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여동생》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누이 중 '아돌피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치 독일시대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된 네 자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네 자매가 살았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독일군이 점령해 오스트리아를 떠나려면 출국사무소에 신고해야 하고 실제로 비자를 받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제법 학계에 유명인사였던 지그문트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는데 같이 데려갈 가까운 사람들 명단에 누이들은 없었다. 그의 가족은 물론 처제, 주치의 가족, 가정부, 심지어 강아지 요피까지 포함했으면서도...... 유대인 지구에는 로자, 파울리나, 마리, 아돌피나 네 자매가 남아있게 된다. 런던으로 간 오빠 지그문트는 이내 사망하게 되고, 네 자매는 유대인에게 내린 규제령속에서 두려움을 안고 사는 법에 익숙해졌다.
그리고......1942년 죽음의 수용소행. 그 과정에서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생전에 아꼈던 누이동생 오틀라 카프카와의 짧은 인연도 가지게 되지만 어린이 호송열차의 호송인으로 자원한 오틀라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내 네 자매도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구스타프 클림프의 <죽음과 삶> 작품이 실린 이 소설의 표지, 매 챕터마다 앞부분에 실린 뒤러의 <멜랑콜리아> 작품은 삶과 죽음, 삶의 그림자, 우울을 나타내고 있어 격정의 세월을 홀로 외롭게 살다 간 아돌피나의 삶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소설 《프로이트의 여동생》은 프로이트 가족사는 물론 아돌피나와의 인연을 가진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문제,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어 그저 실화를 바탕으로 한 흥미 위주의 스토리가 아닌 삶, 사랑, 모성애 등에 관한 의미를 끄집어내고 있어 묵직한 소설이다.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존재하지 않으니만 못한 지긋지긋한 현실에 대한 미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미움,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엄마'라는 존재는 아돌피나에게 가장 아픈 상처다. 무슨 죄를 지은 지도 모른 채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아돌피나. '오빠는 이성과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 비밀이 암호처럼 숨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빠는 생각과 감정 모두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면서 두 가지가 '협력'해야만 한 인간이 자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등 지그문트가 인간의 정신에 관해 빠져드는 과정도 그녀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미술 수업으로 만난 아돌피나와 동갑인 구스타프 클림프와의 인연은 구스타프의 누나 클라라 클림프와의 오랜 인연으로도 이어진다. 그녀와는 여성의 권리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 세상과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 권리 쟁취에 관한 노력을 해 온 클라라는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연인 라이너와의 만남, 그의 자살, 그의 아이를 지우게 되는 일은 아돌피나가 더더욱 세계와 대화의 밖에 머무는 존재로 남아있게 한다. 항상 결핍되어 있었고 이런 결핍과 부족, 공허함 때문에 무력해진 아돌피나. 어린 시절의 절망에서 시작한 통증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사랑과 미움이 커질수록 절망은 깊어질 뿐이었다.
『나는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뒤러의 판화 한 점을 볼 때마다 나와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중략)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판화에서 그늘 속에 파묻혀 흰자위를 반짝이는 얼굴에 떠오른 질문이다. (중략)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질문인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었다. 』 - p139-142
『 어느 한순간에 잃어버린 건 두 번 다시 돌려받지 못해. 잃어버린 그것이 사라진 순간에 필요했던 거니까. 그러니 우리가 죽고 다른 세상에서 다시 산다고 해도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는 그저 위안일 뿐일 거야. 어차피 물질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부당하고 사후에 우리가 다른 현실에서 어떤 위안이 되는 존재로 계속 살아갈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세상의 아름다움이야. 』 - p155
『 살아있으니까 아픈 거야. 다 지나갈 거야. 』 - p161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아돌피나는 원장 괴테 박사와 우울증, 정상과 광기의 구분 등 인간 본질과 정신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바깥세상에서 도망쳐 들어와 정신병원이란 감옥에서 오히려 자유를 얻는 아돌피나. 7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돌피나는 모녀의 쓰디쓴 기억과 미움을 삼키지만, 그녀의 모습은 절망으로 가벼워진 영혼의 무게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참 외로운 사람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람처럼, 여기도 없고 저기에도 없는 사람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사람...아돌피나의 이야기는 단지 한 여성의 삶 외에도 인간 존재의 철학적 의미,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함께하고 있어 진중하고 가슴 아린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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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내가 알고 있는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범위 내에 있다. 그만큼 심리학, 정신분석학, 철학 같은 학문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잘 알지 못한다. 고체 스밀레프스키 작가님의 '프로이트의 여동생'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라고 한다. 그 동안 프로이트의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짧게 나온 이야기를 얼핏 읽었던 것이 전부인데 프로이트와 누이들을 둘러 싼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스토리는 프로이트의 여러 명의 누이들 중 유달리 그를 따르던 여동생 '아돌피나'의 관점에서 풀어놓은 이야기다. 그녀는 오빠 프로이트의 관계, 자매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평생 마음에 새겨진다. 엄마의 애증을 받고 자란 아돌피나의 외로움과 슬픔, 여기에 아돌피나가 성장하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들과의 이야기가 아돌피나 자신의 입을 통해 들려주고 있어 훨씬 더 전쟁이 가진 아픔과 고통,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가 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독일 나치군에 의해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은 비엔나를 떠나기 위해 비자를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우린다. 프로이트의 네 자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탈출이 힘들자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오빠 프로이트를 찾아가 부탁을 하지만 그는 안심하라며 거절한다. 허나 얼마 있어 프로이트는 비엔나를 떠나기로 한다. 그것도 아내는 물론이고 아내의 친정 식구들과 가정부를 비롯한 개까지... 아돌피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이 간다. 더군다나 눈이 보이지 않는 피울리나가 딸을 만나고 싶은 마지막 마음까지 무시한 오빠였기에.... 오빠가 가족들이 떠나고 남겨진 아돌피나와 누이들은 결국 임시수용소로 가게 되는데...
남달리 몸이 아팠던 아돌피나가 엄마에게 느껴야 하는 정을 처음부터 차단당하며 오빠 프로이트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고 느껴진다. 오빠의 방을 찾아 그를 통해 다양한 작품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이후 오빠와의 관계도 서먹해지며 멀리하게 된다. 이런 관계가 돌파구가 되어 준 것은 아돌피나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면서다. 그림을 배우면서 알게 된 첫사랑 라이너와 프로이트와도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사라와 만나게 된다. 사라를 통해서 자립적이고 여성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려는 혁신적인 여성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이 클라라와도 만나게 된다.
프로이트의 결혼과 관련해 친구 사라를 잃고 옛사랑과의 재회와 배신, 그리고 아돌피나에게 남겨진 사랑의 흔적... 허나 이마저도 자신의 생각과 상관없이 프로이트의 권유로 잃게 되면서 아돌피나는 결국 괴테 박사가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보니 같은 여자로서 아돌피나란 인물이 무척이나 아프게 다가온다. 온전히 사랑을 주어야 하는 엄마의 차가운 말과 행동을 감수하고 따르던 오빠에게 버림 받는다.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차례로 잃거나 떠나게 되며 그녀는 온 몸으로 그 모든 것을 감내해야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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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뒤러의 '멜랑콜리아'란 판화다. 이 판화를 보며 아돌피나는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라는 질문은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다. 판화 속 건물은 곧 그녀의 삶, 어떻게 살고 무엇을 짓든 겨룩 완성되지 못한 채 헛되이 끝나고 말 그녀의 삶을 의미한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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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히는 흡입력 있는 스토리지만 읽는 내내 한 인간의 인생이 이토록 고독하며 안타깝고 철학적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람이란 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처음부분에 프로이트는 아돌피나의 청을 들었을 때 솔직히 심각할 정도로 위험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허나 친구들이 떠나라고 말했을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누이들을 떠올렸다면 그녀들의 삶은 다른 식으로 흘러갔을까 생각해 보면 마음이 안 좋다. 죽음을 눈앞에 둔 프로이트의 사과를 인간이기에 악의가 아닌 친절에 대한 게으름으로 표현한 아돌피나의 말에 아~ 저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새삼 놀라게 되며 그녀의 깊은 인간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밌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은 책이다. 개인의 삶이 암울한 시대와 만나 고통스럽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 무거운 소재의 이야기지만 내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해보게 만든다. 신예 작가의 작품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라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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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내 삶이 시작하는 순간에 절망과 희망이 있었다
'내 삶이 시작하는 순간에 사랑과 미움이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둘의 감정이 공존하면서 때로는 상처에 연고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연고가 독이 되어 상처를 덧나게 만들기도 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마주친 이 문장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마음 속에 머물렀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뒤, 이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어졌다. '내 삶이 시작하는 순간에 절망과 희망이 있었다.'
아기는 울음으로 삶을 시작한다. 삶에 대해 아주 비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기의 모습이 고통스러운 삶의 풍광을 내다본 본능적인 절망의 표현 방식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그의 해석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 아기의 앞에 펼쳐질 인생의 페이지들에는 아름다운 평화보다는, 서사의 역동성을 위한 고난과 역경이 훨씬 다양하고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기는 엄마의 눈망울로 삶을 시작한다. 모든 아기의 옆에는 그의 탄생과 함께 인생의 새로운 분기를 시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기의 눈동자가 들어오고, 아기의 눈동자에 그녀의 눈동자가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서로와의 인연이 갖는 특별함을 감지하게 된다. 아기를 기다리는 삶의 가시밭길은 험하지만, 그의 옆에는 어떤 가시라도 꺾을 수 있을 것 같은 강인함을 가진 보호자가 있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모든 아기의 절망에 대한 가장 강렬한 희망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엄마로부터 버림 받거나, 학대 당한 사람들이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인 아돌피나, 그녀가 평생을 바쳐 사랑한 라이너, 여성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으나 결국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클라라 모두 태어날 때부터 그들의 희망이었던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배신당한 사람들이다. 이 세 명은 모두 '광기'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거나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주변의 무엇과도 교감할 수 없게 된 건, 아마 '엄마'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던 희망이 산산조각나는 끔찍한 경험을 몸소 체험한 이후일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의 이야기이자, 상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소중한 사람들을 상실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대를 상실해가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독자들은 인생과 철학과 현실과 무의식을 탐험하게 된다. 아돌피나의 오빠, 프로이트가 그랬듯이.
*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섬세한 문체도, 철학적 사유도, 소설 전체에 흘러넘치는 '광기'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정리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다만, 번역이 조금 아쉽다. 작가가 표현하려는 바가 워낙 많았다 보니 번역자가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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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삶이 시작하는 순간에 사랑과 미움이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둘의 감정이 공존하면서 때로는 상처에 연고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연고가 독이 되어 상처를 덧나게 만들기도 했다. 엄마의 미움은 내게 가장 아픈 상처이면서 또 엄마만큼 날 사랑해준 사람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오빠 지그문트조차도.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2. 살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이 찾아온다. 어떤 고통은 이내 수그러들지만 어떤 고통은 죽는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겪은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이다. 나머지는 모두 처음의 고통을 통한 아픔이다. 이후의 모든 고통에서는 첫 고통에 닿을 때만 무지근하게 아프고, 첫 고통과 유사한 면이 있을 때만 아프다.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3. 새 생명을 몇 달 동안 심장 아래 담고 지내다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그 생명이 엄마 뱃속에서 떠밀려 나온 충격으로 어리둥절한 채 당연히 모를 수 박에 없는 세상과 조우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해요. 어차피 새 생명은 미지의 세상을 알 턱이 없고 아는 것이라곤 오감으로 느끼는 것뿐이니까요. 엄마로서 그 생명이 얼마나 나를 필요로 하고 내 젖가슴으로 젖을 먹여야 하는지 직접 보고 느껴야 하고, 그 생명의 눈이 어떻게 경험을 담는지 바라보고, 그 생명이 맞이할 첫 희망과 첫 절망을 지켜보고, 그 생명이 독립하는 모습과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모습을 봐주고, 내게서 나온 생명이 어떻게 나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지 지켜봐야 해요. 내가 생각하는 부모는 이런 거에요.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4. 나는 평생 팔이 잘려나간 밀로의 비너스처럼 나의 한 부분이 잘려나갔다는 느낌에 젖어 살았다. 겉으로는 모자란 데가 없어 보여도 나의 내면에는 영혼의 팔이 잘려나간듯 무언가 결핍되어 있었고, 이런 결핍과 부족, 공허감 때문에 나날이 무력해졌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시선이 내 존재를 깨뜨리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렸고, 그러면서 깨진 나를 치유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5. “시인이란 무엇인가? 마음 속에 사무치는 고통을 감추고 있지만 입술에서 탄식과 비명이 새어나와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는 불행한 인간이다.”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6. 그때의 우리는 세상물정 모르고 아직 가슴으로 생각하고, 철학자들이 써놓은 글을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리고, 행복에서 돋아난 달달한 시가 내 것인 줄 알고, 절망에서 비틀어 짠 씁쓸한 시가 내 것인 양 느꼈다. 그때는 말은 공허한 울림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현실을 모르고 아직 무덤 속처럼 시시한 일상에 질척대지 않던 시절이라 고상한 것들과 하늘 한 조각만큼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면 폐기처분해버릴 것들을 마음껏 떠들 수 있었다.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7. “광기는 모두 내 말을 기다리면서 말하라고 요구하고 나는 말하고 또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거에요. 입이 내 말을 듣지 않아요. 나는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데도 입은 굳게 닫혀 있어서 모두 날 보고 미쳤다고 해요. 어서 말을 하라고 아우성인데도 나는 계속 침묵하고 침묵하고 또 침묵하니까요. 내가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걸 아무도 듣지 못해요.” - 고체 스밀레프스키, <프로이트의 여동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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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여동생’이란 문구는 ‘프로이트’와 ‘여동생’은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는, 좀 과장하면 ‘여동생’은 ‘프로이트’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면 ‘오빠’와의 관계에서 ‘동생’, 특히 ‘여동생’은 약자에 해당한다. 강자는 약자를 힘으로 억압하지 않고 보호할 때 사회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힘을 가진 이들은 늘 착각하지만 ‘보호’라는 단어는 약자, ‘여동생’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드라마 속 오빠들의 다정함을 알지만 현실의 오빠들은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오빠가 없다. 어떤 끌림이 작용한 것인지 친한 친구들 역시 거의 오빠가 없다. ‘오빠’라는 단어는 내게 아주 낯설다. 세상의 모든 오빠가 여동생에게 깊은 애정을 갖진 않겠지만 적어도 어려움에 직면한 동생을 외면할 만큼 무심하진 않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예외는 존재했다. 그는 바로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여동생에게 깊은 애정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애정을 누르는 다른 강력한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고체 스밀레스키의 『프로이트의 여동생』에서 프로이트는 전쟁을 피해, 죽음의 위험을 피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떠나 런던으로 가면서 아돌피나를 비롯하여 여동생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구제할 수 있는 명단을 직접 작성했고 그 안에는 가정부와 주치의 부부, 처제 그리고 강아지 요피까지 포함됐다. 프로이트는 아돌피나에게 ‘국가의 광기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굳이 떠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핑계였다. 살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이 찾아온다. 어떤 고통은 수그러들지만 어떤 고통은 죽는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겪는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이다. 나머지는 모두 처음의 고통을 통한 아픔이다. 이후의 모든 고통에서는 첫 고통에 닿을 때만 무지근하게 아프고, 첫 고통과 유사한 면이 있을 때만 아프다.(63쪽) 세상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는 아돌피나에게로 향했고 아돌피나는 탄생의 순간, ‘삶의 시작’부터 고통을 받았다. 프로이트가 아돌피나에게 가졌던 애정은 어머니,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고통받는 대상에게 보내는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우치에 누워 자신을 맡겼던 환자들처럼 아돌피나 역시 자신을 의지하길 바랐으나 아돌피나는 프로이트의 생각과 달리 너무 똑똑했다. 환자들과 달리 아돌피나는 고통의 원인을, 광기의 원인을 스스로 찾았다. 프로이트와 아돌피나의 엄마 아말리에 나탄존은 아돌피나에게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라는 말을 반복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속에는 아돌피나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다, 라는 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딸들에게 아내의 덕목에 대해 말했고 딸인 안나가 의학공부 하는 걸 반대했다. 프로이트에게 여자는 소통하는 자가 아니라 남자의 삶을 돕는 자였다. 프로이트는 자기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던 역사,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아돌피나로 인해 열패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아돌피나 역시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 믿었던, 그러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오빠로 인해 상처받았다. 프로이트에게 아돌피나는 더는 ‘보호’해야 할 동생이 아니었다. 출국비자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는 프로이트를 돌봐줄 사람들이자 그가 돌봐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녀(들)은 아니었다. 한때 아돌피나와 함께 둥지 정신병원에 있었던 클라라의 “멀쩡한 사람은 어슷비슷 정상이고, 미친 사람은 제가끔 미쳤어.”라는 말은 광기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가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는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처음엔 고통의 기원을 알지 못해 상처받고 나중에 고통의 기원을 알아서 상처받았던 라이너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맛봤던 그녀 아돌피나, 그리고 ‘착한 영혼’으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삶은 영원하지 않고, 사는 한 고통의 끝은 없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삶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죽음으로 소멸할지라도. 그녀는 죽음 앞에서 고통의 기억을 잊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녀의 삶은 사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이었다. 현재 내 삶을 본다. 나는 살고 있는 것일까. 견디고 있는 것일까. 『프로이트의 여동생』을 만난 시간은 다시금 고통에 직면해 아팠지만 어떤 삶이든 무의미한 삶은 아닐 거야, 라며 현재를 사는 나를 위안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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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라는 제목과 구스타프 클림프의 그림을 표지로 한 탓에 나는 이 책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데에 방점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의 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도 많은 저서들이 그 유명세를 증명하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을 짚어보자면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마지막으로 사망한 걸로 정리가 된다. 저자인 고체 스밀레프스키는 바로 그 즈음 그가 영국으로 망명을 할 때 누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했는지, 남겨진 누이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당시에 프로이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어렵지 않게 누이들의 출국비자를 마련해서 그녀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이제는 누구도 알아낼 수 없는 프로이트의 마음이 아니라 남겨진 누이들의 생이었다. 누이들 중에 가장 다정하고 착한 동생이었던 아돌피나, 어머니에게 학대 받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평생 외롭게 살았던 그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의 생애 속에 감춰진 주변 인물을 그려내는 작업이 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품은 커다란 역사 속의 한 귀퉁이에서 그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오롯이 그려낸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프 <죽음과 삶> ![]() 오빠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 벽에 걸려있는 70년 전 우리 프로이트 집안의 자식들을 그린 유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이 그려진 당시 한 살 반이던 알렉산더가 훗날 기억하기로, 그가 조금 컸을 때 지그문트 오빠가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누이들하고 같이 있으니까 꼭 한 권의 책 같구나. 네가 막내고 내가 장남이니까. 우리가 튼튼한 표지가 되어 나보다 늦게 태어나고 너보다 앞서 태어난 누이들을 굳건히 보호해줘야 해. "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오빠가 다시 그 그림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건 따로 싸자꾸나." 오빠는 손을 뻗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려 했다. "오빠는 그 그림에 손댈 자격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프로이트가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을 가면서, 그는 올케, 조카들, 집안 식솔들, 올케네 여동생과 가정부 둘, 그의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들까지.. 강아지 요피 까지 데려갔다. 그러나 누이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남겨진 그의 누이들은 오빠가 런던에 가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비엔나에서 빼내 줄 거라고, 죽기 전까지도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궁핍과 공포에 떨면서 열차에 실려 수용소를 옮겨 다니면서도 말이다. 그가 왜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다.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추해볼 수 있는 건, 프로이트가 평생 인간의 본질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고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아버지라는 적의 죽음을 갈망했기 때문이다>라는 지그문트의 말처럼, 누구보다 순수하고 무력한 존재가 원초적인 죄를 저질렀다는 이론에 따르자면 뭐.. 설명이 안 될 법도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이니 우리는 이 작품의 내용에 주목 해야 한다. 아돌피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많이 아팠고, 여섯 살 위였던 프로이트는 다른 누이들보다 그녀에게 더 살갑게 대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도서관에 들락거렸었고, 어린 그녀는 그런 시간들 덕분에 엄마의 힐난과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었다. 어린 아돌피나가 기침을 하거나 토하거나 열에 들떠 정신을 잃으려고 할 때마다 엄마의 푸념.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이런 말은 그녀에게 상처로 박힌다. 물론 그녀 또한 엄마가 자신을 얼만큼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했고, 그 고통은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어린 그녀에게 사랑 만큼의 미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아돌피나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 사랑했던 라이너의 배신과 그의 자살로 인한 충격, 이어지는 낙태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원 생활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 펼쳐진다.
책의 장마다 삽입되어 있는 뒤러의 판화<멜랑콜리아>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판화에서 그늘 속에 파묻혀 흰자위를 반짝이는 얼굴에 떠오른 질문이다. 뒤러의 판화 속 멜랑콜리아에는 날개가 있지만 그녀가 날개를 펼치고 날 거라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질문인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라는 질문은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었다.
아돌피나가 사랑하던 라이너와 헤어지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복잡한 애증관계에 있던 엄마와 지내던 그 시기에, 프로이트는 결혼한 뒤 신혼 집에 의원을 열고 정신과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진료를 했다. 외로웠던 그녀는 오빠네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애원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식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돈도 부족하고 공간도 넉넉하지 않다고 거절한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고, 아돌피나는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매일을 한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그녀의 일부는 침대에 그냥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으로 말이다. 그때, 그녀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를 본다. 자신의 몰골을 마주하기 싫어서 일부러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판화 속의 여인은 날개는 있지만 천사는 아니고, 아무데도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한다. 아돌피나 역시 망연자실한 상태로 몇 해를 보냈으니, 곁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상태에서 그와 비슷한 심경이었으리라. 지그문트 오빠가 집에서 나가 병원에서 살기 시작하고, 안나 언니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나고, 파울리나와 마리 언니도 결혼해서 베를린으로 떠나고, 부모님만 남은 집에 아돌피나는 홀로 쓸쓸히 남아 있었다. 집안 어디에서도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결핍, 공허, 무력감과 우을증.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존재했다. 그러니 이 작품의 표지에 삽입된 클림프의 <죽음과 삶>과 뒤러의 <멜랑콜리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삶과 죽음이 종이의 양면과도 같이 사실은 별 다를 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돌피나는 결국 수용소에서 죽어가면서 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것이라 되뇌 인다. 엄마도, 아기도, 오빠도..이 모든 고통도.. 상처받기 쉬운 자신도...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실도 잊을 거라고 말이다. <인간은 살면서 가장 고통 덜 받는 곳으로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어쩐지 웃을 수 없는 농담처럼 느껴지는 슬픈 장면이었다. 나는 이 매혹적인 책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오히려 더 관심이 갔다. 정작 이 작품에서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그의 누이 아돌피나의 목소리만 들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돌피나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어쩐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게 여운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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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광기와 고통으로 점철된 한 여인의 생애를 그린 이야기이다. 단지 그녀가 공교롭게도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정신의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프로이트의 동생이라는 사실만 색다를뿐..그녀가 살던 그 시기의 여성들 대부분이 걸어왔던 삶과 다를 바 없는 고통받는 삶이었다. 결혼하지않은 여자는 무시당하고 특히 결혼하지않은 상태에서 연애를 하다 임신이라도 한 여성은 그야말로 매춘부와 같이 능욕적인 삶을 살거나 집에서도 내쫏기는 치욕을 당할뿐 아니라 별다른 직업을 가질수 없었던 당시의 여자들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는 길 외엔 특별한 방법이 없었던 ...여자들에게서 참으로 암담했던 시기였다. 앞서가는 지식인으로서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고 그 연구의 업적으로 후대에도 이름을 남긴 프로이트 조차도 이런 불합리한 일에 전혀 의문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전쟁의 조짐이 보이고 유럽이 나치즘의 광기로 흔들리던 그 시기에 그 위험한 곳에서 유대인누이들을 구조할수 있음에도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않고 자신들의 가족과 자신이 사랑하던 개와 고용인들만 빠져나오는 몰인정하고 무신경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누이라고 그녀 아돌피나를 꼽는 그의 무신경함이란... 이 책은 그가 왜..도대체 왜 구할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남은 가족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보내지않았는지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진않는다. 뒤에 남아 가스실의 고통속에서 쓰러져가던 아돌피나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뒤돌아 보는것에서 소설적 요소와 사실이 결합한 팩션소설이라고 볼수 있다.
아돌피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해서인지 엄마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껄..이란 소릴 듣고 자란다. 어쩌면 자신의 아비보다 나이가 많은 홀아비로 시집온 자신의 상태가 싫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어려서부터 남과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다른 아이들과 뭔지 모르지만 다른 아돌피나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껴서였을 확률이 더 많은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녀 아돌피나는 학교가는것을 거부하고 오빠 지그문트와 각별한 사이가 되고 그에게서 많은 지식을 배우지만 오빠와 자신의 차이를 인식한 순간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찾아 온 사랑 그 사랑조차도 안식과 위안이 되기는 커녕 자신의 존재의미를 몰라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심약한 인간이었기에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만 될뿐 그녀의 외로움과 절망은 깊어만 간다. 그녀에게 삶은 녹록지않았을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조차 태어나지않았더라면 좋았을 아이라며 존재를 부정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위로받지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정신병원인 둥지와 그녀의 친구 클라라만이 위로가 되지만 친구 클라라 역시 평범치 않은 인생을 살다간 여인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가 시대적 상황에 의해 빛을 서서히 잃어가며 스스로를 가두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아돌피나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공포를 부정한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영생을 꿈꿨고 이에 반해 죽음은 그저 망각일뿐이라며 고단했던 삶 마지막순간에 그저 다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아돌피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철학적이면서도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책이기에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읽고 난 후 나로 하여금 뭔지 모른 성취감을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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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속에서 찾은 아돌피나 프로이트의 일생 [프로이트의 여동생]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려한 그림을 표지로 한 이 책은 <Death and life> 라는 제목답게 삶과 죽음의 이중주를 솜씨 있게 버무려 놓는다. 책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그림으로 표지도 훌륭하지만, 각 장이 시작하는 곳마다 보게 되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 또한 압도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의 얼굴은 그늘 속에 들어가 있고, 두 눈의 흰자위가 그늘 속에서 반짝인다. 그녀의 시선은 아무도 없는 어딘가에 꽂혀 있다. 소설 속 중요한 장소인 정신병원 <둥지>에서 생활하는 아돌피나의 표정이 꼭 저러하리라 상상하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인 그에 대해 학문적 호기심 이외에는 품어 본 적이 없었지만, 프로이트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여동생을 주인공으로 한, 실존 인물이 주인공이 된 소설을 읽자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명 인물에다 석학이라면 도덕적 삶에 있어서도 남다른 철저함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지만, 거기에 부합하는 완벽한 인물은 거의 없다.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은 “사실”임을 전제로 하고 내용을 전개하기에, 무작정 허구려니 하고 넘길 수만은 없는 진지함을 기저에 깔고 있다. 프로이트가 쌓아올린 학자로서의 이미지에 금이 갈 것을 각오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리라... 프로이트의 편지에는 아돌피나가 어머니에게 학대당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주었고, 평생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 명기되어 있다. ‘누이 동생 중에서 가장 다정하고 착한 동생’이라고 불렀으나 프로이트의 가족들은 아돌피나를 무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쌍히 여긴 느낌도 든다. 여기까지가 사실이고, 히틀러 정권을 피해 런던으로 망명한 프로이트 일가가 끝내 누이동생들을 저버린 이후의 이야기는 역사에 남아 있지 않다.
그 공백 상태의 아돌피나가 작가의 상상력을 덧입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는 바, 아돌피나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손주까지 있었던 늙은 양털장수 야곱을 아비로. 늙은이에게 시집오자 곧바로 현실에 적응해 꿈도 접고 눈물도 잊은 채 살았던 아멜리에 나탄존을 어미로 하여 지그문트, 안나, 로자, 마리, 아돌피나, 파울리나, 알렉산더는 차례차례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아돌피나는 엄마로부터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녀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에 사랑과 미움이 있었고, 그녀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둘의 감정의 교차를 시시때때로 느껴야 했다. 몸이 약해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오빠 지그문트로부터 공부를 배우며, 오랜 시간 붙어있었던 그녀는 지그문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품기도 했다. 엄마들이 딸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던 그 시절, 그녀는 첫사랑 라이너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그녀의 아기는 태어나지 못한 채 그녀의 방 벽에 핏자국으로 남았다. 생명을 낳지 못한 여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은 그녀를 정신병원 <둥지> 속으로 숨어들게 만들었고, 클림트의 누나 클라라와 함께 하는 <둥지>에서의 생활 속에 적응하게 만들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광기에 시달리던 많은 이들 가운데, 새 생명을 낳고 싶은 기분 좋은 고통과 강렬한 갈망에 괴로워하던 아돌피나가 있었고,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나로, 시대를 앞서갔던, 성의 평등에 앞장서고 최초로 바지를 입었던 선구적 여인 클라라가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필코 우리 젊은 여자들은 세상과 시대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 권리를 스스로 쟁취해야 합니다.” -81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며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마련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의 여동생 역시 정신병원 <둥지>에서 광기에 시달리며 살았다. 개인적인 심약함과 나약함에 자기 자신을 붙들지 못했던 아돌피나가 프로이트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클라라 또한 시대를 잘못 만나 한 개인이 싸우기엔 너무나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가 일찌감치 좌초당한 셈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늘이 드리운 그 시절은 누구에게나 암울했을 터이지만, 프로이트의 힘을 빌어 런던으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음에도 비엔나에 남겨진 아돌피나와 자매들은 더더욱 힘이 빠지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테레진 수용소에서 우연히 프란츠 카프카의 여동생을 만나게 한 시대적 상황보다도, 아돌피나의 개인적 삶은 같은 여자로서 깊은 동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한 여인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작가의 힘을 빌어 이제야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과 미움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다 정신병원을 들락거린 인생이란 참으로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란 이름이 있었지만,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아돌피나를 미로의 삶 속에서 건져내어 빛을 발하게 한 작가의 노력에 새삼 감사한다.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살다가 한 번은 부딪치게 될 이 질문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여인의 이야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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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여동생
이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이 이야기는 프로이트에게 버려지고 사랑하는 엄마와 애인에게 외면받게된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의 지독한 한 생을 다뤘다. 아돌피아의 시선으로 보게되는 프로이트는 리비도,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꿈의 해석등으로 잘 알려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여기서 말하는 프로이트가 정말 맞는건가라는 의문을 몇번이고 할만큼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준다. 책을 덮고 난 지금까지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유대인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의 학살이 자행되기 조금 전. 프로이트는 출국비자를 받아 런던으로 망명을 갔다.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 가정부와 처제, 기르던 강아지까지 데리고 런던으로 망명을 갔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아낀다는 여동생 아돌피나와 그의 누이들은 모두 비엔나에 남겨뒀다. 여기서 왜!라는 의문이 생긴다. 결국 남겨진 여동생들은 모두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된다. 이 부분들을 모두 사실이다.
키우던 강아지, 주치의, 가정부까지 데리고 갔으면서 왜 프로이트는 그의 누이들은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프로이트에게 누이들은 가정부보다 못한 존재였던걸까. 여기서부터 아돌피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망명을 간 프로이트에게 누이들은 계속 자신들의 비자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들어주지 않았다. 그 속사정은 알 수 없겠지만 그토록 유명한 정신분석 학자에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게 한다. 나치의 학살에서 남게된 아돌피나가 담담한 듯하지만 두려움을 담은 이야기들은 더욱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게 만든다. 앞부분을 읽었을 때는 아돌피나의 수용소 생활이야기를 들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그녀의 과거 인생을 중점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 자신을 아껴주던 프로이트 오빠와 그녀에게 널 낳지 말걸 그랬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뱉어버리는 모진 엄마, 이기적인 애인에게 버림받는 이야기,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나 클라라와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등을 들려줘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프로이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책 표지의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이라는 그림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로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고 그림에 대한 설명도 한적없고 인터뷰도 한적없다고 하는데 이 책속에서 아돌피나가 들려주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름답다라고만 느껴지던 그의 그림들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조금을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여성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나 클라라와 그의 그림들을 더욱 궁금해지게 만드는 이야기다.
아! 그리고 그가 궁금해서 알아보다가 너무 예뻐서 퍼즐로 갖고 있는 "엄마와 아기"라는 그림의 원본 제목이 여성의 세시기 (The Three Ages of Woman)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작가의 그림 중에 딱 이 부분만을 골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알게했는지! 두 그림은 정말 느낌이 천지차이였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을 통해 만난 프로이트 또한 마찬가지의 인상을 남겼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교과서에 등장하는 분석학자가 아니었다. 더이상 이 책을 만나기 전의 느낌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 같다.
책 중간중간 아돌피나는 프로이트가 설명한 연구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는데 오빠의 말이 옳다라기보다 그건 분명 잘못된 생각일꺼야라며 어린 시절 프로이트의 행동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프로이트의 연구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한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프로이트의 모습은 진실일까, 허구일까. 그런 거들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작가의 상상인지에 대해 궁금해진다.
프로이트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다보니 '우상의 추락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이라는 책이 눈에 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니 이것 또한 충격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정신분석학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지난 1세기동안 역사적으로 미화된 프로이트의 신화적인 이미지를 깰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개인적으로 겪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 시키고 과학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기까지 그의 주장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싶다는 말에 '프로이트의 여동생'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된다. 프로이트는 노벨의학상을 받았지만 세상은 그에게 괴테상을 안겨줬다는 말에 책 속 정신과 의사 괴테가 떠오르는건 나만이 생각일까.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판화에서 그늘 속에 파묻혀 흰자위를 반짝이는 얼굴에 떠오른 질문이다. 뒤러의 판화 속 멜랑콜리아 에게는 날개가 있지만 그녀가 날개를 펼치고 날 거라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날개는 장식도 아니다. 아마도 그녀의 날개는 단지 걸음을 방해하고 무겁게 짓누르며 한때는 날 수도 있었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고 일깨워주기 위한 장치일 뿐인지도 모른다." - 141page
뒤러의 '멜랑콜리아'란 동판화가 매 단락마다 등장한다. 왜 같은 그림들을 반복되게 했을까 궁금했는데 아돌피아가 이 그림을 보고 느낀 것들이 그 이유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가 조금만이라도 따뜻한 말들을 아돌피나에게 던져줬다면, 오빠 프로이트가 출국부지 명단에 그의 누이 이름들을 적었다라면, 아돌피나에게 사랑의 징표라도 남아있었다면! 아돌피나라는 한 여인의 지독한 삶, 사랑받지 못한 삶에 대한 이야기. 답답하다고 생각될만큼 당하고만 사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다.
안타까운 한 여인의 일생을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동생이 들려주는 프로이트의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계속 머릿속에 프로이트의 숨겨진 진실일까, 허구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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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디자인을 먼저 보자면 겉면에는 유광으로 반짝 반짝하게 코팅된 클림트의 그림이 중앙에 위치하고있고 뒷면에는 무광이라는 점, 책을 펼친 첫 페이지가 ‘내 삶이 시작하는 순간 고통이 있었다.’라는 문장이 피처럼 붉은 종잇장 위에 써져있어서 인상깊었고 동시에 이 구조와 책의 상관관계에대해 호기심이 들었는데 다 읽고나서 이 모든게 각각의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아주 치밀하고 섬세한 구상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일 아꼈던 아돌피나 프로이트의 시각에서 쓰여진 책인데 책 속에 그녀의 엄마가 널 낳지않았다면 좋았을텐데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고 지그문트를 편애하면서 그녀와 그녀의 다른 자매들에게는 엄격했던 모습이 나온다. 여자가 있을 곳은 부엌이라며 지그문트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아돌피나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면서 힐난을 하는 모습도 나온다. 또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그림그리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한다고 말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늘 어렸을 때부터 공인시험 점수가 없어서 무능력하다고, 빈틈이 많아서 헛똑똑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아왔기 때문에 프로이트 가정에대한 글이 나올 때마다 아돌피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첫 장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 고통이 있었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누가 그런 상황에서 고통을 못 느끼고 평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피처럼 붉은 빨간색이 그녀를 대변하는 느낌이 들었다.파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우아한 모습으로 변한 다른 자매들은 사실 어쩌면 엄마에게 길들여진, 마치 세뇌당한 아바타 같은 존재라면 아돌피나는 그녀의 어머니의 영향을 벗어나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로 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개 열정을 상징하는 빨강과 그녀의 이런 특징과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반부에는 클림트남매와 아돌피나의 만남을 그리고 있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구스타프는 애인으로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은 창녀취급에 그가 낳은 자식들은 버리다시피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가이자 친누나인 클라라를 정신병원에 가두질않나 입만 열면 음담패설을 일삼는 아주 천박한 난봉꾼이다.이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각각 정신분석학과 미술의 거장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암을 알게될 줄은 미처 몰랐다. 프로이트가와 클림트가의 남자들은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개인에 불과하고 정작 그들이 속한 사회와 그들이 외면한 클라라와 아돌피나가 세상의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고 온몸으로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묘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책을 다 읽고 다시 본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그가 가졌던 세상의 흔한 오류 중 하나인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이론에 대한 조소마저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림은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행한 악행들이 더욱 악랄하고 비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책 속의 클라라 클림트를 통해 여성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해야한다는 것을 배웠다.전에는 페미니즘에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있었는데 이 책에서 묘사된 사회배경과 지금 내가 속한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몸으로 맞서 싸운 클라라에게 경외심이 들었고 그녀의 숭고한 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단순히 감동받은 것을 넘어서 내 생활 속에서 페미니즘을 들여와야겠다는 결심을 하였고 나도 그녀와 같이 내가 아니더라도 주변의 여성이 당하는 불이익에 더 이상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정폭력 및 아동학대, 남성우월주의와 성평등,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등등 여러가지 주제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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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먼트 프로이트라면 정신분석학을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 나에게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라는 제목과 표지의 그림은 낯설었다. 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회상부분이 얽혀있다.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의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 인 것 같다. 1938년 비엔나에서 나치가 쳐들어 오게 되자 지그문트는 처음엔 가지 않는다고 하더니 여동생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영국으로의 망명을 위한 출국 명단에 여동생들은 다 적지 않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치의와 가족, 가정부와 처제, 하다못해 기르던 강아지까지 그 명단에 포함되었는데 어떻게 그의 누이들은 한 명도 넣지 않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먼저가서 데려오려 했던 것인지, 모른척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나라면 오빠에게 마구 화라도 내겠는데 아돌피나는 그런 오빠를 배웅까지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동생과 함께 말이다. 그렇지만 영국으로 망명한 오빠, 지그문트는 결국 여동생들을 데려오지 않고 죽을음 맞이하게 된다.
결국 네 자매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되고 결국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외 삶의 회상이 시작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어찌 이리 삶이 허무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삶이 시작하는 순간 고통이 있었다'라는 말은 아돌피나 스스로를 말한 것은 아닐런지... 세상에 대한 어머니의 원망은 아돌피나에게 돌아 왔고 학대하기도 했다.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이란 말 왜이렇게 걸리는지 모르겠다.그럼에도 아돌피나는 어머니를 이해하려 한다. 어머니의 인생 역시도 그러했으니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역시 다른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돌피나는 첫사랑 라이너를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위안을 줄 뿐 진정 사랑하지 못한 것 같다. 아돌피나는 라이너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라이너에게는 아이마저도 진정 삶의 의미가 되진 못한 것일까? 아돌피나 앞에서 강에 뛰어 내린다.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결국 아돌피나는 오빠인 지그문트에게 낙태 수술까지 받게 된다. 무슨 운명이 이리도 불행하단 말인가.
한 여인의 인생 속에 광기와 사랑 죽음까지도 너무도 강렬하고 도발적인 이야기다. 역사적 배경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고 많이 생각과 통찰을 하며 읽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