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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책을 만날 때는 늘 일정한 설레임이 있다. 좋아하는 소설가, 에세이스트의 신작일 때 그렇고 베스트셀러를 손에 쥐었을 때도 기대감이 솟을 것이다.
그런데 ‘평전’이라는 장르, 논픽션을 만났는데 너무도 설레여하는 나에 놀랐다. 조선 후기의 천재로 불리는 정약용. 그의 평전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몇 년전 영화 『자산어보』에서 잠깐 등장한 정약용 씬에 감동했었던 기억. 정조대왕 시절을 그리는 사극 드라마, 영화에 늘 신 스틸러처럼 나왔던 인물. 그러나 막상 깊이있게는 알지 못했던 분이기도 하다.
평전으로 만나는 정약용은 ‘픽션’의 단골소재가 되기 충분하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사대부의 가문에서 태어나 관직에 올랐고, 비범한 능력으로 고위직에 등용되었다.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측근이 되어 천재적인 기질로 화성을 건축했다.
갑작스럽게 정조가 승하하자 신분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유배형을 받았으며, 18년이라는 짧지 않은 귀양살이를 했다.
정약용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정치를 엿볼 수 있었고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책 저술을 통해 미래를 준비했던 한 선각자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위대한 인물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분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분들로 세종대왕, 이순신, 현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나는 이번 평전을 읽고 감히 정약용도 베스트 10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산이 집필한 책들을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특히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올 해에 꼭 읽고 싶어졌다. 공직자에게는 공정한 판단, 청렴한 생활을 강조하였고 유배생활 중에 집필한 저서를 통해서 조선의 폐단을 진단하고 장래를 내다 본 다산 정약용.
그가 박해받는 말년에 자신의 뜻을 책으로 펼치고 후세에 남겼다는 것은 후대인 우리에게 분명 커다란 선물이 아닐까.
책 중에서 ‘자찬묘지명’은 정약용이 귀양에서 돌아와 61살에 고향에서 쓴 글이다. 스스로 지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숨김도 거짓도 미화도 비하도 없는 내용이다. 36쪽
정약용은 서학의 천주사상과 동양의 중용 사상을 함께 받아들여 체화시킨 큰 그릇이었다. 55쪽
목민관은 주색에 빠져 거드름 피우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리가 아니다. 정약용은 학구적으로, 그리고 중앙에서 관념적으로 추구하던 실학정신을 현장에서 행정으로 실행하고자 했다. 113쪽
이 때에는 이용후생을 본질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자리를 잡아가고, 국내에서도 북학파에 의해 세계의 객관적인 인식과 과학문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노론 계열은 공리공담론에 빠져 국리 민복보다 낡은 질서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집착했다. 자신들은 군자당이고 반대파를 소인당으로 몰아 숙청하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152쪽
정인보는 정약용을 가리켜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평가했다. 정약용은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167쪽)
(다산이 자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끝을 보면 그 근본을 헤아릴 수 있고, 흐르는 물을 건너다보면 수원지를 찾아낼 수 있다. (172쪽)
목민관은 하늘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이다.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서 삼가고 두려워할 줄 몰라 털끝만 한 일도 세밀히 분별해서 처리하지 않고서 소홀하게 하고 흐릿하게 하여, 살려야 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은 살리기도 한다. (238쪽)
조선 시대 선비들 중에는 노동을 천시하면서 학문과 과거시험을 본다는 구실로 놀고먹는 유한계층이 많았다. 정약용은 이를 경계했다. 책상 앞에서 독서만 하는 선비들, 즉 현실은 외면한 채 이론에만 집착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폐단을 잘 꿰뚫고 있다. (262쪽)
시 ‘노인일쾌사 육수효향산체’ 중에서. 노인의 즐거운 일 하나는 붓 가는 대로 마음대로 시 쓰는 것 어려운 운자에 신경 안 쓰고 퇴고하느라 더디지 않고 흥이 나면 뜻을 싣고 / 뜻이 이르면 바로 시를 쓰네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즐거이 조선 시를 쓰노라 그대는 그대의 법을 쓰면 되지 시작법에 어긋난다 떠드는 자 누구뇨 중국 시의 구구한 격률을 먼 곳의 우리가 어이 안단 말인가 (302쪽)
이황과 이이를 능가하는 평가를 받을 만큼 훌륭한 정약용의 업적이 조명을 받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와 뜻을 함께했던 남인 세력이 몰락하고, 노론 벽파가 구한말에 이어 국치(조선병탄)에 가담하면서 식민 통치기에도 지배층의 한 축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해방 후 급속한 서구문화에 편입되었다. 즉 “일제에 의한 조선 왕조의 패망과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계승발전 노력이 배제된 채 서구 모델에 따른 근대화의 추구”가 정약용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318쪽)
다산은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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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책을 읽고 개인적인 의견, 요약 내용이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안녕하세요 2023년도 23번째 책 '다산 정약용 평전' 리뷰입니다.
정약용에 대해 자세한 부분은 몰랐었으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정약용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깨달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유배/사망과 자신은 유배를 당하고 병에 걸리면서까지도 500권이 넘는 책을 서술하였으며, 그의 과학적, 의학적, 애민 사상 등 엄청난 위인이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위인이었지만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떠나간 그의 인생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정약용이 뜻을 이루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조금은 더 발전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책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개인적으로 생각한 주요한 내용을 적어보자 합니다.
책을 읽다 보니 조선의 마지막 빛은 정조까지였던 것으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약용이라는 위인을 보지 못하고, 서로 당파싸움만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좇다가 몰락해버린 조선이라는 나라가 보였으며, 왠지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젠더 이슈, 빨갛거나 파랗거나,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 등 이분법 적인 생각이 사회를 병들고, 나라를 곪게 만듭니다. 200년 전에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 지금 다시 발발해서는 안 되며, 현재도 똑같이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휴전국이며, 국방력과 경제력을 더 강화 시켜야 합니다. 미국이 전 세계의 패권을 잡은 이유는 막강한 국방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있으며, 더 뒤에는 여러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위인들의 창의력과 기술력으로 인해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공부하고, 성장하고, 지금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끼리 싸워야 할 게 아니라 더 발전되고 토론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의견이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차단하고 싸우면 결국 과거의 행적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더 좋은 방향으로 많이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 가서도 자식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고, 공부를 하라고 꾸짖었으며, 자신은 계속해서 글을 쓰고, 정진해 나갔습니다.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백성들을 생각했으며, 사의재라고 하는 문구에서 나 자신도 저 뜻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생각은 언제나 사람을 정진시키고 마음을 올바르게 하며 나 자신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바꿔줄 수 있습니다. 좋은 용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언어는 나 자신과 남들에게도 많은 이해와 생각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좋은 몸가짐은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며, 결국 이것도 마찬가지로 나와 남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나쁜 행동을 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나와 타인에 대해 언제나 생각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남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며, 함께 해야 더 큰 것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지금의 건축,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이 이뤄낼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함께해야 하며, 나 자신을 올바르게 가꿔나가면 남들도 올바르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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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인 나의 아이는 유치원에서 독서활동을 하면서, 위인전을 읽기 시작했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단연 눈에 들어온 분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제 아이를 어떻게든 잘 키우고 싶은 어미의 심정을 자극할 정도의 문구, "창의력 융합과학 인재"라는 말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책이 한 두 권이 아니어서 그에 따른 선택장애가 왔다. (평전을 다 읽고 나니 정약용의 삶과 업적을 단 몇 권으로는 망라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다산 정약용에 대해 알려주려면, 일단은 내가 먼저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회가 된다면 평전 한 권쯤은 꼭 읽어보리라 하던 차에, 두레에서 나온 <다산 정약용 평전>을 운좋게 만나게 되었다. 우스개 소리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정약용이 많은 책을 지었기에 다산茶山이라는 호의 뜻이 많을 다多, 낳을 산産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조선 후기에 한강 배다리와 수원 화성을 축조한,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저리가라한 선비에 대해 나는 이토록 무지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중국을 사모하던 조선처럼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던 대한민국의 영향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실학자들의 힘이 아니라, 일본에 점령당하고 서구적 모델에 따라 이루워졌기에 정약용 또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이 책 318p), 나 역시도 학창시절 역사시험 끝으로는 찾아보지도 않았던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책에서는 아홉까지의 의문점들을 정리하여 평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내가 주목한 것은 첫째, 개혁정치가 무너지고 다시 수구세력에 권력이 넘어가게 된 이유와, 다섯 번째, 정약용 집안이 천주교 집안인데 그가 배교자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를 꼽은 것은, 나라에 실용성을 중시한 여러 인재들이 있었는데도 근대화의 초석을 다질 수 없었는지 궁금해서였고, 다음으로 다섯째가 궁금했던 것은 내 자신이 천주교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읽을 때에는 또다른 궁금증을 주제로 읽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궁금증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 군신관계와 애민정신을 큰 줄기로 잡아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노론세력에 의해 숙청당했고, 정조는 노론의 위협을 느끼면서 위태로운 정사를 이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개혁군주라고 하지만 저자말대로 꽃망울만 겨우 터뜨렸을 뿐,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없었으니 안타깝게도 열매맺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정조의 처지를 현대사로 건너와 김대중 대통령의 상황과 빗댄 것이 참 절묘했다. 영조와 정조가 고른 인재 등용을 위해 탕평책을 만들었지만, 그 실효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권력을 쥐어잡고 희생양을 만들어가며 세를 키운 이들이 제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론의 역사는 일제 이후, 지금까지도 되풀이되고 있으니 씁쓸할 따름이다. 시절이 이러하니 정조가 아무리 아끼고 그 재능을 인정해주었을지라도 정약용의 신세가 어떠할지는 가늠이 절로 되는 것이다. 관직에 나아섰다가 유배되었다가, 한직에 있다가 또다시 불려졌다가 자리를 거절하기를 오락가락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제아무리 특출난 인재라할지라도 등용의 문이 닫혀있으면 어찌하랴하는 한탄이 여전히 변함없는 현실을 꼬집으며 지금도 정약용의 싯구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종교박해로 일가친척들을 잃고, 멀리 떨어져 자식들의 죽음도 겪어야했던 유배생활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선비의 마음 가짐을 절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페족의 위기에 내몰린 가족들을 보듬고, 무려 500여권의 책을 복숭아뼈가 닳도록 쓰면서, 많은 인재들과 교류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정약용이 유배에 지쳐 마음과 정신을 놓아버리고 병이 들어 금새 쓰러져버렸다면 어떠했을까. 동학농민운동에 영향을 주고, 후대의 지방자치관리들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그가 <목민심서>에서 언급한 청렴결백한 관리가 갖추어야할 덕목들은 지금의 관리들에게도 적용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정약용 선생의 호기로운 정신과 마치 후대를 미리 생각하여 남겨놓은 듯한 자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던 정약용이 노론의 갖은 박해와 모함으로 배교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갈라져 분분한 것 같다. 다산의 삶과 저서 모든 것이 한 임금을 지극히 모시고, 부모를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데,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랴 싶다. 끝으로, 유배지에서 자녀들에게 재기를 위해, 또 당신의 책을 읽어줄 독자가 되어야 한다며, 독서를 놓지 말라고 당부했던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이 내 귓가에 아직까지도 쟁쟁 울린다.
-YES24 서평단 자격으로 리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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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에 빠져서 평전을 읽고 싶었다. 정약용 일대기인 평전을 읽고나니 다산선생의 마니아가 된거같다. 조선후기 실학자라는 좁은틀로 규정하기엔 그의 학문과 업적이 너무 넓고 깊고 심오하다고. 다산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불운한 사람이다. 삶의 절반가량인 40세 이전까지는 비교적 평탄하고 평온했다. 유배시작하면서 뛰어난 정치가이자 관리에서 학자로 거듭난다. 폐족의 위기에서 그는 뜻을 굽히거나 체념하지 않은다. 다산이 남긴책은 500여권, 요즘 책으로 400쪽짜리 50여권의 분량이다. 18년동안 저술에만 힘써 복사뼈가 세번이나 구멍났다. 관료시절, 정조와 채제공과 함께 입신의 기회가 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개혁정치와 소신을 펼칠수 있었다. 이때 정조의 총애를 지극히 받는다. 작가는 18세기 르네상스의 트로이카를 정조,채제공,정약용이라 한다. 그는 성호 이익선생의 학문을 사숙하면서 학풍을 계승한다. 18세기에 서학이 청으로부터 들어오는데 그때의 서학이란 천주학과 서양과학사상을 의미한다. 학자들이 뻬이징을 다녀오면서 새로운 청나라 문화와 문명이 소개되고 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유득공등 이들을 통해 서학도 전해짐.이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파를 북학라고 한다.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설치에 성공한다. 정조시대의 문체반정.. 북학파들이 당시 유행했던 박지원풍의 한문문체를 순정고문으로 되돌려 바로잡고자했던 정책. 정조는 개명군주이나, 글쓰기만은 집요하게 고문체에 고집함.정약용은 "문제개혁책"을 지어 문체반정을 적극 옹호하였다. 노론벽파의 공격을 무마하기 위해 정조의 계획된 정책이라는 견해도 있다. 정약용의 또하나의 업적은 거중기를 이용한 수원성을 설계함으로써 경비를 절감하였다. 노론벽파의 반대파들은 남인 채제공을 겨냥해 정약용에 대한 참소와 모해를 함.정조의 큰 총애와 극진한 배려로 정조시대에는 함께하여 그의 이상을 펼칠수 있었다. 36살에 곡산부사 재임 시절.이때의 경험으로 치민에 관한 도리를 논하고 벼슬아치들의 폐단을 제거하고 관리를 바른길을 알리고자 그릇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목민심서를 쓰는 계기가 된다.또한 이때 홍역에 관한 의학서인 "마과회통"을 쓴다. 정약용의 "천주쟁이'라는 먹구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주변에 아른거리고 있었지만, 군주와 채제공이 막아주고 있었을뿐이다. 그런 채제공의 사망소식을 곡산부사시절에 들었다. 채제공과 정조가 사망하자 정약용은 막아줄 울타리가 없어져 서서히 먹구름이 오고있었다. 정조대왕.. 정조를 세종 다음으로 르네상스를 꿈꾸웠던 훌륭한 군주로 보지만, 세종시대와는 다른 시대적 배경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이도록 한 노론 벽파세력의 울안에서 권좌에 오른다. 아무리 영민한 군주라도 꿈꾸던 개혁정치를 맘대로 펼치기 어려운 정국이였다.아버지를 죽이게 한 기득권 세력이 조정과 사회를 움켜쥐고 있었던 시대로 정조의 사망으로 모든것을 잃는 미완의 군주가 되었다.즉 정조시대는 꽃망울을 떠트렸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여 미래를 위한 씨를 생산까지 못한 시대였던것이다. 정조는 스스로 반석이 되어 조정을 독점하였다 그가 죽자 순식간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반석이 사라지니 왕실과 국가가 붕괴되는 사태가 도래한다. 정조 승하후 조선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걷는다.이때 세계는 근대문명의 발달과 경쟁의 각축장이 되어가는 중요한 시기였다. 조선은 개혁군주를 잃고 길을 잃고 만다. 정조의 승하로 24년간 쌓였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얼마나 애석할 일인가 정조 승하후 노론세력의 목표는 정약용, 이가환,이승훈,천주쟁이들을 사교집단으로 몰아 대역죄로 처리한다는 명분을 잡는다. 정약용은 한때 천주교에 매혹되어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다. 이가환, 권철신은 국문중에 옥사하고, 이승훈,정약용은 사형이 확정된다. 이후 천신만고끝에 정약용,약전형제는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페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정약용이 그토록 유배지에서 책과 글쓰는거에 집착하는 이유를 보자. 내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거 아니냐.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사람으로 취급받겠느냐? 아무쪼록 너희(두아들)들은 이런점들까지 생각해 다시 분발하여 공부해서 내가 이어온 실날같이 된 우리집안의 글하는 전통을 너희들이 더욱 키우고 번창하게 해보아라... 두아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이유를 밝혔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에게 희망은 저술을 통해 다음 세상에서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는 일.즉 그의 삶은 역사를 위한 삶이였다. 아호를 "사암'이라고 한것도 백세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겠다는 뜻. 즉 곧 역사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다산"이라는 호는 강진 만덕사 서쪽에 있는 다산초당.그곳은 차나무 만여그루가 있는 일명 "차동산'이라 부르는곳. 그곳의 지명에서 따와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 지었다. 유배후반부 10년간 다산초당의 시기로 제자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고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들을 집필하였다. 한편 조정은 순조 5년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권력을 장악,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으며, 민란이 곳곳에서 발생한다. 1803년,1810년,1814년 해배명령이 있었느나 반대파 방해로 막혔다. 그래서 18년까지 유배생활이 지속된다. 이런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정약용은 오직 100년후의 역사를 의식하면서 저술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는데 열중하였다. 정약용은 결코 괴퇴에게 뒤지지 않았다. 지식인 관리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채 유배된 신세였으나, 나라의 앞날을 위해 해야할일을 스스로 찾았다. 그일이 바로 글쓰기였다. 유배지 "다산학단"을 이루어 함께 배우고 연구하면서 그 제자들은 스승 정약용이 학술을 연구하고 저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복사뼈에 구명이 세번이나 나고 엉덩이가 곪아서 앉아있을수가 없어서 벽에 선반을 만들어 놓고서 글을 썼다. 자,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것은 이토록 훌륭한 정약용에 대해서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못하고 정약용 세계관이 대중화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작가의 견해를 들어보자. 정약용은 뛰어난 유학적 학식과 남다른 독창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유학에서의 독창성은 한국유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황과 이이를 훨씬 능가할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들과는 달리 그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원인은 첫째 그가 함께 했던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둘째 노론벽파가 구한말에 이어 국치에 가담하면서 식민통치기에도 지배층의 한축이 되었다. 셋째 그리고 한국사회는 해방후 급속한 서구문화에 편입되었다. 즉 , 일제에 의한 조선왕조의 패망과 우리문화적 전통에 대한 계승발전 노력이 배제된체 서구적 모델에 다른 근대화의 추구가 정약용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했다. 조선500년동안 가장 반시대적 정파인 노론벽파세력이 집권한 시대에 살면서 천재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체 정약용은 눈을 감고 말았다. 정약용의 저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구한말 언론인 장지연의 황성신문에 실린 아국의 경제학선생 정다산 약용의 소술한바를 적요하노라 라는 논설에 의해서였다. 그전에는 완전히 묻혀졌던 것이다. 정약용이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1934년이 되서야 언론인 정인보와 안재홍이 다산의 모든 저서를 간행해야 한다고 제기하면서 다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1938년 신조선사, 1939년 최익한에 의해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단행본을 간행함으로써 다산에 대한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산은 전 생애를 통해서 이 병들고 썩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강구하는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현실에 활용하면 부패와 타락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혁안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게 바로 다산의 개혁사상이요 실학사상이다. 나는 이렇게 시간을 쪼개서 독서하고 정리하고 리뷰쓰는 일련의 일들이 정말로 힘들때가 있다. 그때마다 다산을 떠올리고, 유배지에서 이 악물로 책과 붓만을 가지고 본인을 몰아부쳤던 것을 상상하며 힘을 얻는다. 개인적인 바램은 다산이 정당하게 평가되어 이황,이이,신사임당처럼 우리나라 지폐에 꼭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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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은 늘 아쉽다. 이랬더라면, 그때 그러기만 했어도.... 라는 식의~ 조선시대의 많은 뛰어난 인물중 아쉽고 아쉬운 인물들이 많지만, 그중 정약용 선생은 단연코 꼽게되는 큰 인물이다. 백성에 대한 애민과 천재성을 가졌던 군주 정조와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또한 천재였던 다산♡ 이 두 인물의 이와같은 만남은 조선시대 그 어느때도 없었다고 본다. 정조대왕과 늘 함께 거론되어 사실 다산 혼자만의 생은 잘 몰랐었다. 다산의 천재성은 집안의 내력인듯, 모두다 뛰어난 인물들였다. 수원 화성행궁에 가본적이 있다. 화성행궁의 높은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정약용의 그 위대함에 가슴이 벅차 먹먹해진다.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런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보여주었을까하는~ 아직 수원 화성행궁을 가보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꼭 한번은 가보시라고, 간곡히 추천을 드린다. 유배지에서의 인연을 맺은, 그래서 자식까지 보았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니 판단을 할수는 없겠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또 다른 면도 볼수 있었다. 분야를 가릴것 없이 참으로 천재였던 다산 정약용 ~ 다른 시대를 만나 태어났다면 또 어떠했을지~ 정조가 더 오래살아 정약용의 활약이 더 크고 높게 쓰였으면 어떠했을지~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늘 깊은 한숨으로 아쉽기만 하다. 나에게 참으로 큰 산~ 두고두고 그분이 남기신 기록들을 또 틈틈히 꺼내보렵니다. 감사합니다 ^^♡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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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처럼 자신이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도 보이지 않던 때가요. 그때 도망치듯 책을 읽었습니다. 책이라도 읽어서 몇 권 읽었다는 성과처럼 내보이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3개월에 100권 읽기에 도전해서 날마다 책 속으로 도망을 갔던 때 알게 되었죠.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은 것 같습니다. 그 책 속에서 독서를 의미를 깨달았어요. 그 울림이 이후로 내 독서의 의미이자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 말을 얼마나 지켰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어떤 책이던 그 마음을 먼저 되뇌면서 책을 읽습니다. 마치 다산과 함께 책을 읽어왔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그런 마음에서 선택한 책입니다. 최소한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다는 마음과 생각 때문에요. 차 나무가 심어진 작은 동네의 동산 같은 다산이 정약용을 만나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함께 따라가 보실래요?
저자 김삼웅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청치 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어요. 민주화운동 관련자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 규명 및 명에 회복 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많은 기관과 단체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신채호 평전, 김구 평전,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등 많은 저술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바른 역사 찾기에 노력한 부분들이 많은 평전으로 남아있죠. 저자의 시각과 관점으로 다산을 보는 즐거움과 기대가 있습니다. 다산의 호는 어떻게[ 정해졌는지 궁금함을 가지고, 찻잎을 상징하는 듯한 푸른 책의 표지를 넘깁니다.
법의 적용은 마땅히 임금의 가까운 신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p93) 다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습니다. 어머니가 9살에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 홍 화보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정약용은 채제공의 가르침을 받았고, 채제공은 정조의 신임을 얻어요. 채제공은 정조에게 정약용을 소개합니다. 두 사람은 학문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고 신뢰하는 사이가 됩니다. 개혁 군주 정조의 집권과 채제공의 도움으로 정약용도 승승장구하는 시간을 보내요. 하지만 이때가 심각한 당파 싸움 중이라 정조는 정약용을 아끼면서도 한직으로 발명하기도 합니다. 반대편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흉내만 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요. 요직에 앉지는 못했지만, 정조는 정약용을 신뢰했고, 그에게 중요한 일들을 맡깁니다. 암행어사를 나가서 비리를 고발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정조가 아끼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비리를 낱낱이 고하는 상소를 올려요. 주위에서는 아무리 정조라도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벌할 수는 없을 테니 상소를 올리지 말라는 충고를 합니다. 정약용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상세히 상소를 올리며 말합니다. 법의 적용은 마땅히 임금의 가까운 시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그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함을 알고는 있지만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강직하게 바른말을 하는 정약용이나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벌하는 정조나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뉴스에서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 큰 욕심인가요?
겨울에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한다는 뜻이 담겨있다.(p131) 정약용의 호인 여유당의 뜻입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뛰어났던 정약용은 15세~ 20세까지 거의 학문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그때 접한 서학과 중용은 정약용의 애민 사상의 기본이 되죠. 하지만 올곧은 성품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정약용에게는 적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이지만, 결국 그 모습은 자신을 더 발전시키고 성숙 킵니다. 매사에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했기 때문에 그에게 단점이나 허물은 서학뿐이었죠. 서학도 종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접근한 것 같아 보입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문을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했으니까요. 정약용이 주로 사용한 호라고 합니다. 어느 자리에 있던지 자신을 살피는 마음이 전해지는 호입니다.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 많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p165) 짧은 관직 생활을 끝내고, 채제공과 정조의 죽음 후 서학으로 인해 고신을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됩니다. 포항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고 또다시 소환되어 추국을 당합니다. 오래전에 서학을 버렸다는 정약용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형제들의 필담을 통해서도 밝혀짐) 사형은 면하게 됩니다. 세 번째 유배지인 강진으로 가게 되고,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시작하죠. 시간은 흘러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훈육을 담당해요. 그중 하나가 독서에 대해 말하는 부분입니다. 책을 읽는 것에 대해 강조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된다고 말해요.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내리기만 한다면 하루에 백번 천 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요. 이 부분을 읽으며, 저의 독서를 돌아봅니다.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서 ‘그 책 읽어봤어,’ 라거나 ‘나 이런 책 읽는 사람이야’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내가 읽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자라게 하지 못한다면 독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읽은 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나?’ 고민이 깊어지면서 다산이 나를 향해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다산이라는 호는 강진 유배 시절에 옮긴 거처가 있던 곳입니다. 조그만 동네 차 동산 같은 언덕 위에 있던 집이었죠. 그곳을 다산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다산은 자신의 저서에 다산이라는 호를 잘 적지 않았습니다. 그가 상용했던 호 중에는 “사암”이 있어요. 백 세 뒤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역사에 맡기겠다는 뜻이죠. 길어진 유배 생활에서 지치지 않고 집필과 독서를 이어오고 있었지만, 읽어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져 다산 사후 100년 뒤에 그의 저서들은 빛을 보게 됩니다. 그의 탁월함과 천재성은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던 것이지요. 복숭아뼈에 구멍이 세 번 뚫릴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고 썼다는 정약용은 약 500권의 저서를 남깁니다. 다작도 대단하지만 그 내용면에서도 탁월하고 훌륭합니다. 의서에서부터 정책집, 경집, 장례절차에 대해 다룬 책, 관리들의 덕목을 다룬 그 유명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라 이름 붙인 법률 집까지 정말 다양하고 전문적입니다. 그의 책들이 이렇게 전문적인 것은 애민정신이 늘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연두를 앓아 자녀를 잃은 경험을 가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쓴 책은 전문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도움을 주고 싶은 간절함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고 다 정약용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그의 훌륭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계발서가 넘쳐납니다. 미라클 모닝이 붐입니다. 책을 읽어야 산다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할까요? 혼자만 잘 살고, 돋보이기 위해서? 책 읽는 의미와 뜻을 알아가는 데 정약용의 독서법만 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그의 삶이 천재적인 재능을 뛰어넘어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을 엄격하게 지켜내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한 권의 책이 단 한 권의 책으로만 끝나지 않는 경험을 함께 나누어 보시길 바라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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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독서에 관한 책을 접하다 보면 정약용에 대한 다독, 다작에 대한 얘기가 자주 거론되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때문에 기회가 되면 꼭 정약용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다. 이 이유가 내가 <다산 정약용 평전>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궁금증 즉, 서양의 레오나드로 다빈치에 견주고도 남을 만한, 다방면에 능한 정약용은 어떻게 그토록 힘든 유배지 생활을 하면서도 다독과 다작이 가능했던 건지 이 부분을 알고 싶었다는 게 맞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난 이 책을 망설임 없이 집어들었다. 글쓰기, 독서를 함에 있어서 어떤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다산 정약용 평전> 이 책은 정약용 일대기에 대해서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저술했는지 너무나도 잘 느낄 수 있다. 상황이 힘들어서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주저없이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만큼 늘 곁에 두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인생 지침서로 삼아도 손색없는 책이다.
'내가 만약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유배되어 살게 되면 과연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유배자라는 처지도 답답한데 다산 정약용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유배자라는 막막한 처지에서, 과연 무엇이 그토록 다산 정약용을 끊임없이 다작을 하도록 움직이게 했던 걸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읽다 보면, 유독 하나의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애민사상'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올곧은 마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배자란 처지에 굴하지 않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 글쓰기는 무려 500여권이나 된다고 한다. 유배 초기에 쓴 <상례사전>,<주역사전>을 시작으로 정치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가 정책의 탁월한 제도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법률 관련 저술서인 <흠흠심서>, 애민정신이 담긴 <목민심서>,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최초로 정리한 <이방강역고> 등 이외에도 수많은 저서들이 500여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이 복사뼈가 구멍이 날 정도록 저술하는 데에 매진했다는 점은 가히 충격적이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안주하느냐' 아니면 '그 환경을 뛰어넘어 개척하느냐'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꼭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현재 안주하려는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에 대한 단순한 평전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지침서가 될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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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 지금 남양주 다산동에 살면서, 여유당에 가서 보는 정도만 알 수있었는데, 이렇게 정약용 평전을 읽어보니, 그에 대한 지식이 좀 더 넓어져서 좋았어요. 먼저, 작가 김상웅님의 약력을 보고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는데요,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시며, 그간 주요 저서로 백범 김구평전, 안창호 평전, 홍범도 평전등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운동등에 헌신한 인물들의 많은 저서를 집필해서였어요. 특히,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전은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정약용의 생애를 따라 그가 저술했던 책과 수많은 편지등에서 보여지는 그의 신념과 삶의 자세에 대해 엿볼 수 있었어요. 평전에서 그 인물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열할수도 있지만, 이 책은 그가 남긴 책과 편지등으로 이루어진거 같아서 이 책 하나만으로 이해하기보다 참고가 된 자료들을 같이 찾아보는것도 책을 읽을때의 즐거움을 줄 수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되고, 부모가되니, '사회정의'에 대한 것에 생각이 깊어지는데, 그것에 관한 글도 있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후대에 다산정약용의 평가는 여러가지 의견으로 나뉘어 진걸로 아는데 그의 한면을 볼 수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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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특히 책 디자인이 깔끔에서 눈에 들어온 책. 수많은 재주를 타고 났으며 운까지 타고나 집안에서는 복덩이였고, 양심이 올바르고 마음이 선해서 정조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 사색과 재치, 집필뿐 아니라 일처리 능력도 뛰어나 다분야에서 괄목할 행보를 보였으나, 당대의 당쟁과 사상 싸움, 온갖 갈등의 희생양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온집안이 갖은 고생과 고초를 겪는 생애를 보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오랫동안 다산을 흠모(?)해온 저자가 그동안 조사해온 자료들을 자신의 나름의 궁금증들을 중심으로 정리하며 펴낸 책이라 한다. 정약용의 삶과 그에 대한 주변인의 인식, 그의 정치적?사적인 업적과 죽기까지의 행보 등을 인용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평전이다보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료 모음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진보, 개혁, 혁명 등을 키포인트로 둔 저자의 시각이 인물 해석에도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 정약용에 대한 막대한 자료들 중 경향에 따라 자료 선정이 편향된 느낌도 없진 않았다. 그런 부분들에서 정약용에 관한 다른 평가나 시각이 담긴 책과 자료들을 직접 찾아보면서 비교대조해보곤 해야했다. 나쁘진 않지만 좀 더 자세히 정약용을 파고 들고 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궁금한 독자라면 스스로 발품 파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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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은 그렇다면 정약용의 시는 어떠할까. |