당신은 낡아간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그 부조화가 안타까우신 것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나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 엄마의 집을 지으면서 나는 자꾸만 엄마의 노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불안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불안이 좀 덜 잦게 찾아오게 만드는 것만이 최선일 것이다. (107p)
어두운 방으로 들어온 태양광뿐만 아니라, 밤의 어둠에 하나씩 켜진 조명도 빛을 만들고 그 빛은 공간에 깊이를 부여한다. 작은 공간도 빛과 어둠의 무수한 결 때문에 더 깊어지고 아늑해진다. 그래서 '감성조명'이란 말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깊은 공간에서 더 감성적이 되는 법이다. 감성이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이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기 시작하는 어스름 무렵이나 한밤의 간접조명 아래에서 감성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빛' 때문만도 아니다. 빛과 어둠, 그 사이에 있는 켜켜이 다른 빛의 자질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빛과 어둠이 만드는 깊이 속에서 세상과 관계에 대해 더 아름다운 생각,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69p)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어둠이 메타포일까. 사랑하지 않아도 어둠은 많은 것을 변질시킨다. 가령,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밀을 누설하고 싶어진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취기가 돌고 '내일'이라는 시간이 의식되지 않고 다만 '지금 여기'만이 팽창할 때, 그때 우리는 감춰두었던 어떤 '사실'을 들키기 위해 애쓴다. 그때 진실게임 같은 것을 한다. 상대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진실게임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게임이 아니다. 비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소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그 진실이란 것은, 결코 비밀이 될 수 없는 부분에 한정된다. 비밀은 그냥 비밀로 묻혀 잇는 것이다. 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앎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앎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진짜 비밀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앎에 포함된다. 혹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 앎에 해당된다. (176p)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의 엄마는 빌리에게 "항상 너 자신이길......(Always be yourself)"이라는 말을 남긴다. 엄마가 아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자기 자신을 믿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믿는 또 다른 존재와의 만남 사이에서 증폭되는 에너지이다.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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